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0화 (150/265)

“......!”

미나토의 안색이 변했다. 힘들어지는 것이다.

“조금 참으세요. 피부암으로 가는 기혈 통로를 막았습니다. 아까 충격요법이 필요하다고 했었죠? 말하자면 기의 재세팅입니다.”

“으으...”

“조금만...”

윤도는 기의 흐름에 집중했다. 세 장부의 혈자리를 막자 오장육부가 허덕이기 시작했다. 피부암으로 가는 기혈은 서서히 끊겼다.

‘이제 슬슬 시작해볼까?’

윤도가 사를 멈추고 보를 시작했다. 침끝 방향을 일제히 시계방향으로 감은 것이다. 이제 닫힌 기혈이 경락을 타고 흐르면 본격 약침이 들어갈 판이었다. 신장과 심장의 기력만 남겨두고 총력전이 펼쳐지는 것이다.

그런데...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침을 감았지만 닫힌 기혈이 열리지 않았다.

“......?”

윤도의 등골에 오싹한 냉기가 맺혀왔다. 문제가 있었다. 게다가 긴급 상황이었다. 환자는 극악 피부암으로 생존예정일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 이런 상태가 지속되면 여기서 사망할 수도 있었다.

‘이런...’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비 오늘 날, 침의 부작용은 아니었다. 노령에 허약체질이지만 그 정도 감당 못할 윤도의 신침이 아니었다. 게다가 축빈혈에서 방사능도 어느 정도 걷어낸 상황. 그런데... 그런데 왜?

다시 보를 시도했다. 기혈의 문을 열어야했다. 하지만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는 혈자리들... 결국에는 침끝이 약간 뒤틀리면서 절침까지 나왔다.

툭.

소리와 함께 윤도의 정신줄이 아득하게 멀어졌다. 이렇게 되니 웅황이 아쉬워졌다. 그 약침을 주요 경혈에 꽂으면 어땠을까? 급한 마음에 구급혈인 용천혈을, 백회혈을 바라보게 되었다.

일단 미나토를 깨울까? 아니야, 그건 이 치료에 두 손을 드는 것과 같아. 이제 겨우 시작인데...

윤도의 의식이 상념 속에서 뒤섞였다. 아찔하다. 마치 거꾸로 물구나무를 선 것 같았다.

‘물구나무?’

거기서 어지럽던 머리가 잠시 맑아졌다.

물구나무...

거꾸로 서는 상태다. 다시 말하면 역순이었다.

‘어쩌면...’

윤도가 장침 두 개를 뽑아들었다. 그 침은 간수혈과 기문혈로 들어갔다.

‘윽.’

윤도가 주춤거렸다. 이번에는 경악이 아니라 경탄이었다. 윤도의 짐작이 맞았다. 방사능보다 꼬인 게 있었다. 바로 경락의 역주행이었다.

순행.

혈은 경락을 따라간다. 이게 인체의 기본이다. 그러나 세상에 변하지 않는 건 없다. 산천도 변하고 거목도 변한다. 그렇기에 사람에 따라 경락이 역주행하는 경우가 있었다. 미나토의 케이스라면 신장에서 대장, 대장에서 폐로 들어간 사기가 피부암을 주도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역주행이었다. 신장과 대장에서 폐를 공략한 게 아니라 간에서 폐를 범한 것이다. 그런 차에 기혈을 막았으니 제대로 꼬여버린 상황이었다.

서둘러 간수혈과 기문혈을 자극했다. 혈자리마다 삼향자침으로 세 개씩의 장침을 꽂았다. 처음처럼, 여는 게 아니라 막는 장침이었다.

‘제발...’

마지막 기혈까지 막는 손이 떨렸다. 자칫 마지막 실오라기까지 막히면 영영 사그라질 목숨이었다.

기의 결이 침 끝에 왔다. 그 한 가닥 한 가닥을 세며 조절을 했다. 그리고... 마지막 서너 가닥이 남았다고 느꼈을 때, 폐의 기가 간경에서 최고의 정체를 보일 때, 비로소 Off에서 On으로 침끝을 돌렸다.

방향전환.

단숨이었다.

‘움직인다.’

