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7화 (57/265)

중완혈이 시작이었다.

완(脘)이란 위를 뜻한다. 위 한복판에 위치한다 해서 붙여진 혈 이름. 중완혈은 기(氣)의 발전소이자 전체 장기의 조정자이기도 했다.

다음은 중극혈이었다.

귀래혈과 곡골혈이었다.

무아지경의 왼손이 혈자리의 잠을 깨웠다.

마지막으로 3일간 침을 꽂아온 관월혈자리 주변을 풀어주었다. 왼손의 할 일을 충분히 했다고 판단한 윤도, 장침이 부드럽게 피부를 뚫고 들어갔다. 한 마디로 ‘빨려’들어가는 모양이었다.

몰입과 집중. 그 경지에 이른 윤도였기에 장침은 환자의 기혈 흐름과 완전한 하나를 이루고 있었다.

‘으음.’

시침을 보는 순간 침구과장의 눈꺼풀이 살짝 떨었다. 3일 간의 시침과 달랐다. 미세하게 더 들어간 것이다. 대한민국 최고 한방병원의 침구과장답게 윤도가 남긴 1mm의 차이를 간파한 눈치였다.

1mm.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명의의 침이라면 혈자리 안에서 엄청난 차이를 낼 수 있는 경우의 수였다.

“악!”

환자 입에서 짧은 비명이 나왔다.

“몇 번 쥐어짜는 통증이 있을 겁니다. 그것만 참으면 됩니다.”

윤도의 시선은 오직 관월혈의 장침에 있었다.

“아악!”

환자의 비명이 높아졌다. 그걸 그녀의 변호인이 들었다. 응급실에 들어선 그가 고함을 지르며 뛰었다.

“지금 뭐하는 짓입니까?”

불짬뽕 땡기는 날-2

불짬뽕 땡기는 날-2

“치료 중입니다만.”

대답은 조 과장의 입에서 나왔다.

“치료라니? 의료소송 제기사안인데 무슨 치료요? 당장 물러나세요.”

“환자가 동의한 일입니다만.”

“동의요? 저렇게 고통스러워하는데 무슨 동의? 강제 동의나 위계에 의한 동의 아닙니까?”

“중요한 순간입니다. 그러니 잠깐 기다리시든지 아니면 나가시든지...”

“뭐야?”

“아니면 진료방해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악!”

실랑이 속에서 환자가 또 자지러졌다.

“유 사장님, 괜찮습니까?”

변호사가 환자에게 다가섰다.

“저, 저 좀... 저 죽을 거 같아요.”

“나쁜 사람들. 당신들 지금 의료과실 숨기려고 무슨 이상한 처방하는 거 아니야?”

변호사가 핏대를 올렸다.

“말조심하세요. 이상한 처방이라뇨?”

윤도가 응수했다.

“환자가 이러니까 그러는 거 아니오?”

“치료과정이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물러서세요. 당신은 법정에서 법조인이 아닌 사람의 참견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까?”

“그거야...”

변호사의 기세가 잠시 누그러졌다.

“일단 저부터... 다른 병원으로...”

환자가 손을 내밀었다.

“알겠습니다. 구급차 대기시켜요. 환자가 원하고 있어요.”

변호사가 다그치지만 윤도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잠시 헝클어진 상황. 하지만 윤도는 믿었다. 자신의 장침을...

“채 선생, 계속 할 거면 마취혈을...”

조 과장의 의견에도 윤도는 반응하지 않았다. 장침 한두 방이면 될 마취침. 윤도라면 식은죽 먹기일 마취침 시침을 왜 거절하는 걸까? 그때였다. 버둥거리던 환자 손이 겨우 경련을 멈췄다.

“사장님, 왜 그러세요?”

변호사가 물었다.

“배가...”

“배가?”

“안 아파요.”

“......?”

환자의 눈길이 하체로 내려갔다. 신기한 일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쥐어짜고 뜯는 듯한 통증이 서서히 가시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별 수 없이 윤도에게 향했다. 윤도가 다가와 그녀의 하체를 바라보았다. 사타구니 부근은 쏟아진 하혈로 흥건했다. 그러나 죽은 피였다.

‘나이쓰!’

