001화
001화
빨간 알약, 파란 알약.
너라면 뭘 먹을래?
빨간 휴지, 파란 휴지 따위랑은 차원이 달라.
그건 그냥 엉덩이를 스치면 끝이지만, 이건 몸속으로 흡수되는 거라고!
선택하기 쉽게 해 줄까?
그럼 노란 알약과 초록 알약 중에 골라 볼래?
나?
하하.
지금부터 설명해 주마!
괴물이란? 20세기 말 갑자기 출몰한 존재.
우리가 흔히들 아는 신화나 설화 속의 그것이라고 보면 돼.
물론 녀석들에게서 고고한 신의 손길이나, 영악한 악마의 하수인 따위를 기대하면 안 돼.
놈들은 그냥 냄새나는 살인 기계야. 빡친 야생의 알파고 정도로 생각하면 돼.
참 쉽지?
조무래기는 현대의 병기로도 충분히 대응이 가능해. 하지만 중형급이 나타난다면?
여기서부턴 군대도 버거워해. 총알을 튕겨 내기도 하니까!
그나마 핵폭탄으로 처치가 가능하지만…… 싸울 때마다 방사능을 뿌리면 우리는 어디서 살아?
심각한 문제는 거대한 녀석들. 이 수준에 해당되는 놈들은 답이 없어.
군대가 할 수 있는 것은 사살이 아니라 몰이.
그것도 놈들 기분이 나쁘면 전면전으로 확산되지. 괜히 우리나라랑 북한이 휴전에서 종전으로 관계가 바뀐 게 아니야.
참고로 북한은 영토 대부분을 녀석들에게 침식당했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어떤 의미로 괴물의 출현은 축복이기도 해.
인류는 괴물과 싸우느라 자기들끼리 싸우는 멍청한 짓을 중단했으니까……. 그래서 간혹 이 괴물을 ‘신이 보낸 평화의 사자’로 보는 얼간이들도 있어.
물론 난 얼간이가 아니야.
왜냐하면 ‘신이 보낸 평화의 사자’는 열심히 살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을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고’ 하지 않거든.
괴물의 신체는 다양한 분야에서 큰 관심거리가 되었어.
어떤 종은 식품으로, 어떤 종은 공업품으로 쓰여. 심지어 어떤 괴물은 기존 가축의 역할을 대체하기도 했지.
괴물의 몸에서 채취하는 소위 ‘부산물’이라 부르는 신체 부위는 완전 ‘황금 알을 낳는 거위’가 싼 다이아몬드 똥이야.
추잡하지만, 가치가 높아.
군대는 강력한 괴물을 견제하느라 바쁘고, 정부는 사람들을 챙기느라 바빠. 결국 용병과 민간 업체가 발 벗고 나섰지.
돈이 오가면서 자연스럽게…… 헌터란 직업도 생겼어. ‘헌터’란 단어가 그렇듯 헌터의 뿌리는 영국이야.
처음 영국에서 시작된 헌터 협회는 오늘날 전 세계에 각 지부를 두고 있어.
물론 그중에서 우리나라, 한국 지부가 최악.
여긴 비리랑 은폐 빼면 시체거든! 하지만 그럼에도 늘 이곳은 청년들로 붐벼.
일종의…… 희망 고문 퍼레이드 같은 거지. 왜냐하면 그나마 여기가 복권보다 돈 벌 확률이 높기 때문이야.
어차피 여기 아니면…… 공직 시험이니까……. 그것도 아니면 치킨집이나 카페, 또는 편의점?
아, 슬프다.
내 이름은 김상팔.
아버지가 ‘상팔자’를 즐기란 의미에서 지어 주셨다는데, 내가 보기엔 완전 실패한 이름이야. 어쩌면 역효과가 난 건지도 모르지.
내가 내세울 거라곤 ‘우연히’ 얻은 이상한 힘뿐. 근데 내가 워낙 허당이라…… 힘이 아까워.
하하. 너무 자조적인가?
21세기. 스마트폰. 이상한 능력. 그리고 괴물과 사냥.
이게 현실이야.
헌터는 괴물을 사냥하기 위해 자신을 끊임없이 단련해야 하고, 이를 위해 ‘능력 수치’란 개념이 존재해.
흔히 말하는 전투력. 참 편리하지?
내 꿈은 랭킹 1위.
최고의 헌터가 되는 거야. 그런데…… 적보단 아군이 더 힘겨워.
젠장! 인생, 될 대로 되라지.
이야기는 한 달 전부터 시작해.
***
네 개의 팔이 주먹을 날린다.
일명 발톱 난타! 바로 ‘네팔구미호’의 필살기다.
상체에 달린 4개의 팔이 번갈아 가며 날리는 무차별 펀치!
보통 사람이라면 첫 발을 맞는 순간 비명횡사할 위력이다. 무슨 대공포처럼 팔들이 기계적으로 움직인다.
반칙 아니야?
