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5화 (265/265)

에필로그-신의 선물!

에필로그-신의 선물!

초록!

아침이 그렇게 밝았다. 윤도가 눈을 떴을 때 보인 색깔이었다. 창가의 화분 몇 개에 눈 시린 아침햇살이 떨어지고 있었다. 피로는 깔끔하게 풀렸다. 인간이란 참 오묘한 존재였다. 의욕으로 질주하면 세상이 아름답다. 그 의욕이 아름다우면 더욱 그랬다.

찬 물 샤워로 세포를 깨웠다. 말단의 하나하나까지 다 깨웠다. 어머니가 한방차를 가져왔다.

“마셔.”

정다운 목소리와 차 향이 고마웠다. 한 모금을 입에 물고 이메일을 열었다. 침술특화대학의 설계도 때문이었다. 설계도는 참신한 건축가에게 맡겼다. 그 역시 윤도의 환자였다. 심부전 때문에 고생하던 사람. 윤도의 장침으로 호흡의 자유를 얻었다. 이제는 아침 운동도 가능한 그였다. 뛰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했다.

설계도 시안이 열렸다. 약포지와 탕약, 장침, 약장 등을 형상화한 작품이었다. 시안임에도 윤도의 마음을 후렸다.

“형.”

잠시 후에 윤철이 들어왔다. 입에는 칫솔을 물고 있었다. 그가 가리킨 곳은 창밖이었다. 기자들이 몇 보였다.

“왜?”

윤도가 동생을 바라보았다. 오늘은 모교 강연을 가는 날이다. 북한 지도자의 서울방문 일정이 잡혔다지만 윤도를 취재할 일은 아니었다.

“진짜 몰라?”

윤철이 치약 파편을 튀기며 물었다.

“모르니까 묻지? 인터넷에 뭐 떴냐?”

“아, 진짜. 노벨상 시즌이잖아?”

“노벨상? 그게 뭐?”

“형이 후보 중의 한 사람이잖아? 노벨의학상. 미국의 앤드류 박사님과 함께.”

“난 또. 야, 꿈 깨라. 그건 한 10년 후 쯤이나...”

“아무튼 어제부터 저래. 형은 못 봤어?”

“어제?”

그러고 보니 한의원에도 기자들이 몇 얼씬거렸다는 말을 듣기는 했었다. 서랍 안에 챙겨둔 ‘물건’을 주머니에 찌르고 밖으로 나왔다. 하루의 시작이었다.

“선생님, 좋은 꿈 꾸셨습니까?”

기자들이 다가와 물었다.

“아무 꿈도 못 꿨는데요?”

그들이 원하는 답대신 한방차 팩을 하나씩 나눠주었다. 어쨌든 윤도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들이었다. 차에 오르니 부용의 전화가 들어왔다.

“선생님, 저 부용이에요.”

“흐음, 또 선생님?”

“어머, 애들이 그렇게 부르다보니 저도 모르게...”

이름을 부르기로 해놓고도 선생님 모드에 익숙한 부용이었다.

“일찍 일어나셨어요?”

그녀의 목소리도 오늘은 초록이었다.

“지금 출발하는 길입니다.”

“저는 조금 전에 도착했어요.”

“우와, 벌써요?”

“윤도 씨와 만날 생각을 하니 초등학교 첫 해외여행 가던 날처럼 일찍 깨지 뭐예요? 그래서 일찌감치 와서 자리 잡았어요.”

부릉.

시동 걸기 무섭게 속도를 올렸다. 오늘 아침은 부용과 약속이었다. 브런치를 함께 하게 되었다. 저녁이 아니라 아침 겸 점심. 파리의 흔한 풍경처럼. 부용의 제안이었다. 그녀는 역시 연예기획사의 대표다웠다. 가는 길에 한 번, 꼭 한 번 차를 세웠다. ‘물건’에 보탤 것이 있었다.

“윤도 씨.”

윤도가 도착하자 부용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초록 풍경이 가득한 테라스의 그녀. 하얀 블라우스와 검은 리넨의 통 넓은 바지가 환상을 연출하고 있었다.

“늦어서 미안해요.”

“천만에요. 제가 윤도 씨 기다리려고 일찍 나온 거라니까요.”

“부용 씨가 바쁜 사람이니까 그렇죠.”

“아무리 바빠도 기다리고 싶은 사람이 있거든요.”

“고맙습니다.”

모닝 커피가 나왔다. 가벼운 식사도 나왔다. 그때까지도 부용은 청아한 초록 풀잎처럼 보였다. 식사를 마치자 그녀가 작은 포장 하나를 꺼내놓았다.

