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6화 (216/265)

“박사님.”

“진심입니다. 우리 인간은 헤쳐나가야 할 난제가 많습니다. 지금 제가 파악한 것만으로도 지구 상에 나무인간이나 산호인간 증후군으로 고생하는 환자가 20여 명이 넘습니다. 인류 전체로 보아서는 미미하지만 불치병이란 언제 어떤 양상으로 변할지 모르니 소소할 때 정복해 나가야한다고 생각합니다.”

“......”

“물론 선생님의 능력이라면 문제가 없겠지만 그렇다고 지구 곳곳의 환자들을 찾아다니기란 역부족이지요.”

“공감합니다.”

“부탁합니다. 이 연구... 제가 8년 째 연구하는 과제입니다. 인유두종 바이러스를 통제할 수 있다면 외부감염인 나무인간 증후군은 물론이고 내부 감염으로 인해 자궁경부암에 걸린 여성들을 구할 수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치면 엄청난 숫자가 될 것입니다.”

“박사님.”

“이 연구... 특별한 보상은 없겠지만 나무인간 증후군에 대한 발병 기전만 밝혀도 노벨의학상 후보에는 오를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운이 좋으면 수상을 할 수도 있고 말입니다.”

“그런 엄청난 연구에 저를 파트너로요?”

윤도 시선이 출렁거렸다.

“천만에요. 당신을 만난 건 나의 행운입니다.”

앤드류가 못을 박았다.

노벨의학상.

한국과는 인연이 먼 상이다. 노벨상이라면 전직 대통령이 받은 평화상이 유일하다. 기타 문학상 쪽에 더러 후보 소식이 오지만 물리학상, 화학상, 의학상 등은 아직 물꼬를 트지 못한 한국이었다. 더구나 앤드류는 이미 노벨상 물망으로 회자되고 있는 저명한 의학자. 단순히 윤도에게 던지는 떡밥이 아니었다.

“노벨상이야 제가 언급할 주제가 못 됩니다. 다만 박사님께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돕도록 하겠습니다.”

윤도가 수락의사를 밝혔다.

상 때문이 아니었다. 앤드류는 인류를 대표하는 연구자가 분명했다. 이런 사람과 인연을 맺을 수 있다는 건 윤도의 발전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보았다.

앤드류와의 대화가 길어졌다. 침술과 한방에 관한 이야기였다. 앤드류의 눈은 반짝거렸고 쉴 새 없이 메모를 해댔다. 세계 최고의 석학이기에 윤도 정도는 무시할 수도 있는 사람. 그러나 그는 윤도의 생각을 스펀지처럼 받아들이며 한의학을 존중해주었다.

윤도와 앤드류는 그렇게 친구가 되었다. 둘 사이에 인종과 나이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같은 길을 가는 동지의식이 더 컸던 것이다.

공동연구.

느닷없는 과제를 안은 윤도가 연구소를 나왔다. 앤드류는 윤도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어주었다.

달콤한 전리품들.

달콤한 전리품들.

“이 겁니다.”

미국을 떠나기 전 날, 성수혁이 박물관 벽의 지도를 보며 말했다. 류수완과 정나현까지 함께한 자리였다. 윤도네 일행이 마무리 파티장으로 가면서 들른 코스였다.

초대형 세계지도.

거기 또렷한 독도가 보였다.

마음 뿌듯해질 때 한인회장단이 다가왔다. 그는 성수혁을 통해 윤도의 쾌거를 듣고 있었다.

“진짜 대단한 일 하셨습니다. 우린 거의 지쳐가던 판이었는데...”

회장이 윤도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아닙니다. 저야 그저 숟가락 하나를 얻었을 뿐입니다.”

“그럴 리가요. 지역신문에서 채 선생님 의술에 대한 찬사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언제 정식으로 초대할 테니 오셔서 우리 교민들 중병도 좀 돌봐주시기 바랍니다.”

“그러죠.”

대답을 하며 다시 한 번 지도를 보았다.

독도...

그 이름은 왜 늘 혀에 감길까?

‘매직!’

선명한 표기를 보며 윤도는 로날드의 ‘정치마법’에 한 번 더 뜨거운 찬사를 보냈다.

챙!

샴페인 잔이 허공에서 맑은 키스를 나누었다. 류수완이 한 턱 내는 자리였다. 미국의 일정은 모두 끝났다. 올 때 기준으로 보면 200% 달성이었다.

