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6. 모르쇠
남미연은 당황했다. 연기력이 좋아서 잡아떼는 건 잘했는데, 시나리오의 앞뒤가 안 맞았다.
“그게….”
구하니가 얼른 옆에서 끼어들었다.
“사까이가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걸 들었어요. 얼굴에 뭔가 덮어썼다고 했던가? 저희도 정확히 들은 건 아닌데, 그걸 듣고 짐작하는 거예요.”
형사팀장이 두 사람을 빤히 쳐다보았다. 믿음보다는 의심이 더 많이 깃든 눈빛이었다.
남미연이 더 뻔뻔하게 나왔다.
“설마 우리를 의심하는 건 아니죠? 우리는 피해자인데요?”
팀장이 표정을 바꾸고 얼른 손을 흔들었다. 납치 피해자인 유명 여자 연예인을 경찰이 오히려 의심했다는 소문이라도 퍼지면 뒷감당이 안 된다.
“아니요. 그냥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만 본 겁니다.”
형사가 다가왔다.
“팀장님. 좀 보셔야겠는데요.”
팀장이 대화 주제를 바꾸려고 얼른 물었다.
“뭔데?”
“범인이 아무래도 외국인 같습니다.”
“왜? 여권이라도 나왔어?”
“아니요. 얼굴이….”
팀장이 인상을 썼다.
“요즘 세상에 외모만 보고 어떻게 국적을 확신하냐?”
형사가 손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한 명이면 그냥 그런가 보다 하겠는데, 저쪽은 셋 다 그러니까….”
구하니가 얼른 말했다.
“그쪽 말고 저쪽에 좀 덜 다친 놈 말인데요. 사까이라는 놈이에요. 일본인이죠.”
형사팀장은 그 이름을 들어보았다.
“어? 사까이?”
“저를 납치 사주한 혐의로 수배 중인 그놈이 저놈이에요.”
“아! 그럼 저쪽 놈들도 외국인일 수 있겠군요.”
팀장이 형사에게 지시했다.
“관련 기관에 협조 요청해서 신원 파악해. 외국에서 용병이 들어왔을 수도 있어. 이거 사건이 원래도 컸는데, 조사할수록 점점 더 커진다.”
다른 형사도 다가왔다.
“팀장님. 이거 좀 보셔야겠는데요.”
“야. 이미 사건이 충분히 큰 것 같은데….”
“와서 보셔야 합니다.”
“이번엔 또 뭔데?”
팀장이 그쪽으로 걸어갔다. 바닥에는 범인들이 사용한 총기가 떨어져 있었다.
형사가 총의 단면을 가리켰다.
“엽총을 뭔가로 잘랐는데요. 좀 보시죠.”
팀장이 단면을 플래시로 비추어보다가 당황했다.
“어? 총이 왜 이렇게 깔끔하게 잘렸어? 이거 어디 공장에서 잘라온 거야?”
“잘린 단면만 보면 기계로 자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엔 그럴만한 기계가 없습니다.”
팀장이 펜션 앞마당을 보았다.
“설마 여기서 싸우다가 잘린 건 아니겠지?”
“만약 그렇다면 뭔가 대단한 특수 장비를 쓴 거겠죠.”
다른 형사도 다가왔다.
“팀장님. 범인들의 목이나 팔다리에 뭔가가 감긴 자국이 있습니다.”
“감기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채찍 같은 거로 감아서 꽉 조인 것처럼 보이는데요.”
“저렇게 구겨놓은 후에?”
“제가 보기엔, 싸울 때 그런 것 같은데….”
팀장이 눈을 껌벅였다.
“저놈들은 총을 가지고 있었어. 총잡이가 하나도 아니고 넷이나 있는데, 채찍으로 싸웠다고? 누가? 어떻게? 아니, 왜?”
“글쎄요?”
팀장이 답답한 얼굴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이 펜션에는 CCTV는 없냐?”
“없던데요.”
“환장하겠네. 여기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형사팀장이 남미연과 구하니를 돌아보며 물었다.
“혹시 이 사람들이 어떻게 싸운 건지….”
남미연이 딱 잡아뗐다.