“뭐죠?”

“윤도 씨가 열어보세요.”

안에 든 건 반지를 넣을 수 있는 상자였다. 상자는 예쁘지만 안은 비어 있었다.

“......?”

윤도가 부용을 바라보았다.

“언젠가 제게 선물 하나 하고 싶다고 하셨죠?”

“받고 싶은 거 있어요?”

“뭐든 그 상자를 채워주세요.”

부용의 시선이 윤도를 겨누기 시작했다. 부드럽고 단아한 눈빛이었다.

“이건 제 취향이 아닙니다.”

윤도가 상자를 밀었다. 짧은 순간, 부용의 눈동자가 출렁거렸다. 하지만 오래 가지는 않았다. 윤도가 품에서 꺼낸 물건 때문이었다. 윤도는 그녀의 흔들림이 끝나기도 전에 부용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흰 손가락으로 반지가 들어갔다.

“윤도 씨.”

“돌아보세요.”

“뒤요?”

부용이 고개를 돌렸다. 돌리다가 그대로 멈췄다. 흰 벽 때문이었다. 초록이던 테라스가 어느새 흰 세상으로 변해있었다. 벽의 정체는 장대한 카라꽃이었다. 시원한 흰색에 어리는 초록의 풀빛. 그걸 가져온 사람은 여종업원이었다. 오는 길에 꽃집에서 주문한 꽃을 찾은 윤도, 종업원에게 주며 부탁한 이벤트였다.

“부용 씨.”

흰 카라꽃을 받아들고 부용에게 내밀었다.

“언제든 아플 때 치료해달라고 하셨죠?”

“네.”

“기왕이면 옆에 붙어서 언제든 치료할 수 있기 위해 청혼합니다. 결혼해주세요.”

“윤도 씨...”

“지구별 여행의 단 한 사람의 파트너로 당신이 필요합니다.”

“고마워요. 윤도 씨라면 물 없는 사막이라도 함께 걸어갈 용의가 있어요.”

부용은 주저없이 윤도 품에 안겼다.

“부용 씨.”

윤도가 부용을 당겼다. 흰 카라꽃에 묻힌 그녀에게 키스를 작렬했다. 초록 테라스 속에서 하얀 꽃에 싸인 부용. 마치 여신과의 키스 장면 같았다.

“사랑해요.”

윤도가 말했다.

“저도요, 사랑해요.”

부용은 이미 윤도와 한 마음이었다.

“채 선생.”

모교에 도착하자 아는 얼굴들이 다가왔다. 총장도 있고 학장도 있었다. 한의대 교수진들도 모두 나와 윤도를 반겼다.

<국가대표 명의 채윤도 초청 강연회>

<한국의 자랑 우리의 자랑 채윤도 선배님을 격하게 환영합니다.>

곳곳에 걸린 플래카드들도 큼지막했다. 이렇게 교정을 돌아보니 새내기 때의 기억이 새로웠다. 어리바리하던 풋내기 한의대생 채윤도. 그때는 실수도 많았다. 실습한답시고 윤철의 혈자리를 엉망으로 찔러대던 침. 오죽하면 침술봉사를 나갔을 때 요양원 원장까지도 울상을 지었을까?

“들어가세. 귀빈들이 많이 오셨네.”

총장이 몸소 길을 안내했다. 그는 매우 흡족한 얼굴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에게 있어 윤도는 자랑하고 싶은 0순위의 제자였다.

“채윤도 있지? 내 제자야.”

그 자부심은 그들 모두에게 큰 보람이었다.

짝짝짝!

강당에 들어서기 무섭게 기립박수가 쏟아져 나왔다. 강당은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펑펑!

기자들도 많았다. 그들의 주무기도 쉴 새 없이 플래시를 터트리며 매순간을 담아냈다. 돌아보니 낯익은 얼굴이 너무 많았다. 장 박사도 있고 한의사협회 회장도 있었다.

“채 실장.”

반가운 얼굴 중에는 TS의 김전무도 보였다.

“전무님도 오셨어요?”

윤도가 인사를 챙겼다.

“당연하지. 채 실장 강의는 천만불짜리 아닌가?”

김전무 뒤로 이 회장이 보였다. 부용의 언질을 받기는 했지만 진짜 올 줄은 몰랐던 윤도. 이 회장에게도 꾸벅 인사를 전했다. 이 회장은 윤도의 어깨를 툭 쳐주는 것으로 마음을 전해왔다.

