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사를 위해 열어둔 혈문들이 바빠졌다. 그만큼 할머니의 안색은 좋아졌다. 흉측한 건선 비늘이 떨어지고 혈색이 좋아진 할머니. 뽀얀 새색시가 따로 없었다.
“워매, 아주 딴 사람이 되얐어야.”
치료가 끝난 후에 들어온 노덕순이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고마워. 친구 덕분에 머리가 시원해. 몸도 시원하고.”
장덕순 할머니는 좋아 어쩔 줄을 몰랐다.
“그라게 나가 뭐랬어? 진짜배기 침쟁이가 있다고 했잖아?”
“그려, 그려. 고마워.”
두 할머니는 서로 손을 잡은 채 정을 나누었다.
“이제 돼지고기 생식하시면 안 돼요. 정 육회가 먹고 싶으시면 소고기로 드시고요. 거기도 무구조충이라는 게 있지만 돼지고기 조충보다는 덜 위험하거든요.”
윤도가 주의사항을 일러주었다.
“아이고, 대체 뭔 침은 놓은 겨? 나도 뽀샤시해지게 저 침 좀 놔줘.”
노덕순 할머니가 윤도를 팔을 흔들었다. 할머니들은 샘이 많다.
“그러자면 이걸 할머니 머리에 넣어야할 텐데요?”
윤도가 성충을 들어보였다.
“그거이 뭔데?”
“기생충이요. 이게 장덕순 할머니 머리 속에 들어있었거든요.”
승주가 성충이 놓인 트레이를 들어보였다.
“아이고, 싫어, 싫어. 그것이 내 머리 갉아먹으면 나 다시 머리 나빠져.”
노덕순 할머니는 손사래를 치며 머리를 감싸안았다.
대의치국大醫治國-1
대의치국大醫治國-1
노벨상 시즌이 돌아왔다. 기자들 발걸음이 잦아졌다. 미국의 앤드류 때문이었다. 그는 또 다시 유력한 후보에 올랐다. 윤도와의 공동연구 때문이었다. 앤드류의 연구는 이미 결실을 맺고 있었다. 실험에 참가한 자궁경부암 환자들에게 현저한 성과를 얻었다. 그 과정에는 윤도도 계속 참여하고 있었다. 덕분에 윤도 역시 세계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한국인 최초의 본격 노벨상 수상자가 나올 것인가?
초미의 관심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앤드류는 인유두종 바이러스 연구 말고도 다른 업적이 많았다. 노벨상 위원회에서 어떤 업적을 평가하느냐에 따라 윤도의 공동수상은 나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
사실 윤도가 바라는 건 한의대인가였다. 그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교육부의 내부 심사과정을 무난하게 넘어간 것이다.
마지막 환자를 본 후에 약작두를 잡았다. 일침 한의원에는 약작두가 두 개 있었다. 하나는 진경태의 것이고 또 하나는 윤도의 것이었다. 특별한 법제가 필요한 약재는 진경태가 썰었다. 때로는 윤도도 함께 썰었다. 약재가 잘릴 때마다 풍기는 알싸한 한약 냄새가 좋았다. 일종의 수련이기도 했다.
“이거 하면 꼭 장터가 생각난다니까요.”
윤도가 말문을 열었다.
“저도 그렇습니다.”
진경태가 답했다. 그의 손은 절단로봇이다. 오직 감만으로도 같은 크기로 썰어낸다. 저 실력으로 방송출연도 했다. 윤도가 초대된 프로그램이었다. 짧은 시간이지만 신기의 절단 실력을 뽐냈다. 진경태 또한 굉장한 인터넷 댓글 반응을 받았다.
<약재절단 AI>
진경태의 별명이 하나 더 추가되었다.
“그때 아저씨를 못 만났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럼 저는 한 쪽 눈을 못 보고 있을 지도 모르죠.”
“갈매도에 들어올 때 기분 어땠어요? 젊은 놈이 헛소리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나요?”