윤도는 숨도 쉬지 않은 채 기의 흐름을 집중했다. 간을 돌아나간 기가 신장, 대장을 거쳐 폐로 들어갔다. 거기서 기의 흐름을 잡았다. 신장에서 세워, 원래의 흐름대로 바꾼 것이다. 방사능 피폭으로 오랫동안 뒤틀린 수로에 서서히 기혈이 차기 시작했다. 그렇게 세력을 이룬 기가 이제는 순행으로 경락을 따라 흘렀다. 신장에서 비장으로, 대장에서 폐로 가는 흐름이었다.

‘좋았어.’

후끈 달아오른 윤도. 백회혈에 장침 하나를 넣었다. 미나토는 서서히 눈을 떴다. 그의 눈에 심혈을 기울이는 윤도가 들어왔다. 그는 기절해 있던 것을 몰랐다. 그가 느끼는 건 단지 청량감이었다. 피부 곳곳에 달라붙었던 칙칙하고 음산한 죽음의 그림자. 그 그림자의 무게가 가벼워지고 있었다.

합곡과 삼음교혈에 들어간 장침을 끝으로 시침이 끝났다. 곳곳의 포인트마다 약침이 들어갔다. 약쑥을 쓴 곳도 있고 적유의 농축액을 쓴 곳도 있었다. 나머지는 신선초의 농축액이었다.

일대 위기.

그러나 나중에는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다. 윤도가 의도하던, 최후의 정기만 남겨둔 총력전이 위기 대처와 함께 해결된 것이다.

피부암이 시드는 게 보였다. 기저암세포의 상흔에서 악성의 느낌이 사라지고 결절도 조금씩 줄어들었다. 동시에 껍질이 단단해진 결절들이 저절로 떨어져나갔다.

‘유후!’

기선제압은 대성공이었다.

신장과 심장의 기혈을 조금 열어두고 시간을 쟀다. 그런 다음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쏴아아!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그 빗속에 미우가 있었다. 노란 우비를 쓴 모습이었다. 고풍스러운 단청의 절에 노란 우비. 도드라진 노랑은 하나의 희망처럼 보였다.

“선생님...”

미우가 다가왔다.

“잘 되고 있습니다.”

대답한 윤도가 빗속으로 나섰다. 쉬임없이 내리지만 빗방울은 굵지 않았다. 걸어서 적송 밑으로 갔다. 비를 따라 번지는 싱싱한 피톤치드 냄새가 좋았다.

“이거...”

미우가 따라와 차를 내밀었다.

“미우...”

차를 받아든 윤도가 말문을 열었다.

“네, 선생님.”

“차 더 있으면 내 차의 아저씨에게도 부탁해요.”

“벌써 챙겨드렸어요.”

“할아버지...”

윤도가 습기 속으로 입김을 뿜으며 말을 이었다.

“성공할 거 같나요?”

“네!”

그녀의 대답은 빨랐다.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죠?”

“제가 이 세상에서 믿는 사람은 두 사람이에요. 할아버지와 이 대표님...”

“......”

“이 대표님이 그러셨거든요. 선생님이라면 저에게 희망을 줄 수 있을 거라고.”

“나는 신이 아니라서 실수도 합니다. 방금도 그랬어요.”

“괜찮아요. 실수는 누구나 하는 거니까요. 저도 맨날 실수투성이인 걸요. 어떨 때는 발음을 틀려서 연습을 다시 할 때도 많아요.”

“아까 할아버지와 한 약속... 어떻게 생각해요?”

“할아버지가 한 일이니까 저는 관여하지 않아요. 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일어난 일들인 걸요.”

“그렇군요.”

“다만 그 물건들이 원래 한국의 것이었다면, 돈으로 사고 팔 가치를 넘는 거라면 돌려주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되면 할아버지가 쓴 비용을 돌려주면 되겠지만 이제는 선생님과의 약속이 되었으니까요.”

“미우.”

“네?”

“할아버지가 미우 노래 좋아해요?”

“그럼요. 가수하라고 밀어준 것도 할아버지였는 걸요. 사실 엄마 아빠는 반대였어요.”

“그럼 노래 불러줄래요? 어쩌면 할아버지의 치료는 이제부터 시작이거든요.”

“할아버지에게 힘이 된다면 얼마든지요.”

미우의 다짐을 들으며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약침을 바꿀 시간이었다.

“내~ 그리움에는 당신의~ 얼굴이 들어있어요.”

