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신 우리 아버지가 장의사였어요.”
할머니의 시선이 창 밖으로 날아갔다. 장의사. 괜히 솜털이 송연해졌다. 창 위에 그녀의 아버지가 관을 메고 와 있기라도 한 걸까?
“가난한 우리 아버지, 허리가 부러져 앓다가 돌아가셨는데 열흘 동안 아무 것도 먹지 않고 몸을 비웠어요. 집안에 염습할 돈도 없고 명색이 장의사니 누구 염습 받을 일 없이 그대로 묻으라는 뜻이었지요. 그렇게 하면 죽어도 치울 대소변이 나오지 않아 그냥 관 뚜껑만 닫으면 되거든요.”
“할머니...”
“아버지가 그래요, 짐승도 제 죽을 때를 알아 죽을 자리를 찾아가는데 인간만은 헛된 욕망으로 살려고 바둥거리다가 비참하게 죽는 사람이 많다고... 때가 되면 스스로 질 줄 아는 사람이 사람 자격이 있는 거라고 말이에요.”
“......”
“우리 아이들... 굉장히 가난해요. 그런 아이들에게 오랫동안 짐이 될 수 없어요. 아이들 마음이 애틋할 때 떠나주는 게 부모된 도리지요. 게다가 나는 살만큼 살았어요. 여기서... 이런 목숨으로 연명하는 게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
이런 목숨으로 연명하는 게 의미가 있어요?
어려운 질문이었다.
윤도의 몸은 완벽하게 얼어붙고 말았다. 조용하지만 설득력이 강한 할머니의 말. 그건 마치 하늘의 속삭임처럼도 들렸다.
“의미 없어요. 나도 망치고 아들도 망치는 일이에요. 그래서 지금 내 아버지처럼 스스로 염습을 하고 있는 중이에요. 내 생각에는 내일 쯤이면 끝날 걸로 생각해요.”
“......”
내일 쯤...
할머니의 말이 윤도의 진료와 일치했다. 그녀는, 그녀의 운명을 알고 있었다. 아니, 그녀 자신이 만들어가는 운명이었다.
“우리 아버지, 늘 그러셨어요. 진짜로 생을 아는 사람이라면 사후 장례가 아니라 생전 장례를 치루는 게 현명하다고 말이에요. 그래서 고운 옷도 갖춰 입었어요. 아들이 사다준 옷인데 새 거예요. 이 옷을 입으니 아들들이 좋아해요. 저렇게들 좋아할 줄 알면 진작 입어주는 건데...”
‘생전 장례...’
“그러니 정 침을 놓고 싶다면, 그래야 우리 아들들이 행복하다면, 내 목숨이 질기지 않게 웃으며 죽을 수 있는 침으로 부탁해요. 찡그리고 죽으면 아들들이 슬퍼하지 않겠어요?”
“할머니...”
“한의사 선생이 내 첫 하객이에요. 축의금 대신 그렇게 해줘요.”
할머니 말의 끝이었다. 더는 말하지 않았다. 우묵하게 깊은 눈빛만 아득할 뿐이었다. 이미 마음의 결단을 내린 사람이었다. 이때만은 할머니 홀로 숭고했다. 윤도의 장침이 아니었다.
파르르.
침 든 손이 떨렸다. 침 몇 개가 할머니의 몸으로 들어갔다. 원래 생각한 침이 아니었다. 마음을 편안하게 달래는 혈자리였다. 그것 외에는 자침하지 않았다. 할머니의 말에 홀린 윤도, 예의를 지키고 싶었다.
신침은 지적 장애인에게 집중되었다. 대저혈과 견우혈을 시작으로 내관혈과 대능혈까지 10개의 장침을 넣었다. 대미는 백회혈에서 장식했다.
“한의사 양반.”
장애인에게서 발침을 하자 할머니가 윤도를 불렀다.
“네?”
“고마워요.”
할머니... 윤도의 침을 알고 있었다. 그녀의 뜻에 따라준 침이라는 거. 어쩌면 할머니야 말로 신침인지도 몰랐다.
“우와.”
시침이 끝나자 쌍둥이가 탄성을 질렀다. 지적 장애인 때문이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생기가 가득했다. 웅얼거리던 목소리도 확연한 차도가 보였다. 그렇기에 어머니에 대한 기대감도 함께 차올랐다.
“저희 어머니 어떠세요? 심각한 병이 있는 건 아니죠?”
