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내장을 향한 위대한 도전-3
“모양 좋게 1억 내세요. 보건 지소 진료비로 치면 몇 푼 되지 않지만 그런 식으로 계산할 일이 아니라는 거 아시죠?”
“......?”
진경태의 눈빛이 거기서 정지되었다. 꿈틀 흔들리는 미간도 보였다. 잠시 골똘하던 그는 산을 닮은 미소로 말을 이었다.
“선생 침은 과연 신선의 침인가 보군요.”
“......”
“1억을 모으면 '꼭'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진경태가 조용히 일어섰다. 그 손을 윤도가 잡았다.
“그때면 늦습니다.”
“......?”
“약재를 다루시니 모든 병에는 때가 있다는 거 알 거 아닙니까? 아저씨 눈은 오늘 내일이 아니면 안 됩니다.”
“하지만 나는 1억이 없습니다.”
“돈이 없다면 그만한 가치가 나가는 걸 내시면 되지요.”
“......?”
“이 섬에 온 후로 쭉 아저씨를 지켜보았습니다. 한의사는 아니지만 제가 닮고 싶은 사람이더군요.”
“하핫, 한 수 높은 한의사가 장터 약쟁이를 닮고 싶다고요?”
“한약사시잖아요?”
“그거야 다 부질없는 면허증이죠. 약사하고 한의사가 다 해먹는 세상이니.”
“죄송합니다. 다 해먹어서.”
“하핫, 그런 뜻은 아니오.”
“하긴 한의사라 해도 저는 아직 병아리입니다.”
“좋은 한의사란 짭밥 쌓인 한의사가 아니라 능력이 있고 인술을 베푸는 한의사입니다. 그건 절반 이상 타고 나는 거고요.”
“혹시 법제도 하실 줄 아시나요?”
“우직하게 했지요. 덕분에 돈 밝히는 한의사들에게 욕도 많이 먹었고.”
“1억은 이걸로 갈음하면 어떨까요?”
윤도가 계약서 한 장을 흔들었다.
“무슨 계약서죠?”
“법제까지 능통하시다니 제가 공보의 끝난 후에 혹여 한의원이라도 차리면 오셔서 도와주겠다는 계약서입니다. 물론 아저씨의 능력에 걸맞는 대우를 하겠습니다. 언제가 될 지는 모르지만요.”
“내가 그만한 가치가 있을까요? 더구나 요즘 한의원들은 전부 규격화된 한약재만 써서 한약사 채용하는 데가 많지 않는데...”
“규격화 될 수 없는 한약도 있지요. 아저씨만이 캘 수 있는 약도 있고요. 게다가 제가 진짜 신침의 능력이 있다면 다른 한의원들 처방을 카피해서도 안 되지 않을까요?”
“......?”
“눈이 보이거든 사인을 하세요. 선치료, 후사인입니다. 원하시면 년 중 일부는 직접 약초를 캐러 다니셔도 좋습니다. 시간이 되면 저도 동행하죠. 아저씨는 밑질 거 없는 장사입니다.”
“......”
“그럼 시작할까요?”
윤도가 장침을 꺼내놓았다. 진경태는 잠시 망설였지만 그냥 주저앉았다. 윤도의 진솔함에 마음이 열린 것이다. 윤도의 손이 맥을 짚었다.
장터에서 본 진맥은 잊었다. 병이란 어제와 오늘이 다른 것. 선입견은 내려놓고 처음부터 시작이었다. 녹내장에 연관된 혈자리는 많았다.
풍부혈도 있고 풍지혈도 있으며 통리와 합곡, 신맥에 간수와 명문혈도 관여한다. 특히 간수와 명문은 신침이 들어가면 봉사도 눈을 뜬다는 곳이었다.
그러나 눈병의 근본은 오장(五臟)이다. 원래 눈은 오장의 기운이 모여 사물을 본다. 동의보감에서도 눈동자에는 신장의 골수, 검은자위에는 간장, 흰자위는 폐, 눈초리에는 심장, 눈꺼풀에는 비장의 골수가 모여 있다고 적시하고 있다.
잠시 맥을 놓은 윤도가 물을 마셨다. 그 후에 한 번 더 확인에 들어갔다. 오장의 혈자리를 차례로 짚었다. 신중에 신중을 기해도 모자람이 없을 일이었다.
[오장 중에 간장.]
[턱관절과 경추의 미세만곡.]
진단이 나왔다.
‘역시 간경.’
눈병을 고치는 경혈은 간경이라고 해도 무방하다는 근거가 여기서도 확인되었다. 그러나 지엽적으로 확인된 병인은 의외의 경우였다. 턱관절과 경추의 미세만곡에 의해 시신경이 압박되어 차단된 것이다.
