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이 거기에 이르자 생각이 달라졌다. 윤도가 실망에 젖은 사모님에게 다가섰다.
“사모님.”
“예?”
“저희 아버지 말이 사실인가요?”
“예...”
“그럼 조금 전의 의사가 이 병원 실질 경영자로군요?”
“그렇다고 들었어요.”
“사모님은 저희 아버지와 뜻이 같은 가요?”
“물론이죠. 내 배로 나은 아들이지만 글러먹었고 더구나 못된 며느리를 만났어요. 쟤들이 회사 맡게 되면 다 말아먹을 거예요. 저이가 얼마나 애를 세운 회사인데...”
“그럼 아드님에게 가세요.”
“아들에게요?”
“며느님이 기절한 거 같으니 가셔서 최대한 시간을 끄세요. 그 동안에 제가 사장님을 어떻게 한 번 해보겠습니다.”
“되겠어요?”
“해봐야죠. 기왕 온 걸음인데...”
“아이고, 선생님. 고맙습니다.”
사모님이 윤도 손을 잡았다.
“빨리 가세요. 시간 끄는 거 잊지 마시고요.”
“네.”
사모님이 복도로 나갔다. 아버지는 복도에 세웠다. 그런 다음 심호흡을 하고 진맥을 잡았다. 이상균의 맥이 윤도 손끝으로 전해왔다.
오장육부다 다 좋지 않았다. 그 영향으로 심장에 병이 들었다. 덕분에 심장에 있는 구멍이 죄다 폐쇄직전이었다. 가래가 찬 것이다. 이 구멍이 가래로 막히면 정신력이 약해진다. 환자는 심장이 병들어 생긴 치매였다.
혀를 확인했다. 혀에도 병색이 완연했다. 심장의 기혈이 바닥이 난 게 확실했다. 심장의 병은 낮보다 밤에, 여름보다 겨울에 더 심해진다. 얼굴이 흑빛이면 머잖아 사망할 수도 있었다.
‘이런...’
병세를 짚어가던 윤도의 등골에 식은땀이 흘렀다. 이 환자는 심장을 제외한 사장육부를 먼저 치료해야만 했다. 그래야 심장에 막힌 7개 구멍에 길이 난다. 그 길이 나면 치매는 저절로 나을 일이었다. 그러자면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여기는 병원. 환자 아들의 아내가 기절을 했다지만 오래가지 않을 수 있었다.
‘어쩐다?’
영약을 꺼내들었다. 영약을 약침으로 심장 혈자리를 잡으면 잠깐은 효과가 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기초를 다지지 않고 목적만 취하는 건 의술이 아니었다. 고뇌하는 순간, 복도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아직 안 갔습니까? 비키세요.”
아들의 목소리였다.
“얘, 네 아버지 주무신다. 그러니 가서 며느리부터 살피자니까.”
“의식이 안 돌아오니 큰 병원으로 가야한다잖아요. 이 안에 내 핸드폰이 있다고요.”
아들 손이 사모님과 윤도 아버지를 밀어냈다.
드륵!
병실 문이 거칠게 열렸다. 하지만 아들의 기세는 거기서 내려앉았다.
“아버지...”
아들은 감히 병실 안으로 들어서지 못했다. 약을 먹고 몽롱하게 잠들었던 아버지. 그 아버지가 꼿꼿하게 앉아있는 게 아닌가?
“여보.”
사모님이 그 뒤로 달려들었다.
“오랜만인데 반갑지 않은 목소리구나?”
이상균의 목소리가 나왔다. 지치고 맥 없는 목소리. 그러나 환청과 환상을 보며 헛소리를 지껄이던 그 정신 나간 모습은 아니었다.
“당신...”
아들이 윤도를 쏘아보았다. 윤도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무시해버렸다.
“네가 이 분의 침술을 막았다고?”
이상균이 물었다.
“그, 그게 아니라...”
“막지말거라. 나를 위해 하늘에서 보내준 명의시니.”
“......”
“솔직히 믿기지 않으시죠.”
윤도가 나섰다.
“......”
“아내 분, 정신이 돌아오지 않으셨나요?”
“......”
“지금 어디 있죠?”
“앰뷸런스 타려고...”
대답은 사모님 입에서 대신 나왔다.
