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0화 (170/265)

“드세요.”

자리를 부용의 방으로 옮겼다. 부용이 직접 차를 타서 내밀었다.

“같이 식사하고 가시면 좋은데...”

“미안해요. 광희한방대학병원에서 수행할 프로젝트가 있어서요.”

“눈코 뜰 새 없네요. 일본에 번쩍, 우리 아버지 회사에 번쩍, 청와대에 번쩍.”

“하핫, 그렇게 되었네요. 부용 씨 사업은요? 유럽과 중국에 큰 공연 들어갈 거라는 풍문이 돌던데?”

“유럽은 괜찮은데 중국이 문제예요. 아시다시피 한중 관계가 복잡미묘 하잖아요? 그렇다고 보장될 때까지 기다릴 수도 없고요.”

“잘 될 겁니다.”

“선생님은 우리 아버지 회사에서 빅 히트를 두 방이나 날리고 오셨더군요?”

“빅 히트는 아니고... 민폐만 끼쳤죠. 인재 스카우트 비용을 너무 많이 주셨습니다.”

“아버지는 너무 적다고 하시던데요?”

“그래요?”

“선생님은 모르실 수 있지만 세계적인 인재 스카우트하는데 몇 십억은 많은 돈이 아니에요. 실제로 글로벌 인재들 데려오려면 백지수표 내미는 경우가 허다하거든요. 당연히 그 대행하는 에이전트도 거액을 부르죠. 스캇 보라스라고 아세요?”

“미국 메이저리그요?”

“그 사람도 보통 계약총액의 6% 정도를 먹어요. 만약 대박난 FA가 5000만불 계약을 한다면 얼마일까요? 그건 단순히 프로야구지만 글로벌 기업의 년간 매출액은... 상상이 되세요.”

“그렇게 말하니까 이해가 쉽네요.”

“오빠도 무척 고무되어 있더라고요. 선생님 강연의 반응이 너무 좋아 한의사들 가끔 모셔야겠다고... 나보고 만나게 되면 추천 좀 받아오라고 하던데요?”

“장 박사님 있잖습니까?”

“장 박사님이 유명하긴 하지만 진취적 성향의 아버지 회사와는 거리가 있어요.”

“그렇다면 조수황 교수님이 딱이겠네요. 광희한방대학병원 침구과장님이시고 굉장히 활동적이십니다.”

“전해드릴 게요.”

“제가 추천했다고는 말하지 마세요.”

“왜요? 대통령 주치의가 되실 분이...”

“어, 그것도 알아요?”

“왜 이러세요? SN 대표 자리는 게임 레벨 올리듯 얻는 건 줄 아세요? 세상 돌아가는 걸 알아야 컨셉을 잡을 수 있다고요.”

“으음... 조심해야겠군요.”

“뭘요?”

“잠자리, 화장실... 혼자 있을 때 코 후비는 거 같은 것도 다 알고 계실까봐...”

“푸훗, 관음증 같은 건 좋아하지 않거든요.”

“하핫, 조크였습니다.”

“하실 거예요?”

부용이 시선을 가다듬으며 물었다.

“뭘요?”

“대통령 주치의.”

“글쎄요, 워낙 전격적인 제의라서... 하지말까요?”

“네!”

부용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그 말에 놀란 윤도가 고개를 들었다.

“제 생각이에요. 결정이야 선생님이 하실 거잖아요.”

“하지 말라는 이유가 뭐죠? 설득력이 있으면 따를 게요. 아직 결정된 건 아니고... 사실 잡음도 좀 있는 모양이고...”

“잡음이야 당연히 있기 마련이죠. 그건 각오하셔야 해요.”

“당연히라고요?”

“우리 연예계만 해도 신인이 빅히트를 치면서 등장하면 온갖 루머와 악플이 뜯어먹을 듯 달려들어요. 정상급 연예인이 다시 정상에 서는 것과는 아주 다르죠. 사람 사는 거야 어디든 똑 같을 테니 한의계라고 다를 거 없잖아요? 게다가 선생님은 아직 어리고요.”

“그렇군요.”

“이유를 말하라하시니... 제가 볼 때 선생님은 이제 시작이거든요. 우리 애들로 치면 굉장한 재능을 지닌 가수가 이제 막 조명을 받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한 쪽 발을 잡히는 거에요. 그럼 굉장한 제약이 있지 않겠어요?”

“......!”

부용의 빗댄 설명에 윤도 머리가 밝아졌다.

대통령 주치의.