윤도가 내심 쾌재를 불렀다. 침술은 성공이었다. 게다가 영약 없는 성공이었다. 일대 위기를 하나의 가능성으로 승화 시키는 윤도였다.

“자궁근종은 해결되었습니다. 마무리를 해드릴 테니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다른 병원으로 가시든, 제게 의료소송을 거시든...”

환자 앞의 윤도는 당당했다. 이제 그러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근종이 해결되었다고요?”

환자의 시선은 시원하게 쏟아진 하혈에 있었다.

“네.”

“그럼 이 피가?”

“근종의 뿌리가 빠진 겁니다. 그래서 출혈이 많이 나온 거고요.”

“......”

“그래서 부득 마취혈을 잡지 않았습니다. 마취가 되어서는 진행상황을 알기 어렵기에...”

“......”

“그 점은 양해를 바랍니다.”

“그럴 수가...”

“잠시 후면 배가 살짝 아플 겁니다. 상한 음식으로 뒤틀린 위장은 다 나은 게 아니거든요. 근종의 뿌리를 빼는데 내장의 요동이 나쁘지 않아 그냥 두었습니다만 원하시면 이제라도 마취침을 한 대 놓아드리겠습니다.”

“침...”

“참을만 하면 맞지 않아도 됩니다. 생리통의 통증에 비하면 별 거 아닐 테니까요.”

“......”

“......”

환자와 윤도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하체를 바라보았다. 말라가는 검붉은 피 뒤로 약간의 출혈이 이어지고 있었다.

“......!”

그녀가 문득 달력을 돌아보았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그날’ 이었다. 한 달에 한 번 찾아오는 마법의 날. 일대 소동 사이에 생리가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별로 아프지 않았다. 자궁을 쥐어뜯고 잘라내는 듯한 통증이 거의 없는 것이다.

“선생님.”

환자가 윤도를 바라보았다.

“말씀하세요.”

“저 지금 생리하는 거 같아요.”

“......”

“그런데 하나도 안 아파요. 나 약도 안 먹었는데...”

“......”

“선생님이 진짜 그 장침 하나로 제 자궁근종을 없앴나봐요.”

“약속드렸으니까요. 생리가 끝나면 근종의 잔여물 분비도 같이 끝날 겁니다.”

“약속?”

“확인해 보실래요?”

“확인이라고요?”

환자가 고개를 들었다. 안미란이 그녀를 안내했다.

환자는 바로 초음파를 찍었다. 자궁근종이 있던 부위는 풀썩 꺼져 있었다. 수수알을 뿌린 듯 빼곡하던 염증자리도 흔적만 남았다.

“세상에... 세상에...”

화상을 본 환자가 부들부들 떨었다.

기적!

그녀의 머리에 들어온 단어가 그게 아니면 무엇일까? 배석해 있던 윤도의 눈이 빛난 건 그때였다.

“유수미 님.”

“네?”

“아까 그 변호사 말입니다.”

“네...”

“불러다 제게 정식 사과를 부탁드립니다.”

윤도 얼굴에 카리스마가 서렸다. 치료에 집중하던 때와는 달랐다. 그때는 치료 중이었고 이제는 치료가 끝난 상황. 고질병을 고치는 과정을 참지 못해 의술을 무시하는 건 묵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울러 유수미 님도...”

“......”

“제게 사과할 일 없으십니까?”

“......”

“있을 텐데요?”

“죄송해요. 제가 선생님 지시를 어겼어요.”

그제야 환자의 고백이 나왔다.

“음식 말이에요. 명색이 요리사인 제가 차마 음식 잘못 먹었다고 말할 수 없어서... 어제 손님이 너무 밀려 밥 먹을 시간이 없다보니 구석에 밀어두었던 짜투리 초밥을 몇 개 집어먹었거든요. 그런데 그게 마침 잘못 되었던지...”

“저는 분명 무리하지 말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죄송해요. 음식점이라는 게 어쩌다 쉬는 날 꼭 단골들이 찾아와 어제 갔더니 문 닫았더라고 하는 머피의 법칙이 있는 바람에 문을 닫을 수가...”

그녀가 고개를 숙였다.

탓할 수 없는 일이다. 대한민국 자영업자 대부분이 그렇다. 음식에 의한 탈도 그렇다. 요리사라고 배탈나지 않는 건 아니다. 의사도 병에 걸린다.

