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1. 옥탑방 옥상 (완)
지원위성의 저장장치에는 지구연합에서 인기 있던 노래 일부가 파편화되어 들어 있다.
대부분의 음악 데이터는 예전에 사라졌다. 파편화된 상태로나마 찾을 수 있는 건 극히 일부분뿐이다.
그 데이터를 찾아 모으는 데 시간을 많이 투자하면 음악을 조금 더 복원할 수는 있다.
그런데 그 작업은 김수선이 지상에 내려와 있는 상태에서는 하기 어렵다.
이 지구의 여러 지역에서 즐기던 고대 음악은 상황이 달랐다. 그건 김수선이 따로 관리한 덕분에 제대로 남아 있고 기억도 하고 있었다.
김수선이 고대 음악 중에 두 곡을 복원했다. 그걸 현대에 맞게 편곡하는 건 구하니가 도와주었다.
그렇게 고대 음악 두 곡과 현대의 작곡가가 만든 음악 두 곡이 준비되었다.
구하니가 김수선에게 물었다.
“번역은요?”
“이미 끝났어요.”
“그럼 작업 시작할까요?”
고대 음악은 그 지역 고대 언어로 노래한 것과 한국어, 영어, 세 가지 버전으로 녹음했다. 현대 음악은 한국어와 영어 두 가지였다.
남미연이 놀러 와서 녹음 작업을 구경하면서 물었다.
“하니 씨. 원래 곡을 녹음할 때는 연습도 하고 부분별로 잘된 부분을 모으는 작업도 해야 하지 않아?”
“김수선 씨는 원래 한 번에 다 부르고 끝내요. 전에도 그랬어요.”
예전에는 팔찌형 통신기의 에너지 잔량 문제가 있어서 음성을 오래 보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때는 단 한 번의 시도로 녹음을 끝내야만 했다.
이제는 지상에 내려왔으니 그럴 필요가 없지만, 김수선은 여전히 같은 방법으로 노래하고 녹음했다.
예전과 다른 점도 있었다.
현대 음악 한 곡은 구하니가 피처링을 맡았다. 그건 서로 호흡을 맞춰야 해서 한 번에 녹음할 수는 없었다.
구하니가 그 곡을 녹음한 후에 녹음실에서 말했다.
“김수선 씨와 이렇게 같이 작업하니까 참 좋네요. 전에는 직접 대화할 시간이 없어서 아쉬웠거든요.”
남미연이 손을 들었다.
“밥 먹고 하자.”
구하니가 말했다.
“녹음 작업은 아직 안 끝났….”
김수선이 벌떡 일어났다.
“밥!”
“녹음은요?”
“지금 밥이 중요해요? 녹음이 중요해요?”
“당연히 녹음….”
“녹음은 밥 먹고 해도 되잖아요.”
남미연이 물었다.
“김수선 씨는 밥에 참 진심이다.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산 사람처럼.”
“오천 년쯤 못 먹으면 이렇게 돼요.”
“단군 할아버지 때부터 우리 민족이 그랬다는 거야? 에이. 그건 아니다.”
◈ ◈ ◈
김수선의 예전 뮤직비디오는 남미연이 최지석에게 부탁해서 맡겼었다. 이번 뮤직비디오도 최지석 감독이 맡았다.
최지석은 예전에 납치됐다가 선우현이 덕분에 무사히 구출된 일이 있다.
“김수선 씨의 뮤직비디오라면 당연히 제가 맡아야죠! 하하하!”
남미연이 말했다.
“이번에는 김수선 씨를 직접 만날 수 있어.”
“헉! 드디어!”
◈ ◈ ◈
최지석은 김수선을 만난 후에 호들갑을 떨었다.
“김수선 씨. 뮤직비디오에 직접 출연하시면 제가 진짜 잘 찍어드리겠습니다.”
김수선은 단칼에 거절했다.
“전 카메라 울렁증이 있어서요.”
“예?”
남미연은 김수선이 사까이와 용병들을 어떻게 박살 내는지 똑똑히 봤다. 그녀는 김수선에게 카메라 앞에 서면 안 되는 사정이 있다고 생각했다.
남미연이 말했다.
“최 감독. 뮤직비디오는 내가 하면 돼.”
“누님이요? 그러면 기사도 많이 나가도 반응도 쩔겠네요.”
“당연히 그렇겠지. 그러니까 오늘 안에 촬영 끝내자.”
