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2화 (132/265)

“실은 이 것 때문에 저를 북한으로 초청한 거죠?”

“반은 그렇고 반은 여기 서경세 동무 덕분입니다.”

방수용이 조수석의 무뚝뚝한 남자를 가리켰다.

“이 동무가 우리 외사촌 형님을 잘 압니다. 침술에도 나보다 조예가 깊지요. 그때 남한의 병원에서 간 이식을 받을 때 아마 채 선생 침술에 반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제게 그래요, 남한은 현대의학도 발달했지만 침술도 굉장한 것 같더라고... 간 이식보다 선생 침에 더 놀랐다고...”

“......”

“다른 동무가 그랬다면 그냥 넘겼겠지만 서 동무 말이기에 김광요 차장보를 졸랐지요. 청와대에서 밥 먹을 때 채 선생과 같이 먹으면 안 되겠냐고...”

“아... 네...”

윤도가 고개를 들자 서경세가 꾸벅 목 인사를 해왔다. 그제야 기억이 살아나왔다. 그때... SS병원의 간 이식 수술실... 집도의 강기문의 어깨에 자침하는 윤도를 매섭게 관찰하던 서경세...

이제야 그 눈빛이 이해되는 윤도였다.

“돌아보면 세상은 인연으로 이어진 것 같습니다.”

“모쪼록 남북관계도 잘 풀렸으면 좋겠군요.”윤도가 처음으로 남북관계의 소감을 피력했다.

“잘 될 겁니다. 서로가 파국으로 치달으면 민족적 비극 밖에 남을 게 없다는 건 남북의 공통된 견해니까요.”담소하는 사이에 공항이 가까웠다. 차는 그대로 활주로로 들어갔다.

“서울에서 봅시다.”

오병길이 마중 나온 당 비서와 악수했다. 방수용과도 악수를 나누었다. 대표단은 트랩을 올랐다.

“잘 가시오, 채윤도 선생.”

방수용이 손을 들어보였다. 그 손짓이 북한일정의 끝이었다.

차상광.

차평재.

비행기 창으로 내다보니 구름이 두 사람의 얼굴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이내 또 하나의 얼굴이 생겼다. 바로 노윤병이었다.

서울의 노숙자...

평양 땅에서 이륙하기 무섭게 그가 궁금해졌다.

침 때문이었다.

그의 침통에 든 침은 소위 나노 침에 가까웠다. 어쩌면 오장직자침법에 적합한 침이었다. 그렇다면 그 노숙자도 오장직자침을 놓을 수 있단 말인가?

일침이구一鍼二求, 침 하나로 둘을 살리다-1

일침이구一鍼二求, 침 하나로 둘을 살리다-1

“차장님!”

중국 공항에 내리자 박 과장 등의 국정원 직원들 둘이 나와 윤도 일행을 맞았다.

“걱정 많이 했습니다. 별 일은 없었습니까?”

“별일이 있었네만 여기 채 선생의 빛나는 의술 덕분에 예정대로 일정을 마쳤네. 국내는 어떤가?”

김광요가 물었다.

“다행히 NNL에서의 일은 잘 수습이 되었습니다.”

“비행기표는?”

“나오신다는 연락 받고 3시간 후 편으로 예약해 두었습니다. 대통령께서도 걱정하고 기다리시는 마당이라...”

“NNL은 초긴장이었겠지만 우리에게는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네. 월남한 북한 병사들은 어떻게 되었나?”

“그게 좀 좋지 않습니다. 귀순한 병사는 둘인데 둘 다 총상이 심해서...”

“죽었나?”

“최고의 응급의학전문의를 투입했지만 워낙 총성이 깊은데다... 집도의가 수술 중에 과로로 쓰러지면서 한 명은 목숨을 잃었고 남은 한 명도 수술이 미뤄져 위독한 상태라고 합니다.”

“저런, 그럼 다른 의사를 투입하면 될 거 아닌가?”

“그게 워낙 총상 같은 중증외상 전문의가 드문 상황이라...”

“말도 아니군. 의사는 수술 중에 과로로 쓰러지고 다른 전문의는 전무한 상황이라니... 그럼 그 의사가 일어나야 수술이 진행된다는 건가?”

“그것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

박 과장이 말꼬리를 내렸다.

“어렵다니?”

“그게... 그 의사가 워낙 중증외상 치료에 과로가 쌓여서 안구에 이상이 온 모양입니다. 한 쪽 눈은 이미 황반변성인가 뭔가로 시력을 상실한 마당에 남은 한 쪽 눈마저 안압 상승으로 녹내장이 도져 시신경이 다 날아간 모양입니다. 안과의사들 진단으로는 두 눈 시력을 영원히 잃을 수도...”