“채 선생님.”

기자들 틈바구니에서 성수혁이 손을 흔들었다. 그도 출동이었다.

짝짝짝!

뜨거운 박수를 받으며 강단에 올라섰다. 강당이 한 눈에 들어왔다. 강연이 끝날 때 쯤이면 부용도 도착한다고 했다. 함께 오고 싶어 했지만 중요한 약속 때문에 기획사로 간 그녀였다.

“여러분!”

윤도가 강단을 보며 운을 떼었다.

“오면서 생각이 많았습니다. 무슨 말씀을 드려야 귀한 시간을 내준 여러분에게 천금의 만족을 드릴지. 하지만 제에게 강연은 늘 어렵습니다. 침에는 구침이 있어 적재적소의 것을 찾기 어렵지 않은데 말은 천만가지가 넘어 적절한 언어를 찾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보면 저는 천상 한의사가 된 걸 고맙게 여겨야할 것 같습니다.”

윤도가 화두를 펼치자 실내는 더욱 숙연해졌다.

“긴장하지 마시고 편하게 들어주세요. 지금 이 순간, 저는 저 뒤에 쓰인 명의나 신의가 아니라 그저 여러분 선배의 한 사람으로 서 있을 뿐입니다.”

다사로운 눈빛을 보낸 윤도가 화면을 돌아보았다. 자료가 나오고 있었다.

<도전>

단어 하나였다. 그 뒤를 이어 수술 장면이 나왔다. 한의술이 아니라 현대의학의 수술이었다.

“보시다시피 간이식 수술입니다.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우리나라에서 첫 간이식 수술은 서울올림픽이 개최된 1988년이라고 합니다. 이때 국내 첫 간이식수술에 도전하신 분은 S대 교수님이셨습니다.”

“......”

윤도의 말에 학생들이 주목하기 시작했다.

“국내 뿐 아니라 아시아 최초의 간이식 수술의 시도였고, 기어이 성공한 날입니다. 그런데 이 당시 이 간이식은 자칫하면 불법으로 살인죄의 처벌까지도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분은 환자의 목숨과 자신의 신념을 믿고 수술에 도전했습니다. 심지어는 환자가 가난했기에 수술비까지 사비로 보태가면서 말입니다.”

“......”

“그 뒤로 이 분은 한국 간이식 수술의 레전드가 되셨지요.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건 도전정신 때문이 아닐까합니다.”

“......”

“최근 저는 침술특화대학을 설립하기 위해 한의계의 원로와 현대의학을 하는 분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그때 현대의학의 원로 분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한의사들이 영역을 넓히려고 하는데 한의학은 한계가 있다. 그러니 결국 갈 길은 의료일원화다. 한의학을 현대의학에 편입시켜야한다는 얘기입니다.”

이 말에 학생들이 출렁거렸다.

“500년 전, 이 땅에는 양방이 없었습니다. 300년 전에도 그랬고 100년 전까지도 한방이 이 나라의 의료를 책임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100년 동안에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요?”

다시 화면이 바뀌었다. 시간을 두고 첨단의학의 화면이 보여졌다. 그러다 마지막은 다시 처음의 간이식 수술 장면으로 돌아갔다.

“바로 이겁니다. 도전. 도전이죠. 양방은 무수한 도전을 통해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고 우리 한방의 도전은 그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안타깝지만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

“어쩌면 우리는 그동안, 500년 민족의학의 기반과 성과에 너무 기대 왔는 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제가 몇 몇 난치병과 불치병에 도전해 성과를 일군 것도 그동안 도전이 너무 없었기 때문에 부각된 건지도 모릅니다. 만약, 더 많은 한의사들께서 허준처럼, 허임처럼, 혹은 중국의 편작이나 화타처럼 수많은 전설적 치료의 역사를 만들었다면 오늘 제가 준비한 자료는 양방이 아니라 한방의 한 장면이었을 지도 모르니까요.”

“......”

“여러분.”

윤도의 시선이 학생들을 향했다. 객석은 누구할 것 없이 숨을 죽이고 있었다.

“제가 HIV를 고치고 오장육부의 장부에 직접 자침을 합니다. 제가 나무인간증후군을 고치고 죽은 사람도 살려냈습니다. 나아가 아토피 피부염과 획기적인 치매약, 바르는 고혈압 탕약까지 성과를 이루었습니다. 돌아보면 도전의 연속입니다. 그러나 이것 한 가지는 알아주십시오. 제가 여러분의 자리에 앉아있었을 때, 저는 성적도 그저 그런 한의대생에 불과했었다는 것.”

