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 파괴 천사
구하니와 남미연은 충청도 산속 펜션의 작은 방에 갇혀 있었다. 그 방은 본채가 아니라 따로 떨어진 별채라서 크기가 작았다.
그래서 사까이는 두 사람을 그곳에 가둬두면 편하게 관리할 수 있을 줄 알았다.
두 사람은 밧줄로 묶여 있었다. 두 손은 물론이고 상체도 의자에 묶인 상태라서 움직이기 어려웠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손이 앞으로 묶였다는 것이었다.
구하니가 묶여 있는 두 손을 남미연에게 내밀었다.
“제 팔찌 좀 비틀어봐요.”
그녀의 팔지는 가느다랗고 장식이 별로 없는 원형 팔찌였다.
남미연이 의자와 함께 콩콩 뛰어서 구하니에게 다가가 팔찌를 잡았다.
“이렇게?”
원형의 팔찌를 힘껏 비틀자 중간이 분리되었다.
“이제 팔찌를 힘으로 구부려봐요. 떨어뜨리지 않게 조심해서요.”
남미연이 두 손으로 팔찌를 더 구부렸다. 분리된 끝부분에서 숨겨져 있던 짧은 톱날이 튀어나왔다.
“앗! 이게 뭐야?”
그 톱날은 길이가 짧고 폭도 가늘어서 무기로 쓰기는 어려웠다.
“그걸로 제 손을 묶은 끈부터 잘라줘요.”
“이런 게 어디서 났어?”
“전문가에게 의뢰해서 만들었어요. 위험한 일을 좀 겪었더니, 비상용 탈출 도구가 있어야겠다 싶어서요.”
남미연이 그 작은 칼날로 구하니의 손을 묶은 끈을 톱질하듯이 잘랐다.
구하니는 손이 풀리자마자 칼을 받아 남미연의 손을 묶은 끈을 자르고 의자에 묶은 끈도 잘랐다.
몸이 자유로워진 남미연이 얼른 문으로 다가가 안쪽에서 잠갔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남미연이 제안했다.
“손잡이를 아예 고장 내자. 열쇠로도 못 열게.”
구하니가 몸을 묶은 끈을 자르면서 물었다.
“고장 낼 줄 알아요?”
“그 의자 다리로 비틀면 되겠지.”
두 사람은 의자의 쇠로 된 다리를 손잡이에 끼운 후에 체중을 실어 비틀었다. 의자 다리가 손잡이 사이에 단단히 끼었다.
“됐다. 이러면 열쇠로 열어도 손잡이가 돌아가지 않을 거야.”
창문에는 금속 창살이 설치되어 있었다. 꽤 튼튼한 창살이라 안쪽에서 탈출할 수는 없지만, 바깥쪽에서 안으로 들어올 수도 없었다.
사까이는 문이 잠겼다는 걸 알고 짜증을 내다가 곽덕구의 전화를 받았다.
사까이가 전화기에 대고 말했다.
“아니, 나는 구하니가 필요…. 그럼 기왕이면 남미연을…. 그런데 지금 저것들이 문을 안쪽에서 잠가서….”
남미연이 그 소리를 듣고 말했다.
“역시 나를 노리는 건가? 이것들이 내가 예쁜 건 알아서.”
“지금 농담이 나와요?”
“긴장이라도 풀어보려고.”
사까이가 전화를 끊고 용병들에게 손짓했다.
이쪽에는 사까이와 용병 셋만 배치되어 있었다.
여기는 선우현을 잡을 함정을 파는 곳이 아니다. 인질만 가둬두는 예비 거점이다. 그래서 배치된 인원이 적었다.
◈ ◈ ◈
김수선이 보고했다.
“선장님! 전장에 돌입합니다!”
- 이미 돌입한 줄 알았는데!
“강하 캡슐을 대충이라도 숨기느라 조금 늦었습니다!”
- 수선아?
“전장 상황은 아직 안 늦었습니다!”
- 두 사람은?
“실내에 거점을 확보하고, 문으로 적의 출입을 막고 있습니다. 적 리더가 접근 중이지만 아직은 괜찮습니다.”