의사건 한의사건 최고의 영예에 속한다. 그러나 제약이 있었다. 주치의는 영광만 누리는 게 아니다. 대통령의 건강을 돌봐야한다. 때로는 외국순방에도 동행해야한다.

그 스케줄은 윤도가 짜는 게 아니다. 그건 부용과 맺은 계약, TS전자의 의무실장이 되는 것과 차원이 달랐다. 이쪽은 윤도의 스케줄을 우선시해주만 대통령 주치의는 그 반대였다.

“설득력 있네요.”

윤도가 대답했다. 장침에만 골똘하다보니 미처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역시 부용의 눈은 달랐다.

“이제 또 다른 신약에 도전하신다고요?”

“네.”

“선생님은 하실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건강은 챙겨가면서 일하세요. 제가 아프면 선생님이 치료할 수 있지만 선생님이 아프면 침을 놔줄 사람이 없잖아요.”

“요즘 같아서는 아플 시간도 없답니다.”

“가보세요. 광희병원 가야한다면서요.”

부용이 먼저 일어섰다. 윤도의 부담을 없애주려는 배려였다. 윤도가 그녀를 당겨 키스를 했다.

“그거 알아요?”

윤도가 물었다.

“뭐요?”

“아픈 데를 낫게 하는데 꼭 한의사나 의사일 필요는 없어요.”

그 말과 함께 다시 한 번 키스가 오갔다. 그녀는 윤도가 말하는 의미를 알았을까? 실제로도 피로가 쫙 풀린 윤도가 스포츠카에 올랐다.

“여보세요.”

시동을 걸며 통화버튼을 눌렀다. 청와대 비서관이 나왔다. 그에게 의사를 전했다. 주치의 고사였다.

“생각해 봤는데 주치의를 하기에는 제가 너무 일천해서 말입니다. 일이 너무 진행되어 곤란하시면 자문의 정도로 위촉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윤도가 의사를 전했다. 부드럽지만 명쾌한 목소리였다.

‘뉴 잉글랜드 저널 오브 메디슨’

‘뉴 잉글랜드 저널 오브 메디슨’.

딸깍!

광희한방대학병원 세미나실 문이 열렸다.

“들어오세요. 다들 와계세요.”

윤도를 맞이한 건 안미란이었다. 그녀는 현관까지 나와 있었다.

“죄송합니다. 늦었습니다.”

윤도가 착석자들을 향해 인사를 했다. 안에는 두 사람이 앉아있었다.

광희한방대학병원 침구과장 조수황.

광희한방대학병원 레지던트 송재균.

여기에 윤도가 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들의 모임은 이제 세 번째였다. 처음, 윤도가 치매 신약 개발을 생각했을 때 윤도는 SS병원의 부원장의 제의를 받고 있었다. SS병원의 치매 환자 몇에게 침술 공동치료를 부탁한다는 말이었다. 그때 신경정신과장을 소개받은 자리에서 윤도는 치매치료 논문에 대한 결심을 굳혔다. 신경정신과장이 보여준 해외논문 때문이었다.

대한민국의 의술.

기가 막히게 발전했다. 하지만 학술분야에서는 그렇게 현격한 진격을 이루지 못했다. 사이언스나 네이처급에 발표되는 논문은 여전히 적었던 것이다.

“채 선생님 정도 되면 당연히 도전해 봐야 하는 거 아닙니까? 이 정도 치료효과라면 당연히 최고 수준의 학술지에도 실릴 수 있을 겁니다.”

신경정신과장의 응원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길로 조수황 과장에게 전화를 걸어 협조를 부탁했다. 조수황은 ‘닥치고 OK’였다.

논문...

할 일이 많았다. 쓰는 원칙도 있었다. 노하우는 조수황 과장에게 들었다. 그는 이미 공진단과 침술복합치료가 뇌신경전달물질에 기여하는 효과로 해외 저널에서 주목을 받은 바가 있었다.

그는 실험을 통해 공진단 복용그룹과 비복용그룹으로 나누었다. 그 두 그룹을 다시 시침그룹과 비시침그룹으로 구분한다. 그런 후에 스트레스 저항력과 세로토닌 분비량, 스트레스 호르몬 분비의 차이를 비교분석하였다. 거기서 도출된 결과를 토대로 논문을 작성해 개가를 올렸다. 논문은 한약의 피로해소 효과와 침술의 시너지 효과 기전을 과학적으로 밝혔다는 점을 평가 받았다.

윤도의 목적도 자명했다.

치매...