“치료 동의하면 제가 5분 안에 해결해드리죠.”
“당신이?”
“따라오세요.”
윤도가 앞서 걸었다. 아들은 아버지를 한 번 돌아본 후에 윤도 뒤를 따랐다. 며느리는 침대에 있었다. 아직 정신이 돌아오지 않았다.
“침 한 대면 됩니다.”
윤도가 의사에게 말했다. 비켜서라는 요청이었다. 의사가 주저하는 사이에 윤도의 장침이 백회혈로 들어갔다. 거기서 침끝을 돌리자 며느리가 꿀럭 움직였다.
“여보!”
아들이 반색을 했다. 윤도는 침감을 조금 더 가했다. 하지만 ‘완전’까지는 가지 않았다. 일종의 반의식 상태로 침감을 맞춘 것이다.
“한 시간 정도 안정하면 정상으로 돌아올 겁니다. 그 사이에 손발이나 열심히 주물러 주시기 바랍니다. 침은 제가 올 때까지 건드리지 마시고.”
그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아들이 윤도를 바라보았다.
“손발!”
운도가 턱짓을 했다. 강력한 위엄이었다. 아들은 며느리 곁으로 다가가 손발을 주물렀다. 그는 아내에게 휘둘리는 남자였다. 성실한 아버지와 달리 아버지의 후광으로 음주가무를 즐기는 양아치과에 속하는 탓에 아버지에게 인정 받지 못했다.
그렇기에 아내에게 얹혀살았다. 이번 일 또한 아내의 조종을 받는 형편이었다. 그러니 아내의 안위에 목숨을 걸 수 밖에 없었다.
“여보오.”
찌질하게 울먹이는 목소리만 봐도 견적이 나왔다.
신침神鍼 앞에 불치 없다-2
신침神鍼 앞에 불치 없다-2
병실로 돌아온 윤도가 진료를 이어갔다. 이상균은 다시 늘어져 있었다. 겨우 뜬 눈이 파르르 흔들렸다. 조금 전, 그건 기적이었다. 상황 상 어쩔 수 없이 편법을 쓴 윤도였다. 차근차근 기혈을 돋궈 심장을 살린 게 아니라 영약으로 잠시 정신이 돌아오게 만들었다.
당연히 오래 갈리 없었다. 그래도 환자가 부응해 주어 다행이었다. 그건, 환자의 의식 속에도 회사에 대한 애착과 현재 상황에 대한 간절함이 가득한 까닭이었다. 간절함 앞에서 인간은 누구나 초인이 되길 원한다. 윤도의 영약이 그 간절함에 잠시 불을 당겨준 것이다.
하지만!
그리하여 시침은 더 어렵게 되었다. 말하자면 어설프게 항생제를 쓴 꼴이었다. 한 방에 잡아야 박멸이 되는 세균들. 미리 건드려놨으니 내성이 생길 수 있었다.
‘후우!’
심호흡을 하며 이상균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윤도와 마주쳤다.
살려주시게.
부탁하네.
그의 눈동자가 입술 대신 말했다.
걱정마세요.
최선을 다할 겁니다.
이미 시작된 진료니까요.
윤도가 눈으로 화답했다.
약간의 시간은 벌었다. 그렇다고 해도 평안한 진료는 아니었다. 윤도로서는 아들의 아내가 제 정신이 들기 전에 진료를 끝내야했다. 이번에는 이상균의 치매를 완전하게 밀어내야 하는 것이다.
장침을 뽑았다.
심장을 제외한 모혈 전부에 장침을 넣었다. 간단하지는 않았다. 환자의 혈자리는 휘고 구겨지고 밀렸다. 돌연 발작한 급성 치매. 그러나 아들 부부가 적극 치료를 하지 않았다. 사모님은 발언권이 밀려 아들 부부의 의견을 따르는 수 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오장육부에 울화가 쌓이고 내상과 허로가 깊어졌다.
폐수의 중부혈.
간수의 기문혈.
비수의 장문혈.
신수의 경문혈.
삼초수의 기해수까지 장침을 넣었다.
