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1화 (61/265)

“매사에는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의술도 예외는 아니죠. 그래서 채 선생의 선택이 더 멋지다는 거예요.”

“이거 내가 두 번 뒤집어지는군.”

“단순히 환자 선택 때문에만 뒤집어지는 건 아니시죠?”

“맞아. 채 선생에게 이유를 물었더니 대답하더군. 폐암 환자의 혈자리가 최악이라 도전하고 싶다고.”

“역시 채 선생님이시군요.”

“이래서 늙은이들이 배척을 받는다니까. 잘난 경험으로 젊은이들을 재단하려는 못 된 관록병...”

“밥은 제가 쏠 테니까 마음 푸세요. 채 선생님의 가치관을 엿볼 수 있는 기회를 주신데 대한 보답이에요.”

“그게 또 그렇게 되는가?”

“저 몇 가지 지시만 마무리하고 내려갈게요.”

“오케이!”

장 박사가 일어섰다.

“......!”

전화 지시를 내린 부용이 종이를 집어들었다. 장 박사가 꺼낸 그 답지였다. 입가에 미소가 번져갔다. 그녀가 장 박사에게 한 말은 진심이었다. 부용은 자기중심이 반듯한 남자를 좋아했다. 실력이 있어도 오만한 남자는 싫었고, 실력도 없으면서 허세를 부리는 건 더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오늘 윤도가 한 선택은 더 할 나위 없이 좋았다. 도전하는 마음에 더해 은은한 향을 발한 인술.... 그건 윤도의 장침만큼이나 빛나는 선택이 분명했다.

‘당신이 택한 두 사람... 보란 듯이 치료해주세요. 이 이부용이 응원할 게요.’

가방을 집어들며 부용은, 진심으로 기원했다.

**

그 시간 윤도는 구석의 상담실에서 의학 서적을 섭렵하고 있었다. 윤도의 손가락은 신침을 놓는다. 신맥을 짚는다. 하지만 질병치료는 환자와의 피드백이었다. 치료가 중요하지만 기전을 알아야했다. 환자가 이해하도록 설명도 해야 했다.

그러자면 현대의학의 이론도 필요했다. 한의대에서 일부 배웠던 현대의학. 그것들을 한의학과 매칭을 시켰다. 환자에 따라서는 한의학의 용어보다 현대의학의 용어에 익숙한 사람도 많았다.

그런 다음 한의학 의서를 펼쳤다. 오늘은 옹저(癰疽)에 집중했다. 한의학에서의 옹저는, 적취와도 통하지만 인체의 안팎에 생기는 모든 종기의 통칭이다. 암도 여기에 속한다.

암!

건강 100세의 최대 장벽.

암 치료는 발생부위에 따라 치료방법을 달리한다. 옹저 치료과정과도 유사하다. 약재로는 복룡간, 국화, 황기, 인동덩굴, 백지, 참외씨 등이 나왔다. 새살이 빨리 돋지 않을 때는 백지를 필수로 꼽았다.

‘쑥...’

불에도 잘 타지 않는 종양덩어리가 쑥뜸에 의해 중심부부터 녹아 사라진다는 말은 기억에 갈피로 찔러두었다. 흔하면서도 요긴한 약재. 그게 바로 쑥이었다. 그렇기에 쑥은 단군신화에도 버젓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암에 좋은 혈자리 몇 개를 숙지했다. 폐와 뼈에 관련된 혈자리들이었다. 대거혈을 공부하고 공최혈을 다시 보았다. 공최는 원래 치질에 좋다. 하지만 항문이 백문(魄門)에 속한다는 걸 직시하고 돌아보니 백(魄)이 폐의 기므로 항문이 폐에 속함을 깨달았다.

따라서 공최는 폐경(肺經)이 되고 폐의 질병에 효과가 있었다. 격수와 간수혈도 주의 깊게 보았다. 병은 대개 격수와 간수 사이에서 발생해 다시 그 틈새로 돌아간다는 말 때문이었다.