- 그건 네 생각이고!
“지금 갑니다!”
◈ ◈ ◈
사까이가 펜션 별채 앞에서 말했다.
“구하니. 너는 살려줄 테니까 문 열어라.”
그의 억양에서 일본어 느낌이 났다. 구하니는 상대의 정체가 사까이라는 걸 확실히 알았다. 하지만 눈치챘다는 걸 내색하지는 않았다.
“무슨 소리야?”
“저쪽에서 너를 죽이라고 했는데, 내가 너는 살리고 남미연을 죽이겠다고 했다. 내가 너 살려줬으니까 넌 나한테 고마워해야 해.”
남미연은 깜짝 놀랐다.
“나? 왜 나야!”
“둘 중 하나는 죽어야 하는데, 내가 구하니를 더 선호하니까.”
“나 남미연이야!”
“나는 가수를 좋아해서.”
“너에게 유감은 없다. 선우현이 말을 안 들으니까 하나는 죽어야 해. 그게 네가 된 것뿐이다.”
사까이가 용병들에게 영어로 지시했다.
“문 부숴.”
갑자기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사까이가 무슨 일인가 싶어서 뒤를 돌아보았다.
김수선이 펜션을 목표로 돌진했다. 날렵한 디자인의 우주복 뒤에는 보조 추진기가 붙어 있었다. 달리는 힘에 추진기의 출력이 더해졌다. 뒤쪽으로 하얀빛이 잔상처럼 뿌려졌다.
김수선이 눈앞의 바위로 뛰어올랐다가, 그 바위를 강하게 박차고 앞으로 점프했다. 그 모습이 마치 하늘을 나는 것처럼 보였다.
사까이는 너무 당황해서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우주복의 특이한 디자인 때문에 지금 어떤 존재가 왜 날아오는지 판단하지 못했다.
사까이와 용병들이 제대로 대처하기도 전에 김수선이 펜션 앞마당에 착지했다. 발이 땅에 닿자마자 등 뒤 보조 추진기의 하얀빛이 사라졌다.
용병 하나가 뒤늦게 권총을 뽑았다. 서로의 거리가 가까워서 권총을 제대로 조준만 하면 빗나가기 어려웠다.
“너 뭐야!”
김수선이 왼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팔에서 견인용 케이블이 튀어나가 용병의 목을 휘감았다.
그 케이블은 우주에서 장비를 붙잡거나 몸을 고정할 때 사용하던 것이다. 케이블이 용병의 목을 콱 조였다.
“켁!”
김수선이 왼팔을 옆으로 쭉 뻗었다. 그 방향으로 견인 케이블이 움직였다.
용병의 몸이 옆으로 휙 날아갔다. 권총은 이미 손에서 빠져나갔다.
“케엑!”
케이블은 마치 채찍을 바닥에 내리치는 것처럼 움직였다. 케이블에 목이 묶인 용병이 바닥에 처박혔다. 이번에는 신음조차 들리지 않았다.
케이블이 용병의 목에서 스르륵 풀렸다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김수선의 왼손으로 말려 들어갔다.
다른 용병은 사냥용 엽총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엽총을 급히 들었다.
김수선이 바닥을 박차며 용병에게 돌진했다. 그러면서 오른손을 아래에서 위로 휙 들었다. 오른손에 장착된 선체 수리용 플라즈마 커터가 작동했다.
적의 엽총 중간에서 불꽃이 마치 불꽃놀이라도 하는 것처럼 거세게 튀었다가 사라졌다.
용병이 총구를 김수선 쪽으로 돌렸다. 하지만 남아있는 건 엽총의 뒷부분뿐이었다.
엽총 중간은 깔끔하게 잘려나간 상태였다. 절단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엽총의 앞부분이 땅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용병은 경악했다.
“으, 으아….”
김수선이 왼손을 흔들었다. 견인 케이블이 반쪽짜리 엽총을 들고 있는 용병의 발을 휘감았다.
김수선이 손을 옆으로 휙 뻗었다. 케이블이 용병의 발을 옆으로 잡아챘다.