각각의 혈자리마다 침감을 달리했다. 간수의 기문혈은 가장 강력한 침감을 넣었고 신수의 경문혈은 오히려 기를 낮췄다. 음양의 조화 때문이었다. 오장육부의 기가 떨어지면서 심장을 범한 건 틀림없지만 오랜 병상의 환자에게 무작위로 기혈을 올릴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심장은 불에 해당하는 화(火)이므로 상생하는 목(木)의 간장 기를 올리고 상극인 수(水)의 신장 기세는 오히려 잠시 낮춘 것이다.
기본 안배를 한 후에 심장 혈자리를 머리에 그렸다. 심장하면 단전이다. 단전을 잡지 않고 심장 치료에 들어가면 실패를 낳는 건 정해진 수순. 한의학에서의 ‘정신’은 단전과 개연성을 가진다.
‘관원은 하단전 뇌는 상단전...’
그렇다면 상초를 살려야했다. 그러자면 하초에서 기를 몰아 중초로, 상초로 몰아주어야 했다. 오장의 상태를 침감으로 파악했다. 신-폐-비-간장으로 이어지는 기혈의 조화가 심장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이제는 심장에서, 연결 장기들이 보내주는 기를 받아들여야했다. 제 아무리 좋은 기혈이 온다 해도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병이 될 뿐이었다.
‘심수... 5늑간 옆에서 많이 밀렸다.’
보통 사람보다 한 치 가까이 밀린 혈자리. 하지만 윤도의 손가락을 그걸 놓치지 않았다. 심수혈을 잡고 신당혈도 잡았다. 그런 다음 심장의 모혈로 불리는 거궐을 찌르고 심경에서 빼놓을 수 없는 신도혈도 장악했다. 이제 거궐혈에서 연결 장기의 기를 끌어들였다.
“......!”
침 끝에 걸려오는 기의 감각이 윤도 촉각을 세웠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연결 장기들의 기는 심장에 힘이 되지 못했다.
인체의 신비였다. 어떤 환자에게 일어난 일이라고 해서 모든 환자에게 적용되지 않는다. 더구나 이상균은 향정신성의약품을 너무 많이 복용했다. 아들 부부의 특별한 요청 때문이었다. 그건 원장의 처방이었다. 주치의는 월급 의사였으니 일상적 진료와 관리, 이상균 보호자에 대한 응대만 했던 것이다.
‘젠장!’
거기서 윤도가 벌떡 일어섰다. 서둘러 침을 뽑아버렸다. 시간을 의식하는 통에 너무 조급했다. 그렇기에 가장 기본이 되는 ‘비법침’을 빼먹은 것이다.
<축빈혈.>
거기 장침을 넣었다. 삼향투자침으로 효과를 재촉했다. 기의 순환이 두 번 돌기를 기다렸다. 그런 다음에 처음부터 다시.
리스타트!
윤도의 손이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오장육부의 모혈들에 장침이 들어갔다. 처음과는 다른 각도에서 넣었다. 그리고 마침내 장악한 심장의 모혈 거궐혈. 그 왕의 궁전에서 명을 내리자 폐와 간, 비와 신장의 기가 응답을 했다.
때를 맞춰 명문혈과 신수혈에 침을 넣어 하초의 기혈을 올렸다. 분위기가 조성되자 상초와 중초를 가르는 지양혈과 격수혈에서 지원군을 밀어주었다. 이후로 옥침혈을 잡았다. 뒤통수의 옥침혈은 틈새만 남았다. 그 문을 열어 하단전에 기를 보태는 동시에 뇌의 활력을 도왔다.
심장하면 단전.
뇌는 상단전.
이제는 그 상단전에 기를 밀어줄만 했다. 오장육부가 그럭저럭 균형을 갖춘 형세였다.
‘가자.’
곡지혈에 추가 장침이 들어갔다. 이 혈자리는 전체 혈자리에 대한 조절과 배합의 지원. 관원은 하단전이오 뇌가 상단전이니 두 단전의 조화를 이루려는 처방이었다.
스륵!
한순간, 환자의 목이 바로섰다. 눈동자에 비치던 광기도 눈에 띄게 내려앉았다. 입을 벌리고 혀를 보았다. 좋았다. 처음보다는 괄목할만큼 좋았다.
‘오케이.’
윤도의 몸이 후끈 달아올랐다. 치매 혈자리들이 비장하게 머리를 스쳐갔다.