“그, 그런...”

김광요가 휘청거렸다. 북에서 NNL 사태로 초긴장의 시간을 보냈던 김광요. 그런데 한국의 상황이라니...

“다른 중증외상 전문의를 물색 중이기는 한데 북한병사의 상처가 워낙 깊다보니 다들 난색이라고 들었습니다. 맡아봤자 가능성이 없다보니 다들...”

“이런, 이런!”

“저...”

듣고 있던 윤도가 말꼬리를 물고 들어왔다.

“중증외상 전문의 안질환이 황반변성과 녹내장이라고 했습니까?”

“그렇습니다만...”

“차장님.”

“말씀하세요.”

“저를 그 의사가 입원한 병원으로 좀 보내주십시오.”

“채 선생을요?”

“녹내장이나 황반변성이라면 제가 침으로 어떻게 해볼 수 있을 거 같습니다. 그럼 그 의사도 시력을 되찾고 북한병사도 살릴 수 있을 거 아닙니까?”

“......?”

“저와는 의술의 갈래가 다르지만 중증외상 전문의들이 굉장한 격무와 열악한 근무환경에 시달린다는 말은 많이 들었습니다. 더구나 대한민국 대표 중증외상 전문의라면 시각장애인이 되는 건 막아야하지 않겠습니까?”

“채 선생.”“시간이 없습니다. 북한의 경우처럼 지체할수록 회복 가능성은 떨어집니다. 어서요!”

윤도가 재촉했다. 그 표정은 한없이 비장했다. 북에서 죽은 소좌를 살리고 온 윤도였다. 그건 윤도의 의지가 반영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한국이었다. 북한과 다르다. 그렇다면 어떻게든 중증외상전문의를 돕고 싶었다.

거기에 일침이구(一鍼二求), 침 하나로 둘을 살릴 수 있는 일이니 어찌 의술하는 사람의 몸으로 두고 볼 것인가?

“이거...”

“차장님, 시간이 없다니까요.”

“박 과장, 비행기 편 알아봐. 최대한 빨리.”

결국 김광요의 지시가 떨어졌다. 박 과장은 10여 분만에 비행기표를 확보했다. 40분 후에 출발하는 비행기였다. 박 과장과 윤도의 두 좌석이었다.

“인천공항에 차량 대기 시키도록. 차장보님 특별지시야.”

체크인을 하는 사이에도 박 과장의 전화는 쉴 틈이 없었다.

“다 왔습니다.”

저만치 SS병원이 보이자 박 과장이 말했다. 중증외상전문의가 입원한 병원이었다. 선두 인도차량이 병원 구내에서 멈췄다. 윤도와 박과장이 차에서 내렸다. 로비에는 이철중과 강기문 등의 의료진들이 나와 있었다.

<중증외과 분야 대한민국 일인자 손석구 전문의.>

그는 본래 영남권 대학병원에 속했다. 전국에서 밀려드는 중증외상환자와 응급환자를 돌보느라 자기 몸관리할 시간도 없었다. 한국은 응급의학이나 중증외과 분야가 취약한 나라. 그렇기에 투자 또한 빈약했으니 중요성을 알리기 위한 강연까지도 그의 몫이었다.

오른쪽 눈의 실명조차 모를 정도로 뛰었다. 그렇다고 대우를 받는 것도 아니었다. 상당수 의사들은 그를 비웃었고 소속 대학병원의 동료 의사들조차 돈 안 되는 진료과라며 탐탁지 않게 생각하던 판이었다.

NNL의 비보를 들은 당일, 그는 중앙선을 넘어온 차량과 정면 충돌하면서 박살난 환자를 수술했다. 갈비뼈, 목뼈, 척추뼈 등 진단명만 17개나 나온 환자였다. 신경외과 팀과 더불어 22시간의 대수술에 돌입했다. 수술이 끝나자 맹견에게 물어뜯긴 할머니가 중증외상센터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 또한 14시간의 마라톤 수술이었다.

겨우 눈을 붙이려는 순간 전화를 받았다. 이틀 밤을 새운 피로는 날아가는 헬기에서 조는 것으로 대신해야 했지만 나쁘지 않았다. 병원이라면 이렇게 쉴 시간도 보장되지 않을 일이었다.

이날 해상의 날씨가 좋지 않았다. 그렇기에 헬기출동은 무리였다. 하지만 상황이 급박하다보니 어쩔 수가 없었다. 덕분에 헬기가 거꾸로 처박힐 뻔한 위기가 있었다. 기류가 험해지면서 돌연 돌풍의 와중으로 들어간 까닭이었다.

