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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장 박사의 원장실 문을 열자 요정들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한둘도 아니고 무려 일곱이었다. 일곱 명이 한 팀을 이룬 걸그룹 해피 프레지던트가 먼저 도착해 인사를 해온 것이다.
“부용 씨.”
놀란 윤도가 부용을 바라보았다.
“해피 프레지던트예요. 요즘 군통령으로 불리며 군인들에게 인기 상한가인데... 아, 선생님은 같은 병역의무지만 공보의를 하셔서 잘 모르시겠군요?”
“예...”
“얘들 한 번 떴다 하면 최정예 기계화 7군단이나 막강 해병대도 픽픽 쓰러져요. 예쁘지 않아요?”
부용이 일곱 요정을 가리켰다.
“안녕하세요.”
요정들은 다시 한 번 매력적인 포즈를 취하며 인사를 해왔다.
“하핫, 채 선생 때문에 나도 눈 호강하고 있네. 한 20년은 젊어진 것 같아.”
장 박사가 악수를 청해왔다.
“번거롭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아닐세. 이런 번거로움이라면 일 년 365일 대환영일세. 우리 직원들도 좋아서 난리들이라니까.”
“환자는 이 녀석이에요.”
부용이 키가 훤칠한 멤버를 앞으로 끌어냈다. 자태는 두말 할 것도 없이 여신 강림이었다. 복부 통증으로 얼굴이 해쓱함에도 윤도 혼을 쏙 뽑아갔다.
“침구실로 가실까?”
장 박사가 윤도에게 물었다. 윤도가 끄덕 인사로 답했다. 여직원이 윤도 가운을 가져다주었다. 그녀 역시 좋아 어쩔 줄을 몰랐다. 인기 연예인 고객. 그건 많은 분야에서 잘 나가는 상징이 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일부 업종에서는 리베이트까지 제공하면서 유치하려는 현실이었다.
“너희들은 여기까지.”
침구실 앞에서 부용이 요정들을 막아 세웠다.
“연하에게 기를 보태줘야하는데...”“맞아요, 대표님. 연하는 쟤 겁 대따시 많아요.”
멤버들이 애교신공을 펼치지만 부용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오히려 옵션 하나가 더 붙었다.
“병원 진료 방해하지 말고 휴게실에 가서 얌전히 착석, 품위유지, 잡담금지. 알았어?”
“네에...”
멤버들의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그걸 보자니 훈련소의 조교들이 생각나 풋 웃었다. 짧은 훈련소 시절이었지만 조교의 위엄과 엄숙함을 잊지 못하는 윤도였다.
“저기요.”
돌아서는 아이돌 멤버들을 윤도가 불렀다.
“네?”
“침 겁나죠?”
“네에!”
멤버들은 단어만으로도 몸서리를 쳤다.
“그럼 여기서 지켜보세요. 친구에게 힘을 주면서...”
“와아!”
멤버들이 환호했다.
“선생님.”
부용이 윤도를 돌아보았다. 윤도가 그 귀에 대고 사박사박 속삭였다. 설명을 들은 부용이 고개를 끄덕였다. 간접 경험으로 침에 대한 공포를 없애자는 거였다.
<채윤도 침은 안 아프다.>
저들이 나가 연예계에 소문을 내주면 소속사 연예인들 침 놓는 일이 수월해질 수 있었다.
“시작할까요?”
환자를 안정 시킨 후에 맥을 짚었다. 그녀의 맥이 윤도의 손가락 끝에서 파닥거렸다. 젊은 까닭이다. 하지만 복부 쪽에서 기약 없이 무너진다. 탈장이 제법 진행된 상황에 장폐색까지 겹쳤다.
‘창만...’
창만은 배가 붓고 단단해지는 질환이다. 부종과 다른 점은 배만 붓는 게 특징이었다. 복수나 장협착, 장폐색 등을 모두, 한의학에서는 창만으로 부른다. 이 병의 원인은 많았다. 결석, 장벽의 종기, 신경기능의 이상, 스트레스 등이 꼽힌다.
배를 눌러보았다. 단단했다.
“목이 평소보다 건조하죠?”
윤도가 환자에게 물었다.
“네...”
“여기 아파요?”
이번에는 배를 누르며 물었다.
“네. 대따시 아파요.”
환자가 인상을 구겼다.
‘실창이군.’