“우리는 아무것도 못 봤다니까요? 방구석에 숨어만 있었어요. 진짜예요.”
구하니가 옆에서 그녀의 말에 맞춰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예요.”
◈ ◈ ◈
경기도 펜션에도 경찰이 도착했다.
충청도 펜션에는 사까이와 용병 셋만 배치되어 있었다.
반면에 경기도에는 청부업자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그들이 곽덕구의 주력부대였다.
그런데 그 청부업자들은 산에서 총에 맞은 상태로 발견됐다. 주변 상황도 난장판이었다. 총에 맞아 구멍이 나거나 부러진 나무가 수두룩했다.
경찰들은 난장판이 된 사건 현장을 보고 당황했다.
“전쟁이라도 터진 건가?”
“무장공비 아닐까요?”
경기도 쪽은 충청도 쪽보다 전투의 규모가 훨씬 컸다. 총에 맞은 놈도 많았고, 바닥에 굴러다니는 총도 많았다.
지원병력이 속속 도착했다.
경찰은 현장 상황부터 수습하느라 바빴다. 산 전체 수색은 아직 시작도 못 했다.
경찰은 현장 수습이 바빠서 피해자인 박서윤이 누구인지는 조사하지 못했다. 그녀의 이름은 확인했지만 신원 조회까지는 미처 하지 못했다.
박서윤이 형사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거실에 있는 저놈은 최근에 망한 기획사 JXK의 사장 천호균이에요. 구하니와 천호성 납치를 사주한 혐의로 수배된 인물이죠.”
“아. 저 새끼가 그 새끼군요.”
“그리고 저쪽에 있는 놈은 저를 납치하고 이번 일을 주도한 놈이에요. 아실 거예요. 덕구파 두목 곽덕구.”
형사가 그 이름을 듣고 깜짝 놀랐다.
“헉! 곽덕구가 저기 있습니까?”
“저기 쓰러진 놈이니까 확인해보세요.”
곽덕구는 지명수배자 중에서도 거물이다. 형사들이 곽덕구를 확인하려고 뛰어갔다.
형사 한 명이 곽덕구의 사진을 스마트폰에 띄우고 기절한 놈과 비교했다.
“곽덕구 맞습니다.”
“이 비탈길 아래에서 찾은 두 놈은 곽덕구가 경호원으로 데리고 다니는 조직원들입니다.”
고참 형사가 입맛을 다셨다.
“곽덕구가 드디어 잡혔구나. 이놈을 내가 잡았으면 특진인데.”
“우리는 줍기만 했는데 설마 특진이 나오려고요.”
“고과는 잘 나오지 않을까?”
“그거야 앞으로 수사를 잘하면 잘 나오겠죠.”
이곳에 있는 피해자는 박서윤뿐이다. 경찰 몇 명이 박서윤을 안정시키려고 의자를 가져왔다.
박서윤은 그 의자를 거절했다. 그녀는 똑바로 서서 두 손을 허리에 댄 채로 현장 상황이 어떻게 수습되는지 보고 있었다.
여자 경찰이 그녀의 손을 보며 물었다.
“혹시 총을 쏘셨어요?”
권총의 탄창이 텅 빌 때까지 쐈다. 박서윤은 순순히 인정했다.
“저를 지켜야 했으니까요.”
“총은 어디서 나셨어요?”
“천호균이 떨어뜨린 걸 주웠어요.”
“천호균은 왜 총을 떨어뜨렸죠?”
박서윤이 질문하는 경찰을 돌아보았다.
“지금 저를 취조하는 건가요?”
여자 경찰이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살짝 흔들었다.
“그건 아닌데, 총을 쏘신 이유와 과정을 알아야 해서요. 사건이 사건이라서….”
박서윤이 당시 상황을 빠르게 설명했다.
“천호균이 기절하면서 총을 떨어뜨렸고 저는 그걸 주웠어요. 그리고 저 자신을 지키려고, 저를 쏘려던 놈을 먼저 쐈어요. 한 발은 적의 방탄조끼에 막혀서 효과를 못 봤어요. 그놈이 바위 뒤에 숨어있다가 다시 저를 쏘려고 할 때 반격했어요. 그때는 어깨를 맞혔죠.”