최지석은 당황했다.
“네?”
“대본은 네 곡 다 준비해 봤다며? 그걸로 그냥 찍자. 밤을 새워서라도 해.”
“뮤직비디오 네 개를 오늘 하루에요? 누님 몸이 버티겠어요? 그러다 얼굴 상합니다.”
남미연도 거기까지 생각한 건 아니다. 구하니와 남미연이 녹음을 하도 빨리 끝내서, 자신의 전문 분야인 이쪽에서도 속도를 내고 싶었던 것뿐이다.
“어? 음…. 피부가 거칠어지면 안 되지. 내가 얼마나 공들여서 관리하는 중인데.”
“한 번에 다 찍는 것도 이상하죠.”
“한 번에 다 녹음하는 인간은 있더라.”
“네?”
“아니야. 그럼 한 곡만 먼저 찍자. 나머지는 나중에 상황 봐서 더 찍는 거로 하고.”
◈ ◈ ◈
김수선의 신곡이 발표됐다. 노래 자체는 네 곡이지만, 여러 언어로 발표된 것까지 세면 열 곡이었다.
김수선은 노래를 정말 잘했다. 곡도 좋았다.
인터넷에 반응이 곧바로 올라왔다.
- 역시 김수선. 노래 쩌네.
- 목소리도 좋고 감성도 좋고 표현력도 좋아요.
- 김수선의 노래에는 뭔가 가슴을 울리는 그런 게 있다니까요. 정말 최고죠.
- 뮤직비디오도 장난 아닙니다. 남미연이 이번에도 흰둥이와 함께 뮤직비디오에 출연했는데, 진짜 여신입니다. 여신.
- 남미연은 점점 더 젊어지는 것 같네요.
- R 크림을 매일 바른 덕분이라던데요.
- 그게 매일 바를 만큼 많이 구할 수 있는 거던가요?
- 톱스타잖아요. 방법이 있겠죠.
- 천호성은 뚜껑에 묻은 것까지 긁어서 얼굴에 바르는 사진 올렸던데요.
곡에 대한 관심도 많았다.
- 이번에도 고대 음악을 복원해서 부른 노래가 두 곡이나 있네요.
- 여기 달린 외국어 댓글 중에 그 이야기가 꽤 있습니다.
- 구하니가 피처링을 했네요? 잠깐. 그럼 둘이 만났다는 건가?
- 아무리 얼굴 없는 가수라도 관계자들끼리는 만나겠죠.
◈ ◈ ◈
남미연이 셋이서 밥을 먹은 식탁의 사진을 SNS에 올렸다. 구하니와 남미연은 정면에서 찍혔고, 김수선은 젓가락을 쥔 한쪽 팔만 살짝 나왔다.
- 어? 김수선이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이었군요!
- 당연한 거 아닙니까?
- 이게 김수선이 찍힌 최초이자 유일한 사진 아닌가요?
- 팔 한쪽만 찍혔지만요.
- 소매가 긴 옷을 입고 장갑까지 껴서 아무것도 짐작하지 못하게 하고 찍었네요.
고대 음악을 복원한 것에 반응을 보이는 전문가들도 있었다. 그 전문가들의 반응을 보고 달린 댓글도 있었다.
- 언어학자들이 김수선의 노래에 관심이 많다던데요. 고대의 언어를 현대에 완벽하게 복원한 언어학의 천재라고 하는데, 만날 수가 없어서 같이 연구를 못 한답니다.
- 고대 문화 쪽에서도 어떻게 그 시대 음악을 그렇게 완벽하게 복원했는지 궁금해한답니다. 그런데 역시 만나지 못해서 알 수가 없다던데요.
- 구하니한테 연락해서 약속 잡겠네요.
- 구하니도 연락을 쉽게 받아주는 사람은 아니죠. 방송국에서 섭외하기 힘든 톱스타 중 한 명이라던데.
- 그럼 남미연은요?
- 원래 콧대가 높아요.
◈ ◈ ◈
선우현이 옥탑방 옥상에서 김수선에게 물었다.
“이번 신곡은 망하지는 않았고?”
김수선은 스마트폰이 하나 생겼다. 선우현의 명의로 등록된 스마트폰이지만 실제로 쓰는 건 김수선이다.
김수선이 스마트폰 화면을 선우현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음원 차트 1등 찍었습니다만?”
“그래?”
“제가 노래를 잘하긴 하죠.”
