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2. 덕구
양수진은 살짝 당황했다.
‘앗. 나도 모르게 본심을 말했다.’
그녀는 미국 유명 가수 제니퍼 그레이와 협찬 계약을 하러 왔다.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해서 좋을 건 없다.
“아니, 제 말은 그러니까, 팬….”
선우현은 그녀의 팬이라는 말을 한 적이 없다.
어차피 제니퍼는 신경 쓰지 않았다.
“훗. 괜찮아요. 어차피 나랑 몇 시간만 같이 있으면 나한테 반할 테니까.”
“아. 네. 그러시구나.”
‘그렇게 쉬운 남자면 내가 벌써 차지했지. 씨도 안 먹히는 소리를 하고 있어.’
제니퍼가 방실방실 웃으며 프리미어 X8을 쓰다듬었다.
“나중에 그냥 이 차를 나한테 팔아요. 그 남자가 튜닝해준 차를 가질래요.”
“그렇게 처리할게요.”
“이 차는 한국에 왔을 때만 타려고 했는데, 항공 운송으로 가져가야겠다. 미국에 가서 자랑해야지.”
제이퍼 그레이는 전호 호텔 펜트하우스를 빌린 엘리자베스 켈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엘? M 연료전지를 개발한 분이 내 팬이래. 그래서 그분이 내 차 오디오를 스페셜 오더로 따로 달아줬어. 오호호홋. 네 차에는….”
제니퍼가 양수진을 보았다. 양수진이 고개를 옆으로 흔들었다.
제니퍼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넌 이런 거 없지?”
제니퍼가 대놓고 자랑한 후에 전화를 끊고 양수진에게 말했다.
“이걸 개발한 분이 스래곤 사장님이시죠? 감사의 뜻으로 식사라도 대접해야겠다.”
양수진이 손을 살짝 흔들었다.
“그분이 워낙 바쁜 분이시라서요.”
“그러면 비서 통해서 정식으로 초대해야겠네요. 스래곤에 연락하면 되겠죠.”
“어머. 그러시면 되겠다.”
‘만나줄 리가 없지만.’
◈ ◈ ◈
선우현은 바쁘지 않았다. 옥상 평상에서 뒹굴었다.
“주말이 얼마나 소중한지 출근을 하고 나서야 알았다.”
“멍!”
“역시 노니까 좋다.”
“멍!”
신나리가 옥상에 올라왔다가 그 꼴을 보고 한마디 했다.
“부럽다.”
“나리야. 주말인데 너는 안 노냐?”
대학생 신나리가 기지개를 켰다.
“시험공부 해야 돼요.”
“너도 공부라는 걸 하는구나. 맨날 노는 줄 알았는데.”
“멍!”
“다른 사람은 몰라도 옥상에서 굴러다니는 옥상 오빠랑 엠투한테 그런 말을 듣고 싶진 않아!”
◈ ◈ ◈
대성차는 M 연료전지를 장착한 프리미어 X8을 정식으로 출시했다. 워낙 급하게 출시하다 보니 초기 생산량은 그리 많지 않았다.
당연히 그 정도로는 내수 수요를 채우기에도 턱없이 부족했다.
양중근 회장이 지시했다.
“내수는 절반만 공급하고, 나머지 절반은 수출로 돌려.”
“일단은 미국 위주로 파는 게 좋겠습니다.”
“우리가 팔 수 있는 모든 나라에 팔아.”
“그러면 나라별 공급량이 너무 적습니다.”
“괜찮아. 그 모든 나라에 제일 먼저 출시했다는 게 중요하니까.”
X8의 수출 물량은 기존에 대성차가 수출하던 모든 나라에 나눠서 공급됐다.
가뜩이나 부족한 물량이 여러 나라로 쪼개졌기 때문에, 맛보기 수준으로 차가 들어간 나라가 많았다.
그런데도 소문이 꽤 잘 퍼졌다. 소량만 수출된 나라에서도 차를 산 사람들이 대놓고 자랑하고 다녔기 때문이다.
“내가 말이야. 최첨단 M 연료전지차를 타고 있다니까? 이거 몇 대 수입 안 된 거야.”
“환경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X8이지.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야.”
“한국의 대성차 많이 컸네.”
외국 중에 그나마 X8이 많이 들어간 곳은 미국이다. 미국은 자동차 시장이 워낙 크고 상징성도 크다. 대성차의 영업망도 제대로 갖춰져 있다.
양중근 회장이 지시했다.
“수출 물량의 절반은 미국으로 보내.”
제니퍼 그레이는 X8이 정식 출시가 되기 전부터 미국에 차를 가져가서 자랑했다.
“미국에서 X8을 타는 사람은 내가 처음일걸? 나 이거 정식 출시되기 전부터 받았단 말이야.”
“엘리자베스 켈리도 X8을 탄다던데?”
“어딜 감히 비교해? 내 차는 M 연료전지를 개발한 사람이 직접 손봐준 스페셜 버전이라고.”
“개발자가 왜?”
“훗. 내 팬이더라고.”
“와우! 실제로 만나봤어?”
“그게…. 내가 바빠서 안 만난 거야.”
X8이 정식으로 출시된 후에는 할리우드 연예인들이 인증 영상을 공개했다. 어떤 연예인은 초기 물량 구매에 성공했다. 다른 사람이 산 차를 웃돈 주고 사들인 연예인도 있었다.
“이건 기적입니다. 분명히 기름을 넣고 달렸는데 매연이 안 나옵니다.”
“연비도 와! 진짜 좋습니다.”
“전기차와 휘발유차의 장점만 모은 느낌입니다.”
환경 오염과 기후 변화에 관심이 큰 연예인들은 호평을 쏟아냈다.