무차별 난타는 주인공들이나 쓰는 거잖아?
‘고모고모열매’라든지, ‘오러오러 러시’라든지, 하다못해 ‘너는 이미 뒈져 있다.’라도!
무차별 펀치를 막아 내고 있는 것은 족히 2m는 될 거대 방패.
그 방패를 지탱하고 있는 사람은 키가 평균보다 조금 작은 사내다.
이름은 다움! 팀에서 가장 나이가 많아 다들 다움 형이라 부른다.
한 명의 인간과 한 마리의 괴물.
네팔구미호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구미호의 모습과 많이 다르다.
신화 속 구미호는 꼬리 아홉 개 달린 여우이면서 요상한 술법으로 사람을 홀린다고 한다.
그에 반해…….
지금 우리 눈앞에 있는 네팔구미호는 다리 여섯 개인 구미호가 뒷발로 직립 보행한 형태다. 게다가 요술이 아닌 체술로 사람을 쳐 죽이려고까지 한다!
발톱과 방패 사이에서 불꽃이 튀겼다. 그리고 발톱이 스친 방패 표면에는 흠집 수십 개가 남았다.
다움 형은 방패로 전달된 충격을 버티며 최대한 자세를 유지했다.
“이 녀석, 힘이 엄청나!”
다움 형이 든 거대 방패 왼쪽.
“그러면 더 좋지!”
다움 형보다 조금 키가 큰 여성이 쭈그리고 앉아 있다.
바로 이 팀의 리더, 주아라.
남자들끼리 있을 땐 ‘싸이코’라고 부르는데, 그 이유는 얘가 ‘피’에 환장하기 때문이다.
다움 형이 네팔구미호를 잡아 두는 동안 아라는 재빨리 방패 옆에서 뛰쳐나갔다. 그리고 손에 든 쌍도끼로 네팔구미호의 옆구리를 사정없이 찍었다.
“키이이익!”
네팔구미호의 옆구리에서 뿜어진 피가 아라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붉게 물들였다.
아라가 저럴 때마다 섬뜩하다. 쟤는 아마 헌터가 안 됐으면 9시 뉴스에 나왔을 거야.
나쁜 걸로…….
네팔구미호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비명 아닌 비명을 질렀다. 흔들리는 녀석의 꼬리들이 폭풍 속 깃발처럼 보였다.
온몸이 피에 젖은 아라는 오히려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고통에 몸부림치는 네팔구미호의 목덜미를 향해 한 번 더 쌍도끼를 휘둘렀다.
역시 인간은 잔인하다.
아니구나, 쟤만 그렇구나.
세상 모든 인간에게 사과드린다.
역시, 주아라는 잔인하다!
“마무리!”
아라는 호쾌하게 네팔구미호의 목에 도끼를 꽂았다. 하지만 옆구리 때와 달리 네팔구미호는 경직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을 공격한 아라를 바라보며 그대로 몸을 부딪쳤다.
2m의 키와 수백 kg의 육중한 몸을 활용한 기습.
좋은 판단이다. 영악한 여우 대가리!
“꺄아아악!”
갑작스러운 네팔구미호의 대응에 아라는 미처 손을 쓰지 못했다. 그리고 자신보다 훨씬 큰 맹수의 돌격에 가녀린 몸이 공중에 뜨면서 멀리 날아갔다.
“아라 누나!”
치료술사 문일의 목소리.
아라가 놓친 쌍도끼는 원을 돌며 날아가 일행의 가장 뒤에 선 문일의 양옆에 박혔다.
하마터면 문일이 즉사할 수도 있던 상황. 하지만 문일은 신경 쓰지 않았다.
팀의 생명을 책임지는 치료술사로서 자신보단 다친 사람을 우선하는 것이 중요했다.
“문일아! 어서 아라를 치료해!”
다움 형은 아라를 향해 달려드는 네팔구미호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다움 형이 할 수 있는 것은 ‘방어’뿐.
‘공격’ 담당인 아라 없이 얼마나 버틸지는 미지수였다.
마음 같아선 내가 뭐라도 돕고 싶지만, 그건 역효과다. 하다못해 총이라도 있었다면……!
내 이름은 김상팔. 직업은 헌터지만, 정식 헌터는 아니다. 21세기에 흔해 빠진 그저 그런 헌터 지망생이자, 현 보조 헌터다.
여기는 ‘네오서울’ 근처의 3급 사냥 구역.
거주 구역과 완전히 분리된 괴물의 서식 지역이다. 그리고 지금 내 앞에서 네팔구미호와 혈투를 벌이고 있는 팀은 정식 헌터 3명으로 이루어진 ‘세손가락’이다.
즉, 나는 이 팀의 정식 팀원이 아니다.
이번 사냥까지만 계약된 몸, 비정규직이라 생각하면 쉽다.
지금 내 어깨에는 새로 산 신형 특수캠코더가 달려 있다. TV 촬영에 쓰는 그 크고 무거운 것이 맞다.