“권총…. 잘 쏘시네요?”
“회사 거래처 중에 방산기업이 있어요. 그 회사와 미팅하다가 그곳에 있는 실탄 사격장에서 쏴봤어요.”
“네? 겨우 그 정도 경험만 했는데, 권총으로 방탄조끼와 어깨를 정확히 맞힐 수 있다고요?”
“많이 쏘니까 결국 맞더라고요.”
“아…. 네.”
그녀가 다른 걸 물었다.
“천호균이 기절한 이유는….”
“제가 턱을 걷어찼거든요.”
“네?”
“제가 발차기를 좀 해요.”
“그럼 혹시 천호균의 팔이 부러진 것도….”
엠투가 물어서 부러뜨렸다.
“그때는 맹수가 나타났어요.”
“네?”
엠투는 경찰이 도착하는 걸 보고 산으로 숨어든 상태다. 그래서 경찰은 엠투를 본적이 없다.
“아주 용맹한 맹수였죠.”
“혹시 곰….”
“전장의 하얀 악마라고 부르고 싶네요.”
“네?”
사건 현장으로 차가 몇 대 급하게 달려와 대충 주차했다. 차 문이 열리면서 사람들이 뛰어내렸다.
현장을 조사하던 경찰들은 살짝 긴장했다.
이곳은 총격전이 벌어진 곳이다. 갑자기 나타난 사람들을 보고 현장을 조사하던 경찰 중 몇 명이 권총에 손을 댔다.
차에서 내린 사람 중 하나가 손을 위로 번쩍 들며 외쳤다.
“스래곤에서 나왔습니다!”
“어? 스래곤?”
남자가 형사팀장에게 다가가 신분증과 명함을 보여주었다. 명함에는 스래곤 비서실이라고 찍혀 있었다.
차에서 내린 사람들은 남녀가 섞여 있고 연령대도 다양했다.
형사팀장이 물었다.
“스래곤에서 여기는 왜 왔습니까?”
박서윤이 말했다.
“우리 회사 사람들이에요. 제가 불렀어요.”
“아. 직원이 납치된 사건이라서 오셨구나. 스래곤은 좋은 회사네요. 그런데 그렇다고 회사에서 이렇게 많이 찾아옵니까?”
비서실 직원이 설명했다.
“우리 실장님이십니다.”
“실장이라니요?”
“비서실장님이십니다.”
“누가요?”
“옆에 계시잖습니까?”
“이분이요?”
“네.”
형사팀장은 깜짝 놀랐다.
“헉!”
경찰은 피해자 박서윤의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는 확인했지만, 아직 개인정보까지 신원 조회로 조사하지는 않았다.
형사팀장이 박서윤에게 물었다.
“왜 그 이야기를 안 하셨는지….”
“안 물어보셨으니까요.”
이미 파악한 사건 규모만 해도 대단히 크다. 총격전이 벌어졌고, 총에 맞은 놈도 많았다.
게다가 중요 수배자인 덕구파 두목 곽덕구가 이 사건의 주범이다. 덤으로 천호균도 있다.
“큰 사건인 줄은 알았지만, 납치 피해자가 스래곤의 비서실장이라니….”
형사팀장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이거 그럼 산업스파이 사건까지 얽혀 있는 건가?”
박서윤이 얼른 맞장구쳤다.
“저놈들이 자꾸 신기술을 요구하긴 했어요.”
◈ ◈ ◈
선우현이 충청도 펜션에서 꽤 떨어진 곳에 도착했다. 그 좁은 비포장도로는 너무 외진 곳이라 지나가는 차가 없었다.
선우현이 차에서 내렸다.
“이쯤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누군가 산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여기 맞네.”
그는 김수선이 산에서 내려올 때까지 차 옆에서 기다렸다. 김수선이 길가에 도착한 후에 물었다.
“선장님. 왜 이리 늦었습니까?”
“거기서 여기로 다이렉트로 오면 이상하잖아. 조금 돌아서 오느라 늦어졌다. 너는?”