복도로 나오자 쌍둥이 중의 하나가 따라 나왔다.
“예. 하지만 몸이 워낙 다운되어서 오래 견디지는 못할 거 같습니다.”
“......”
“오늘 특별히 잘 보살펴 드리고 가세요.”
특별히.
그 말만은 강조하고 돌아섰다.
늘 살리는 것에 익숙했던 장침이 처음으로 살지 않으려는 환자를 만났다. 스스로 염습을 마치고 생전 장례를 치루고 있는 할머니...
자신의 꽃 질 날을 스스로 알고 있는 할머니...
비장하지만, 인간의 위대함을 새삼 엿볼 수 있는 날이었다.
글로벌 인재의 거궐혈에 장침을 꽂아라-1
글로벌 인재의 거궐혈에 장침을 꽂아라-1
“채 실장.”
TS전자 본사 앞에서 김 전무가 소리를 높였다. 오랜만에 오는 TS전자 의무실이었다. 정기 진료일은 아니었지만 시간을 내달라는 요청을 받은 윤도였다.
“갑자기 호출을 해서 미안하네.”
“괜찮습니다만 한 번 오신다더니 왜 안 오셨습니까?”
차에서 내린 윤도가 물었다.
“그게... 요즘 워낙 할 일이 밀려서 말일세.”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는 건강입니다.”
“그거야 누가 모르나. 살다보면 마음대로 안 되는 일이 많은 거지.”
“아무튼 오늘은 여기서라도 치료를 받으세요.”
“오늘 핵심은 내가 아닌데?”
“전무님.”
“아, 알았네. 일단 회장님이 기다리시니 들어가세나.”
김 전무가 입구를 가리켰다. 윤도가 키를 눌러 자동차 문을 잠궜다. 순간, 끝 열의 자동차가 눈에 들어왔다. 그 앞에 선 여자 때문이었다. 청바지에 면티를 당겨 입은 여자. 한국 사람이 아니었다. 척 봐도 굉장한 미인인데 입술 염증에 피부가 건조해보였다.
‘화장 컨셉인가?’
보기에는 건강의 이상 현상 같지만 낯선 여자를 잡고 진맥을 볼 수도 없는 일. 윤도는 김 전무의 뒤를 따랐다.
“어익후, 채 실장.”
회장실에서 자료를 보던 이 회장이 윤도를 반겼다.
“앉으시게. 요즘 활약이 대단하더군.”
“별 말씀을... 치아는 잘 났습니까?”
자리에 앉으며 윤도가 물었다.
“그렇잖아도 이제나 저제나 채 실장이 올 날만 꼽고 있었다네. 보시겠나?”
이 회장이 입을 벌려보였다. 입 속이 꽉 차 있었다. 새로 난 이빨이 제대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제대로 났군요.”
“그렇다마다. 내 치과주치의가 보더니 바로 기절해버렸다네.”
“그래요?”
“처음에는 다른 데서 임플란트를 한 줄 알더군. 해서 치조골이 부실한데 성급한 일을 벌였다며 이런 몰상식한 치료를 한 치과의사가 누구냐고 흥분을 하더니만 임플란트가 아니라 자연 치아인 걸 알고는 꽈당...”
“기분 좋으셨겠군요?”
“그렇다마다. 우리 치과의사가 무슨 약을 먹은 건지 알고 싶어서 난리였네. 채 실장 얘기를 했더니 나중에 자기 좀 소개시켜 달라더군.”
“네...”
“아무튼 요즘은 살 맛이 나요. 외국 가서 만찬초대를 받아도 겁이 안 나고... 어제는 십수 년 만에 양갈비도 뜯었다네.”
“잘 됐군요.”
“다 채 실장 덕분이야. 이거 이빨 없어본 적 없는 사람은 절대 모를 심정이라고.”
“예...”
“이거 사설이 길었군. 채 실장이야 하는 일마다 화제가 되는 사람인데...”
“별 말씀을...”
“아니야. 신약개발 그거 나도 정보를 받았는데 굉장한 개가였더군. 더구나 깐깐하기로 소문난 바이마크사에서의 호평이라니... 게다가 국보급 고미술품의 반환 역시 그 못지 않은 개가였고.”
“다 부용 씨 덕분입니다."
“우리 부용이?”
“신약개발도 그렇고 고미술품 역시 부용 씨가 데리고 있는 아이돌 가수의 할아버지였거든요. 그렇게 연결이 되지 않았다면 제 장침도 소용없었을 일입니다.”