현 상황과 헌터의 본분에 어긋나는 물건. 그렇지만 지금은 이게 꼭 필요하다.
내 출세, 정확히는 내 정규직을 위해서다.
어느 방송국 PD에게 일자리를 대가로 자신들이 할 수 없는 위험한 촬영 일을 맡게 되었다.
성공만 하면 보수가……!
방송가에서 헌터에 대한 이야기는 독이 든 성배와 같다. 위험하지만, 촬영할 수만 있다면 반응이 엄청나기 때문이다.
헌터들에게는 있고, 평범한 우리에게 없는 특별한 힘.
축복과도 같은 체질, 바로 ‘H세포’라고 불리는 것이다.
정확한 명칭은 헌터 세포.
이것을 타고나면 언제든 신체를 강화해 에베레스트 절벽이라도 자유롭게 뛰어다닐 수 있다.
한마디로 초인이 되는 것이다.
‘H세포’를 갖고 있는 사람이 헌터로서 생업에 종사하는 일은 근대화와 더불어 일어난 사회 현상 중 하나였다.
일각에선 괴물의 출현이 H세포 각성의 원인이란 의견도 있다. 하지만 진실은 아무도 모를 일이다.
어차피 나처럼 보조 헌터로 살아가는 사람에겐 그림의 떡.
“제기랄!”
결국 H세포가 없는 내가 가장 위험하단 소리다.
하긴, 세포도 없는 주제에 지망생 자리에서 버틴 내가 이상한 놈이지! 대부분은 억지로 버티다가 나가 버리기 일쑤. 세포가 없는 이상 정식 자격은 꿈속의 이야기다.
실질적으로 뒤에서 구경만 하고, 싸우지 않는데도 말이다!
헌터 일을 하는 사람들은 협회에 방문해 자신의 ‘능력 수치’를 알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식’ 헌터들의 이야기.
난 보조 헌터라 해당 사항이 없다.
일단 카메라의 초점을 다시 맞췄다.
잘 만들어진 보디빌더의 근육, 야성미 넘치는 털, 웬만한 성인 남자의 허리둘레만 한 다리, 그리고 인간의 머리 따윈 한 방에 꿰뚫을 발톱.
네팔구미호는 확실히 ‘괴물’이다.
문일은 다움 형의 말에 따라 아라를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쓰러진 아라를 살폈다.
“괜찮아요. 부상을 입진 않았어요!”
몸만 멀쩡하다면, 의식이야 차리게 하면 그만.
문일은 양손을 모아 아라의 배에 갖다 댔다.
문일의 손에서 은은한 빛이 나와 아라의 몸으로 들어갔다. 빛을 쬔 피부는 순식간에 재생되었고, 생채기가 사라졌다.
그러고 보면 아라는 항상 최전방에서 싸웠지만, 겉으로 드러난 몸에는 흉터 하나 없었다.
아라는 극심한 두통을 호소하며 깨어났다.
“크윽, 짜증나! 얼마나 잔 거야?”
“1분? 얼마 안 됐어. 지금 다움 형이 버티고 있어.”
다움 형은 연속으로 네팔구미호의 발굽을 막아 내고 있었다. 다행히 네팔구미호가 피를 많이 흘린 탓에 버티기는 수월했다.
“땡큐! 그럼 이제 뒤로 물러나 있어.”
아라는 쌍도끼를 집어 들면서 문일에게 윙크를 날렸다. 그리고 도끼 하나를 부메랑처럼 네팔구미호를 향해 던졌다.
빙글빙글 날아간 도끼의 날이 네팔구미호의 허벅지를 파고들었다. 도끼날이 무거운 만큼 날은 꽤 깊숙이 박혔다.
네팔구미호는 박힌 도끼를 빼내지 못해 허둥거렸다. 발톱으로 도끼를 빼려고 했지만 빠지기는커녕 오히려 상처만 더 벌리고 있었다.
보기에 참 안쓰럽다.
“어때? 이러면 또 돌진하지 못하겠지?”
아라는 언제나 자신만만하다.
네팔구미호는 한 번 더 크게 울부짖으며 아라를 노려봤다. 하지만 집요하게 가로막는 다움 형에게 막혀 아라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다.
다리를 다쳤으니 놈은 더 이상 위력적인 공격을 할 수 없다.
이족보행에서 가장 중요한 근육이 바로 다리 근육.
다리는 의외로 거의 모든 움직임에 필수적으로 쓰인다. 몸을 제대로 받쳐 주지 않으면 힘을 줄 수가 없으니까.
다움 형은 거대 방패를 들썩이며 네팔구미호를 도발했다.
“형을 봐야지, 어딜 봐? 형한테 덤벼. 우쭈쭈, 우리 애기?”
네팔구미호는 이를 갈면서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리고 늑대들이나 할법한 ‘하울링’으로 울부짖었다.
그리고…….
“앗?”
최후의 발악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