마루에서 미우의 노래가 시작되었다. 윤도의 약침도 다시 시작되었다. 다른 한의사라면 꿈 꿀 수 없는 연속 자침. 그러나 윤도의 신침은 그걸 가리지 않았다.

이제는 처음과 달랐다. 장침을 통한 재진맥을 통해 혈자리의 변동을 감안한 자침이었다. 승부수의 관점도 이제 바뀌었다. 기선제압은 성공이었다. 그렇기에 오장의 조화를 함께 고려해 나갔다. 신장에서 원천 기를 살리고 비장에서 후천 원기를 북돋웠다.

비장의 기가 조금 약한 느낌에 은백혈도 잡았다. 엄지발가락의 은백혈 또한 비장 조절의 필수혈이었다. 비장의 기세가 신장과 나란해지자 두 원기가 어울리는 삼초의 상화로 옮겨갔다. 마침내 대거혈이 제자리를 찾았다. 폐에 기가 탱천해졌다는 의미였다.

처음과 달리 더 큰 결절 딱지들이 떨어져나갔다. 얼굴의 기저암세포들 역시 크기가 확 줄었다. 신수혈 덕분이었다. 신수혈의 효과는 전신의 피부에 미친다. 그중에서도 특히 얼굴이 그랬다.

“내~ 그리움에는...”

미우의 노래와 함께 밤이 깊어갔다. 노래는 이제 더 들리지 않았다.

새벽녘, 윤도는 미나토의 목소리에 눈을 떴다. 벽에 기댄 채 졸은 모양이었다.

“채 선생, 채 선생...”

“아, 제가 깜빡...”

“아니오. 하도 곤하게 졸기에 깨우기 싫었는데 몸이...”

“안 좋습니까?”

“그 반대라오. 몸이 근질거려 미치겠는데 이게 좋은 느낌의 근질근질 소양감이라오. 해서 침을 뽑고 아침 바람이라도 좀 쐬었으면 폐가 맑아질 것 같은데...”

“잠깐만요.”

윤도가 피부를 보았다. 더러웠다. 밤새 떨어져나간 딱지와 부산물, 분비물의 흔적 때문이었다. 윤도는 손목부위를 털어내 보았다.

“......?”

윤도 눈이 휘둥그레 변했다. 기저세포암이 줄어들어 있었다. 아까는 진맥조차 못할 정도, 그러나 이제는 진맥 잡을 정도는 되었다.

‘나이쓰.’

쾌재를 부르며 발침을 했다. 남김없이 뽑았다. 그가 일어서자 딱지와 부산물들이 부스스 쏟아졌다. 거짓말 좀 보태서 한 바가지 이상이었다.

외출을 허락했지만 두툼하게 옷을 입혔다. 마스크도 씌웠다. 한기는 언제나 노년을 노린다. 미나토는 적송 아래로 걸어가 심호흡을 했다.

“바로 이거요. 한국의 맑은 공기... 이제야 내 폐가 공기 맛을 아는구려.”

미나토가 숨을 골랐다.

“천천히... 서두르지 마시고요.”

“피부도 그래요. 찜찜한 느낌은 간 곳없고 마냥 시원하군요. 새살이 올라오는 느낌이에요.”

사실, 그 느낌은 틀리지 않았다. 미나토의 살은 쉴 새 없이 새 세포를 밀어내고 있었다. 암의 흔적이 없는 정상적인 세포들이었다.

“할아버지!”

잠이 깬 미우가 마당을 달려오며 소리쳤다.

“와아, 할아버지, 이제는 몬스터 피부가 아니에요. 굉장히 좋아졌어요.”

미우는 미나토의 팔을 잡고 깡총거렸다. 둘 사이로 보이는 적송 틈새로 아침 해가 고개를 내밀었다. 마치 미나토의 몸에 돋는 새살처럼 싱그럽게.

빅 딜-4

빅 딜-4

“......!”

아침, 환하게 내린 햇살이 마루까지 남실거릴 때 미나토가 거울을 보았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이었다. 전면을 비추더니 몸을 뒤틀어 등 쪽도 확인했다. 몸을 굴신할 때마다 딱지들이 우수수 쏟아졌다. 이번에는 손으로 몸을 쓰다듬었다. 살비늘이 먼지처럼 날렸다.

미나토의 손이 파르르 떨었다. 경련은 어깨를 타고 척추로 옮겨갔다.