<신문혈, 내관혈, 백회혈>
<신문혈, 중층혈, 구미혈, 백회혈, 후계혈>
몇 가지 조합에서 환자의 상태와 맞는 혈자리를 골랐다. 복도에서 다시 소음이 들려왔다. 이번에는 아들과 아내까지 온 모양이었다. 하긴 요양원장이라고 바지 의사는 아니다. 그가 적절한 조치를 했다면 윤도의 계산보다 빠르게 정신이 돌아올 일이었다.
“비켜요.”
아내의 목소리에 각이 섰다. 윤도는 듣지 않았다. 머리에 있는 건 오직 혈자리 뿐이었다. 이 환자의 치매를 한 방에 몰아낼 수 있는 혈자리...
신문혈에 장침을 넣었다. 영약을 묻힌 약침이었다.
내관혈에도 그랬다. 그 역시 약침이었다.
다음은 손의 후계혈이었다. 여기는 합곡에서 노궁을 거쳐 소부와 후계로 이어지는 일침사혈의 장침이었다. 마지막 조율은 머리의 백회혈이었다. 거기서 최후의 사투를 벌이는 순간, 병실 문이 왈칵 열렸다.
“이봐!”
아들이 핏대부터 올렸다.
“당신 우리 아버님에게 손 떼요. 경찰 부를 거예요.”
아내의 더 목소리는 높았다.
“이봐요. 보호자들이 반대하지 않습니까? 당장 내 병원에서 나가세요.”
원장도 거들었다. 사모님이 나서려했지만 아들이 눌렀다. 윤도 아버지는 입장 곤란한 탓에 안절부절할 뿐이었다.
“이봐요!”
아내가 다가와 윤도의 등을 흔들었다. 그 순간에도 윤도의 손가락은 백회혈에서 기혈조화의 마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안 되겠네. 원장님, 경찰 부르세요.”
아내가 원장에게 말했다.
원장이 전화를 걸었다. 결국 경찰이 출동을 했다. 그때까지도 윤도는 이상균에게서 손을 떼지 않고 있었다.
“경찰입니다. 같이 좀 가주셔야겠습니다.”
두 경찰이 윤도 팔을 잡는 순간, 닫혔던 윤도의 입이 열렸다.
“후우, 끝났습니다.”
윤도의 표정은 밝았다. 결국 진료를 끝내버린 것이다.
“뭐해요? 빨리 잡아가지 않고.”
아내가 소리쳤다. 하지만 윤도는 느긋하게 환자의 침을 가리켰다.
“미안하지만 침은 뽑고 가야할 거 아닙니까? 그리고 경찰관님들, 나는 한의사입니다. 한의사가 보호자의 요청을 받고 왕진을 나온 게 불법입니까?”
“......!”
윤도의 항변을 들은 경찰들은 뭐라 대답을 못했다. 윤도는 차분하게 발침을 했다. 넣은 침이 한두 개가 아니니 시간이 걸렸다. 물론 윤도의 계산이었다. 침 하나하나를 뽑을 때마다 환자의 기 상태를 점검하며 시간을 맞춘 것이다.
마침내 백회혈의 침을 뽑는 순간, 감겼던 환자의 눈이 초롱하게 떠졌다. 신침과 혼신의 치료, 그 앞에 불치병은 없었다.
“여보!”
사모님이 먼저 소리쳤다. 남편의 눈동자가 정상으로 돌아온 것이다. 수십 년을 함께 산 부부였기에 눈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어떻습니까?”
윤도가 환자에게 물었다.
“좋아요. 좀 나른하지만 머리가 맑아...”
“여보...”
사모님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그런데... 무슨 일인가?”
환자가 병실 풍경을 보며 말했다. 원장에 아들부부, 채혁수와 경찰관들... 이해하기 어려운 조합의 풍경이었다.
“실은 채 사장님 당신을 치료하려고 여기 채 선생님을 모시고 왔는데...”
사모님이 울먹이며 설명을 했다.
“그랬군.”
설명을 들은 이상균이 흐린 미소를 지었다. 그러더니 경찰부터 해결을 했다.
“나 때문에 수고가 많았군요. 두 분은 돌아가셔도 될 것 같습니다만.”
경찰은 군말 없이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