“독도 만세!”

정나현의 건배사였다. 윤도의 딜을 아는 그녀였기에 목소리도 당찼다. 지도에 찍힌 점 하나. 그건 그녀에게도 뜨거운 자부심이었다.

200% 달성.

그 전리품은 보석보다 빛났다.

첫째는 치매신약이었다. 윤도의 활약이 바탕이 되었다. 메사추세츠 병원을 들었다 놓은 것이다. 입원환자 19명을 완치 시켜 일상으로 돌려보냈다. 게다가 톱스타 엘리자베스도 있었다. 그녀는 오늘도 미국 언론의 한 면을 장식하고 있었다. 불과 며칠 사이에 과거의 모습에 근접한 얼굴이었다.

역경을 딛은 그녀에게 커다란 딜도 들어왔다. 미국 최고 감독의 차기작 여주인공 캐스팅 제의가 있었고, 드라마 사상 최고의 예산을 퍼붓는 극에서도 여주인공을 타진해 왔다.

CF도 줄을 이었다. 그녀는 행복한 비명에 빠졌다. 폭풍 뒤에 평화가 온다더니 그 말을 실감하는 엘리자베스였다.

다음은 개가는 인유두종 바이러스 치료였다. 그 또한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다. 그동안 보안을 유지하던 로날드와 리처드슨이 커밍아웃을 한 것이다. 그들 부자도 언론의 찬사를 받았다. 가족의 비극을 감춘 채 사회공헌을 해온 리더십에 대한 칭송이었다.

마지막은 독도 지도 표기였다. 인유두종 바이러스와 독도 표기는 방미 예정에 없었지만 커다란 자부심이 아닐 수 없었다.

미국 땅에서 인맥 형성도 넓혔다. 우선은 골프 선수 빌런이었다. 그의 수술도 무사히 끝났다. 작별인사 차 들린 자리에서 윤도는 그의 두통과 흉곽결림은 침 두 방으로 해결해주었다. 나이스 샷이 아닐 수 없었다.

“골프를 배울 생각이 있다면 언제 어디서든 평생무료 레슨 보장합니다.”

빌런의 인사였다. 말이라도 고마웠다.

엘리자베스와 리처드슨 부자도 리사와 더불어 큰 경험이자 재산으로 남게 되었다.

그 외에 치매전문병원에서의 침술봉사도 빼놓을 수 없었다. 지상 최고의 시스템을 갖춘 메사추세츠 치매병원. 거기서도 윤도는 개가는 빛이 났다. 한나절 침술봉사로 20명이 넘는 환자들에게 제정신을 선물한 것이다.

아차, 앤드류가 빠졌다. 그와 공동연구하기로 한 인유두종 바이러스. 그건 일부러 빼놓은 윤도였다. 앤드류는 어찌 보면, 미국 땅에서 만난 또 하나의 헤이산시호였다. 그에게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 그래서 마음 깊이 갈피로 찔러두었다.

“저는 채 선생님만 보면 살맛이 납니다. 열심히 일하고 싶은 의욕도 샘 솟고요.”

류수완은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치매신약은 북미시장에 제대로 상륙했다. 며칠 사이에 들어온 주문만 해도 몇 년치 생산량으로 모자랄 지경이었다. 이제 윤도와 류수완의 강외제약은 돈방석에 앉은 것과도 같았다.

“이 기회에 아주 신약개발로 나서시지요?”

차 이사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럴까요?”

윤도가 맞장구를 쳤다.

“선생님만 좋다면야 저희가 모든 준비를 갖추겠습니다.”

“그것도 나쁘지 않지만 한의사는 역시 환자를 고쳐야겠죠.”

윤도는 흔들리지 않았다.

“한의원에서 고치는 것보다 신약으로 고치는 게 더 많은 병자를 구할 수 있습니다.”

“양이 아니라 질의 문제입니다. 보편적인 질환보다 난치병을 고칠 때의 보람도 있고요. 한의사나 의사들이 그런 어려운 과정을 넘어가야만 신약의 발전도 함께 이루어진다고 봅니다만...”

“그렇군요.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차 이사가 두 손을 들었다.

파티를 겸한 식사가 끝났다. 이제는 한국행 비행기를 탈 시간이었다. 두 대의 차량에 분승한 윤도 일행이 공항으로 출발했다. 공항이 가까울 무렵에 카톡이 들어왔다.

