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 방...’
사실 한의사가 먼저 딜을 해서는 안 될 조건이었다. 하지만 진료를 거부하는 환자다보니 어쩔 수 없는 선택. 일반적인 자침이라면 내관혈을 시작으로 노궁혈, 복류혈, 대돈혈 등으로 들어가면 되었다. 그것도 아니면 신문혈과 합곡, 소해, 간사, 족삼리도 나쁘지 않다. 다른 길로 독맥, 심포경락, 백회와 인당혈에서 승부를 내도 괜찮다.
‘심포경락의 내관혈...’
윤도의 시선이 환자의 몸으로 갔다. 가장 약한 반응을 보인 혈이었다. 하지만 바로 시선을 바꾸었다.
백회혈이었다.
<머리의 백회혈>
윤도의 장침은 환자의 백회혈로 들어갔다. 왜 백회냐? 백가지 혈이 모이므로 백회라고 말했다. 내관에 찌르면 심포경락의 조율에 유리하지만 백회라면 나머지 혈자리까지 조율할 수 있었다. 윤도라면, 그랬다.
그렇다고 백회에서 치료를 끝내겠다는 건 아니었다. 초중증 우울증이라면 간단하게 생각할 일이 아니었다. 그러니 환자에게 딱 한 가지만 맛보일 생각이었다.
이 세상...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꿀꿀한 잿빛만은 아니라는 것.
장침의 맛처럼 상큼시원한 사이다 맛도 있다는 것.
백회에서 정신을 바로 세웠다. 그건 원래 백회혈의 기능에 속했으니 어려울 게 없었다. 물 먹은 솜처럼 처진 정신에 기를 넣었다. 침은 시계방향으로 돌아갔다. 허증이므로 보(補)을 위한 시침이었다.
사락!
사사락!
침은 정밀하게 돌았다. 사람의 눈에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의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환자 안에서는 달랐다. 그 미세한 보사에 따라 몸 안의 기가 요동을 치는 것이다. 물길이 열리고 닫히는 것이다.
욕심내지 않았다. 정신 하나만을 바로 세울 작정이었다.
‘열린다.’
손끝으로 저릿한 감이 올라왔다. 심허가 채워지면서 물길이 열리고 있었다. 그쯤하고 인당혈을 조절하기 시작했다. 백회혈에서 멀지 않다. 미간의 인당혈이라면 생기를 불러일으키고 감정조절이 가능한 혈자리였다. 일단은 주변의 기혈을 잡아끌었다. 몸은 아직 젊으니 심장으로 기혈을 살짝 집중한다고 해서 무너질 체력은 아니었다.
‘여기...’
팟!
포인트가 나오자 반 바퀴쯤 돌린 장침을 그대로 밀어넣었다.
“......!”
환자의 눈동자가 커지는 게 보였다. 눈꺼풀에 힘이 들어온다는 건 늘어진 감정이 일어선다는 뜻이었다.
“기분 어때요?”
침을 놓으며 물었다.
“......”
“아마 좋아졌을 겁니다.”
“......”
“솔직히 맛배기만 보여준 겁니다. 사관을 다 열고 제대로 시침하면 우울증 잡을 수 있습니다.”
“그럴 지도 모르겠네요.”
처음으로 환자의 추임새가 따라왔다. 그러나 그 뒤에 나온 말이 부정적이었다.
“침을 맞으니 머리와 가슴이 시원하고 가벼워요. 이런 기분은 참 오랜만입니다.”
“그런데요?”
“그래도 나는 결국 다시 우울증으로 돌아갈 겁니다.”
“압니다.”
“안다고요?”
환자가 윤도를 돌아보았다.
“김경호 씨의 우울증은 육체적으로는, 한의학적 진단용어로 심허입니다. 심장의 기혈이 약해요. 그러니 육체는 심허를 조절하는 것으로 나을 수 있지요. 지금의 예처럼요.”
“......?”
“하지만 그 심허의 원인... 그걸 찾아야겠죠. 김경호 씨의 시린 심장 안에 든 진짜 원인.”
“찾으면요?”
환자가 냉소를 뿜었다. 고마웠다. 우울증은 무관심이 무섭다. 희노애락도 없다. 매사에 무감각으로 가는 것이다. 그러니 냉소라도 나오는 건 긍정적인 사인이었다.
“해결해줄 게요.”
“당신이요?”
환자가 고개를 들었다. 나이로는 윤도보다 고작 몇 살 어린 환자. 코웃음이 나올만도 했다.
“만약 자신이 없다면 우울증 치료 시도도 하지 않을 겁니다. 나도 솔직히 헛고생은 하기 싫거든요.”
“풋!”
“김경호 씨.”
“......?”
“노래하고 싶군요?”