윤도는 원인을 알았다. 오랜 불규칙 식사와 스트레스가 주원인이었다.
“밥 제 때 안 먹죠?”
“예...”
“얼마나 그랬어요?”
“한 2-3년... 연습에 몰두하다 보니...”
“탈장이 빈번하다 보니 장폐색이 온 거예요. 앞으로 귀찮아도 식사는 제때에 하고 된장, 고추장 등의 장(醬) 종류는 피하세요. 마음 느긋하게 먹고 쉬는 시간에는 음악도 안 듣는 게 좋아요.”
“예...”
“침은 금방 끝납니다.”
“옷 벗어요?”
환자가 물었다. 발랄한 흰 면티에 핑크빛 미니스커트 차림. 침을 맞는 데는 큰 무리가 없었다.
“안 벗어도 돼요. 티 좀 끌어올리세요.”
윤도가 대답했다.
옷을 올리자 환자 배가 볼록 솟아 보였다.
“어머, 똥배.”
멤버 하나가 배를 보고 놀렸다. 원래는 명품 일자근육이었을 배. 풍선처럼 부풀어 있으니 환자가 얼굴을 붉혔다. 아이돌 체면을 구기는 장면이었다.
“쉬잇!”
부용이 주의를 주자 침구실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통제불능에 재기발랄한 그녀들도 부용의 말에는 절대적이었다.
‘어떻게 할까?’
침묵 속에서 혈자리를 생각했다. 뒤틀린 혈자리는 세 곳이었다. 배꼽 주변의 천추혈과 다리의 족삼리, 그리고 상거허혈...
“선생님.”그때 환자가 모기 소리만하게 웅얼거렸다.
“네?”
“침 많이 맞아요?”
“아뇨. 그렇지는 않습니다.”
“저 한 방만 맞으면 안 돼요? 대표님 말씀이 선생님 침은 매직 마법침이라던데... 그럼 한 방만 맞아도 되지 않나요?”
환자가 흰 손가락 하나를 세워보였다. 가냘파서 더 애절한 손가락이었다. 딱 한 방으로 끝내주세요. 말까지 하는 것 같았다.
“......”
“박연하.”
부용이 슬쩍 경고를 날렸다.
“아니, 괜찮습니다.”
윤도가 부용을 막았다.
“선생님.”
“한 방으로 하죠. 환자가 원하니까...”
“앗싸!”
환자가 쾌재를 불렀다.
“선생님.”
부용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한 방으로 해보겠습니다.”
윤도가 웃었다.
사실 윤도가 생각한 혈자리는 세 곳이었다. 하지만 어린 친구들이 침이나 주사를 싫어하는 건 하느님도 아는 일이다. 그렇기에 침이 들어갈 때마다 멤버들이 어머, 어머 하고 경기를 하게 할 마음은 전혀 없었다. 반대로 참관자들을 매료 시킨다면 이부용 사단과 연예계에 저절로 홍보가 될 일이었다. 지켜보는 머릿수가 무려 여섯이 아닌가?
‘일침으로 간다!’
윤도가 마음을 굳혔다. 회심의 조력군이 있었다. 산해경에서 얻은 배설물의 뼈가 아니라 갈매도였다. 거기서 이미 장현서의 장경색을 잡아본 윤도였다. 똑 같은 케이스는 아니지만 도움이 될 일이었다.
선택은 천추혈이었다. 셋 중 상황이 가장 나쁘지만 잡기만 하면 즉빵의 효과를 기대할 만 했다.
차분하게 천추혈의 혈자리를 탐색했다. 배가 부어올라 쉽지 않았다. 심연 저 아래의 신호 같은 혈자리. 하지만 윤도의 손가락은 기어이 심연 아래의 탐지에 성공했다.
톡!
장침을 넣었다. 처음에는 절반이었다. 세밀하게 기를 조절하며 단계적으로 밀어넣었다.
0.1mm.
0.2mm...
침이 깊어지자 탈장이 꼼지락 반응을 했다. 환자의 복부도 살짝쿵 움직였다. 좌로 우로 침을 조절하니 탈장이 조금씩 얌전해졌다.
‘여기로군.’
세팅이 되었다고 생각한 순간에 남은 부분을 다 넣었다. 뒤틀린 혈자리들이 도미노처럼 제 자리를 찾는 게 느껴졌다.
꿀럭!