“으악!”
중심을 잃은 용병이 바닥에 넘어졌다.
김수선이 이번에는 왼손을 위로 들었다. 케이블이 용병을 거꾸로 뒤집어 하늘로 띄웠다.
김수선이 손을 아래로 내렸다. 위로 떠올랐던 용병이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케에엑!”
케이블이 다시 김수선의 왼손으로 말려 들어갔다.
세 번째 용병은 6연발 리볼버 권총을 가지고 있었다. 다른 두 놈이 당하는 동안 그는 권총을 꺼낼 시간을 벌었다.
용병이 거리를 벌리며 김수선을 향해 권총을 겨누었다.
‘잡았다!’
용병이 방아쇠를 당겼다.
김수선의 몸이 수평으로 이동했다.
권총탄은 허공을 갈랐다.
용병이 황급히 방아쇠를 다시 당기려고 했다.
견인용 케이블이 길게 쭉 날아가 용병의 팔을 잡았다. 용병이 방아쇠를 당기긴 했는데 총구 방향은 이미 김수선의 옆쪽으로 틀어져 있었다.
총탄이 다시 빗나갔다.
김수선이 적을 끌어당기며 플라즈마 커터를 뻗었다. 용병은 오른손을 잡힌 상태라 피할 수도 없었다.
플라즈마 커터가 권총 중간을 수직으로 잘라버렸다.
약실에 남은 네 발의 금속 탄피 속에는 화약이 들어 있었다. 탄피가 잘려나가면서 화약이 플라즈마에 닿았다. 네 발 분량의 화약이 약실 속에서 폭발했다. 그 충격으로 용병의 오른손이 찢어졌다.
“으아악!”
김수선이 왼팔을 옆으로 흔들었다. 용병은 케이블에 붙잡혀 옆으로 날아가다가 얼굴부터 땅바닥에 처박혔다.
“켁!”
김수선이 왼팔을 내렸다. 케이블이 살아있는 것처럼 흔들리면서 오른손에 도로 감겼다.
이제 이곳에 남은 적은 사까이밖에 없었다.
사까이는 권총을 뽑았다. 하지만 총을 쥔 손이 덜덜 떨렸다.
사까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너, 너 뭐야? 너 도대체 누구야!”
구하니와 남미연은 방안에서 창문 창살을 통해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남미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구하니의 눈도 커진 건 마찬가지였다.
“저도 몰라요.”
“저 사람 정체가 뭐야? 사람 맞아?”
“몰라요.”
“저 이상한 무기는 또 뭐야?”
“지금 그게 중요한가요? 우리 편인지가 중요하죠.”
남미연은 불안했다. 상대의 전투 방식이 너무 거칠었다.
“우리… 편이겠지?”
구하니의 목소리도 살짝 떨렸다.
“그래야죠.”
사까이는 겁이 났지만, 어차피 도망치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그가 김수선을 향해 권총을 조준하며 소리를 질렀다.
“너 뭐냐고!”
그의 말에 일본 억양이 섞여 있었다.
견인 케이블이 채찍처럼 날아가 사까이의 팔뚝을 뱀처럼 휘감았다.
“으, 으아아!”
사까이가 방아쇠를 연달아 당겼다. 하지만 팔이 옆으로 젖혀지는 바람에 총탄은 엉뚱한 방향으로만 날아갔다.
김수선이 물었다.
“네가 사까이냐?”
남미연이 방안에서 외쳤다.
“맞아요! 그 새끼가 사까이에요! 아주 나쁜 새끼예요!”
“그러면 아는 게 좀 있겠네.”
김수선이 사까이를 끌어당기며 플라즈마 커터의 출력을 낮췄다. 그런 후에 커터를 사까이의 손목 앞에서 가볍게 흔들었다.
가는 끈처럼 얇아진 플라즈마가 커터에서 튀어나와 사까이의 손목을 짧게 관통하고 사라졌다.
사까이가 비명을 질렀다.
“으아악!”
손목이 뚫렸지만 피는 나지 않았다. 오른손은 통제를 완전히 벗어났다. 권총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김수선이 사까이도 옆으로 휙 던졌다. 사까이는 다른 놈들이 있는 곳으로 날아가 떨어졌다.