도무지 상관이 없을 것 같지만 이런 케이스도 많았다. 특히 턱관절 장애가 생기면 전신 질환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진경태의 녹내장을 잡으려면 근본에 속하는 간 기운을 돋구고 턱관절 교정과 경추까지 해결해야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원인이 결과를 낳는다.>
<결과를 바꾸려면 원인을 고쳐야한다.>
윤도의 의술이 조금씩 깊어지기 시작했다. 눈병이 났다고 눈에서만 해결책을 찾으면 안 된다는 교훈을 또 한 번 얻은 것이다.
“시침하겠습니다.”
병인을 찾았다. 그렇다면 이제 시도할 차례였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은 갖지 않았다. 성공확률은 낮지만 가능성 자체는 제로가 아니었다.
99%의 절망과 1%의 희망.
신침과 영약까지 갖췄기에 1%의 희망도 놓을 수 없었다. 우선 진경태의 눈을 가렸다. 허벅지 안쪽의 족오리 혈부터 잡았다. 간경이다. 일단 근본이 되는 물길부터 열려는 의도였다.
침의 위치는 원래 혈자리보다 조금 아래 쪽이었다. 맥으로 파악한 결과 그곳을 자극해야 최고의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계산을 얻었다.
그런데...
똑!
장침이 근육 안에서 부러져 버렸다. 소위 절침(折鍼)이었다. 침의 삽입 방향에 불거진 굳은 혈관에 걸려 부러진 것이다.
혈관뭉침도 뭉침이지만 윤도의 침 때문이었다. 현재 한의원에서 쓰는 스테인레스 재질이나 산프라티나 재질은 부러지지 않는다. 하지만, 윤도의 침은 마함철이 원료. 드물게 나오는 절침이 이 때문에 나온 것이다. 덕분에 혈자리를 막고 있는 혈관종의 위치를 알았다.
동강난 침을 뽑고 다른 장침을 뽑았다. 왼손 엄지와 검지로 뭉친 부분을 눌러 풀었다. 침의 각도를 틀어 장애물을 지나갔다.
혈자리를 장악한 윤도가 간의 기세를 자극했다. 눈병은 화(火)에 속한다. 그 불을 끌 수로를 열어주는 것이다. 오랫동안 닫힌 수로는 쉽게 열리지 않았다. 그 조절은 오직 침 끝과 윤도의 기. 끝을 왼편으로 감아돌리다 멈추고 오른쪽으로 절반 쯤 돌렸다. 미세한 울림이 손 끝에 전해왔다. 진경태의 녹내장은 왼쪽 눈. 그 반대에서 감이 온 것이다.
‘좋아.’
망망대해에서 반딧불 한 점, 혹은 다 닳아버린 배터리에서 한 점의 잔량을 만난 셈이었다. 거의 절망적이지만 없는 것 보다 나았다. 침 끝의 긴장을 유지하며 불빛을 쫓았다. 다섯 번, 열 번이 이어졌다. 오십 번 백 번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불빛이 ‘깜박’ 출렁이는 걸 보았다. 그 자리에서 침을 고정 시켰다. 족오리를 차고 오른 기세가 간까지 올라갔다. 재빨리 간경의 태충혈에 장침을 꽂았다. 발등의 혈자리에서 지원을 해주는 것이다.
이제는 국소적인 문제를 해결할 차례였다. 턱관절과 경추의 미세만곡이었다.
‘턱관절의 관장하는 협거혈...’
단 한 방.
장침이 들어갔다.
덜컥!
손가락 끝이 시원해지는 느낌이 전해왔다. 미세하게 불균형을 이루던 턱관절이 제 자리로 돌아갔다.
한 방 더.
이번에는 경추의 만곡혈이 타겟이었다.
덜컥!
어깨 역시 좌우의 조화가 맞게 되었다.
‘뚫렸다!’
윤도 의식이 꿈틀 흔들렸다. 마침내 닫힌 시신경의 수로를 열어버린 것이다.
‘후우!’
겨우 숨을 돌렸다. 옷은 땀으로 비빔이 된지 오래였다.
밤이 깊어갔다. 윤도의 시선은 오직 장침이었다. 녹내장은 시세포의 영역이다. 안압이 높아지면 시세포가 죽어나간다. 그것들이 다 죽으면 각막이식을 하는 수 밖에 없다. 다행히 그것들은 몇 개만 살아있어도 사물을 볼 수 있다. 윤도는 바랬다.
말라버린 혈자리에 들어간 물길. 그것들이 몇 개의 시세포만이라도 싹이 트게 해주기를. 그러기를...
“침 뽑겠습니다.”
신 새벽, 통보와 함께 윤도 손이 움직였다. 이 또한 무 뽑듯 쑥쑥은 아니었다. 몸 안의 기 평형을 고려해 발침 속도를 조절했다.
쉬이이!