잠시 후 뱃속에 진동이 이나 싶더니 탈장이 제 자리로 물러섰다. 숨통을 조이 듯 좁혀졌던 장의 구멍도 서서히 열렸다.
‘됐다.’
침 끝으로 전해오는 반응으로 감을 잡은 윤도가 혼자 쾌재를 올렸다. 배의 긴장이 빠지는 게 보였다. 약속대로 단 한 방의 침으로 탈장을 제 자리로 돌린 윤도였다.
원샷!
흥분을 밀어낸 윤도의 호흡이 신중해졌다.
‘부디...’
기도와 함께 장침을 두 손으로, 동시에 돌렸다.
피시시이.
사기(邪氣) 빠지는 느낌이 왔다. 소리 없는 소리, 사기가 새어나오는 소리... 윤도만이 들을 수 있는 소리... 확인이라도 시키려는 듯 부풀었던 배가 차츰 가라앉기 시작했다. 일침즉쾌, 아이돌들 앞에서 그것을 이루는 윤도였다.
“대표님, 연하 똥배가 없어졌어요.”
멤버 하나가 소리쳤다.
“쉬잇!”
부용이 주의를 주지만 멤버들은 놀라움을 참지못하고 웅성거렸다.
“어때요?”
윤도가 환자에게 물었다.
“끝난 거예요?”
그녀는 배부터 확인했다. 불룩 솟구쳐 짜증과 통증의 원인이던 볼륨이 보이지 않았다.
“어머!”
“아파요 안 아파요?”
윤도가 배를 눌렀다. 아까는 손가락만 닿아도 자지러지던 곳. 이제는 별 고통을 모르는 그녀였다. 진맥으로도 확인이 되었다. 가출했던 장은 제 자리로 돌아갔고 막혔던 부위의 혈자리들도 시원하게 열려 있었다.
“우와, 안 아파요. 선생님.”
환자가 환호를 했다.
“오늘은 푹 쉬고 내일부터 움직이세요.”
“저 연습해도 되는 거예요? 공연할 수 있는 거예요?”
환자가 재차 물었다.
“물론이죠.”
“우와, 대박. 우리 대표님 뻥이 아니었어. 선생님, 고마워요. 너무너무 고마워요.”
감격한 환자가 윤도 품에 안겨버렸다. 이제 요정으로 돌아온 걸그룹의 리더. 그 화사함을 품으니 정신줄이 아득해졌다.
“야, 너 진짜 안 아팠어?”
멤버들이 환자에게 물었다.
“하나도. 나 진심 침 맞는 줄도 몰랐어.”
“진짜?”
“그렇다니까.”
“와아.”
멤버들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윤도 입가에도 미소가 돌았다. 부수적 목적까지 달성이었다. 뒷줄의 부용이 팔짱 사이로 엄지를 세워보였다. 최고예요. 그녀의 엄지가 말했다.
“선생님 저도 실은 발목 아픈데 그 마법 침 좀 놔주시면 안 돼요?”
“저도요, 저는 어깨가 아파요.”
“저는 옆구리에 한 방 부탁해요.”
몇 몇 멤버들이 자청을 하고 나섰다. 그녀들은 큰 질병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장침 한 방으로 끝났다. 대신 진맥 때는 조금 시간을 끌었다. 예쁘니 진맥 핑계로 손이나 주물럭거리자? 아재들의 저렴한 작태가 아니었다. 맥으로 파악되는 몸매와 생김새 때문이었다. 전부터 조금씩 감이 오던 진맥에 의한 체형 파악. 조금 더 신경을 써보니 얼굴 형태까지 파악이 되었다. 윤도의 진맥도 침술처럼 진화 중이었다.
“선생님, 짱!”
“최고예요.”
아픈 곳이 감쪽 같이 낫자 멤버들은 신기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작은 관절염이나 근육통이라 매니저나 트레이너에게 말하지 않았던 애로사항. 윤도가 말끔히 씻어주었다. 뜻하지 않게 아이돌과 장침 파티(?)를 연 윤도였다.
그렇게 침통을 수습하려할 때였다. 난해한 주문 하나가 들어왔다. 멤버 하나가 맨 뒤에서 주저하던 멤버를 민 것이다.
“야, 너도 거기 아프잖아? 말씀드려봐.”
“......”
윤도 앞으로 밀려나온 멤버는 얼굴만 붉혔다. 그녀를 민 멤버가 윤도 귀에 속삭였다.