“으아악!”

승무원들이 비명을 질렀다. 손석구 역시 공포를 느꼈다. 헬기가 곤두박질치는 순간 손석구는 피가 거꾸로 흐르는 걸 느꼈다. 그게 쥐약이었다. 녹내장이 심한 경우 물구나무를 서는 것만으로도 치명적일 수 있었다. 그렇기에 안구의 압력을 올리는 역기 같은 운동도 금하게 하는 게 녹내장이었다.

결국 도화선이 터졌다. 몇 개 남지 않은 시신경에 불이 꺼진 것이다. 소속 병원에서 북한 병사 응급수술 중, 손석구는 돌연 시야가 변하는 걸 느꼈다. 세상이 마치, 전원이 나간 텔레비전 화면 같았다.

“안 돼.”

수술장에서 그가 외친 한 마디였다. 자신의 눈이 문제가 아니었다. 이미 북한 병사 하나를 잃었다. 이제 남은 한 명. 필사의 노력으로 살려야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꺼져버린 안구의 빛... 이후 손석구는 SS병원으로 실려 왔다. 이제는 손석구 자신도 응급환자 신세였다.

딸깍!

병실문이 열렸다. 손석구는 침대에 앉아있었다. 두 눈에는 붕대를 감았다. 2인실이지만 옆 침대가 비어 1인실이었다. 21살, 그의 외동딸이 침대를 지키고 있었다. 아내마저 유방암으로 잃은 손석구였다.

“손 선생.”

이철중이 다가섰다.

“나 이 병원 진료부원장 이철중이오.”

“예...”

손석구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혹시 채윤도 한의사를 아시오?”

“모릅니다.”

“얼마 전에 우리 병원에서 폐암환자를 치료한 보도를 봤습니까? 폐부전이라 이식을 해야 하는데 장기를 기다릴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시술을 시도해서 기적적인 성공을 한 적이 있습니다.”

“......”

“그 얼마 후에 간담췌장의 권위자 강기문 박사가 중요한 수술을 앞두고 있었는데 그만 어깨탈구가 일어나 난감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때도 이 닥터가 기적의 시술로 어깨를 맞춰주고 수술장에서까지 침술 지원을 펼쳐주는 덕분에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지요.”

“......”

“그리고 이건... 판타지 소설 같은 이야기지만 풍용푸드 지창용 회장의 일화를 아시오? 속된 말로 다 죽은 시체라서 집에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역시 이 닥터가 시술로써 일으켜 세워 필생의 꿈이었던 풍용의 신사옥 준공식을 지켜보며 임종을 맞았습니다.”

“부원장님...”

“다 모르겠지요? 듣자니 손 선생은 너무 바빠 뉴스를 들을 시간도 없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방금 내가 한 말의 포인트는 집고 계시겠지요?”

“포인트라면... 시술?”

“맞습니다. 시술, 수술이 아니고 시술입니다.”

“......?”

“폐부전 환자에게 새 생명을 준 시술, 어깨탈구를 귀신처럼 맞추는 시술, 천수를 누리고 죽어가는 노인을 일으켜 세우는 시술...”

“......”

“그 기적의 닥터가 손 선생을 도우러왔습니다.”

“......!”

“이 분은 우리 양의가 아니라 한의입니다. 한의사.”

“한-의-사?”

“녹내장과 황반변성... 우리 안과부장 백대승 선생에게 보고를 받았어요. 어떻게든 당신에게 빛을 주고 싶은데 방법이 없다고...”

“그런데...”

“한의사가 뭘 어떻게 하겠냐고요?”

“너무 제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어차피... 이제 좀 쉴 수 있어서 오히려 후련합니다.”

“아빠...”

손석구의 말에 딸이 무너졌다.

“어차피가 아닙니다. 이 닥터의 침은 다르니까요.”

“침이라고요?”

“우리가 흔히 회자하던 먼 옛날의 화타와 편작재림입니다. 나도 강기문 박사도 실은 믿지 않았었지요. 하지만 그 기적의 침술을 보게 되면 누구든 이 닥터에게 매료되지 않을 재간이 없습니다.”

“부원장님...”

“손 선생.”

“......”

“아무 말 말고 채 선생의 침술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당신의 어깨에만 그 어려운 응급중증환자들을 맡겨 마음 아픈 우리들입니다. 눈이 보이면 다시 또 응급실로, 수술대로 달려가겠지만 그래도 손 선생은 혼자가 아닙니다. 일부는 제외한 많은 의사들은, 동료로써 선후배로써 당신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여기 당신을 위해 쉴 틈도 없이 날아온 채윤도 한의사도...”