“......”

“허준 선생도 허임 선생도, 심지어는 편작과 화타도 천재는 아니었습니다. 그들 역시 처음부터 차근차근 도전해 전설이 되고 명의가 되었습니다. 이 자리에 있는 여러분들도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미래를 걱정하지 말고 오직 환자와 질병을 걱정하시기 바랍니다. 한의사의 영광은 치료와 질병의 퇴치에 있는 것이지 연봉과 좋은 근무조건에 있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한의사 노릇을 하면서 밥 굶어죽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요.”

“......”

“아인슈타인 같은 분도 그런 말을 했습니다. 인생을 사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하나는 그 무엇도 기적이 아닌 삶, 또 하나는 모든 것이 기적인 삶. 여러분의 선택은 어느 쪽입니까? 여러분, 저와 함께 도전합시다. 간이식에 도전한 저 분처럼, 수없는 도전으로 새로운 수술과 시술법을 만들어내는 양의들처럼 우리도 도전합시다.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듯 한방의 침체는 이제 끝났습니다. 제가 도전하고 여러분이 도전하면 우리 한의학 역시 인류를 수호하는 의료의 중심으로써 우뚝 설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내일이 날마다 기적 같은 날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열정어린 눈빛을 보니 더 확신이 섭니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강연을 끝낸 윤도가 강단의 끝으로 나와 인사를 올렸다.

“와아아!”

다시 기립박수가 쏟아졌다.

“채윤도, 채윤도!”

후배들의 열화 같은 연호도 이어졌다. 그들을 더듬던 윤도의 시선이 앞줄에서 멈췄다. 부용이 도착해 있었다. 사랑은 신묘하다. 수많은 사람들 틈에 있어도 그녀가 보인다. 그녀는 학생들의 박수가 다 끝날 때까지도 박수를 멈추지 않았다.

“멋졌어요.”

강단을 내려오자 부용이 꽃다발을 건네 왔다. 후배들도 일부 꽃다발을 건네주었다. 후배들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때 윤도 핸드폰이 울었다.

빠라빰빠라빰.

“......?”

전화기를 꺼내던 윤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소음 때문인지 벨소리가 살짝 다르게 들린 것이다. 전화번호 또한 낯설었다.

‘보이스피싱?’

그렇잖아도 분주한 자리라 통화거절을 눌렀다. 하지만 벨은 또 울렸다. 별 수 없이 전화를 받았다.

“Hello, is Doctor Chae there?”

전화에서 영어가 흘러나왔다. 영어는 저 홀로 계속 이어졌다.

“여기는 노벨의학상과 화학상을 주관하는 카롤린스카 연구소입니다. 올해 노벨의학상 공동수상을 통보하며 진심어린 축하를 드립니다.”

“......?”

몇 마디 멘트에 윤도 몸이 굳어버렸다.

“윤도 씨?”

부용이 다가섰다.

“이 전화...”

윤도가 전화를 들어보였다. 부용이 받아 귀로 가져갔다. 전화기 속의 멘트는 바뀌지 않았다.

“여기는 스웨덴 카롤린스카 연구소입니다. 올해 노벨의학상 공동수상을 통보하며 진심으로 축하를 드립니다.”

“윤도 씨!”

부용이 윤도를 바라보았다.

“장난 전화일 겁니다. 그렇죠?”

“아니에요, 윤도 씨. 노벨상이래요. 노벨상!”

부용은 벼락처럼 윤도 품에 안겼다.

“와아아!”

기자단 쪽에서도 함성이 일었다. 그들 중 누군가도 정보를 받은 모양이었다.

“와아아!”

이번에는 재학생들이 환호를 했다. 기자들의 말이 그들 귀에 들어갔다. 현장은 바로 열광의 도가니가 되었다.

“채윤도, 채윤도!”

재학생들이 연호하는 가운데 기자들의 카메라가 미친 듯이 집중되었다.

빠라빠라빵.

얼떨떨한 가운데 다시 전화가 울었다. 이번에는 미국의 앤드류였다.

“닥터 채, 스웨덴 카롤린스카 연구소에서 전화 받았습니까? 우리가 노벨의학상 공동수상을 하게 되었답니다.”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오는 앤드류의 들뜬 목소리. 노벨상 수상이 꿈이 아님을 확인 시켜주었다.

이부용.

그녀가 윤도 품에 안겼다.

노벨의학상 수상.그 또한 윤도 품에 안겼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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