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장님.”
“쉬잇!”
정나현에 대한 두 번째 경고는 진경태가 대신했다. 다시 윤도의 손이 환자 눈 위를 오갔다. 환자의 시선이 손을 따라 움직였다.
“보이죠?”
“네... 보입...니...”
환자의 목소리는 조금 더 또렷해졌다.
“후우!”
맥이 풀린 윤도가 무너지듯 의자에 앉았다. 산해경의 영약은 성공이었다. 윤도의 장침 또한 성공이었다.
“와아!”
대기실에서 애를 태우던 조모와 이진웅, 그리고 엄 부장과 수행원들은 윤도의 통보와 함께 격한 환호를 울렸다.
“원장님, 제가 좀 봐도 되겠습니까?”
엄 부장이 소리쳤다.
“일단은 조모께서 먼저입니다.”
윤도가 그를 진정시켰다. 노모가 침구실에 들어섰다. 그리고... 침구실 안에서 또 하나의 기적이 이어졌다. 정신이 돌아온 손자를 본 조모가 엄 부장보다 높은 소리를 지른 것이다.
“아이고, 기택아!”
소리였다.
사실 윤도도 그게 어떤 상황인지 잘 몰랐다. 워낙 환자에만 신경을 쓴 까닭이었다. 하지만 조모 역시 충격으로 실어증에 걸렸던 상황. 그 실어증이 단숨에 사라진 것이다.
“회장님, 저 진웅입니다.”
이진웅은 복도가 떠나가라 전화를 걸었다.
“채 실장님이 또 한 번의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오라개발 정기택 대리, 정신이 돌아왔습니다. 말을 하고 사람을 알아봅니다!”
이진웅의 목소리는 점점 더 높아졌다.
“이 부장님, 고맙습니다.”
정 대리를 보고 나온 엄 부장이 이진웅에게 인사를 전했다.
“제가 아니고 우리 채 원장님입니다.”
이진웅이 인사의 방향을 고쳐주었다. 엄 부장은 윤도를 향해 허리가 부러져라 인사를 올렸다.
그로부터 30여분 후에 이 회장과 김 전무가 들이닥쳤다. 그때는 이미 정기택의 상태가 조금 더 좋아진 때였다.
“회장님!”
기혈조화를 위해 다른 혈자리에 장침을 맞고 있던 정기택이 상체를 세웠다.
“아아, 그냥 있게. 그냥...”
이 회장이 친히 정기택을 위로했다.
“고맙네.”
이 회장이 정기택의 손을 잡았다.
“아닙니다. 심려를 끼쳐 죄송합니다.”
정기택이 대답했다.
“채 실장, 정 대리 업무복귀 가능하겠나?”
이 회장이 윤도를 바라보았다.
“정신이 돌아왔으니 큰 문제 없습니다. 모르핀 때문에 저혈압이 좀 심한데 이신교제단과 영계출감탕 정도 합방해서 탕제 먹으면 곧 좋아질 겁니다.”
윤도가 대답했다.
“김 전무, 이 친구 몸 상태가 정상이 될 때까지 전사적인 지원을 아끼지 말도록. 조모의 건강도 함께 챙겨드리고.”
“알겠습니다. 회장님!”
김 전무가 지시를 받았다.
“회장님...”
감격한 정 대리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의 신분은 오라개발 대리. 본사와 독립된 법인체였으니 막말로 TS전자가 외면해도 그만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회복시켜준 것도 전사적인 지원 지시. 감격하지 않을 수 없는 정 대리였다.
“자넨 아무 걱정 말고 채 실장이 시키는 대로만 하게. 나머지는 내가 다 책임지겠네.”
“회장님...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정 대리에 이어 조모도 눈물을 훔쳤다. 알고 보니 정나현도 구석에서 울고 있었다. 진경태가 다가가 그녀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채 실장.”
김 전무가 다가왔다. 윤도는 그가 할 말을 짐작했다.
“오 이사님 모셔 오셔도 됩니다.”
선수를 쳤다.
“가능한가?”
“처음이 어렵지 두 번째가 어렵겠습니까?”
“고맙네. 정말 고맙네.”
“한의사로써 아픈 사람 고치는 수고는 당연한 일입니다.”
“말은 당연하지. 하지만 아무 의사나 하지 못하니까 이러는 거 아닌가?”
“대신 며칠 말미를 주세요. 일단은 정 대리님부터 완전하게 회복시킨 후에...”
“알겠네. 한 달이 걸리면 어떤가? 내가 정 대리 동영상 찍었는데 가면서 오 이사 가족에게 보여줄 걸세. 그 분들, 이 영상 보면 천국의 선물을 받은 듯 좋아할 거야.”
김 전무는 흥분 모드에서 헤어나지를 못했다.