‘응?’

첨부된 사진에 윤도 눈이 휘둥그레졌다. 소방공무원 구대홍이었다.

<선생님 기사를 봤습니다. 미국에서도 멋지시네요. 제 첫 화재진압 사진 보여드려요. 선생님께 바칩니다.>

진압복장 사진이었다. 대형 유리창을 깨서 10여 명을 대피 시킨 구대홍. 시커멓게 그을린 얼굴이었다. 괜히 눈앞이 핑 돌았다.

<멋지네요. 최고의 소방관이 되기를 바랍니다.>

답글을 남길 때 전화가 걸려왔다. 이번에는 엘리자베스였다.

“선생님 어디 계세요?”

“어, 저희 지금 공항으로 가는 중인데요?”

“알겠습니다. 저도 지금 공항 앞이에요.”

“출국하세요?”

“아뇨. 선생님 배웅하려고요?”

“저를요?”“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전화는 그렇게 끊겼다.

“팬입니까?”

옆 자리의 류수완이 물었다.

“엘리자베스입니다. 배웅을 나온다는 데요?”

“정말요?”

“예... 집에서 가료 중이라더니...”

“하긴 생명의 은인이잖습니까? 그대로 흉측하게 잊혀져갈 비운의 스타였는데 선생님이 되살려 놓으셨으니...”

류수완이 웃었다. 공항은 어느 새 코앞이었다.

“이거 받아주세요.”

입국장 앞에서 엘리자베스가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뭐죠?”

윤도가 물었다.

“제가 아끼는 장신구예요. 앙크(Ankh)라고 고대 이집트 형상문자 하이어로글리프(hyeroglyph)인데 영원한 삶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선생님이 받아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엘리자베스... 이 귀한 걸...”

윤도가 미간을 좁혔다. 윤도 기억에 있던 장신구였다. 삶을 포기한 그녀의 목에서 그녀를 지키고 있던 장신구...

“받아주세요.”

함께 나온 어머니도 간곡함을 감추지 않았다. 순금의 앙크. 그 뒤에는 엘리자베스의 이니셜이 쓰여 있었다. 돈으로 쳐도 꽤 나가겠지만 정성만을 생각해 받기로 했다.

“저 언제든지 몸에 이상이 생기면 선생님 찾아갈 거예요. 그래도 되죠?”

“그럼요. 제 명함은 잘 챙기셨죠?”

“제 보물상자들 속에 꼭꼭 넣어두었어요. 하지만 아프거나 하는 것보다 좋은 일로 선생님을 뵙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셔야죠. 저희 신약 CF도 찍으셔야 하고...”

“그건 지금 당장 찍어도 문제없어요.”

“하핫, 우리 류 사장님이 곧 스케줄 잡아서 연락드릴 겁니다.”

“기왕이면 한국에서 찍었으면 좋겠네요. 선생님도 뵐 겸요.”

“그럴까요?”

“선생님 덕분에 최고의 감독님과 영화 찍게 되었어요. 한국에서도 개봉한다니 CF가 안 되면 개봉인사 때 찾아뵐 게요.”

“그러세요.”

그것으로 인사를 마감했다.

윤도는 일행 중에 마지막으로 입국심사를 받았다. 두 눈에 검색직원들이 들어오자 기억이 철렁해지는 윤도였다. 하지만 걱정할 것 없었다. 저만치에서 다가온 검색직원 때문이었다. 알고 보니 그녀였다. 윤도에게 빨간 여드름을 치료 받은 안경 쓴 여직원. 안경을 벗고 경쾌한 화장을 하는 바람에 알아보지 못한 윤도였다.

“돌아가시는 건가요?”

그녀가 물었다.

“네.”

“인터넷으로 당신 의술 기사를 봤어요. 그렇게 훌륭한 분인 줄도 모르고...”

여직원이 엄지를 세워보였다.

“고맙습니다. 이제는 한국인들에게 너무 빡빡하게 하지하세요.”

당부를 남기고 탑승장으로 걸었다. 여직원은 그 뒤통수를 향해 거수경례로 마음을 전했다.

면세점이 나오자 정나현과 여직원이 한눈을 팔기 시작했다.

“뭐 살 거 있어요?”

윤도가 정나현에게 물었다.

“그게 아니고... 배 샘, 김 샘, 그리고 진 실장님 기념품이라도 하나씩 사야할 거 같아서요.”