경맥에 침을 놓으면 상승하고 낙맥에 침을 놓으면 하강한다. 같은 장침을 찔러도 경맥에 가는 것이 있고 낙맥에 가는 것이 있다. 그러나 모두 그런 것은 아니다.

윤도의 신침에 의하면 사람마다 차이가 났다. 그렇기에 인체는 저마다 하나의 우주였다. 그 우주의 조화를 이루는 침술이니 참으로 신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맥의 원리도 그랬다.

문맥은 36문으로 통한다. 질병은 이 문을 통해 드나든다. 침을 꽂으면 반응을 알 수 있다. 침의 깊이와 방향에 따라서도 영향이 달랐다. 문은 무려 36문에 이른다.

금문, 혼문, 은문, 기문, 충문, 액문, 아문...

문을 알 것 같았다. 맥을 짚으면 질환의 정도에 따라 반응하던 문들이었다. 침을 꽂으면 열리고 닫히던 문이 있었다. 문맥을 지배하면 질병을 지배할 수 있는 것이다.

거기까지 짚고 있을 때 상담실 문이 조용히 열렸다.

“선생님.”

안미란이었다.

“안 선생님.”

“과장님이 어디 가지 말고 대기 좀 부탁한다던 데요? 부인과 산모의 특별요청이래요.”

“부인과라고요?”

“마취제 부작용이 있는 산모가 지금 자연분만 대기 중이에요. 그런데 겁이 좀 많은 분이라 선생님을 콕 찍어 비상 시에 도와달라고 했다네요.”“저를요?”

“자궁근종 환자 소문이 쫙 돌았잖아요? 과장님이 약속했다고 체면 좀 세워달라셔요.”

안미란은 그 말을 남기고 문을 닫았다.

체면?

윤도가 피식 웃었다. 소문 때문에 바빠지긴 했지만 나쁘진 않았다.

‘다음은 폐암...’

이제 본론으로 들어갔다,

신수혈과 폐수혈, 중부혈 등이 꼽혔다.

골종양도 빼놓지 않았다.

‘천추혈, 경문혈, 신수혈, 명문혈...’

암에 좋은 양문혈과 종기의 명혈로 꼽히는 수삼리 역시 기억 갈피에 찔렀다. 필요한 자료를 재정립한 후에 신비경을 잡았다. 이제는 산해경에 영약채집을 갈 시간이었다.

물론 침이 우선이었다. 자궁근종에서 그걸 실현했다. 영약 굴거가 있었지만 장침으로 쾌거를 이룬 윤도였다. 하지만 이번 병자들은 암 환자들. 치료 방법이 있다면 마땅히 약재를 함께 써야하는 게 한의사의 사명이었다.

암에 쓸 수 있는 영약은 하나가 아니었다. 간단히는 산해경의 약수도 효과가 있을 수 있고 신목의 재료도 가능할 것 같았다. 자궁근종 때 확보한 ‘굴거’도 있고 종기를 낫게 하는 거북 ‘세발’도 있었다. 양도는 피부의 종기를 없애고 추어 역시 혹을 사라지게 한다. 거기에 나쁜 기를 없애고 온갖 독을 지배하는 웅황...

‘웅황...’

한방으로 치면 광물 약재였다. 영약 중에서 그게 마음을 끌었다. 아기 주먹만 한 웅황을 손에 넣었다. 이 또한 산해경의 점지라 생각되었다. 투박한 황금빛이었다. 너무 투박해 약이 될까 싶을 정도였다.

‘이제 좀 쉴까?’

…싶을 때 안미란으로부터 응급호출이 들어왔다.

“선생님 분만실로 빨리 좀 와주세요. 급해요.”

안미란의 소리는 비명에 가까웠다. 윤도는 책을 놓고 뛰었다.

땡!

엘리베이터 벨이 열렸다.

“이쪽이에요.”

복도에서 기다리던 안미란이 분만실을 가리켰다.

“아악!”

안에서 뒤틀린 신음이 새어나왔다.