“용서해 주세요. 주제에 자존심은 있어가지고 여러 선생님들 협박까지 하고...”

“변호사는요.”

윤도의 단호함에 변호사가 불려왔다.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그 역시 윤도 앞에 고개를 떨구었다.

“고질병은 환자와 한의사가 한 마음이 되어야만 합니다. 다시는 치료 중에 이런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

“사후 치료 스케줄은 조 과장님과 상의하시면 될 거 같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선생님...”

윤도가 진료실을 나왔다. 폭풍은 물러갔다. 조금 씁쓸한 마음도 있지만 이게 의료현장이었다. 공과를 모두 짊어져야 하는 곳. 그 병원...

딸깍!

휴게실 문을 열고 들어설 때 바쁜 발걸음 소리가 따라왔다. 돌아보니 환자 유수미였다.

“선생님.”

“......”

“다시 한 번 미안해요, 그리고 고마워요. 선생님께만 핑계를 대자면 생리 격통에 시달리다보니 그 때가 되면 무척 민감해지는 편이라서...” ”

“......”

“근간 저희 초밥집 초대할 테니까 과장님, 부원장님 모시고 꼭 와주세요. 선생님의 장침맛처럼 최고의 재료로 최고의 초밥 맛을 보여드릴 게요.”

“굳이 그러지 않으셔도...”

“아뇨. 꼭 그러고 싶어요. 오늘 일, 마음으로 사죄도 할 겸요.”

“......”

“선생님.”

“그러죠.”

윤도 입이 열렸다. 그런 초밥이라면 먹어줄 용의가 있었다. 환한 미소로 멀어지는 그녀의 모습이 초밥처럼 보였다.

꼬르륵!

배의 신호가 보낸 환상이었다.

‘기분도 전환할 겸 점심은 칼칼한 불짬뽕으로?’

금강산도 식후경이다. 게다가 아침도 거른 윤도였다. 생각난 김에 질렀다. 윤도는 혈자리를 짚듯 병원 근처 맛집을 차근차근 뒤지기 시작했다.

“저기...”

그때 안미란을 앞세운 송재균이 들어왔다.

“채 선생님...”

“네?”

대답하면서 놀랐다. 호칭 뒤에 ‘님’자가 따라붙은 것이다.

“괜찮으면 같이 점심식사라도...”

“식사요?”

“아까 소동으로 기분도 꿀꿀할 텐데 병원 뒤에 도가니탕집이 있잖아? 거기 맛이 개운하거든. 땡기지 않으면 다른 메뉴도 괜찮고...”

“......”

윤도가 대답을 주저했다. 그러자 안미란이 거들고 나섰다.

“같이 가요. 송 선생님이 특별히 쏘는 거예요.”

‘특별히?’

“솔직히 처음에는 신의네 명의네 하면서 띄워대니까 반감이 많았어. 게다가 연수받는다고 온 친구가 부원장님, 과장님하고 핫라인이고... 니가 그렇게 잘 났어 싶은 오기가 있었지.”

“......”

“하지만 나이트 때 일에 이어 이번 진료까지 보고 반했어. 나 완전 항복이야. 채 선생 침술은 100년에 하나 날까말까한 명의의 침술이더군. 그래서 그동안 뒤에서 뒤땅까고 씹어댄 거 밥 한 끼 쏘고 면제 받으려고 그러는데...”

송재균이 얼굴을 붉혔다. 그 안에서 엿보이는 얼굴은 군림하려던 레지던트 2년 차 얼굴과는 많이 달랐다.

“웬만하면 받아주지. 우리 송 선생이 누구한테 꼬리내리는 거 처음이거든.”

거기서 또 한 사람이 끼어들었다. 말년차 레지던트 마혁이었다.

“나는 S대 떨어지고 한의대로 왔지만 송 선생은 수시에서 S대는 물론이고 U대까지 합격하고도 온 사람이거든. 워낙 자부심이 강하다 보니 가끔 후배들에게 세게 대하곤 해. 반면 유유상종이라고 인재들끼리는 서로 통한다니 받아들이는 게 어떨까?”

마혁의 지원사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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