“커컥!”
이곳에 있는 놈이 넷뿐이라는 건 지원위성에 있을 때 이미 파악했다.
김수선이 두 사람이 갇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문 열어요.”
남미연이 안에서 말했다.
“우리가 안쪽에서 손잡이를 망가뜨려 놔서, 문을 열 방법이 없어요. 의자가 꽉 끼어서 안 빠져요. 열쇠로도 못 열어요.”
“그럼 뒤로 물러나요.”
“네?”
“가까이 있으면 다쳐요.”
두 사람이 뒤로 후다닥 물러났다.
김수선이 플라즈마 커터로 문 손잡이를 문짝과 함께 잘라버렸다. 손잡이에 끼워놓은 의자의 다리도 같이 잘려나갔다.
김수선이 문을 활짝 열었다.
두 사람은 방구석으로 물러나 있었다.
남미연은 사까이와 용병들이 순식간에 전멸하는 모습을 똑똑히 봤다.
그런데 구출하러 온 사람이 이상한 무기를 사용했다. 헬멧을 쓰고 있어서 누구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적어도 경찰일 리가 없다는 건 확실히 알았다.
남미연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저기, 누구세요? 우리 편이세요?
“선….”
김수선이 선장님이라고 말하려다가 얼른 말을 바꾸었다.
“우현 님이 보내셨어요.”
남미연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아! 우현 씨랑 아는 분이세요? 어떤 사이세요?”
“하필 그 인간이 대장이에요.”
“네?”
구하니는 김수선의 목소리가 익숙하다는 걸 깨달았다. 노래할 때의 목소리와는 좀 다르긴 하지만, 음성과 발음의 특징에서 익숙한 부분을 찾을 수 있었다. 구하니는 가수라서 그런 걸 잘 구분했다.
구하니의 눈이 동그래졌다.
“설마…. 김수선 씨?”
김수선이 우주복 헬멧을 해제했다. 헬멧은 앞부분이 자동으로 열린 후에 둘로 갈라져서 우주복 어깨에 갑옷처럼 장착됐다.
“직접 만나는 건 처음이네요. 구하니 씨.”
남미연이 활짝 웃었다.
“와! 진짜 사람이다!”
그녀는 김수선이 신기한 무기를 사용해 폭력적으로 싸우는 걸 보고 일말의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 얼굴을 보고 마음을 놓았다.
구하니는 당황했다.
“김수선 씨는 모습을 절대로 드러내지 않는 사람인데 여긴 어떻게….”
“두 사람을 구하려면 내가 직접 오는 방법밖에 없으니까요.”
“네? 그게 무슨….”
“여기에 두 사람, 경기도에 박서윤 씨 한 사람. 놈들이 인질을 두 군데에 분산해서 가뒀어요. 그래서 선… 우현 님이 경기도로 가셨어요.”
남미연은 그 말을 듣고 서운해했다.
“어머! 우리는 두 명인데 우현 씨는 한 명이 있는 곳으로 갔어요?”
“그쪽이 가까웠으니까요. 나는 여기가 가까웠고.”
“아! 그래서였구나! 거리 때문이었네!”
구하니가 남미연을 보며 물었다.
“언니는 김수선 씨를 보고 놀라시더니, 금방 평소처럼 바뀌시시네요?”
“나 엄청 놀랐어. 근데 뭐, 우리 편이고 사람인 거 확인했잖아. 그럼 됐지.”
남미연도 구하니에게 물었다.
“그러는 하니 씨는 왜 안 놀라?”
“저는 그게….”
구하니는 김수선이 얼굴을 공개할 수 없는 이유를 예전부터 다양하게 추측했다.
‘특수부대나 국제 용병, 아니면 비밀기관 같은 곳에서 우현 씨와 같이 일했을 거라고 추측했는데.’
그녀가 김수선을 보았다. 김수선의 전투 스타일은 굉장히 과격했다.
‘싸우는 스타일이 비슷해.역시 내 생각이 맞았나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