“부원장님.”

“그 마음 속에 든 건 실명의 걱정이 아니라 수술을 마치지 못한 북한병사의 수술장이겠죠? 그 친구 아직 목숨이 붙어있습니다. 어쩌면 당신이 돌아오길 기다릴 지도 몰라요.”

“......”

“시작할까요?”

“......”

“손석구 선생.”

“그러죠. 한의사가 채윤도 선생이라고요?”

손석구가 고개를 들었다.

“예.”

윤도가 대답했다.

“채윤도 선생님.”

“네.”

“한의학은 잘 모르지만 응급의학은 시간이 생명입니다. 미안하지만, 정말로 당신이 내 눈 시력을 살릴 능력이 있다면 가급적 빨리 부탁합니다.”

손석구가 자세를 반듯이 했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기백과 정신력. 그러면서도 자신보다 수술대의 북한병사를 생각하는 의사. 과연 중증외과의 전설다운 기개였다.

딸깍!

그 자리에서 윤도의 침통이 열렸다. 안과부장과 스태프가 달려왔지만 설명은 듣지 않았다. 그럴 시간이 없었다. 이 시간에도 쐐기가 박혀 굳어가고 있을 손석구의 시신경, 그리고 목숨줄이 한 결 한 결 잘려나가고 있을 북한 병사. 윤도로서는 단 1분이라도 아껴야했다. 그렇지 않다면 산해경을 고려했을 일. 하지만 지금은 그 비책 또한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오직 장침.>

윤도는 그걸 믿었다.

진맥...

진맥에 집중했다. 병실에 남은 건 이철중과 안과부장이었다. 둘은 창가의 의자에 앉아 숨을 죽였다. 다만 안과부장 백대승은 조금 달랐다.

한의사 채윤도.

병원의 소문은 들은 바가 있었다. 폐부전 환자를 살리고 간 이식을 도왔다. 하지만 이 건은 무려 녹내장과 황반변성이었다. 시신경은, 일단 죽으면 하느님도 되돌릴 수 없다. 그게 백대승의 생각이었다. 부원장의 지지로 침을 놓고 있다지만 고작 침?

‘허어...’

속으로는 코웃음이 나오고 있었다.

손석구의 경우에는 필요한 모든 장비를 동원해 진단을 했다. 국가적인 관심 때문이었다. 동시에 SS병원 안과의 위상이 달린 일이었다. ERG로 불리는 망막전위도검사를 시작으로 망막 맥락막 혈관검사, 무산동 광각 안저 카메라, 안저 정밀검사 등을 동원했다. 그

그렇게 해서 나온 진단은 회복 불능이었다. 오른쪽은 황반변성, 왼쪽은 녹내장이었다. 왼쪽 녹내장은 급성이 아니었지만 과로 때문에 급격히 악화되었다. 안타깝지만 손을 드는 수 밖에 없었다.

그런 눈을... 그것도 한의사가... 그것도 침 하나로?

백대승은 소리없이 고개를 저었다.

윤도는 오직 집중이었다. 맥을 따라 상황을 읽었다. 침을 넣는 건 윤도였다. 첨단장비의 결과야 물론 중요하지만 윤도 자신의 기준이 더 중요했다.

‘황반변성... 청광안... 그리고... 머잖아 망막혈관 폐쇄도...’

윤도가 숨을 몰아쉬었다. 청광안은 녹내장을 가리킨다. 이들 둘은 당뇨망막증, 눈중풍과 더불어 주요 실명 요인으로 꼽힌다. 황반변성과 녹내장은 진행형, 망막증은 곧 촉발될 위험인자. 그러니까 손석구의 실명요인은 무려 세 가지나 되는 셈이었다.

황반은 눈의 망막 중심부에 위치한 신경조직이다. 시세포의 대부분이 이곳에 모여 있다. 물체의 상이 맺히는 곳도 황반의 중심이기에 시력에 미치는 영향이 절대적이었다.

망막혈관 문제도 함께 해결해야 했다. 동맥과 정맥이 막히기 직전. 그대로 두면 황반과 녹내장을 처리한다고 해도 머잖아 다시 실명할 손석구였다.

“부원장님.”

거기서 부탁 하나를 했다. 약침에 쓸 약이 필요했다.

‘이 사람...’

시선이 손석구에게 닿자 윤도 등골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자그마치 의사다. 그런데도 무식할 정도로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았다. 그 숭고함에 섬뜩해진 윤도가 마침내 장침을 뽑아들었다.

장침.

그 장침이 윤도 눈앞에서 반짝 빛났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