“아, 그렇군요.”

윤도가 손가락을 튕겼다. 여자의 감성은 세심했다. 늘 대충 돌아가던 윤도와는 달랐던 것이다.

“이걸로 사세요. 어차피 공무출장이니까.”

윤도가 카드를 내밀었다.

“그런 거 없어도 돼요. 저도 돈 있거든요.”

“공무잖아요? 팍팍 쓰세요. 천 불이건 만 불이건...”

“원장님, 600불 이상 되면 정부 리스트에 올라가는 거 모르세요?”

“600불이오?”

“해외에서 한 번에 600불 이상 긁으면 국세청에 통보된다고요.”

“으음, 그런 일이... 600불이라야 60만원인데...”

“그러니까 넣어두세요. 제가 달러 바꿔온 거 있거든요. 그동안 너무 바빠서 고스란히 남았어요.”

“그럼 알아서 하세요.”

정나현에게 전권을 넘겨주었다. 쇼핑이야 역시 여자들이 전문가니까.

“채 선생님.”

탑승구 앞에서 류수완이 손짓을 했다. 그는 여기서도 노트북을 펼치고 업무를 보고 있었다.

“방금 한국 본사 보고를 받았는 데요 한국에서도 좋은 일이 있을 거 같습니다.”

“좋은 일이라면?”

“우리 국내 담당 이사 말이 복지부 쪽에서 입질이 왔답니다.”

“......?”

“지금 정부에서 치매퇴치 20년 장기 플랜을 구상 중이라고 합니다. 노령화가 가속되면서 치매환자가 사회적 문제가 되니까 정부차원에서 올인하려는 거죠.”

“그런 사업은 이미 벌이고 있지 않나요? 간병제도를 비롯해서...”

“그건 소극적 의미의 사업이죠. 이번에 구상하는 건 근본적인 프로젝트 같습니다. 예산만 해도 비교가 안 될 정로랍니다.”

“그래서요?”

“자세한 말은 안 하는데 우리 치매신약에 대한 상세자료와 생산규모 등의 데이터를 달라고 했답니다.”

“......?”

“속단하기는 이르지만 신약을 정부의 장기 플랜 구상에 맞춰보려는 것 같습니다. 쉽게 말하면 지정약품 같은 거죠.”

“지정 약품?”

“1차적으로 치매 진단을 받으면 우리 신약을 무상으로 공급하는 제도 같은 거 말입니다. 물론 그 비용은 정부에서 부담하겠죠.”

“그렇게 되면?”

“맞습니다. 엄청난 매출이 보장됩니다. 뿐만 아니라 정부지정약이 되면 다른 국가에 대한 홍보도 수월해지고요. 이거 제 생각대로 된다면 북미시장 선점과 함께 세계 대표 치매약으로 등극할 가능성도 높아집니다.”

“단순히 자료만 달라고 했을 수도 있잖습니까?”

“사안은 그렇지만 본질을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국내 언론과 방송에도 채 선생님의 미국 활약이 대대적으로 보도가 되었습니다. 우리 차 이사가 그런 쪽 촉이 기막히거든요. 거기다 성수혁 기자도 현장중계 기사로 도움을 주어서...”

“......?”

“채 선생님의 인지도와 그간 이룬 신뢰성, 거기에 북미시장의 반응까지 올려놓았기에 복지부가 움직인 겁니다. 우연한 입질이거나 다른 대형 제약사들의 들러리로 서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사장님.”

“이건 기밀인데...”

주변을 돌아본 류수완이 은밀하게 뒷말을 이었다.

“우리 직원들이 인맥을 동원해 체크한 결과 처음에는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던 우리 치매신약이 이번에 급거 부각되었다는 후문도 있습니다.”

“그래요?”

“그리고...”

류수완, 이번에는 윤도 귀를 향해 바짝 다가왔다. 그리고 속삭이는 듯 한 문장을 윤도 귓속으로 밀어넣었다.

“그 발원지가 청와대라고 합니다. 거기서 선생님과 치매 신약을 콕 찍어서 함께 검토하라는 특별지시를 내렸다고...”

“......!”

집중하던 윤도가 왈딱 고개를 들었다. 류수완의 손은 ‘쉬잇’을 가리키고 있었다.

청와대의 특별지시?

윤도 머리 속에서 대통령의 모습이 팽글거리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