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화 (19/265)

별장의 괴물-1

“선생님!”

세희가 윤도에게 다가왔다.

“예...”

“최고였어요.”

땀에 젖은 그녀가 엄지를 세워보였다. 그 손에 걸린 햇살처럼 윤도가 부드럽게 웃었다.

“저기...”

막 지소로 돌아가려던 참이었다. 사모님이 윤도에게 다가왔다.

“경황이 없었네요. 인사도 제대로 못했는데 차라도 한 잔 드시고 가시죠?”

“지소가 문 열 시간이라서요.”

윤도가 사양의사를 밝혔다.

“그럼 선생님만이라도.”

사모님은 완강했다. 결국 창승과 세희가 먼저 돌아가게 되었다.

“드세요.”

고풍스러운 테라스에서 차를 받았다. 방금 전 일촉즉발의 분위기와는 달리 차분한 향이 나는 차였다.

“한의사시라고요?”

“예...”

“저희 아들을 살렸습니다. 나중에 회장님이 오셔서 따로 인사를 드릴 겁니다. 지금은 중국에 나가계셔서...”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의사의 본분인 걸요.”

“아무튼 대단하시네요. 나이도 젊어 보이는데...”

“학교에서 배운 대로 최선을 다했을 뿐입니다.”

“이 섬에서 일하시면 공보의?”

“예.”

“명의감이시네요. 우린 우리 아들이 죽은 줄만...”

숨 가쁘던 순간을 상기한 사모님 눈에서 눈물이 나왔다.

“......”

“애가 스트레스가 심했어요. 그러더니 갑자기...”

“맞습니다. 아드님의 상태는 일종의 깊은 쇼크였습니다. 한의로 치면 음양의 조화가 완벽하게 어긋나 버린 상태였죠. 위에는 절단된 양기의 맥, 아래는 폭발한 음기... 다행히 양기가 음기 속으로 들어가 가닥을 남겼기에 망정이지 그 반대로 음기가 양기로 들어갔더라면...”

사망.

그 말은 소리없이 삼켜버렸다.

“그랬군요. 그래서 처음 본 의사 선생님은 죽은 거라고...”

“예. 그렇게 봐도 무리가 아니었습니다.”

“한의학 공부를 굉장히 많이 하셨나 봐요? 아까 저는 침술의 대가로 불리는 양주동 선생님을 뵈는 줄 알았습니다.”

“그 분을 아세요?”

윤도가 고개를 들었다.

한의학박사 양주동.

그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아깝게도 10여 년 전에 타계했다. 대학에서 교수들도 말했다. 양주동의 사망으로 대한민국 침술 진기의 맥이 끊겼다고.

“전에 제 잔병치레를 도와주셨어요. 저희 회장님도...”

“네...”

윤도가 고개를 끄덕일 때였다. 돌연 거실 쪽에서 괴성이 울리더니 와장창 집기 깨지는 소리가 울렸다.

“잠깐만요.”

사모님이 황급히 일어섰다. 하지만 그보다 더 빨리 날아온 게 있었다. 바이올린이었다. 그게 날아와 사모님 옆의 장식장 유리를 직격하며 엄청난 파편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윤도는 보았다. 깨진 유리 앞에 맨발로 선 여자.

하얀 잠옷차림의 20대의 여자...

여자의 입에서는 차마 입에 담지도 못할 소리가 여과 없이 흘러나왔다.

“야, 이 쌍년아. 왜 바이올린에 밥 안 줘? 너희만 처먹으면 다야?”

쌍년?

그림을 보니 사모님의 딸이다. 그러고 보니 별장의 전설로 불리는 여자였다. 응급환자 때문에 잠시 내려놓고 있던 소문의 그림자들이 고슴도치 가시처럼 빽빽하게 몰아쳐왔다.

‘별장에 공주가 산대.’

‘공주는 식물인간이래.’

‘공주는 정신병자래.’

완전 미녀래. 레알 추녀래. 공주는...

윤도의 시선이 여자와 마주쳤다. 여자는 엉망이었다. 산발한 머리카락 쯤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헐렁한 옷에 감춰진 라인은 기막힌 여자. 그러나 그 얼굴과 살은 온통 뜯기고 짓물러 판타지 속의 오크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의 흉물이자 괴물이었다.

“까하학!”

무방비인 윤도를 향해 여자가 날아들었다. 그건 정말이지 한 마리 살쾡이 같은 야성이었다.

“아가씨!”

가정부와 기사가 달려들어 여자를 잡았다. 여자는 윤도 어깨를 물었다. 마치 굶주린 좀비가 엉기는 느낌이었다. 가정부와 기사는 능숙하게 여자를 떼어냈다. 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닌 것 같았다.

“까아아!”

여자가 온몸으로 버둥거렸다.

“위험해요. 피하세요.”

기사가 소리쳤지만 윤도는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럴 뿐 아니라 허공을 휘젓는 여자의 손목까지 낚아챘다. 진맥을 보려는 것이다.

“만지면 안 돼요. 피부병에 전염성이 있어요.”

가정부가 외쳤지만 윤도는 손을 놓지 않았다. 명색이 의사였다. 피부병 따위가 대수일까? 게다가 모든 병이 다 옮는 건 아니었다. 맥이 건너왔다. 여자의 병은 하나가 아니었다.

“까하악!”

여자가 몸서리를 치자 손을 놓아주었다. 진맥은 이미 끝났다.