“그거 지금 생각해도 제 인생 결단이었습니다. 거기 안 갔으면 원장님하고 인연되기 힘들었을 겁니다.”
“그럼 더 좋은 인연을 만났을 지도 모르죠.”
“하핫, 이보다 더요? 원장님 덕분에 제가 얼마나 유명해진지 모르십니까?”
“그게 왜 저 때문입니까? 아저씨 능력이죠.”
“천만에요. 한약사 데려다 이렇게 대우해주는 한의사 없습니다. 좋은 환경, 약재 전권... 제가 대한민국에서 제일 대우 받는 한약사라고요.”
“별 말씀을...”
“게다가 아파트도 사주셨지, 보너스로 준 주식도 대박나고... 어휴, 정말 이게 꿈인지 생신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좋으세요?”
“당연하죠. 남자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서 죽는다던데 제가 그런 심정입니다.”
“흐음, 그건 좀 오버 같은 데요?”
“오버든 말든 상관없습니다. 내쫓지만 않으면 여기서 뼈를 묻을 거니까요.”
“바르는 탕약은 언제 나오죠?”
윤도가 장비를 돌아보았다.
“마지막 과정 들어갔으니 곧 타이머 울릴 겁니다. 류 사장님 확인실험은 아직 결과 안 왔습니까?”
“아직까지는 문제가 없다고 하네요.”
“으아, 잘 하면 또 신약 한 건 올리겠군요. 세계 최초의 바르는 고혈압 치료제.”
진경태가 고무될 때 윤도 전화가 울렸다. 발신자는 김광요 국정원 차장보였다.
“어, 차장님? 웬일이세요?”
“지금 바쁘신가요?”
“아니, 괜찮습니다.”
“그럼 좀 뵈러가도 될까요?”
“어디 불편하신가요?”
“아닙니다. 뵙고 말씀드리죠.”
전화가 끊겼다.
그는 오래지 않아 한의원에 도착했다. 박과장과 둘이었다. 윤도가 원장실로 모셨다.
“저녁이 있는 시간을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차를 받아든 김광요가 말했다. 웃는 표정과는 달리 근육은 긴장 모드였다.
‘뭔가 있군.’
윤도가 감을 잡았다.
“요즘도 바쁘시죠?”
“예, 좀...”
“올해 노벨상 어떻습니까? 수상 가능성이 높은 거 같던데?”
“차장님도 그 말씀입니까?”
“국가의 영광 아닙니까? 우리나라가 아직 노벨의학상이 없으니...”
“노벨상은 중요하지만 상이 중요한 건 아니라고 봅니다.”
“공감합니다. 하지만 노벨의학상이 연구실적이나 질병퇴치 쪽의 공헌이 아니라 의료인으로서의 의술과 인술에만 무게를 둔다면 마땅히 선생님이 받아야합니다.”
“칭찬이 마구 쏟아지는 걸 보니 저한테 부탁이 있으신 모양이군요?”
“어이쿠, 이거 제가 속을 다 보였군요?”
“말씀하시죠. 누가 아프십니까?”
“맞습니다. 그게 아니면 바쁘신 선생님께 청탁 같은 거 드리면 안 되죠.”
“대통령님은 제가 뵈었고... 혹시 국정원장님?”
“좀 먼 데입니다.”
‘뭔데?’
“북한 쪽입니다.”
‘북한?’
김광요의 말에 윤도가 시선을 들었다.
“지금 남북 물밑 접촉이 계속되고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것도 서로의 원론적인 주장이 팽팽하다보니 고착 상태입니다. 다만 지난번 외교장관 인선에서 선생님이 도와주신 관계로 새로운 라인을 짜서 밀담을 추진 중이었는데 북에서 돌연 특사 방북을 요청해 왔습니다.”
“이제 결실을 보게 되는 건가요?”
“그건 우리 생각이고 저쪽은 다른 의도가 있는 거 같습니다.”
“다른 의도라뇨?”