“얘는요 가슴이 아프대요. 우리끼리 있을 때는 브래지어도 벗는다니까요.”
소위 유방통이었다.
“침으로 안 돼요?”
“되죠.”
윤도가 대답했다. 당사자가 부끄러워할까봐 웃지는 않았다. 유방통에는 천종혈이 좋고 전중혈도 가능하다. 그녀의 상의를 걷었다. 가슴이 큰 멤버였다. 어린 소녀라 안개처럼 뽀얀 가슴골이었다. 그녀의 등날개 뒤 천종혈에 장침을 넣었다.
“어머!”
침을 뽑자 그녀의 표정이 밝아졌다.
“괜찮아?”
그녀를 밀었던 멤버가 물었다.
“응, 안 아파.”
침을 맞은 멤버가 두 팔을 움직여 가슴을 출렁여 보였다.
“선생님!”
기쁨에 취한 멤버들이 윤도를 덮쳤다. 일시에 매달려 종종거리고 뽀뽀까지 날리며 융단폭격을 해왔다. 인증샷도 엄청나게 찍었다. 아무렇게나 눌러도 화보가 될 미모들. 갈매도에서 할머니 할아버지를 주로 상대하던 윤도. 아이돌 스타들 품에서 심쿵심쿵 볼만 붉게 물들어 갔다.
일침즉쾌 And 일침양득.
단 한 혈자리로 난해한 탈장을 바로 잡아버린 윤도. 환자도 고치고 어린 연예인 친구들의 선입견도 살포시 녹여내는 순간이었다.
명당 터에 꽂히다.
명당 터에 꽂히다.
“여기에요.”
돌아가는 길, 부용의 차로 경복궁역 가까운 북악산에 들렀다. 한의원 건물로 내정된 기와집이었다. 건너편 길목에 화암 한의원이 보였다. 초현대식 3층 건물이 아주 독특해 보였다. 그 앞에 방송국 차가 있었다. 인기 절정의 한의사답게 오늘도 촬영을 하는 모양이었다.
장 박사의 한방병원에서 나오면서 부탁도 남겼다. 대학한방병원 연수였다. 인턴도 아니고 레지던트 수련도 아닌 상황. 더구나 유명한 한의사거나 외국인도 아니었으니 느닷없는 연수가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윤도는 비굴하지 않았다. 장 박사가 윤도에게 부채를 지고 있는 까닭이었다. 차관의 호의를 받게 해준 일은 결코 작은 사건이 아니었다.
“부탁드립니다.”
요청하는 윤도는 신침의 품격을 잃지 않았다.
“걱정 마시게. 광희한방대학병원 진료부원장이 내 후배잖나? 차관님 일도 있고... 내가 무조건 밀어넣어 주겠네.”
장 박사는 거물답게 토를 달지 않았다.
기와집의 정원에 들어서니 공사 관계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몇 있었다.
“부용 씨.”
윤도가 부용을 바라보았다.
“선생님 마음 변하실까봐 급 매입하고 공사착수 지시했어요. 한 번 보세요.”
“전광석화로군요.”
“제가 엔터테인먼트 사업을 하다 보니 배팅 타이밍을 중요시해요. 이런 배팅은 바로 저질러야 하는 쪽이죠.”
“......”
추진력도 확실한 부용이었다.
“감독님.”
부용이 현장감독을 불러 윤도에게 인사를 시켰다.
“이 집 진짜 주인이세요. 모시고 공사과정 설명해주세요.”
“아, 신침을 놓는다는 그 분이시군요? 안녕하세요?”
감독이 넙죽 인사를 해왔다.
“안녕하세요.”
“모시겠습니다. 이리 오시죠.”
감독이 안채를 가리켰다. 부용을 돌아보자 따라가라는 사인이 나왔다. 윤도가 감독 뒤를 따랐다.
“자재는 전부 자연친화적인 제품으로 들일 겁니다. 하다못해 기와 한 장도 조선시대 원판으로 주문을 넣었죠. 다만 자연향을 풍길 편백나무 내장재가 문제였는데 편백하면 일본산이 최고거든요. 하지만 이부용 사장님 말씀이 기왕이면 국산으로 찾아보라기에 전국에 수배 중입니다.”
“예...”
“여기가 진료실 자리입니다. 이 건물에서 햇빛이 가장 잘 드는 자리입니다.”
