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뵐 수 있을까요?”
“당연하지요. 어쩌면 형님을 위해 당신을 초청한 건지도 모릅니다.”
“......?”
“채 선생, 무리한 부탁이라는 건 압니다. 하지만 우리 형님을 좀 살려주십시오.”
“방 비서님...”
“인민을 위해 더 사셔야하는 분입니다. 옛말에도 사필귀정이라고 양의가 못 고치는 한의의 병은, 한의가 고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이 분이 병들이 전에는 분명 그리하였습니다. 심지어는 러시아에서 죽어 실려온 당 간부도 살려낸 분입니다.”
“그럼 그 전설 같다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전설이 아닙니다. 그때 기사회생한 당 간부가 바로 내가 모시던 분이었습니다. 당시 내가 러시아에서 그 분을 수행하고 있었고 내 외사촌 형님에게 가면 살 길이 있을 지도 모른다고 고집했던 사람도 나였습니다.”
“......”
“외사촌 형님은 내 기대대로 장침 하나로 그 분을 살리셨지요. 내 형님은 진정한 신의셨습니다. 내 형님이라 하는 말이 아니라 병원이 열악한 우리 공화국에서는 이대로 보내기에는 너무 아까운 보물이십니다.”
“......”
윤도의 정신줄이 흔들렸다. 기도환의 제자 자취를 만난 것만 해도 정신이 없는 판에 전설 같은 일화의 주인공까지... 도무지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부탁합니다.”
방수용은 간절했다. 말 몇 마디에도 진심이 느껴졌다.
“일단 뵙는 게 우선입니다.”
“알겠습니다. 수란아, 이 분을 네 아버지께 모시거라.”
방수용이 뒤를 보며 말했다. 닫혔던 문이 열리더니 여학생이 보였다.
“저를 따라오세요.”
윤도가 일어섰다. 아찔한 현기증은 잘 눌러두었다. 여학생은 이층으로 통하는 계단을 밟았다. 그 이 층... 햇빛이 잘 드는 창가 쪽 방에 차평재가 있었다. 그를 간호하던 여자가 일어섰다. 아까 차를 내온 여자... 그러니까 그녀는 차평재의 아내이자 여학생의 차수란의 어머니였다.
“형님, 남쪽에서 채윤도 한의사가 왔습니다.”
뒤에 선 방수용이 소개를 했다. 윤도가 들어섰다.
“인민의 자랑이자 내 외사촌형님인 차평재입니다.”
방수용의 소개가 이어졌다.
차평재...
그와 눈이 맞았다. 육신은 병마에 시달려 다 내려앉았지만 눈빛만은 짱짱해 보였다.
“반갑소.”
차평재가 인사를 건네 왔다. 입과 혀가 엉망이었다. 윤도는 꾸벅 인사로 말을 대신했다.
“그대가 기도환의 침통을 가지고 있다고?”
“예...”
“실물을 볼 수 있겠소?”
차평재가 원했다. 윤도가 기꺼이 응했다. 침통을 본 차평재가 웃으며 말했다.
“기물이 기물을 만나다니... 내 아버지께서 소원 절반을 푸셨군.”
“......?”
“내 아버지... 살아 생전 이런 침갑 한 번 보는 게 소원이었다오. 이 침갑은 곧 기도환의 분신이니 그 분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었지.”
“저는 기도환에게서 받은 게 아닙니다.”
“상관없소. 기물은 주고받음으로써 주인이 되는 게 아니라 운명을 따르는 것이니...”
‘운명?’
“정길이를 고쳐주어 고맙소. 더불어 내 딸년도...”
“별 말씀을...”
“팔에 마비가 오고 오장육부에 탈이 나면서 식솔들조차 돌보지 못하는 몸이 되었다오. 저무는 길에 그게 마음에 앙금으로 남았는데 선생 덕분에 면피를 한 것 같소. 이 또한 이 침갑의 인연이 아니고 무엇이겠소?”
“제가 진맥을 좀 해도 되겠습니까?”
윤도가 물었다.
“사양하오.”
차평재가 잘라말했다. 거부를 담은 날선 목소리가 아니라 세상을 내려놓은 빈 소리였다.
“선생님...”
“다들 선친과 나를 일러 북의 화타요 편작이라고 했지만 화타와 편작도 오고 갈 때가 있는 것이오. 지금 내 병의 깊이가 그렇소.”
“......”
