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화 (38/265)

공로 제대를 명함-1

‘어쩐다?’

곰곰 궁리를 해보았다. 갈매도에도 경찰은 있었다. 그러나 한 명이고, 퇴직 직전의 고령이다. 전투 능력은 거의 없는 셈이었다. 거기에 비해 수배범 쪽에는 건장하고 무술 고단의 보디가드. 그렇다고 주민들을 동원하는 것도 굉장히 위험한 일이었다.

이런 경우에 대적할 수 있는 사람은 차명균 선장. 하지만 그는 바다로 나갔으니 소용이 없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윤도 뇌리에 한 사람이 스쳐갔다. 그 사람이라면 확실했다. 윤도는 그 길을 택했다.

“이제 됐습니다. 닻줄이 풀리는 바람에...”

그 사이에 남자가 돌아왔다. 노년의 코에서 다시 피가 흘러나왔다. 윤도가 지혈침 끝을 건드린 것이다. 출혈은 사람을 불안과 공포로 내민다. 그래서 작정한 윤도의 연출이었다.

“안 멈춥니까?”

남자가 초조하게 물었다.

“이게 침이 잘 먹히는 혈자리가 아닙니다.”

“아, 방송과 인터넷에서는 무슨 하늘이 내린 명의라더니...”

남자가 투덜거렸다.

“그럼 119 부를까요?”

윤도가 변죽으로 맞섰다.

“이봐요. 한시가 급한데 어느 세월에 119를 부릅니까?”

“그럼 좀 조용히 좀 하세요. 침이란 게 정밀과 정숙을 요하거든요. 환자의 상태와 나이, 날씨와 계절, 몸무게와 성별... 그리고 안정된 분위기...”

“우워어!”

“그리고 그렇게 옆에서 재촉하면 제가 불안해서...”

“아까는 심각하지 않다면서요?”

“그랬는데 이제 보니...”

윤도가 슬쩍 다른 혈자리를 자극했다. 그러자 노년의 사지가 벌떡벌떡 경련을 했다. 환자를 가지고 장난해서는 안 되지만 그래도 되는 인간이 이 환자였다.

“알았어요. 입 다물고 있겠습니다. 그럼 됐습니까?”

불안해진 남자가 입을 닫았다.

“좀 더 물러나세요.”

윤도는 괜한 트집을 잡으며 시간을 끌었다. 장침도 세월아네월아 혈자리를 찾아 들어갔다.

“아놔, 그렇게 놔가지고 어느 세월에... 이러다 그 분 죽어요!”

“이게 어려운 혈자리라고 했잖아요?”

“으아, 사람 미치고 환장하겠네.”

“자꾸 그럴 거면 나가 계세요.”

“명의라면서 그게 중요합니까? 빨리 어떻게 좀 해봐요.”

30분 쯤 지났다. 남자가 핏대를 올릴 때 선상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아, 이번에는 또 뭐야?”

남자가 신경질적으로 돌아설 때였다. 건장한 수사관 두 명이 좌우에서 뛰어들며 두 팔을 제압했다.

“당신들 뭐야?”

남자가 몸부림을 치며 물었다.

“검찰입니다. 배지용 씨죠?”

남자의 눈앞에 또 다른 팔이 신분증을 디밀었다.

‘검찰?’

“저 사람이 성동복이죠? 당신은 보디가드이자 운전기사고... 묵비권 있고 변호사 선임권 있습니다.”

철컥!

남자 손목에 수갑이 채워졌다.

“야, 돌팔이, 니가 신고한 거냐?”

그제야 상황파악을 한 남자가 윤도에게 눈을 부라렸다.

“미안하지만 돌팔이 아니거든.”

윤도가 응수했다.

“씨발, 아니기는... 침도 하나 제대로 못 꽂는 새끼가... 아, 어떤 똘아이 새끼가 저런 놈이 명의라고 소문을 내가지고...”

“아까 말했지 않아? 침이라는 게 때가 있고 분위기가 있는 거라고.”

“뭐야?”

“지금이 바로 그때지 아마?”

윤도가 성동복에게 다가섰다. 끝을 슬쩍 들어놓았던 용천혈의 침을 제 자리로 밀었다. 거짓말처럼 코피가 딱 그쳤다. 남은 두 개의 사신총혈에도 눈 깜짝할 사이에 장침을 넣었다. 윤도는 하나를 더 뽑아들고 남자를 바라보았다.

“잘 보라고.”

윤도의 장침이 백회혈로 들어갔다. 비스듬히 들어가 부드럽게 돌았다. 그러자 성동복의 몸이 꿈틀 움직였다. 윤도 손이 한 번 더 장침을 돌렸다. 이번에는 성동복의 눈꺼풀이 열렸다.

“회장님.”

남자가 소리쳤다.

“으...”

“회장님...”

“뭐야?”

상체를 세운 성동복이 윤도를 바라보았다.

“싸가지하곤. 뭐긴 뭐야? 당신 살린 한의사 선생님이지.”