“우리가 통보한 새 특사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는 모양인데 대표단에 선생님을 보내달라는 옵션이 들었습니다. 그것도 최대한 빠른 일정으로 말입니다.”
“저를요?”
“이게 저희도 이해가 잘 안 가는 옵션입니다. 정보망을 가동해봤는데 북한 지도자의 건강은 큰 문제가 없는 것으로 보이거든요. 정기행사도 빠지지 않고 있고 화면분석으로도 건강악화의 조짐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
“한 번 보시겠습니까?”
김광요가 말하자 박과장이 노트북을 가동시켰다. 북한 지도자의 화면이 나왔다. 최신 화면이었다. 전방부대를 시찰하고 산업단지를 돌아보고 있다. 얼굴 혈색이나 걸음걸이 등을 보아 건강은 그리 나빠 보이지 않았다.
기억을 과거로 옮겨갔다. 그때 그 주석궁. 진맥에서 살짝 이상반응이 오기는 했었다. 만약 악성 사기(邪氣)의 시작이었다면 암이 발생했을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해야 1기 정도에 머물 일. 그 정도는 북한의 의술로도 해결이 가능하다. 더구나 북한의 신의로 불리는 차평재를 살려놓고 온 윤도였었다.
“진맥을 해봐야 알겠지만 화면상으로는 큰 병이 있는 것 같지는 않군요.”
윤도가 소견을 밝혔다.
“그렇죠? 게다가 이 화면은 고작 사흘 전의 것입니다. 중병이 있다면 이런 행사에 나올 리가 없지요.”
“그럼?”
“저희도 궁금합니다. 혹시 그때 주석궁에서 선생님과 따로 특별한 말이 오가기라도 했습니까?”
“아닙니다.”
“아무튼 뭔가 일이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왜냐면 저들이 최대한 빠른 방북을 원하기 때문이죠. 오늘 당장 올라와도 좋다는 말이 나올 정도입니다. 거기에 선생님을 끼워달라니 백발백중 응급환자가 있다는 얘기가 아니겠습니까?”
“......”
“어쩌면 이번 특사의 목적은 선생님의 방북일지도 모릅니다. 물론 그렇건 말건 우리는 남북평화의 기회로 활용할 생각입니다만.”
“......”
“죄송하지만 시간이 되시겠습니까?”
“보아하니 내일이라도 가야하는 것 같군요?”
“죄송합니다.”
“가면 며칠을 있어야하나요?”
“대략 3-4일이면 될 것으로 봅니다.”
“3-4일이라...”
“외교장관께서 이 특사파견을 진두지휘하고 계십니다. 해서 당신이 직접 오셔서 말씀드리겠다고 하는 걸 제가 왔습니다. 그 분은 취임한지 얼마 되지 않아 업무파악도 바쁘신 관계로...”
“별 수 없군요. 이 또한 응급사태에 해당하는 것이니.”
“고맙습니다.”
“내일 하루 예약 진료 좀 땡겨 놓고 모래 가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맞춰보겠습니다. 진료손실에 대해서는 지난번처럼 저희가 보전해 드리겠습니다.”
김광요의 대우는 깍듯했다.
‘북한.’
김광요가 돌아간 마당에 남아 하늘을 보았다. 차평재와 수란, 정길이 얼굴이 스쳐갔다. 가만히 상황을 정리해 보았다.
윤도의 화급한 방북을 원한다.
지도자의 건강에는 큰 문제가 없는 것 같다.
그렇다면 차평재의 재발?
아니면 2인자나 3인자의 중병?
원장실로 와서도 상상은 꼬리를 물었다. 그때 윤도 전화가 울었다. 박과장이었다.
“일정 잡았습니다. 모래 오전에 서울을 출발해 심양에 내리고, 거기서 바로 북한 비행기로 연결해 평양으로 들어가는 일정입니다.”
“알겠습니다.”