“하긴 그 녀석이 다시 살아난 후로 열심히 살고 있기는 하지. 최근에는 미국으로, 중국으로, 독일로 정신없이 뛰어다니던데...”
“어디 다른데 불편하지는 않습니까?”
“한 군데 있기는 하네만.”
“진맥을 좀 보겠습니다.”
“보여드리게.”
윤도의 말에 이 회장, 생뚱맞게 김 전무를 바라보았다. 지시를 받은 김 전무가 PDA화면을 열었다. 화면에 복잡한 프로그램이 올라왔다.
“회장님.”
“5G라고 들어봤지?”
“5세대 이동통신 말입니까?”
“아는군. 거기 나오는 건 5G 다음을 겨냥한 6G 이동통신 기본 알고리즘이라네.”
‘6세대?’
윤도의 촉각이 곤두섰다. 이제 5G가 시작되는 즈음, 그런데 벌써 6G로 질러가고 있다니...
“아시다시피 통신시장이 별들의 전쟁이라네. 이제는 시간 싸움이지. 아차하는 순간 바로 2류나 3류가 되어버린다네.”
“......”
“그러다 보니 가장 중요한 게 핵심 인력이라네. 기술개발을 주도할 글로벌 인재 말일세.”
이 회장의 말은 자꾸 엇나가고 있었다. 윤도가 원한 건 진맥이었는데 미래 기술개발이라니. 하지만 이 회장은 애당초 작심한 듯 분명하게 강조를 하고 나왔다.
“이 6G 진맥이 필요하네만.”
“회장님.”
“설명은 내가 하지.”
옆에 있던 김 전무가 화면을 넘겼다.
그러자 30대 초반의 흑인 남자 사진이 나왔다.
“이름은 보로브요프 스떼빤, 스탠포드 대학을 중퇴하고 실리콘밸리에 들어가 판을 뒤집어버린 미국공학의 신세대 아이콘이지. 러시아인 아버지와 유태계 미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사고방식도 유연하고 일본만화광인 사람. 우리 TS가 스카웃하려고 공을 들이는 친구인데 아무래도 중국 쪽 배팅에 솔깃해진 모양이야. 워낙 중국 음식을 좋아하는 데다 결혼을 앞둔 여자친구까지 중국 사람이라...”
“......”
“중국은 지금 모든 기술과 산업분야에서 축지법이라도 쓰듯 속도를 내고 있다네. 10여 년 후에 미국을 앞질러 AI분야 1등 국가로 우뚝 서겠다는 인공지능 개발계획까지 발표했지.”
‘미국을 제치고?’
“스떼빤은 차세대 통신기술 리더로 꼽히는 사람이네. 또 하나의 스티브 잡스라고 할까? 지금 강연자로 초빙되어와 사내 연구실에서 강연을 하고 있네. 여자친구 역시 공학자 출신이라 같이 와 있는데... 아마 강연이 끝나면 중국으로 날아갈 눈치야. 그렇게 되면 영영 기회를 놓칠 것 같아 최후의 SOS를 보낸 거라네.”
김 전무가 창밖을 가리켰다. 여자가 한 명 보였다. 조금 전 지나친 그 여자였다.
“그러니까 그 공학자 진맥을 보라는 거군요? 지병이라도 있나?”
“연구 때문인지 항문질환이 있고 손목에도 애로가 있다는 정보를 받았네. 해서 채 실장이 그걸 고쳐주면 한 번 대시해볼 기회가 오지 않을까 싶어서...”
“다른 중병은 없다는 거로군요?”
“우리가 알기로는 그렇네. 채 실장처럼 출중한 명의가 있으니 좀 심각한 병이라도 있어서 덜컥 고쳐주면 얘기가 다를 수도 있겠지만... 예를 들어 우리 회장님처럼...”
김 전무가 말을 아꼈다.
“심장의 궁궐로 불리는 거궐혈이라도 한 번 찔러볼까요? 마음이 열릴 지도 모르니...”
“하핫, 그래주면 좋겠네.”
“김 전무도 마음이 급하군. 그냥 채 실장에게 맡기세. 의도가 들어가면 채 실장이 부담스러울 수도 있으니.”
이 회장이 나서 상황정리를 했다.
팩트는 글로벌 공학자 스카우트.