“내 바이올린. 내 바이올린.”

여자는 악을 쓰며 끌려갔다.

“카악!”

“놔, 놓으란 말이야!”

여자의 발악은 10여 분이나 이어지다 그쳤다. 잠시 후에 육중한 체구의 가정부가 돌아왔다. 가정부가 육중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녀는 가정부이자 보모, 간병인 역할로 보였다.

“잠들었습니다.”

가정부가 사모님에게 보고했다. 사모님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죄송해요. 잠든 줄 알고 식사 그릇을 챙겨내려 오는데 갑자기 뛰어들어서...”

“그만하면 됐어요.”

사모님이 손짓을 했다. 가정부는 허리를 굽히고 물러났다.

“물린 데는 어때요?”

사모님이 윤도를 바라보았다.

“괜찮습니다.”

“미안해요. 아들 때문에 잠시 소홀했더니...”

“저 분...”

“......”

“뇌신경 이상과 더불어 고질적 피부병이더군요.”

“네?”

사모님의 시선이 확 올라왔다.

“갑자기 엉기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진맥을 보게 되었습니다.”

윤도가 슬쩍 둘러댔다.

“그새 진단을 했단 말인가요?”

“죄송합니다. 허락도 없이...”

“......”

사모님의 눈이 뜨악하게 변했다. 돌발 사태로 일어난 행패. 그저 잠깐의 실랑이가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틈에 진맥을 했다니...

“딸이에요.”

물잔을 든 사모님이 처연하게 입을 열었다.

“......”

“들은 게 있나요?”

“그저 소문 몇 개를...”

“뭐라던가요?”

“동화 속 공주처럼 굉장한 미인이라고...”

“......”

“어떤 사람들은 또... 환상영화에 나오는 오크 종족처럼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추녀라고...”

“또요?”

“안개가 끼면 신새벽에 맨발에 잠옷 바람으로 해변을 걷는다고...”

“......”

“혹은 식물인간처럼 그저 숨만 붙어있다고도...”

“그게 다인가요?”

“예.”

“다 맞네요.”

“......”

“우리 아이...”

사모님이 물잔을 든 채 일어섰다. 테라스로 걸으며 말을 이어갔다.

“지금은 저래도 우리 부용이가 굉장한 아이였어요. 예일대에 합격했지만 동시 합격한 국내대학을 택한 심지 있는 아이였죠. 졸업 후에는 엔터테인먼트 회사를 만들어 세계 각국에 한류 돌풍을 일으켰는데 어느 날 갑자기...”

“......”

“과로가 원인이었어요. 일에 미쳐서 하루 20시간 이상 일을 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때 말렸어야했는데 에미 주제에 그걸 몰랐어요.”

사모님 시선을 해안으로 행했다. 눈의 물기를 숨기려는 모양이었다.

“......”

“처음에는 치료가 되는 줄 알았는데 재발을 했어요. 그 자괴감에 히스테리가 붙으면서 약물 부작용인지 피부병까지 따라왔어요. 양 박사님이 계셨다면 좀 달라질 수도 있었을 텐데...”

“사모님.”

듣고 있던 윤도가 사모님을 바라보았다.

“예?”

“따님...”

“......”

“제게 한 번 맡겨보시겠습니까?”

“네?”

“보아하니 서울의 최고 병원에서도 두 손을 든 거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 섬에서 요양을 하고 있겠지요.”

“......”

“양주동 박사님만큼은 아니겠지만 최선을 다해 살펴보겠습니다.”

“말했지만 우리 딸 피부병은 전염성이 있어요.”

“......?”

“그래서 간호사도 두 번이나 바꿨고 가정부이자 간병인도 네 명째지요. 이번에도 간호사가 그만 둔 사이에 이런 사고가...”

“......”

“그중 한 사람은 우리 딸 얼굴과 똑 같은 상태로 변했다고 하더군요. 선생님 표현처럼 환상영화 속의 몬스터처럼.”

“......”

“보상은 해줬지만... 그래도 해보시겠어요?”

“당연하죠. 의사는 환자를 가리지 않습니다.”

“의사?”

“따님이 그렇게 굉장한 열정을 가졌다면 더욱 더 병을 고쳐야하지 않겠습니까? 혹시 치료에 성공하면 따님을 돌보다 감염된 분도 치료할 수 있을 테고요.”

“가능성이 있어요?”

“의사는 길 없는 길도 가야한다고 배웠습니다.”

“......”

“사모님.”

“좋아요. 한 번 해보세요. 하지만 아니다 싶으면 바로 얘기하세요. 혹시라도 치료 중에 피부병이 옮으면 보상은 해드릴 게요.”

“알겠습니다.”

윤도가 일어섰다.

“언제부터 할 건가요?”

“내일부터 하겠습니다. 당장 시작해도 되지만 소독된 침도 부족하고 피부병 약도 준비해야 할 거 같아서요.”

“이 섬 보건지소에 피부병 약도 있나요?”

“만들어야죠.”

윤도가 조용히 웃었다.

“선생님, 다시 말씀드리는데 이 피부병은 아토피보다 지독하면서도 그와도 양상이 달라서...”

“따님, 진정제라도 놓았나요? 조용해 졌네요.”

윤도가 화제를 돌렸다.

“그랬을 거예요.”

“죄송하지만 제가 한 번 봐도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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