“......!”

안에 들어선 윤도가 미간을 구겼다. 20대 후반의 산모였다. 자연분만을 하던 중에 응급상황이 발생한 상황이었다.

“아, 채 선생...”

부인과장과 조 과장이 윤도를 돌아보았다.

“마취침을 꽂고 자연분만 중이었는데 갑자기 난산이 되었네. 채 선생을 찾고 계신데 좀 봐주겠나?”

조 과장이 윤도 등을 밀었다.

“선생님...”

산모가 윤도 손을 잡았다.

“걱정마세요. 도와드리겠습니다.”

윤도는 산모부터 안심 시켰다.

“아이가 팔을 들었는데 그 자세로 자궁을 움켜쥐고 놓지를 않고 있네.”

조 과장 목소리가 초음파 영상을 가리켰다. 정말 아기가 팔을 펴고 있었다. 그 팔의 끝은 자궁의 한 쪽을 잡고 있었다. 그렇기에 탄생의 길로 내려오지 않는 것이다.

“어떤가? 수술실은 비워두었네. 방법이 없으면 바로 옮겨야 하네.”“잠깐만요.”

“채 선생...”

조 과장의 눈빛이 윤도를 재촉했다.

방법.

그런 게 있었다. 공부 좀 한 한의사라면 알 수 있는 묘방이 있었으니 바로 ‘합곡혈’이었다. 합곡혈은 손등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 사이에 자리한다.

거기에 침을 넣으면 손의 힘이 없어진다. 그렇게 되면 아기가 움켜쥔 것을 놓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아기는 엄마 뱃속에 있는 상황. 무슨 수로 배 안 아기의 합곡혈에 찌른단 말인가? 내시경을 넣고 보면서 자침한다 해도 엄두내기 어려운 일이었다.

“악, 선생님!”

다시 산모의 비명이 터졌다. 마취침으로도 감당이 안 되는 고통인 것이다.

산모.

뱃속의 아기.

합곡혈.

‘망침!’

윤도 뇌리에 침 하나가 스쳐갔다.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 말과 함께 윤도가 밖으로 뛰었다. 호기심에 가지고 있던 망침. 그거라면 합곡혈을 노려볼만 하다고 판단한 윤도였다.

“......!”

돌아온 윤도가 망침을 꺼내들자 안미란과 보조하던 간호사들이 소스라쳤다. 길이 때문이었다. 팔을 걷은 윤도는 먼저, 산모의 합곡혈부터 짚었다.

“주먹 좀 쥐어보세요.”

산모에게 요청했다. 윤도를 믿는 산모는 피범벅이 된 입술을 깨물면서도 요청에 따랐다. 산모의 주먹에 윤도 시선이 꽂혔다.

‘엄지... 검지...’

손의 형태를 파악하고 산모의 배에 집중했다. 그 배를 문지르며 아기의 위치를 잡았다. 신중하고 또 신중한 왼손, 왼손이었다.

맥을 짚듯 아기의 위치를 확인했다. 움켜쥔 손의 위치... 동시에 아기의 움직임까지 계산에 넣었다. 잠시 숨을 고르며 망침을 바라보았다. 길고 긴 망침의 끝에 시선이 닿았다. 두 과장과 안미란, 간호사들도 그랬다.

‘채윤도...’

왼손으로 목표물을 가늠한 윤도, 기도하듯 뒷말을 이었다.

‘넌 할 수 있어.’

그 말과 함께 망침이 산모의 뱃속으로 들어갔다. 거침없는 자침이었다. 긴 망침은 배 위에서 살짝 돌았다. 양손의 엄지와 검지를 동시에 동원한 협지식천피 자침법이었다.

한 번...

한 번 더...

침 끝은 배 안에서 두 번을 돌더니 활 시위를 당기듯 몸 밖으로 나왔다.

“압!”

자지러지던 산모의 비명은 거기서 그쳤다. 대신 간호사의 비명 같은 외침이 이어졌다.

“아기가 나와요!”