윤도의 장침은 치매를 치료할 수 있었다. 특별한 케이스만 아니면 문제가 없었다. 그저 시간과 치료횟수의 문제일 뿐이었다. 하지만 기혈이 어쩌고, 음양조화가 저쩌고 하는 건 과학적인 인정이 쉽지 않았다. 그렇기에 약침을 더해 침술의 효과를 증명하려는 생각이었다.

장침군.

장침+약침1군

장침+약침2군

남자.

여자.

알츠하이머형 치매군.

혈관성 치매군.

알코올성 치매군.

루이체 치매군.

케이스도 세분화했다. 이는 기 발표된 논문을 참고한 결정이었다. 기존의 치료는 백회혈과 사신총혈, 신정혈, 태계, 족삼리, 수구, 신수, 수삼리, 태충혈 등이 많이 쓰였다.

이 결과에서도 혈관성 치매에 침치료가 효과적이라는 게 엿보였다. 하지만 논문의 질은 높이 평가 받지 못했다. 한의학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게 원인으로 보였다.

그렇기에 윤도는 다양한 케이스와 함께 환자의 수를 늘이기로 했다. 다행히 치매 환자는 많았다. 더 다양한 케이스를 위해 SS병원과 JJ병원의 지원도 받고 있었다. 양병원 공히 양방으로 치료가 더딘 환자를 윤도에게 부탁한 것이다. 그 시침결과에 대한 자료는 물론 윤도의 것이었다.

<타우 단백질>

윤도가 정한 아이템이었다. 단백질이 치매에 관여한다는 연구는 꾸준히 나오고 있었다. 뇌에서 인지기능을 담당하는 해마의 신경세포의 사멸을 유도하는 단백질도 발견되었고 마취가 뇌 영역 내의 타우 단백질의 과인산화를 유발한다는 규명도 나왔다.

타우 단백질은 알츠하이머 및 일부 신경퇴행성질환에 연결된다. 이 타우 단백질이 잘못되어 접히는 구조가 될 때 알츠하이머 치매를 유발한다.

양방에서는 뇌 표면 단백질인 베타 아밀로이드와 타우 단백질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다. 치매 초기에는 베타 아밀로이드 플라크가 증가하지만 정작 치매 증상을 촉발하는 건 타우 단백질의 접힘의 증폭이라는 연구까지 나온 상황이었다.

타우 단백질이 중요한 건 치매의 진행양상 때문이었다. 이 단백질의 뒤엉킴이 측두엽과 두정엽으로 번지기 시작하면 인지기능의 강철벽이 무너진다. 결론적으로 타우 단백질 뒤엉킴의 확산정도를 측정하면 치매 진행의 예측이 가능했다.

윤도의 기준으로는 뒤엉킴의 원상복구를 노렸다. 동시에 알츠하이머 치매환자의 뇌에서 과잉생성되는 가바(중추신경계에서 생기는 전달물질)의 양을 줄이는 과정을 증명하려는 의도였다.

두 가지 의도는 이미 시침에서 확인을 했다. 몇 몇 환자의 케이스를 토대로 양방의 검사법을 통해 자료를 뽑아낸 윤도였다.

그러나 권위있는 학술지에 실리려면 몇 케이스만으로는 불가능했다. 그렇기에 다양한 케이스가 필요했다. 침과 약침을 동시에 시도하는 건 한의학에 대한 관심유도에 더불어 신약의 효과입증에 대한 측면의 고려되었다. 따로 떼어 하는 것보다 한꺼번에 하는 게 효율적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어때?”

조수황이 지금까지의 성과를 물었다.

“잘 되고 있습니다.”

“SS 병원과 JJ 병원에서도 공동진행을 한다고 했지?”

“예, 과장님.”

“채 선생 덕분에 한의학의 위상이 많이 높아졌군. 전 같으면 그런 병원에서 받아들일 리가 없는데...”

“잘 해서 서로에게 윈윈이 되는 일이라는 걸 보여주겠습니다.”

“기대가 크네.”

“예.”

“그럼 시작하시게. 필요한 거 있으면 연락하고.”

조수황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오늘 윤도를 기다리는 치매 환자는 모두 여섯이었다. 알츠하이머 치매와 혈관성 치매, 알코올성 치매 환자가 고루 섞였다.

“선생님.”

복도를 걸으며 안미란이 입을 열었다.

“아, 저번에 한의원 다녀가셨다면서요?”