“그러니 수고를 끼칠 거 없소. 내 대신 두 아이를 고쳐준 것만 해도 진심으로 감지덕지라오.”
“형님, 그저 진맥만이라도...”
듣고 있던 방수용이 간곡히 말했다.
“어허, 내 병을 내가 알거늘...”
차평재가 고개를 저었다.
“차 선생님.”
윤도가 다시 운을 떼고 나왔다.
“사실 먼 길을 오면서 방 비서님께서 왜 저를 초청한 건지 몹시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보니 차 선생님 때문에 저를 부르셨군요. 그렇다면 저 먼 남쪽에서 온 제 성의를 봐서라도 진맥 정도는 허용하는 게 맞지 않을는지요.”
“......!”
차평재가 윤도에게 시선을 맞춰왔다. 단단하면서도 진솔한 압박이었다.
“당신 이름이?”
“채윤도입니다.”
“우리 정길이 혈자리를 어떻게 잡았소?”
“잡을 수 없기에 새 길을 냈습니다. 강물을 새로 만드는 건 신의 영역이지만 도랑을 만드는 정도는 가능합니다.”
“강이 사라졌으니 도랑으로 물길을 이었다?”
“예...”
“그렇다면 말이오, 혹시 표적화침을 아시오?”
‘표적화침?’
윤도가 시선을 들었다. 침구법에서 보지 못한 말이었다.
“남북이 오래 떨어져 용어가 다를 수 있습니다. 무엇을 뜻하는 말인지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당황하지 않고 시간을 좀 벌기로 했다.
“뜻으로 주고 받을 말이 아니오. 모르면 공연한 수고를 더할 뿐이라오.”
“그게 만약...”
생각을 가다듬은 윤도가 뒷말을 이었다.
“암세포 자체를 저격하는 침술을 뜻하는 거라면 가능합니다.”
“......?”
텅 빈 눈빛을 하던 차평재가 벼락처럼 시선을 들었다.
북한의 침술영웅-1
북한의 침술영웅-1
“그걸 뜻하신 말씀입니까?”
“채 선생...”
“진맥을 해도 되겠습니까? 의원으로써 먼 왕진 길에 진맥조차 못하고 돌아간다면 그 또한 오랜 자책으로 남을 일입니다.”
“그럼 내전(內轉)도 아시오?”
“암세포라는 놈, 건드리면 다른 곳으로 둥지를 옮기는 것 말씀입니까?”
“맞았소이다. 내 상태가 그 지경이오. 그러니...”
“처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
“문을 닫으면 됩니다. 암이 대장경에 속하면 대장경의 혈문을 닫고, 간경에 속하면 간경의 혈문... 혹 혈자리와 혈자리 사이라면 두 혈문을 닫고 자침하면 됩니다. 독 안에 넣고 사냥하는 거지요.”
“당신이 그걸 할 수 있단 말이오?”
“저를 믿고 목숨을 맡겨주신다면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윤도가 쐐기를 박았다.
“남쪽의 용한 침술가인가 했더니 이제 보니 저승사자가 오셨군.”
“잘못하면 그렇게 될 판입니다.”
차평재가 웃자 윤도도 따라 웃었다.
“좋습니다. 그렇게 고집하니 진맥은 허락하겠소.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니 그저 의원의 사명을 다했다는 위로로 만족하길 바라오.”
차평재가 손을 내주었다.
‘윽!’
진맥은 처음부터 극악이었다. 차평재는 보기보다도 더 나쁜 상태였다. 오장육부의 기혈은 바닥 밑의 지하실이었다. 그럼에도 정정한 모습은 한 분야의 대가만이 보일 수 있는 정신력의 발로였다.
췌장...
간장...
폐장...
주변임파선...
전이였다. 그리고 저 먼 곳... 머리의 이마와 어깨 견갑골 사이에도 작은 흔적이 있었다. 어깨에서 징조를 보이는 암의 흔적은 팔 마비의 원인이었다. 이마에 다리를 놓았으니 머잖아 머리까지 올라갈 기세였다.
그러나 다행히 암세포들이 찰진 군집을 이루었다. 자잘하게 온몸에 퍼진 게 아니라 장기 안에서 당차게 이웃하며 장부를 장악해 나가는 모양새였다.
‘다행히’
윤도는 그 말에 희망이라는 방점을 찍었다.
‘휴우!’