그의 환심을 사기 위해 윤도를 불렀다. 고질병을 고쳐주면 마음이 바뀔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나 잘 되자고 남의 불행을 바라지는 않는 마음이 엿보여 좋았다.
“강연은 언제 끝나죠?”
“두 시간 정도 걸릴 것 같네. 스떼빤에게 부탁한 이론이 좀 많아서 말이야.”
“그럼 막간에 전에 말씀하신 직원분들 진료를 해도 되겠습니까?”
“그래주면 좋지.”
김 전무가 웃었다.
하지만 윤도의 첫 침은 김 전무에게 들어갔다. 의무실에 들어서기 무섭게 김 전무부터 침대에 앉힌 것이다.
“미안하지만 더 지체할 사안이 아닙니다.”
윤도의 말은 단호했다.
“채 실장...”
“그냥 두면 실명입니다. 아니, 지금도 실명에 가깝지만요.”
“하지만 안과에서...”
“이미 늦었다고 했겠죠?”
“그렇다네.”
“회장님의 이빨은 늦은 거 아니었나요? 부용 씨의 정신질환은요?”
“......”
“더 늦기 전에 누우시죠. 회장님께는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환자의 정보는 공개하지 않는 게 원칙이니까요.”
윤도가 김 전무 상체를 살짝 밀었다. 그는 그대로 침대에 눕고 말았다. 김 전무의 질환은 눈 중풍으로 불리는 망막혈관폐쇄증이었다. 닥터 손석구의 경우와 유사했다. 미리 준비를 마치고 왔기에 바로 시침에 들어갔다. 오장직자침에 더불어 약침이었다.
20분.
타이머를 세팅하고 첫 환자를 맞았다. 김 전무가 말하던 그 직원이었다. 그가 아내를 데리고 들어왔다. 아내는 갓난아기를 안고 있었다. 잘 되어야 2개월 미만이었다. 남직원의 고민은 아내의 젖이었다. 모유수유를 원하지만 잘 나오지 않았다. 게다가 통증까지 있었다.
“채 선생님...”
아내는 윤도를 알고 있었다. 인터넷과 방송으로 여러 번 보았다고 했다. 어릴 때, 그녀는 분유로 자랐다. 어머니에게 병이 있는 까닭이었다. 자라면서 골골 잔병치레가 잦았다. 그 원인이 모유부족에서 온 걸로 생각하는 여자였다. 그렇기에 아기에게는 모유를 먹이고 싶어했다.
아기를 남직원에게 맡기고 서둘러 진맥을 했다.
“어때요? 병원에서는 큰 병은 없다고 하던데 제가 워낙 건강체질이 아니라서...”
아내가 조심스레 물었다.
“위장경락과 간장경락이 좋지 않네요. 그래서 유두의 구멍이 막히면서 멍울이 되었습니다. 간간이 오한에 열도 났을 것 같은데 그렇다보니 젖도 잘 안 나오고 아프기도 상태입니다.”
“맞아요. 열도 가끔... 이제 어떻게 하죠? 침으로는 안 되나요?”
“아닙니다. 가능합니다.”
윤도가 장침을 뽑았다. 남편이 나가려하자 윤도가 그를 불러세웠다.
“남편 분도 치료에 동참해야 하니까 잠깐 거기서 기다리세요.”
“예.”
남편은 윤도의 지시에 따랐다.
장침이 혈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수삼리혈에 양로혈을 짝 지었다. 옹(癰)에 특효를 보이는 혈이었다. 다음으로 몇 가지 혈자리를 더 잡았다. 단중혈과, 소택혈, 양지와 유근혈이 그것이었다. 유근혈에는 화침으로 넣었다.
마지막은 위장경락과 간장경락의 포인트였다.
15분 세팅.
그 사이에 옆 방 김 전무의 침대로 가서 침을 뽑아주었다.
“보이세요?”
시침을 받은 반대편 눈을 감게 하고 책을 대주었다.
“채 선생...”
“이번에는 운이 좋았습니다. 하지만 다음에도 늦으면 저도 장담 못합니다.”
“채 선생...”
김 전무를 책을 잡은 채 경련했다. 거의 보이지 않던 글자가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때 윤도는 사라지고 없었다. 윤도는 다시 모유 수유를 원하는 산모 앞이었다.
“제 치료는 끝났습니다. 이제 남편 차례십니다. 아기는 간호사에게 잠시 맡겨두세요.”
윤도가 남직원에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