윤도가 먼저 자수를 했다. 안미란은 약속을 지켰다. 윤도에게 배우고 싶던 침법이 있었다. 하지만 윤도가 바빴기에 자리에 없었다. 눈치 빠른 안미란은 지나다 들린 것처럼 말하고 다음을 기약했다.

“괜히 선생님께 부담 드려 죄송해요.”

“아닙니다. 미리 연락하고 왔으면 기다렸을 건데...”

“그래도 다시 선생님 침술을 보게 되어서 너무 좋아요. 저 어제 밤잠도 못 잔 거 모르시죠?”

“에, 설마?”

“어머, 진짜예요. 송 선생님에게 물어보세요.”“그래, 그때 와서 뭐 물어보려고 했던 건데요?”

“지금 말해도 되요?”

“당연하죠. 바쁠 때는 시간과 장소 가리면 안 돼요.”

“득기(得氣)와 소산화법(燒山火法)요. 그거 머리에만 있지 침 놓을 때는 가출하고 없어요.”

안미란이 울상을 지었다. 윤도가 웃었다.

소산화법.

예정한 침의 깊이를 천부, 중부, 심부의 세 마디로 나누어 각 마디마다 빠르게 들어 올리고 아래로 누르는 과정을 9회 반복하는 것이다. 이론상 9회지만 환자의 질환에 따라 적당히 가감하면 된다, 하지만 말이 그렇지 몸 안으로 들어가는 침을 감으로 세 부분으로 나누는 것도 어렵고 환부 안에서 올리고 누르는 것도 어려웠다. 자칫하면 엉거주춤 흉내만 내다 마는 것이니 아니함만 못할 수도 있었다.

득기는 더 어려웠다. 이는 침이 들어갈 때 환자의 느낌을 조절하는 침법이었다. 노련한 침술이라면 침이 혈자리에서 감기는 느낌을 받는다.

콱!

조이는 손가락 맛이다.

여간 집중하지 않고는 깨달을 수 없는 침법이었다.

“오늘 한 번 해보죠, 뭐.”

윤도가 안미란을 위로했다.

“정말요?”

“대신 재미에 빠져서 밤 새워도 난 모릅니다.”

“그건 문제없어요. 잠이야 내일 자면 되니까요.”

안미란이 화답했다. 그녀의 열정은 아직도 식지 않은 용광로였다.

이날 윤도는 오직 세 혈자리만을 공략했다. 첫째는 신문혈이었다. 기존의 논문에서 많이 다루지 않은 신문혈. 그러나 그 효용은 명대의 이천이 펴낸 의학입문에 이미 설파되고 있었다.

<노궁은 다섯 가지 간질을 치료하고 신문은 치매를 치료한다.>

남이 안 쓰는 혈자리로 이루려는 공명심이 아니었다. 다양한 루트를 뚫어서 침술에 기여하려는 생각의 소산이었다. 두 번째 선택은 역시 백회혈과 사신총이었고 세 번째는 태계혈을 꼽았다. 다만 한 환자의 경우에는 뒷목의 대추혈을 이용했다. 거기서 망침을 넣어 뇌 안에서 막힌 작은 혈관들을 뚫었다.

망침은 모두 네 개가 드나들었다. 나노 침도 두 개가 보태졌다. 혈관성 치매를 위한 시침이었다. 뇌로 가는 혈관에 약침을 넣고 기다리기에는 상황이 나빴다. 막힌 길은 오래지 않아 뚫렸다. 환자는 아들을 알아볼 정도로 좋아졌다. 지켜보던 안미란은 기절 직전에 겨우 숨을 골랐다.

남은 환자는 두 그룹으로 나뉘어 자침을 계속했다. 정도가 약간 경한 그룹에는 순수 장침만 사용했고 증세가 심한 경우에는 약침을 넣었다. 시침 전후의 채혈과 관련 호르몬 검사는 안미란이 맡아주기로 되었다.

“안 선생님.”마지막 환자에서 윤도가 찡긋 눈짓을 했다. 혈자리가 괜찮은 환자였다. 윤도가 먼저 침을 넣었다. 신문혈이었다. 그녀를 위해 천천히, 시범조교처럼 소산화법을 선보였다. 침은 혈자리로 들어가다 세 번을 멈췄다. 그 세 번마다 침이 움직였다.

올라오고,

내려갔다.

아홉 번이 물결처럼 한 손동작이었다. 안미란의 동영상은 침을 따라 돌아갔다. 백회혈까지 찌른 윤도가 태계혈의 시침을 안미란에게 넘겼다.

‘저요?’

안미란의 눈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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