“그럼 다음에는 나도 피처링에 참여할까?”
“참으시죠.”
“수선아. 내가 노래를 안 해서 그렇지….”
“선장님 노래 실력은 제가 아는데요?”
“그냥 해본 말이었어.”
김수선의 신곡 네 개 모두 음원 차트 10위 안에 들었다. 그중 하나는 1위를 찍었다.
김수선의 노래는 국내에서만 통하는 게 아니다. 외국 음원 사이트에서도 인기가 좋았다.
◈ ◈ ◈
미국 가수 제니퍼 그레이가 전호 호텔에서 R 크림 피부관리 서비스를 받으려고 한국에 들어왔다.
제니퍼가 태블릿 PC를 보며 말했다.
“김수선이 활동을 본격적으로 하나 봐.”
비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진에 모습을 조금이라도 드러낸 것도 처음이고, 다른 가수의 피처링을 신곡에 포함한 것도 처음이니까요.”
제니퍼가 손가락을 까닥였다.
“김수선한테 연락해서 나하고 일하자고 해.”
“어떤 일이요?”
“내 미국 투어에 데려가려고. 곡도 같이 만들고. 나도 고대 음악 하나 받고 싶어.”
“알았어요.”
그 연락은 기획사 스엔지를 통해 김수선에게 전달됐다.
김수선이 말했다.
“제니퍼가 많이 컸네.”
구하니가 물었다.
“아는 사이에요?”
“그건 아니고, 그냥 신인 때부터 관심 있게 지켜본 거예요. 별 흉한 꼴을 다 봤죠.”
“네?”
“아니에요. 어쨌든 안 해요. 내가 미국 투어를 왜 해요?”
“안 하실 줄 알았어요.”
제니퍼는 당황했다.
“거절했다고? 왜? 나 제니퍼 그레이야! 내가 연락했다고 확실히 말했어?”
“당연하죠.”
제니퍼가 씩씩댔다.
“김수선! 노래 좀 한다고…. 물론 잘하는 건 맞지만! 그래도 어떻게 내 제안을 거절해!”
“엘리자베스 켈리도 비슷한 제안을 했다가 거절당했대요.”
“아. 그래? 그 말을 들으니까 위안이 좀 된다.”
제니퍼는 궁금해졌다.
“그런데 왜 내 제안을 거절했대? 신인 가수한테는 정말 좋은 기회잖아.”
“가수는 취미로 하는 거래요. 본업이 따로 있어서 투어에 참여할 시간을 낼 수 없대요.”
제니퍼가 흥분했다.
“그 목소리로 가수가 본업이 아니라니! 그게 말이 돼? 도대체 본업이 뭔데? 지구라도 지키고 있대?”
“저도 모르죠. 김수선은 굉장히 유명한 언어학자니까, 아마 그 이야기 아닐까요?”
◈ ◈ ◈
방송국 예능 작가 안유정과 PD 박성훈이 게스트 섭외 문제를 놓고 회의를 했다.
그 두 사람은 선우현이 처음 지상에 내려왔을 때 충청도 산속 식당에서 구해준 사람들이다. 그때 안유정은 예능 막내 작가였고 박성훈은 조연출이었다.
박성훈이 말했다.
“우리 방송에 선우현 씨를 출연시키면 진짜 멋있는 액션을 찍을 수 있는데 말이야.”
“포기해요. 그 오빠한테는 말해봤자 씨도 안 먹혀요.”
“구하니 씨가 이번에 김수선 씨 노래에 피처링했잖아. 김수선 씨 섭외는 어때?”
“제가 하니 언니한테 찔러봤는데, 불가능하대요.”
“왜?”
“카메라 앞에 서는 거 안 좋아한대요.”
박성훈이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그럼 구하니 씨나 남미연 씨는….”
“둘 다 우리 예능에 나오기엔 급이 너무 높지 않아요? 이미지 관리 때문에라도 안 나올 걸요?”
박성훈이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물었다.
“그럼 흰둥이라도….”
안유정이 손뼉을 쳤다.
“아! 흰둥이는 잘하면 될 수도 있겠다.”
“진짜?”
“그런데 정식으로는 아니고, 내가 산책 데려간다는 핑계로 데리고 나와서 들고 튀면….”
“그거다! 흰둥이를 들고 튀는 부분부터 찍자!”