윤도가 직구 하나를 던져놓았다. 그 말에 환자의 시선이 벼락처럼 튀었다. 마치 용수철 같았다. 이번에는 윤도가 상대하지 않았다. 윤도의 시선은 구석의 벽에 있었다. 그 벽에 낙서가 있었다. 오선지였다. 음표도 있었다. 환자가 손으로 그린 게 분명했다. 하지만, 책장에는 노래나 음악에 관한 게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도는 확신 쪽으로 가고 있었다. 이 환자는 노래를 좋아한다. 기타를 좋아한다. 그건 손의 굳은살이 증거였다. 윤도도 경험이 있었다. 중고등학교 시절이었다. 공부에 스트레스가 있을 때마다 기타를 긁었다. 기타로 생기는 굳은살은 기타를 놓으면 사라진다. 그렇다면 환자는, 최근까지도 기타를 쳤다는 이야기였다.
“아니면 기타를 치고 싶든지.”
이제 윤도의 눈이 환자를 겨누었다. 정통이었다.
“......!”
김경호의 눈에 지진이 일었다. 우울증에 심장을 찔릴 것만큼이나 속절없는 동공이었다.
“아버지에게 들었군요?”
김경호의 목소리에 감정이 들어갔다.
‘좋아.’
혼자 쾌재를 부른 윤도가 판을 장악하기 위해 말을 이어나갔다.
“아뇨. 당신 손이 말해주었습니다.”
“내 손?”
환자가 자기 손을 바라보았다.
“그 정도 굳은 살이면 몇 달 친 정도가 아닐걸요? 내 경험에 의하면...”
“당신도 기타를 쳤어요?”
“예. 중고등학교 시절이지만.”
“......”
“아버님이 반대를 하시는군요? 혹시 그게 우울증의 발단입니까?”
이제 승부구가 날아갔다. 어차피 하나일 필요도 없는 승부구였다. 빗나가면 또 다른 승부구를 마련하면 되었다.
“......”
“그건 책장을 보고 생각해 봤습니다. 김경호 씨 손에는 기타의 처절한 상흔, 그런데 책장에는 기타는커녕 노래에 관한 책은 단 하나도 없음. 이런 건 굉장히 드문 일이거든요.”“......”
“김경호 씨.”
윤도가 김경호 옆에 은근슬쩍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의사들에게 실망한 거죠? 정신건강의학과와 한의원 정신과... 다들 우울증에만 매달리던가요?”
“풋!”
윤도의 질문에 환자가 또 웃었다.
“내가 실수했어요?”
“아뇨. 그 인간들은 우울증이고 나발이고 관심 없었어요. 다들 나를 탓할 뿐.”
“김경호씨를요?”
“그러더군요. 다 내 성격 탓 아니겠냐고? 훌훌 털어버리고 마인드를 긍정적으로 가지라네요. 그럼 우울증 같은 건 쉽게 극복할 수 있다고.”
빌어먹을 의사.
그런 사람들을 만났다. 진료비를 꽁 먹은 것이다. 세상에는 시대불문, 그런 의사가 반드시 존재했다.
중증 우울증을 깨라-3
“그 사람들 아마 로봇이었을 겁니다. 환자가 오면 기계적으로 답하도록 프로그램이 된...”
“나도 의사라는 직업이 참 쉽다고 생각했어요.”
“쉬울 수도 있고 어려울 수도 있죠. 김경호 씨처럼.”
“나요?”
“그 우울증의 장벽 말이에요 내 말이 맞다면 내가 도와줄 수 있어요.”
“내가 원하는 게 뭔 줄 알고요?”
“기타 치는 거 아닐까요?”
“......!”
환자의 시선이 얼어붙었다. 이렇게 감정이 표출될 때마다 윤도의 기분이 올라갔다. 희미하지만 환자는 희노애락의 감정에 닿고 있었다. 중중 우울증 환자에게 있어서 그건, 괄목할 만한 변화였다.
“거기까지 온 것만 해도 대단하네요. 아무튼 그냥 가세요. 당신은 다른 의사와 다르지만 이건 안 되는 거예요.”“왜 그렇게 단정하죠?”
“상대가 우리 아버지니까!”
“......”
“우리 아버지는 기타의 ‘기’자도 못 꺼내게 하니까.”
“집에 기타가 있어요?”
“없습니다. 보이기만 하면 아버지가 가져가서 없애버리니까요.”
“없앤다?”
“아마 박살을 냈을 거예요.”
“잠깐 기다리세요.”
윤도가 돌아섰다.
“이봐요.”
환자가 윤도를 불러세웠다.
“우리 아버지 설득하려는 거라면 그만 두세요. 설득 당할 분도 아니고, 만약 설득 된다면 내 우울증을 고치기 위한 임시방편일 뿐입니다. 그 후에 다시 이전 환경이 되풀이되는 거 원치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울증이고 나발이고 내 피가 먼저 마를 겁니다.”
“그 피는 말라야합니다.”
윤도가 바로 반격타를 날렸다.
“뭐라고요?”
“당신의 우울증 시작... 기타였을 수 있지요. 꿈에 대한 아버지와의 의견충돌일 수도 있지요. 하지만 그 기원은 또 다른 곳에 있습니다. 당신 부친의 지지가 나오면 나는, 당신의 피를 새로 만들 겁니다. 온몸의 피를 갈무리하는 간이 아래로 쳐져 있거든요. 실은 그래서 당신 인생이 쳐지기 시작한 겁니다.”