“좋네요.”
“그리고 여기가 한약연구방이 들어올 자리입니다. 옛날에 한의원할 때 한약재를 둔 곳이라더니 아직도 한약 향이 은은합니다.”
감독이 뒤쪽 공간을 가리켰다.
큼큼.
후각을 열어주니 정말 한약 냄새가 아련하게 끼쳐왔다.
“냄새 괜찮습니까? 마음에 안 드시면 향기업체를 불러다 지울 수 있습니다.”
“그냥 두세요. 어차피 다시 한약재 냄새가 밸 테니 기대되네요. 100년 전 한약냄새와 현재 한약 냄새의 만남...”
“그렇군요.”
다음으로 주거 공간을 구경했다. 한의원일 때는 일종의 입원실이었다. 설계도를 보니 간이 쉼터로 정해져 있었다. 잘 수도 있고 식사해결도 가능한 구조의 방이었다.
이날의 백미는 낡은 현판이었다.
一鍼貫病.
사랑채에서 만난 현판은 낡고 닳았다. 사진에서 본 그 현판이었다. 왠지 푸근하고 정감이 갔다.
“이건 치우지 마시고 잘 손질해서 제 진료실에 걸어주세요.”
윤도가 따로 부탁을 했다.
마지막으로 후원 구경을 했다.
“여기 생각보다 명당자리입니다. 이 황송만 해도 보기 드문 걸작이거든요. 잘만 가꾸면 한의원으로 괜찮을 거 같습니다.”
담장 앞의 기품어린 황송을 올려보며 감독이 말했다. 황송 뒤로 어깨를 겨루는 오랜 기와들. 그 위에 세월의 무늬로 내려앉은 푸른 이끼가 담담해서 좋았다.
명당자리.
그러고 보니 앞뒤의 소박한 정원과 건물이 부드러운 조화를 이룬 곳이었다. 뒤로는 북악산에 앞으로는 광화문. 중간에 청와대까지 한 눈에 들어왔다. 감독의 립 서비스만은 아니었다.
‘과분하네.’
윤도가 혼자 웃었다. 돈으로 치면 윤도네 집을 두세 번 팔아도 못 살 장소였다. 얼핏 보아도 20억대는 될 것 같은 대지...
윤도의 마음이 꽂혔다. 기대되는 건 약제분석실, 즉 연구방이었다. 약재 연구에 더해 약재 가공까지 할 수 있는 알찬 시설은 미량분석 등의 첨단장비까지 내정되어 있었다. 부용의 배포를 볼 수 있는 현장이었다.
“어때요?”
시찰을 마치고 나오자 부용이 물었다.
“굉장하네요.”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으면 말씀하세요. 감독님께 하셔도 되고요.”
“아닙니다. 만족합니다.”
“오늘 고마웠어요. 방금 현아 체크했는데 가뜬하다고 하네요. 덕분에 이번 공연은 차질 없이 진행될 것 같아요.”
“저도 고맙습니다. 이런 터를 찾아주어서...”
“선생님과는 비교할 수 없어요. 이깐 집터가 선생님 의술만 하겠어요?”
“......”
“선생님!”
“예? 대표님...”
“생뚱맞게 웬 대표예요? 그냥 부용이라고 하세요.”
“.......”
윤도가 입을 다물었다. 이제는 어엿한 엔터테인먼트 회사의 CEO. 갑자기 이름을 부르기가 부담스러워진 윤도였다.
“어머니가 언제 정식으로 식사 한 번 초대하고 싶대요. 가능할 때 시간 좀 내주세요.”
“그렇게 하죠.”
“그리고... 선생님 덕분에 건강을 되찾은 것도 고맙지만 제 투자를 받아주셔서 더 고마워요. 이제 선생님과 저는 한 배를 탄 거예요.”
“그렇네요.”
“우리 함께 멀리, 그리고 높이 가요. 이카루스처럼 높이 높이... 까짓 거 인생 뭐 있나요? 아무도 가지 못한 곳까지 올라갔다가 거기서 추락한다고 해도 두려울 거 없잖아요?”
부용의 마인드는 돌직구형 직진이었다. 시원시원해서 좋았다.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윤도가 그 손을 잡았다. 이제는 동업자의 손이었다.
마법의 손 채윤도.
거침없는 사업가 이부용.
두 이름으로 마주 잡은 손은 두려울 게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