◈ ◈ ◈
선우현은 구하니, 남미연과 함께 기획사 스엔지를 만들었다. 구하니와 남미연이 각자 가수와 배우 파트를 책임지고, 선우현이 자본을 넉넉히 투자했다.
스엔지는 JXK가 망하면서 피해를 보게 된 사람들이 잠시 머물다 가라고 만든 회사다.
그런데 만들어놓고 보니 스엔지가 예상보다 잘나갔다.
큰 빛을 못 보던 가수들은 좋은 곡을 받고 지원도 충분히 받으면서 점점 이름을 알렸다. 남미연이 추천한 배우들도 스앤지에 들어온 후에 일이 잘 풀렸다.
예전에 주종환이 관리하던 걸그룹 피치소녀는 JXK가 망하면서 같이 사라질 위기에 처했었다.
그 피치소녀도 스엔지로 넘어온 후에 전보다 잘나갔다. 전에는 이름만 조금 알린 걸그룹이었는데, 이제는 제법 한몫을 했다.
스엔지에는 JXK에서 넘어온 연습생들도 많았다. 구하니는 그 연습생 중 몇 명을 뽑아 걸그룹 우주엔젤을 만들었다.
우주엔젤의 데뷔곡에 구하니와 김수선이 피처링으로 참여했다. 짧게 몇 마디씩만 들어간 것뿐이지만, 그것만 해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데뷔곡은 반응이 굉장히 좋았다. 음원 차트에도 진입했다. 1위는 언감생심이지만, 데뷔곡이 차트에 진입했다는 게 중요했다.
우주엔젤 멤버 네 사람이 스엔지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으며 말했다.
“통장 봤어? 우리 데뷔곡 수익이 벌써 들어왔어.”
“무슨 수익 정산이 곡 발표하고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들어와? 나 진짜 놀랐잖아.”
“연습생 때 들어간 비용을 제하지 않고 주는 건 메이저 기획사나 가능하다고 들었는데….”
“우리 사장님이 돈이 많잖아. 우리 활동비용도 회사에서 가져가는 몫에서 알아서 해결한대.”
“사장님한테 절하고 싶다. 아직 사장님 얼굴도 못 봤지만.”
“그런데 우리는 돈도 들어왔는데 여전히 구내식당에서 밥 먹네?”
“맛있잖아.”
“그건 인정.”
스엔지에서 피치소녀나 우주엔젤이 수익 배분을 어떻게 받는지가 알려졌다. 연습생들이 지원을 얼마나 빵빵하게 받는지도 소문이 났다.
게다가 가수 파트를 총괄하는 건 톱스타인 구하니다.
스엔지는 순식간에 아이돌 지망생들이 가고 싶어 하는 기획사 중에 한 손에 꼽는 회사가 되었다.
“스엔지에서 걸그룹이 나왔으니까 보이그룹도 하나쯤 나오지 않겠어?”
“연속으로 데뷔시키는 건 어지간한 회사한테는 무리 아닌가?”
“스엔지가 돈이 많대.”
“오디션이라도 봤으면 좋겠다. 뽑아만 주면 나도 잘할 수 있는데.”
◈ ◈ ◈
선우현이 옥탑방 옥상에서 하늘을 손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수선아. 우주왕복선을 손에 넣으면 저기로 올라갈 거지?”
김수선도 하늘을 보고 있었다.
“아니요. 지상에 와보니까 여기가 너무 좋아서요.”
“그럴 거 같더라.”
“선장님은 탐사대 선발대장이고 지원위성의 선장이니까 올라가셔야죠.”
“난 지상에서 마가 끼는 현상이 또 있는지 알아봐야지.”
“그래도 가끔은 올라갔다 내려오셔야죠? 지구연합과 연결이 됐는지 확인은 하셔야 하니까요.”
선우현이 하늘을 향해 뻗은 손가락을 옆으로 그었다.
“오천 년 동안 연결된 적이 없잖아.”
“그건 그렇죠.”
“그러니까 몇 년 뒤에 올라가도 충분해.”
“좋은 생각이십니다. 우리는 앞으로도 이렇게 쭉 지상에서 놀죠.”
옥탑방 옥상 문이 열리면서 박서윤이 들어왔다.
“우현 씨. 오늘 나리랑 만나기로 했는데 연락이 안 돼요.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거 아닐까요?”
선우현이 의자에 앉은 채로 말했다.
“수선아. 너 일해야겠다.”
“제가 설마 선장님만 놀게 두겠습니까? 일어나시죠?”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