올 때는 식물인간처럼 들 것에 실려 온 정기택. 갈 때는 휠체어에 앉아 인사까지 하고 갔다. 이제 걷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어!”
이 회장 일행과 환자를 보내고 돌아온 윤도, 대기실 테이블에서 시선이 멈췄다. 거기 배달음식이 있었다. 그제야 생각이 났다. 1차 시침 후에 먹기 위해 시켰던 바지락 칼국수. 그게 퉁퉁 불은 채 식어있었다.
“죄송해요. 원장님이 하도 몰입해 계셔서 말도 못 붙였어요.”
정나현이 고개를 숙였다.
“정 실장님이 왜 미안해요? 식사도 제대로 못 먹게 한 내가 미안하지.”
윤도가 얼굴을 붉혔다. 손도 안 댄 식사 3인분. 정나현과 진경태도 먹지 않은 모양이었다.
“식은 거 먹기도 그럴 테고 어서 가세요. 늦어서 미안해요.”
“쳇, 무슨 말을 그렇게 하세요? 기왕 시킨 거 먹고 가야죠.”
정나현이 그릇의 랩팡을 벗기기 시작했다.
“정실장님...”
“저 그렇게 의리 없는 사람 아니거든요. 게다가 오늘은 왠지 식은 음식도 별미 같을 거 같단 말이죠.”
정나현이 젖가락을 내밀었다.
“그럼 좋은 거 새로 시켜서...”
“에이. 음식 버리면 벌 받으니까 그냥 먹자고요.”
진경태까지 합세하자 윤도는 더 할 말이 없었다.
칼국수는 한데 엉겨서 잘 풀어지지 않았다. 그걸 풀려다가 국물이 튀었다. 서로가 그랬다. 그래도 별미는 확실했다. 칼국수 때문이 아니라 보람 때문이었다. 절망의 수렁에 빠졌던 모르핀 중독 환자. 그를 다시 세상으로 끌어내 가족 품에 돌려주는 맛이라니...
개업 첫날, 윤도의 하루는 역사가 되었다. 숨 돌릴 새 없이 몰아친 장침 내공. 거기에 더불어 숙제 같던 모르핀 중독 해결. 윤도는 불어터진 칼국수 대신에 보람을 먹었다.
호로록 호로록!
천상의 별미였다.
분명 그랬다.
신약新藥 파트너.
[신침 등장]
[원샷 명침]
[한의명의 지상강림]
한 주일...
환자들에 의해 수 많은 닉네임이 추가되었다.
그 한 주가 어떻게 갔는지 생각도 나지 않았다. 첫날부터 완판 매진을 찍은 윤도의 일침한의원은 한 주일 내내 숨 돌림 틈도 없이 돌아갔다. 둘째 날은 더 많은 환자들이 줄을 섰다. 셋째 날은 경찰까지 출동해 질서를 유지해 주었다. 넷째 날이 압권이었다. 마침내 밤을 새워 기다린 환자까지 나온 것이다.
윤도는 비상회의를 열었다. 이러다가는 불상사도 우려되었다. 몸이 좋지 않은 환자들이 밤을 새우면 부작용을 배제할 수 있었다.
<완전 예약제>
<고질병 전문 한의원>
대안과 함께 원칙을 정했다.
예약제는 무작정 기다리는 환자들을 위해서 필요했다. 아울러 고질병, 난치병 전문 표방 역시 피할 수 없는 길이었다. 신들린 명침으로 발목 삐거나 허리 삔 환자를 중심으로 진료할 수는 없었다. 그런 환자는 어느 한의원에서도 고칠 수 있다. 보다 난이도 높은 질환의 환자들에게 희망을 주는 게 옳다고 판단한 것이다.
TBS 방송국 뉴스팀의 신세를 졌다.
실상과 함께 운영 원칙을 뉴스로 부탁했다.
“장안에 명침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는 일침 한의원은 오늘도 환자들로 북새통을 이루었습니다. 개업 이래 날마다 고질병과 난치병을 고치며 신드롬을 이어가는 일침 한의원입니다. 환자가 몰리다 보니 한정된 의료 공간 문제로 차례를 기다리다 기절하는 경우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이에 원장 채윤도 한의사는 앞으로 부득 예약환자만 받겠다는 대책을 내놓았습니다. 날마다 화제가 되고 있는 명침 한의원. 앞으로는 예약제를 이용해 좀 더 편안한 진료가 되기를 바랍니다. 일침 한의원에서 TBS 박혜린입니다.”
뉴스가 나가자 예약제가 슬슬 자리를 잡았다.