철컥!

장성복의 손목에도 수갑이 장착되었다. 그 순간, 윤도가 남자를 향해 걸었다. 걸음을 멈춘 윤도가 보란 듯이 남자를 바라보았다.

“이래도 돌팔이일까?”

“잇!”

속은 것을 안 남자가 미친 듯이 불뚝거렸다. 그 힘이 어찌나 센지 제압한 수사관들이 휘청거릴 정도였다.

“이건 당신을 위한 증명.”

윤도의 장침이 남자의 혈자리 하나를 찔렀다. 그러자 남자가 풀썩 주저앉았다. 맥이 풀리는 혈자리였다.

“그렇게 버둥거리면 수사관님들 힘들잖아. 어차피 다 끝난 일 같으니 얌전히... 그리고 가면서 당신 회장에게 전해줘. 신장 배터리가 방전 직전이라고. 나이 까먹고 자꾸 방출하면 바로 저승이라고.”

말을 마친 윤도가 장침을 회수했다.

“......”

그제야 남자가 고개를 떨구었다. 윤도의 말처럼, 모든 건 끝난 후였다.

“고맙습니다. 외국으로 밀항한 줄 알고 있던 범인인데 이렇게 잡게 해주셔서...”

수사관이 인사를 전해왔다.

“아닙니다. 빨리 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용 검사님이 번개보다 빨리 가라는데 어떻게 꾸물거리겠습니까?”

수사관이 말했다.

용천규 부장검사에게 신고. 그게 윤도의 결정이었다. 그래서 시간을 끌었다. 윤도에게는 조금 위험할 수도 있지만 가장 확실한 길을 택한 것이다.

“검사님께 인사 전해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럼 저희는 이만...”

수사관들이 비상출동한 쾌속정으로 옮겨갔다. 그때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구경을 나와 있었다. 검찰 쾌속정을 보고 모여든 것이다. 세희도 있고 창승도 있었다. 이장과 어촌계장 등도 보였다.

“무슨 일이에요?”

세희가 걱정스레 물었다.

“수배범이에요. 수배를 피해 무인도에서 낚시꾼을 가장하고 있었나본데 사고가 나니까 119나 병원으로 가지 못하고 우리 지소로 온 것 같습니다.”

“수배범?”

“그 왜 성동복이라고 몇 천억 뿌리고 여중생 포함해 미성년자들 성매수한...”

“어머, 그 인간이었어요?”

세희가 자지러졌다. 섬 마을 사람들도 웅성거렸다.

“다친 데는요?”

“문제없어요. 검찰이 일찍 와주는 바람에...”

“와아, 채 선생님 진짜 대단하네요. 겁 안 났어요?”

“겁은요? 맥을 짚어보니 나이도 모르고 무리하게 방출해서 정기라고는 없더라고요.”

“어쩜...”

“아무튼 수고했어.”

창승도 한 마디를 거들고 나섰다.

사건 전말은 곧 알게 되었다. 성동복은 작은 어선을 빌려 무인도에서 은거하고 있었다. 지인을 통해 배를 확보한 덕분이었다.

검찰이 섬을 뒤지자 텐트와 조리기구 등이 나왔다. 물품 중에는 일본야동도 여러 편 있었다고 한다. 그 야동들도 죄다 로리타 쪽이었다. 도피생활을 하면서도 자가방출(?)을 계속한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갈매도가 또 떠들썩했던 것은 아니다. 그건 용천규 검사가 막아주었다. 공은 윤도에게 돌렸지만 언론노출을 최대한 피해준 덕분이었다.

표창이 덩굴 채 쏟아졌다. 안행부장관상, 복지부장관상, 검찰총장상에 이어 도지사와 군수 표창이 줄을 이었다. 여객선 인명구조와 중요범인 검거 공로였다. 표창장은 종이쪼가리에 불과했지만 윤도에게 행운의 다리가 되었다. 그 시작이 장백교 박사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

***

두 주 후에 지소로 전화가 걸려왔다. 태산만한 족쇄가 터지는 꿈을 꾼 날이었다. 두 개의 빛이 날아와 윤도 다리의 족쇄를 풀어주었다. 꿈이지만 시원했다.

“채 선생님요?”

전화를 받은 세희가 윤도에게 수화기를 넘겼다.

“채 선생.”

목소리는 장백교 박사의 것이었다.

“박사님.”

“요즘 아주 핫하시더군.”

“별 말씀을...”

“그건 그렇고 전에 내가 한 말 기억하시나?”

“예...”

윤도가 답했다. 별장에서 한 말을 이르는 모양이었다.

“다음 화요일 어떤가? 저녁에 저쪽 시간이 빌 것 같으니 서울로 올라와 주시면 좋겠는데...”

“그럼 월요일 첫 배로는 나가야하는군요.”

“왜? 문제가 있나?”

“같이 계신 분이 곧 이동할 예정이라 진료가 어떻게 될지 몰라서요.”