혈자리에서 사기가 쏟아져 나왔다. 시신경에 남은 압력이었다. 이 찌든 압박을 뽑아내면 시신경에 활력이 돌 것 같았다. 하지만 기세로 보아 긴 시간이 필요했다.
영약 탁.
그걸 꺼내들었다. 질경이를 태워 환으로 만든 것이었다. 그걸 진경태 입에 물렸다.
“침으로 녹여드세요. 다 녹기 전에 삼키면 안 됩니다.”
우물우물!
환 빠는 소리가 방 안의 적막을 밀어냈다. 그 중간 중간 진경태의 미간이 일그러지는 게 보였다. 독한 맛 때문이었다.
“뱉으면 안 됩니다.”
윤도가 재차 주의를 주었다. 진경태는 꿀꺽 목울대를 가다듬고는 남은 내용물을 빨아 넘겼다.
“기분 어때요?”
윤도가 물었다.
“머리와 눈 주변이 시원해진 느낌입니다.”
진경태의 말에 맥을 확인했다. 약을 먹은 뒤의 맥은 어떻게 변하는가? 침만 넣었을 때와는 어떻게 다른가? 기연의 도움만 바라고 싶지 않았다. 윤도는 스스로 진화하고 있었다.
좋아.
좋아.
맥의 활력이 더 하는 게 느껴졌다. 경결 부위의 시신경에 활력이 돌고 근육의 움직임도 부드러웠다. 혈류 흐름도 좋고 간과 심장의 순환도 좋았다. 장침의 기세에 영약이 올라탄 것이다. 천군만마를 얻은 것이다. 얼마나 지났을까? 시신경의 움직임이 나아졌다 싶을 때 윤도의 입이 열렸다.
“붕대를 풀겠습니다.”
“......”
“천천히 눈을 뜨세요.”
“......”
“어떤가요?”
“......?”
진경태의 시선이 침통으로 향했다. 그는 오른쪽 눈을 감았다. 왼쪽이 실명이니 시력을 확인하려는 행동이었다.
“안... 보이는 데요?”
그가 시선을 들었다.
“......?”
“이게 침통인데...”
이번에는 정상이던 눈을 뜨고 물체를 확인하는 진경태.
“조금도 안 보인단 말인가요?”
“예...”
멀뚱거리는 눈을 보며 다시 맥을 짚었다. 눈 쪽의 맥에는 분명 힘이 실려 있었다.
“몇 번 감았다가 떠보세요.”
“이렇게요? 응?”
눈을 꿈뻑이던 그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진경태의 손이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벌떡 일어서더니 책상의 책을 잡았다.
“본초강목...”
윤도 책을 집으며 시선을 옮기는 진경태...
“이건 동의보감... 이건 황제내경... 이건 침구경험방...”
마지막으로 산해경을 집어든 진경태가 윤도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보입니다. 보여요!”
“......”
“내 눈이 보인다고요. 이건 선생님 핸드폰, 이건 노트북, 그리고 이건...”
닥치는 대로 집어 들고 흔들던 진경태가 고함을 멈췄다. 윤도가 그 손에 들린 물건을 냉큼 거두었다. 구석에 처박아둔 속옷과 양말이었다.
“선생님...”
“다행이군요. 자칫하면 돌팔이 취급 받을 뻔 했는데...”
“선생님!”
진경태는 그 자리에서 큰 절을 올렸다.
“왜 이러세요? 일어나세요.”
놀란 윤도가 진경태를 말렸다.
“고맙습니다. 영영 애꾸로 사나했는데... 그 한 눈마저 근시가 와서 좋아하는 약초도 오래 못 만지나했는데...”
마침내 눈물까지 글썽이는 약작두의 달인.
“주의사항 있어요. 자연인처럼 사시니 운동한답시고 역기 같은 거 들면 안 되고요... 이거 찍으세요.”
윤도가 계약서를 내밀었다. 진경태는 기꺼이 그 종이를 받았다. 그리고 약작두로 약재를 썰 듯 시원하게 사인을 해주었다.
“이거 받으시죠.”
두 눈으로 보는 진경태가 뭉치를 내밀었다.
“뭐죠?”
“큰 산에서 캔 대물입니다. 보기 드문 약초들이라 눈요기라도 하시라고 가져왔으니...”
뭉치를 여니 말린 송라가 나왔다. 윤도는 첫눈에 알았다. 보기는 허접해도 약성은 최상급이라는 걸. 아니나 다를까, 분석을 하니 中上품으로 나왔다.
산해경이 아니고는 최고의 퀄리티였다. 약재공부가 될 것 같아 덥석 받았다.
“고맙습니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인사를 하는 진풍경까지 연출하고 말았다. 진경태가 마음에 드는 윤도였고, 그런 윤도에게 마음을 준 진경태 한약사였다.
창 밖에서 그 어느 날보다 찬란한 아침 해가 밝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