진단이 나오자 허탈감이 들었다. 신비경 때문이었다. 그걸 가져왔더라면... 가장 효과적인 영약을 꺼낼 수 있더라면... 하지만 이제는 대안이 될 수 없었다. 남쪽은 이웃 동네가 아니었다. 이런 이유로 북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도 없거니와 차평재의 암은 시간을 재촉하고 있었다. 암세포가 치명적인 부위까지 장악하면 편작의 할아버지가 와도 별 수 없을 일이었다.
그러나...
주어진 시간은 길어야 이틀...
골똘하는 윤도 눈에 지치 약술이 들어왔다. 지치 역시 암 치료에 쓰인다. 여러 의서에서 해열 · 해독 · 혈액순환 개선, 각종 암과 염증 치료에 효능이 탁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중 유용한 성분은 시코닌. 고혈압, 해독, 항균작용 등에 탁월한 약효성분이었다. 차평재 역시 그걸 알고 복용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약침으로도 쓸 수 있었다.
약침...
그 단어에 북한 방송의 여자 아나운서 목소리가 겹쳤다.
<핵 미사일 정밀타격>
말만 들어도 끔찍하다. 하지만 그 말이 암세포에 적용된다면 얘기가 달랐다. 초토화되는 것이니 완벽한 제거가 아닌가? 윤도가 후끈 달아올랐다. 이미 직장암 치료로 똥꼬를 세이브 시키면서 표적 자침에 대한 간접 경험을 했다.
‘암세포를 직접 타격?’
침통을 보았다. 침통에서 빛이 났다. 해보라는 암시 같았다. 암세포... 그래봤자 하늘에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인체 안이다. 그 안의 어디든 윤도의 장침은 갈 수 있었다.
암세포를 직접 타격하면 시간을 아낄 수도 있었다. 거기에 화침까지도 자유로운 윤도의 손가락. 약침에 더불어 고온을 작렬하면, 체력이 떨어진 환자와 더불어 열악한 조건도 극복할만 해보였다.
‘좋아.’
윤도가 마음을 다졌다.
“차 선생님.”
진맥을 끝낸 윤도가 차평재를 바라보았다.
“두 손 드시겠소?”
“손은 선생님이 들으셔야겠습니다.”
“응?”
“진맥을 보니 다른 사람이면 이미 저승으로 가셨어야 할 상황이군요. 췌장암이 오장육부를 위협하면서 이마와 견갑골까지 차지하고 있습니다.”
“허헛, 역시 명의시군.”
“명의라는 말씀 진심입니까?”
“그렇소만.”
“그럼 이 명의에게 선생님의 목숨을 맡기십시오.”
명의를 강조했다. 차평재에게 내민 수술각서와 다르지 않았다.
<나 차평재는 본 진료를 받음에 있어 의료진에게 그 위험성의 설명을 충분이 들었기에 의료진의 지시에 따르며, 진료결과에 대해 어떠한 이의도 제기하지 않을 것을 서약합니다.>
“그렇다면 내 남쪽 침술 명의의 침 한 번 구경하고 죽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차평재가 각서에 도장을 찍었다. 차평재의 의지는 놀라웠다. 비장은 본래 의지와 지혜를 주관하는 장기다. 그 장기에 암이 발생했다. 간장과 폐장으로까지 전이가 되었다. 그렇다면 의식도 또렷하기 힘들었다. 그럼에도 창창한 성격은 그의 평소 인품이 고매했음을 반증하고 있었다.
이 날!
윤도는 더없이 신중했다. 우선 방 안 온도부터 최적으로 맞췄다. 그런 다음에 사인펜을 준비시키고 차평재의 옷을 벗겼다. 진맥과 함께 백회혈과 양지혈, 족삼리와 중완, 관월혈에 호침을 꽂았다. 암의 병소를 적확하게 찾으려는 것이다. 여기서 기혈의 파동을 맞추면 병소가 있는 경락으로 들어가는 까닭이었다.
‘그래... 거기...’
암 덩어리들이 감지되기 시작했다. 그 부근의 혈자리에 사인펜 표식을 남겼다. 정확히 가두고 박멸을 해야 했다. 그러자면 어느 혈문 하나라도 놓치면 끝장이었다. 이 시침에 환자의 운명이 달려있다. 말쑥하게 몰아내면 회복이 되겠지만 일부라도 놓쳐 다른 곳에 싹이 트면 회복할 길이 없었다.
‘후우!’