“채 선생도 아마 이동하게 될 걸세.”

“예? 제가요?”

“왜? 진짜 그 섬에서 평생 계시려나?”

“그건 아니지만...”

“다행이군. 거기서 뼈를 묻겠다고 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

“아무튼 화요일 오후에 서울에서 봄세.”

“잠깐만요, 박사님.”

“왜 그러시나?”

“박사님의 계획을 좀 알려주시겠습니까? 제가 서울에 가서 뭘 해야 하는지...”

“아, 내가 채 선생 의술에 매료되어 흥분해서 그걸 깜빡했군.”

“......”

“실은 노 차관의 아들이 뮤지컬 가수 지망생인데 목소리에 문제가 생겼다네. 연축성발성장애라고 들어봤나?”

‘연축성발성장애?’

그 또한 희귀병이다. 뇌와 성대를 연결하는 신경 손상으로 성대의 진동이 불규칙해지고 목소리가 떨린다. 한 마디로 가수가 꿈이라면 물 건너간 꼴이었다. 현재의 의술로는 완치가 불가능한 병이기 때문이었다.

“이 국장 쪽도 아내가 뇌염을 앓아 비슷한 상황으로 병원에 있네. 10여 년 동안 큰 차도가 없던데 둘 중 하나만 호전 시켜도...”

뇌염과 연축성발성장애.

둘 다 신의 영역에 걸치는 질병이었다.

“그도 저도 아니면 차관을 직접 공략해도 되네. 그 양반도 허리질환과 안검염으로 고전 중인 눈치거든.”

“알겠습니다.”

“너무 부담은 갖지 말게. 채 선생 실력이면 완치야 그렇지만 호전은 시킬 수 있는 걸로 보네만.”

장 박사의 전화가 끊겼다. 윤도는 한동안 수화기를 놓지 못했다. 군청의 인사이동이 오늘 내일 뚜껑이 열릴 예정이었다. 그게 월요일이 되면 난감하다. 자칫하면 창승도 없고 윤도도 없는 상황이 될 수 있었다. 날마다 일삼아 지소 출석부를 찍는 할머니들... 무책임하기는 싫었다.

그런데 윤도가 이동하게 될 거라는 건 또 무슨 말일까? 윤도가 보건소 본소로 가고 창승이 남는다는 건가? 그렇게 되면 겨우 회복된 관계가 더 악화될 수도 있었다.

수화기를 놓자 다시 전화가 울렸다.

“감사합니다. 갈매 보건지소 은세희... 어머.”

전화를 받던 세희가 자지러졌다.

“정말? 지금 열렸어?”

세희 목소리가 빨라졌다. 전화를 놓은 그녀가 컴퓨터 화면을 바꾸었다. 군 행정전산망이었다.

“어머!”

화면을 본 세희가 소스라쳤다.

“왜요?”

윤도가 물었다.

“인사 뚜껑이 열렸어요. 지소장님이 보건소로 들어가네요.”

“......”

“월요일 인사예요. 지소장님!”

세희가 내과 진료실을 향해 외쳤다. 창승이 바로 건너왔다.

“보세요. 지소장님, 보건소로 발령이 났어요.”

“그래요?”

창승이 화면에 얼굴을 디밀었다. 아주 흡족한 얼굴이었다.

“아, 공무원들이란... 어차피 이동 시킬 거면서 사람 진 다 빼고...”

창승은 한껏 여유로운 목소리로 뒷말을 이었다.

“스크롤 좀 내려봐요. 누가 여기로 오나 좀 보게.”

“알았어요.”

세희가 화면을 움직였다.

“임경석 선생님요.”

“크큿, 그 친구가 밀렸군.”

“어머!”

화면을 보던 세희 눈이 휘둥그레졌다.

“왜요?”

“우종경 선생님도 오는 데요?”

“예? 우 선생이 왜요?”

창승이 고개를 들었다. 우종경은 한의사다. 그렇게 되면 윤도까지 합쳐 한의사 둘에 의사 한 명. 합이 셋이 되는 것이니 군청의 공보의 TO 상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뭐 잘못 된 거 아니에요? 이동란에 채 선생 이름은 없던데...”

“그러게요. 인사팀에서 오타를 냈... 어머?”

아래 쪽을 살피던 세희가 그 자리에서 얼어붙어버렸다.

“또 왜요?”

“채 선생님...”

세희가 윤도를 바라보았다. 영문을 모르는 윤도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화면을 한 번 더 확인한 세희, 떨리는 목소리로 팩트를 전해주었다.

“채 선생님이 특별 소집해제자 명단으로 떴어요.”

“예?”

윤도와 창승이 동시에 반응을 했다. 특별 소집해제라면 제대? 모든 의무복무자, 그러니까 군의관까지 포함해 모든 군인들이 열망하는 그 제대?

그걸 확인이라도 시키려는 듯 세희 목소리가 한 단계 더 높아졌다.

“소집해제 맞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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