“선장님을 오랜만에 만나는 게 반가워서 열심히 뛰어왔죠.”
“뻥 치지 말고. 네가 나보다 늦게 왔잖아.”
“강하 캡슐을 들고 다니다가 적당한 산에 파묻고 오느라 늦었습니다.”
선우현이 산을 보았다. 여기서 충청도 펜션 사이에는 산이 여러 개 있다.
“잘 숨겼지?”
“깊게 파고 묻었으니까 산사태만 나지 않으면 괜찮을 겁니다.”
선우현이 물었다.
“수선아. 들고 있는 건 뭐냐?”
김수선은 나무 넝쿨로 장비 몇 개를 칭칭 감아서 들고 있었다.
“우리 선체에서 지상으로 내려올 때 겨우 챙겨온 장비입니다. 이게 있어야 지상에서 지원위성의 상태를 확인할 수 있으니까요.”
“옷은?”
“옷이라니요?”
“장비는 가져오면서 옷은 가져올 생각이 안 들었냐? 그렇게 입고 돌아다니게?”
김수선이 입고 있는 건 우주복이다. 현대의 뚱뚱한 우주복과 달리 몸에 붙는 날렵한 디자인이다. 그래서 지상에서 보면 우주복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웠다.
그래도 평범한 옷과는 많이 달라 보였다. 그걸 입고 돌아다니면 시선을 심하게 끈다.
그렇다고 우주복을 벗고 다닐 수도 없다. 김수선의 우주복은 내부에 겹쳐 입는 옷이 따로 없다.
김수선이 대답했다.
“탈출용 강하 캡슐에 옷을 넣을 공간이 없었습니다만? 장비도 줄이고 줄여서 겨우 챙겨왔는데, 옷을 넣을 자리가 어디 있습니까?”
“장하다.”
선우현이 차 트렁크를 열어 청바지와 점퍼를 꺼냈다.
“내가 싸우다가 옷이 더러워지면 갈아입으려고 가지고 다니는 건데, 이거라도 입어라.”
선우현은 인상착의를 바꾸기 위해 이미 옷을 갈아입었다. 남아 있는 옷 중에는 펑퍼짐한 청바지와 조금 큰 점퍼가 있었다.
“이렇게 다 준비되어 있을 줄 알고 안 가져온 겁니다.”
“우리 수선이는 말은 참 잘해.”
“선장님을 보고 배웠습니다.”
김수선이 우주복 위에 옷을 껴입었다. 약간 어색하긴 했지만 몸을 가리기엔 충분했다.
김수선이 말했다.
“역시 지상은 물자가 풍부하군요. 나눠주는 옷인데도 땜빵한 자국이 없습니다.”
선우현이 마스크에 모자도 주었다.
“얼굴도 좀 가리자. 선글라스 쓰면 이상하니까 모자챙을 내려.”
김수선이 얼굴도 좀 가린 후에 물었다.
“이제 밥 먹으러 가나요?”
“너도 밥은 요즘은 부족하지 않게 먹을 텐데?”
“지금 우주식량이랑 지상에서 방금 요리한 밥을 비교하시는 건가요? 선장님은 그동안 좋은 거 많이 드셔서 이젠 배가 부르신가 봅니다?”
“지금 상태로 식당은 좀 그러니까, 가는 길에 편의점 컵라면이라도 먹자.”
김수선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컵라면! 관측 카메라로 많이 봤습니다!”
“일단 그걸로 때우고, 옥탑방에 가면 배달 음식 시켜줄게.”
김수선이 얼른 음식 이름을 읊었다.
“치맥에, 피자, 보족 세트에….”
“다 시켜줄 테니까 차에 타. 여기 오래 있어 봐야 좋을 거 없다.”
김수선이 장비를 트렁크에 넣었다. 선우현이 말했다.
“너는 남들 눈에 안 뜨이게 트렁크에 탈 거지?”
“오늘따라 플라즈마 커터가 고장도 안 나고 잘 작동하던데요.”
“당연히 농담이지.”
“농담 맞죠?”
선우현이 말을 돌렸다.
“뒷좌석에 타.그래야 노출 확률이 낮아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