“......!”
“여기, 간, Liver.”
윤도의 손이 환자의 왼 쪽 가슴을 짚었다.
“젠장, 간은 오른쪽에 있어요.”
“그건 현대해부학적인 견해입니다. 한의학적인 견해는 왼쪽 가슴이에요. 경락과 경혈 중심으로 보면 그렇거든요. 간이 병들면 왼쪽 가슴과 왼쪽 옆구리가 먼저 아프게 되니까요. 아마 당신도 그랬을 겁니다. 아닌가요?”
“......!”
“뭐 그래도 내가 ‘사’짜 같으면 검색해보고 계세요.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윤도가 문을 닫고 나갔다. 환자는 황망하게 선 채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젊은 한의사 채윤도.
한의사 같지 않았다. 나이라고 해봐야 몇 살 차이. 그런 정도는 경호의 친구 중에도 있었다. 그런데 쿨했다. 너저분한 말을 늘어놓지도 않았고 팩트도 귀신처럼 짚어냈다. 경호는 자신의 옆구리를 만져보아다. 옆구리가 아픈 것, 그건 사실이었다. 중1 중간고사 이후였다. 다른 곳도 아팠다. 하지만 병원에 가면 이상이 없었다. 아픈 건 그저 경호의 느낌이었으니 귀신이 곡을 할 노릇이었다.
침대에 앉았다. 핸드폰이 보였다. 간에 대해 검색해 보았다. 간은 오른쪽에 있다. 인체에서 가장 큰 그랜드이다. 무게는 약 1.5kg 정도이다. 경호가 아는 상식대로였다. 하지만, 한방적 견해는... 윤도가 맞았다. 왼쪽이었다.
‘옆구리...’
다시 옆구리가 시큰 아파왔다. 검색어에 채윤도를 넣었다. 검색결과가 좌라락 올라왔다.
그 시간 윤도는 1층 거실에 내려섰다. 지검장은 용천규와 함께였다.
“어떻습니까?”
뭔가를 보고 있던 김정엽이 윤도를 바라보았다.
“치료에 앞서서 미리 해결할 게 있어서요.”
“치료는 가능합니까?”
“예!”
“맙소사, 그게 정말입니까?”
흥분한 김정엽이 벌떡 일어섰다.
“하지만 치료에 꼭 필요한 일이 생겼습니다.”
“말씀하세요. 뭐든지...”
“기타입니다.”
“기타?”
“예.”
“저 놈이 그 말을 하... 윽!”
돌연 고조되던 김정엽이 뒷목을 잡고 넘어갔다.
“지검장님!”
놀란 용천규가 그 뒤를 받쳤지만 김정엽은 기절한 후였다.
“119 부를 게요.”
가정부가 전화기를 잡았다.
“그냥 두세요. 여기 119보다 빠르고 안전한 분이 계시니.”
용천규가 가정부를 막았다. 그 사이에 윤도는 이미 지검장의 백회혈에 침을 넣고 있었다. 졸지에 들어온 사기를 밀어내자 늘어졌던 지검장 몸에 탄력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으...”
“괜찮으십니까?”
용천규가 김정엽에게 물었다.
“괜찮네...”
김정엽이 몸을 바로 세웠다.
“채 선생이 침으로 의식을 찾았습니다. 다른 불편한 데가 있으면 말씀하십시오.”
“그 놈이 기타 얘기를 해요?”
김정엽의 시선이 윤도에게 옮겨갔다.
“아뇨. 아드님은 그저 검사장님처럼 백회혈에 침을 한 대 맞았을 뿐입니다.”
“그 놈도 나처럼 기절을 했습니까?”
“아뇨. 우울증을 위한 기본 자침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기타를?”
“아드님의 우울증에 있어서는 기타가 제 장침보다 더 근본적인 치료가 될 수 있어서입니다.”
“채 선생...”
“맹세코 아드님이 조건 같은 걸 건 게 아닙니다. 그건 다른 병원의 경우를 봐서도 알 수 있겠죠. 지금까지 단 한 번이라도 아드님이 그런 조건을 건 적이 있습니까?”
“그러니 하는 말이오, 채 선생은 어떻게?”
“이런 거죠. 용 부장님이나 지검장님을 보면 어쩐지 검사의 냄새가 납니다. 저를 보시면 한의사의 느낌이 날 수도 있겠지요. 그게 켜켜이 쌓인 세월의 힘이 아니겠습니까? 누군가 1만 시간의 법칙이라는 걸 말하던데 오래한 것들은 그 사람의 몸에 흔적으로 남는 법입니다. 아드님의 경우에 있어 기타가, 손에 굳은살이라는 흔적으로 남았습니다. 그걸 보고 알았습니다.”
“......!”
“저도 한 때 기타를 쳤지요. 따라서 그 흔적은 한두 달의 것이 아니었는데... 방 안에는 기타의 흔적이 없더군요. 심지어는 음악서적 비슷한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