통화는 간단히 끝났다. 국정원, 번갯불에 콩을 볶고 있다. 그만큼 시간이 촉박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중국 심양에서 평양.
중국을 생각하다보니 또 하나의 기억이 따라붙었다. 심양에는 요녕중의약의학대학이 있다. 중국 명의순례 때 들렀던 곳의 하나였다. 그러고 보니 명의순례도 이 즈음이었다.
명의순례.
그 단어와 함께 안미란의 이름이 떠올랐다.
“원장님.”
안미란이 가운을 두르며 원장실에 들어섰다. 아침 진료를 시작하기 전이었다.
“좋은 아침이죠?”
“저만 좋은 아침이죠. 원장님은 어제도 늦게 들어가셨다면서요?”
“나야 뭐 일상이잖아요.”
“저 시킬 일 있으면 좀 부려먹으세요. 팍팍 구르려고 여기 온 건데...”
“지금 정도면 충분히 구르고 있습니다.”
“아니에요. 원장님 보면 저는 정말 멀었어요. 이래가지고는 평생 수련해도 원장님 발끝에도 못 미칠 것 같아요.”
“발끝이라뇨? 지금도 제 8-9할 몫은 됩니다 종이 한 장 차이에요.”
“위로 안 하셔도 되요.”
“아, 그건 그렇고 전에 중국명의순례 한 번 가보고 싶다고 했었죠?”
“네.”
“진짜 한 번 가볼래요?”
“말이 그렇지 환자도 많고...”
“휴가도 없고?”
“에이, 그런 뜻은 아니에요.”
“내가 일정보니까 올해 명의순례는 글피부터더라고요. 물론 예약이 다 끝나긴 했지만.”
“예?”
안미란이 뻘쭘한 표정을 지었다. 글피부터 시작되는 명의순례. 게다가 예약도 끝난 상황. 윤도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실은 내가 내일부터 며칠 해외 왕진을 가게 되었어요.”
“어머, 진짜요?”
“그래서 사나흘 자리를 비워야할 거 같은데 마침 중국의 명의순례도 그때네요.”
“예약은 끝났다면서요?”
“에이, 왜 이래요? 제가 중국에 라인 좀 있잖습니까? 중국 주석의 훈장은 괜히 받은 줄 아세요.”
“원장님?”
“농담 아니고요 어젯밤에 주최 측에 접촉해서 확인했거든요? 안 선생님이 오케이하면 바로 끼워 넣을 수 있습니다.”
“원장님...”
“솔직히 명의순례... 어떤 한의사에게는 관광이 될 수도 있고 또 어떤 한의사에게는 한의의 진정성과 인술, 도전, 개척 등을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저도 큰 도움 얻은 사람의 하나고요.”
“정말 저 보내시려고요?”
“한 번 다녀오세요. 가셔서 중국 침술도 체험하시고 의서에서만 보던 중국의 전설적 명의를 발자취를 돌아보면서 미래상을 그려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원장님...”
“가는 겁니다?”
“보내만 주신다면 가보고 싶기는 해요.”
“가시면 하북성 코스에 헤이싼시호라는 호수가 있어요. 잘 하면 영감 같은 걸 받을 수도 있으니 시간 되면 꼭 보고 오세요. 가는 경비일체는 제가 대고요, 이건 품위유지비로 쓰세요. 다만 하북성 코스에서 누군가 진료를 부탁하거든 웬만하면 도와주시고요.”
윤도가 봉투를 내밀었다. 안에 든 건 5000불이었다.
“원장님.”
“여권 가지고 중국대사관부터 가세요. 급행으로 비자 신청하면 오늘 안으로 처리될 겁니다.”
“원장님.”“꾸물거리지 말고 빨리 다녀오세요. 우리 오늘은 좀 빡세게 굴러야합니다. 며칠 예약된 분들 중에 병증이 심한 분들은 전부 모시기로 했거든요.”
윤도가 문을 가리켰다.
“고맙습니다. 원장님. 총알처럼 다녀올 게요.”
안미란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