날숨과 함께 표식이 끝났다. 췌장과 간, 폐, 그리고 이마와 어깨의 암세포 부위였다.
첫 시침은 삼초를 위한 침이 들어갔다.
사람의 기는 어릴 때 하초에 가득하다. 그래서 아이들은 겅중겅중 쉴 새 없이 뛰고 달린다. 이런 걸 모르고 얌전히 지내라고 하면 입맛을 잃는다. 건강도 잃을 수 있다.
그 기는 중년이 되면 중초로 올라온다. 마지막에 노년에는 상초의 머리로 온다. 그런 까닭에 노인들은 하체에 힘이 없다. 재미난 건 무거운 짐을 지고는 오래 버티지 못하지만 아이를 업으면 오래토록 끄떡없다는 사실. 아이 하초의 기를 받는 까닭이다. 동시에 노인들은 잔소리가 많아진다. 팔다리에 힘이 없으니 자신이 할 수는 없고 대신 잔소리를 쏟아내는 것이다.
첫 시침은 명문혈에 들어갔다. 간단히 들어가지만 사실은 굉장한 안배가 있었다. 차평재의 몸 상태 때문이었다. 윤도의 신침이 알아서 조절하기에 가능하지만 일반적인 시침이라면 침을 놓는 사이에 사망할 수도 있었다.
거기서 상초의 기를 끌어내리고 족삼리혈로 옮겼다. 중초까지 내려온 기를 하초로 당겼다. 그런 다음 격수혈로 올라가 하초의 기를 퍼올렸다. 상초에 찌든 기의 순환이었다. 네 바퀴 쯤 돌자 기의 순환이 그럭저럭 느껴졌다. 느리지만 기는, 이제 상초에만 맴돌지 않았다.
환자를 두고 약침을 만들었다. 다행히 탕약기가 있었다. 약쑥도 있고 항암성분을 지닌 버섯들도 있었다. 한국산보다 약성이 좋았다. 그 또한 차평재 집안의 내력 덕분이었다.
약성이 좋은 것을 가려 중탕을 했다. 중탕에 중탕을 거듭해 엑기스를 뽑았다. 그럭저럭 좋은 약침이 되었다. 이제 준비운동은 끝났다.
“기분 어떠세요?”
윤도가 물었다. 차평재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한 포석이었다.
“좋군요. 침 놓는 모습이 보기 좋소. 꼭 내 아버지가 몰입하던 모습이랄까?”
“일단 꼬리부터 자르겠습니다.”
암세포를 녹이기 위한 첫 침은 이마로 들어갔다. 아시혈이었으니 그대로 암세포 부위였다. 그 다음부터 윤도의 손은 신선의 손처럼 우아하게 움직였다.
수태음폐경으로 가 천부혈과 협백혈을 찔렀다. 차평재의 눈자위가 사뿐 경련했다. 찾기 어려운 두 혈을 한 방에 찌른 윤도였다. 짜르르 침감이 오는 것으로 보아 최적의 포인트에 들어갔다. 차평재이기에 그걸 알았다.
‘아아...’
차평재가 홀로 숨을 몰아쉬었다. 윤도의 모습 속에서 아버지의 모습이 아른거린 것이다. 침을 놓는 순간 혈자리와 일체가 되던 아버지 차상광... 바로 기도환의 첫 제자...
차평재가 무엇을 생각하든 윤도는 그저 무아지경이었다. 천부혈에서 바닥난 천기를 끌어올렸다. 협백혈에서는 그 천기로 폐세포에 힘을 주었다. 다음으로 척택혈과 태연혈을 잡았다. 척택은 폐의 기가 모이는 연못. 썩은 물을 비우고 새 물을 채우는 것이다.
물...
물은 쉽게 차지 않았다.
천기를 관리하는 천부혈 때문이었다. 오래 전에 고갈된 천기. 역시 요혈의 자극만으로는 약했다. 거기서 꺼내든 게 망침이었다.
망침!
그건 차평재가 쓰던 것이었다. 중국 상무위원을 찌른 것보다 길었다. 그걸 집어든 윤도, 한치의 주저와 의심도 없이 암세포가 자라는 좌측 폐의 아시혈 가까이로 밀어넣었다.
“......!”
차평재는 눈을 의심했다. 망침이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폐였다. 자칫 실질세포를 건드리면 사망이라는 치명적인 의료사고가 날 수 있는 곳. 그런 부위조차 거리낌없이 들어가는 윤도의 망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