마호오.

일본어로 마법이다. 그는 그렇게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일본에 흔한 만화 속의 마법처럼 온몸이 깨끗하게 나은 건 아니었다. 아직도 기저세포암과 결절 흔적은 몸에 빼곡했다.

하지만!

어제와 달랐다. 나아가는 것이 확연하게 느껴졌다. 피부에 있던 소양감, 발적감 등이 사라진 것이다. 그저 간지러운 것은 살비늘과 딱지가 떨어진 것 때문. 누가 봐도 피부암의 병세가 잡힌 게 완연했다.

“채 선생님.”

미나토의 목소리는 어제보다 정중해져 있었다. 그는 다 벗은 몸으로 윤도를 향해 허리를 조아렸다.

“옷을 입으시죠. 어르신 나이가 되면 찬바람에 몸을 상하기 쉽습니다.”

윤도가 옷을 권했다.

“고맙습니다. 또 고맙습니다.”

미나토는 몇 번이고 허리를 숙인 후에야 옷을 챙겨 입었다.

“미우, 거기 있느냐?”

미나토가 마루를 향해 말했다.

“네, 할아버지. 이제 들어가도 되요?”

“되지. 그 전에 주지 스님을 모셔오거라.”

“네.”

미우가 달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걸음 또한 어제보다 빠르고 경쾌하다. 미우에게도 신바람이 오른 것이다.

“슈스케 보좌관.”그 사이에 미나토는 일본에 전화를 걸었다.

“미안하지만 약속을 어겨야겠네. 내가 한국에서 신의를 만나 내 모든 것을 내주고 치료를 받았네. 그래... 믿기지 않겠지만 자네를 계속 볼 수 있을 것 같네.”

“미나토 선생.”

통화가 끝나기 무섭게 주지 스님이 달려왔다. 그는 미나토의 오랜 지기였다.

“스님 덕분에 좋은 인연에 닿아 이 미나토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무관세음보살...”

주지 스님 역시 합장을 멈추지 못했다. 불자의 몸으로 여러 기적을 보았던 그였다. 하지만, 맹세코 이 기적은 그의 절에서 일어난 최대의 기적이었다.

“그동안 저 때문에 민폐가 많았죠?”

“무슨 그런 말씀을... 덕분에 우리 부처님을 편안하게 모시고 있습니다.”

주지 스님이 답했다. 미나토가 후원한 절간 보수비를 말하는 것이다.

“아닙니다. 언젠가 스님이 한 말씀하셨지요. 한국의 주요 고미술품만이라도 한국에 기증을 하면 어떻겠냐고?”

“......”

“들으셨는지 모르지만 이 미나토, 기증하기로 했습니다.”

“미나토 선생.”

“스님 덕분에 미력한 미나토가 부처님의 현신을 만났습니다. 여기 채윤도 선생님이 그 현신이지요. 그런데도 욕심을 부여잡고 고집을 부리면 그야말로 팔열지옥에 떨어질 일...”

“미나토 선생...”

“스님에게 신세를 진 마당이니 절에서 공직 기증식을 가져도 되겠습니까?”

“되다마다요, 부처께서 기뻐하실 겁니다.”

“채 선생님.”

미나토의 시선이 윤도에게 향했다.

“예.”

“아는 기자 분이 있다고요? 번거롭지 않게 한 분만 불러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죠.”

윤도가 핸드폰을 꺼냈다. 윤도의 선택은 성수혁 차장이었다.

그는 한 시간 남짓 후에 달려왔다. 카메라 기자와 단 둘이었다.

타칵!

카메라가 돌아갔다. 적송 군락 아래였다. 미나토가 목을 가다듬었다. 옆으로는 윤도와 주지 스님, 미우가 서 있었다.

“여기는 만광사입니다. 보물급 문화재가 있는 유서 깊은 절이죠. 하지만 우리는 근세의 혼란 속에서 많은 유서 깊은 것들을 외국에 강탈 당하거나 유출하고 말았습니다. 국보급으로 평가되는 청자세발향로와 왕실군무도, 문인회합도 등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다행히 한 한의사의 활약으로 국보급이 포함된 고미술품 수십 점이 국민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먼저 일본의 대표적인 고미술가로 꼽히는 미나토 씨를 만나보겠습니다.”

마이크가 미나토에게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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