다만 주 1회 오후와 토요일, 오후 6시 이후는 예외로 비워두었다. 쏟아지는 ‘특별의뢰’ 때문이었다. 그 의뢰의 시작은 장 박사 쪽이었다. 그의 능력으로 넘볼 수 없는 환자가 오면 윤도에게 전화를 했다. 다른 경로를 통해서도 의뢰가 줄을 이었다. 대개는 병원이나 한의원이 포기한 난치병과 불치병이었으니 따로 시간을 빼는 수 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도 장 박사에게 탕제 자문도 받았다. 탕제라면 현존하는 한의사 중에서 최고에 속하는 그였다. 갈피를 찔러둘 비방들이 많았다.
퇴근 무렵에 정나현이 침구실 문을 열었다. 윤도는 모르핀 중독자 정 대리에게 활력 시침을 하고 있었다.
“원장님, 손님이 오셨는데 어떡할까요?”
“손님?”
윤도가 돌아보았다.
“명함을 주시는데 제약회사 대표님이세요.”
“......?”
명함을 받아든 윤도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였다. 광희한방병원에서 치료한 폐암환자 류수완, 강외제약 대표...
한 번 만나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어디 계세요?”
“대기실에요.”
“제 방으로 모시세요.”
윤도가 지시를 내렸다.
정 대리의 침을 뽑았다.
“어때요?”
“가뜬합니다. 달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정 대리가 기지개를 켜보였다.
“탕약 잘 드시고요 너무 무리는 마세요.”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정 대리는 혼자 힘으로 일어섰다. 혼자 힘으로 걸었다. 이제는 모르핀의 독이 거의 사라진 그였다. 조금만 보신을 하면 일상이 가능할 정도였다.
조모가 다가와 선물꾸러미를 내놓았다. 받지 않으려 했지만 통 사정을 하는 바람에 받게 되었다. 정성을 다한 한과였다.
“채 원장님!”
잠시 후에 류수완 사장이 원장실로 들어섰다. 양복차림의 그는 병원에서 볼 때와는 또 달라보였다. 이제는 CEO 냄새가 물씬 나고 있었다.
“여긴 어떻게 아시고...”
윤도가 반가이 맞았다.
“대한민국 최고 명의가 가봐야 어디로 갑니까? 요즘 최고 뉴스 메이커시잖아요.”
“아무튼 반갑네요. 앉으세요.”
“활약이 굉장하십니다. 물론 당연히 그럴 실력이시지만...”
“퇴원하신 건가요?”
“선생님 덕분에 확 좋아져서 통원치료로 돌렸습니다. 회사 업무가 너무 밀려서 부탁을 했더니 조 과장님도 수락을 하시더라고요.”
“그래도 무리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실은 그래서 들렀습니다.”
“......?”
“죄송하지만 여기서 치료를 좀 받으면 안 되겠습니까? 광희한방병원도 좋기는 하지만 어차피 제 호전을 이끌어낸 건 선생님이었고...”
“그건 좀...”
윤도가 말을 아꼈다.
“사실 조 과장님께도 말씀드렸는데...”
“뭐라시던가요?”
“다른 데로 가는 건 안 되지만 채 선생님, 아니 채 원장님에게 가는 건 괜찮다고 하시더군요.”
“......”
“부탁합니다. 기왕에 빛을 보게 주셨으니 끝까지 책임을...”
“협박이시군요?”
윤도가 웃었다.
“살려면 무슨 짓인들 못 하겠습니까? 부탁합니다.”
“......”
“원장님.”
“기왕 오신 거 저희 한의원 구경 좀 시켜드려도 될까요?”
윤도가 말머리를 돌렸다.
“......”
“가시죠.”
윤도가 거듭 권하자 류수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진료 확답을 듣지 못했기에 밝은 표정은 아니었다.
윤도가 문을 연 곳은 약제실이었다.
“......!”
약제실을 본 류수완이 소스라쳤다. 안에 딸린 장비와 약재들 때문이었다. 흔히 보는 개인 한의원의 풍경이 아니었다.
“진 선생님, 오셔서 인사 나누세요. 강외제약 류 대표님이십니다.”
“안녕하세요?”
진경태가 다가와 인사를 올렸다 .
“반갑습니다.”
류수완도 맞인사로 답했다.
“저희 탕제와 약재관리 법제 등을 책임지신 진경태 선생님이십니다. 한약사신데 약재 보는 눈이 귀신 같으시죠.”
“그럴 거 같군요. 척 봐도 진열된 약재들이 최상급들입니다. 이제 보니 우리 채 원장님...”
절편 약재를 살피던 류수완, 잠시 생각하더니 뒷말을 이었다.
“한약 개발하고 계시군요?”
“......!”
윤도가 파뜩 반응을 했다. 아직 운도 떼지 않은 일. 안목 있는 개발자는 달랐다. 분위기만 보고도 알아채는 류수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