“......!”

두 과장의 입에서 안도의 숨이 나왔다.

“아기가 나왔어요. 공주님이에요.”

아기를 받은 간호사가 소리쳤다.

“고마워요. 선생님.”

산모 얼굴에 눈물이 홍수를 이루었다. 그 눈물은 윤도에게 바치는 감사였다.

“아닙니다. 많이 힘들었을 텐데 참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아뇨. 선생님이 오시니 됐어요. 무슨 병이든 고치는 명침이시라기에...”

“믿어주신 덕분입니다.”

윤도가 겸허히 답했다. 환자의 신뢰 덕분에 빨리 끝난 시침이었다. 만약 그 반대였다면, 그래서 산모가 몸을 움직이거나 요동을 쳤다면 굉장히 어려운 시침이 되었을 일이었다.

잠시 후에 강보에 싸인 아기가 엄마 품에 안겼다.

“우리 아가, 괜찮아?”

산모가 아기를 안고 울먹였다. 강보 사이로 드러난 아기의 손. 두 과장은 그 손목을 확인했다. 보였다. 아기의 합곡혈에 남은 뚜렷한 침 자국. 윤도의 침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합곡혈에 들어간 것이다.

“......!”

뒤에서 넘겨다 본 안미란은 기절 직전이었다. 이건 인간의 침술이 아니었다.

“채 선생!”

조 과장이 윤도 팔을 당겼다.

“네, 과장님.”

“산모의 합곡혈로 미루어 태아의 합곡혈을 가늠한 건가?”

“예, 아기는 엄마를 닮으니 비율에 따라 축소 시침했습니다.”

“역시...”

조 과장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차원이 다른 선택이었다. 부인과 과장 역시 엄지를 세워 흔들며 고마움을 전했다.

지옥과 천국의 공존.

이게 병원이었다. 어느 한편에서는 쾌차하여 퇴원하는 환자가 있는가 하면 또 한편에서는 갑작스러운 악화로 목숨이 위태로워지는 곳...

“선생님!”

윤도가 나오자 안미란이 뒤따라나왔다.

“네?”

“세상에, 선생님 사람 맞아요?”

“맞는데요. 남자 사람요?”

“말도 안 돼. 이런 건 전설에나 나올 법한 일이에요. 세상에...”

“그만 해요. 나도 조금 떨리긴 했으니까요.”

“이 망침 말이에요.”

그녀가 기다란 침을 들어보였다.

“그걸 가지고 왔어요?”

“이거 멸균해서 제가 기념으로 간직해도 되요?”

“그거야 상관없지만...”

“오늘 선생님 정말 굉장했어요. 진심 저의 레전드라고요.”

“안 선생님도 나중에는 다 돼요. 환자를 구하겠다는 마음이 강하면 기적이 내리거든요.”

“흐음, 기적이 아무에게나 내리나요? 명의로 등극된 조 과장님도 이런 건 못 하시거든요.”

안미란이 망침을 흔들었다.

윤도에 대한 안미란의 신뢰는, 길고 긴 망침의 길이만큼이나 깊은 모양이었다.

명의장침 하사불성何事不成-2

명의장침 하사불성何事不成-2

신새벽, 알람소리에 윤도가 잠에서 깨었다. 서둘러 세수를 하고 나섰다. 상세 진맥을 위해 일찍 나가야하는 윤도였다.

“지금 나가려고?”

거실의 어머니가 물었다.

“어머니는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나셨어요?”

“왜라니? 네 아버지는 벌써 나갔어.”

“......?”

시계를 보았다. 이제 겨우 새벽 5시 5분. 아버지의 일상은 여전히 전과 같았다. 그런 아버지를 생각하니 참 무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단함을 어깨에 달고 나갔을 아버지... 광고에서처럼 음료수라도, 혹은 한방차라도 한 잔 드리며 고맙다고 말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여유가 좀 생기면 피로회복 영약이라도 하나 가져다 드려야겠네.’

마음을 추스르고 집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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