“우리 지구의 미래를 생각하면, 모는 차량은 M 연료전지를 사용해야 합니다.”
“화력 발전소는 매연이 나오고, 원자력 발전소는 방사능 폐기물이 나옵니다. 전기차가 쓰는 전기는 그런 발전소에서 나옵니다. 그런데 X8은 다릅니다.”
“내연기관 차량은 앞으로 그만 만들어야 한단 말입니다.”
“탄소 배출량을 줄여야 우리가 삽니다.”
다른 자동차 회사들도 M 연료전지를 차량에 적용해 테스트하고, 신차 개발도 하고는 있었다.
그런데 제일 먼저 출시한 곳은 결국 대성차다. 사람들의 반응은 굉장히 뜨거웠다.
양중근 회장이 보고를 받으면서 활짝 웃었다.
“으하하하! 이거지! 연료전지차는 이제 우리가 세계 1위야!”
보고한 임원이 말했다.
“회장님의 놀라운 판단력 덕분입니다.”
“이게 어디 나 혼자 잘해서 이룬 성과인가?”
“아, 예. 물론 저도….”
“선우현 사장 덕분이지.”
“예?”
“어디서 그런 사람이 갑자기 나타났는지. 거 참. 진짜 탐난단 말이야.”
“회장님. 스래곤은 우리가 인수하기엔 이미 너무 커졌….”
“스래곤이 아니라 선우현 사장이 탐난다고.”
“아….”
“우리 수진이가 잘하고 있으려나.”
◈ ◈ ◈
프리미어 X8을 향한 고객층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그걸 본 자동차 회사들이 신차 출시를 서둘렀다.
“우리도 최소한 한 모델은 당장 시장에 내놔야 한다고!”
후발주자들은 M 연료전지가 자동차 회사 순위를 뒤집을 기회라고 판단했다.
“더 좋은 차를 빨리 내놓으면 다른 회사들을 따라잡을 수 있어!”
물론 기존 대형 자동차 회사들도 놀고 있지는 않았다.
“일단 출시부터 해! 후발주자들이 따라오지 못하게 일단 내놓으란 말이야! 기습을 당한 건 X8 하나로 충분하니까!”
◈ ◈ ◈
미국에는 X8을 구매 신청순서와 상관없이 출시되자마자 받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 구매 기회는 사회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거나 특별한 사람들에게 제공됐다.
그중에는 우주에서 조난됐다 구출된 토마스도 있었다.
선우현이 말했다.
“수선아. 토마스를 만나면 한 대 때려줄 거라더니?”
- 제가 구해준 인간이니까, 구해준 값으로 홍보에 써먹어야지요.
토마스에게 의심받지 않고 차를 팔 명분은 있었다.
선우현이 위성 충돌 사고를 미리 경고했기 때문에 우주왕복선 선원들과 토마스가 살아남았다. 그 경고가 없었다면 위성 파편이 쏟아졌을 때 우주왕복선이 폭발할 수도 있었다.
토마스가 방송에 나와서 말했다.
“제 차는 스래곤의 연료전지 기술로 만들었다더군요. 그래서 살 기회가 생겼을 때 고민조차 안 하고 차를 샀습니다. 스래곤은 저와는 인연이 깊은 회사니까요.”
진행자가 물었다.
“어떤 인연인지 궁금하군요.”
“제가 우주에서 겪은 일을 이야기하려면, 먼저 LA에서….”
◈ ◈ ◈
자동차 업계의 다른 회사들도 대성차를 따라 신차 출시를 서둘렀다.
그런데 M 연료전지는 차에만 쓰는 게 아니다. 소형 항공기나 선박은 물론이고 동력을 발전기로 대체 가능한 다양한 장비에 쓸 수 있다.
관련 연구를 진행하는 회사도 많았다.
다른 업계는 자동차처럼 먼저 출시한 곳이 파이를 크게 먹어치우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런데 자동차 업계의 선례를 보고 개발을 서두르는 회사가 많아졌다.
그런 회사들은 M 연료전지를 사기 위해서 스래곤과 접촉했다. 스래곤은 업무량이 급격히 증가했다. 그만큼 직원도 많이 뽑았고 회사 규모도 빠르게 커졌다.
스래곤으로 들어오는 돈도 점점 많아졌다. 그 돈으로 공장을 더 짓는 중이다.
선우현이 옥탑방 옥상에서 말했다.
“수선아. 이렇게 돈 벌다가 나중에 돈이 충분히 모이면, 그때 우주왕복선 회사를 사면 되겠지?”
- 그때까지는 놀겠다는 말이군요.
선우현이 씩 웃었다.
“보급품이 더 필요하면 더미 위성을 새로 보내줄게. 지금 예약해둔 정식 발사 스케줄은 2개월 후이지만, 급하면 또 로켓에 빈자리 찾아서 보낼 수도 있잖아.”
- 로켓에 자리가 생기려면 기존 위성 중 하나에 문제가 생겨야 한다면서요.
“나사 말고 다른 나라 로켓에도 빈자리가 날 수 있잖아? 스래곤의 이름으로 요청하면 그 자리를 얻을 수 있겠지.”
- 그건 그렇겠군요.
선우현이 콜라를 마시며 손을 흔들었다.
“그러니까 이제 난 놀아도, 회사가 알아서 잘 굴러가서 결국 우주왕복선을 손에 넣을 거야. 그동안 난 너무 바쁘게 일했어.”
- 바쁘신 기간은 짧았는데요.
“이제 일 안 할 거야.”
- 전에도 안 하셨다고요.
“놀 거야.”
- 놀고 계십니다.
“그거 욕 아니지?”
◈ ◈ ◈
기획사 JXK는 망했다.
선우현은 구하니, 남미연과 함께 기획사 스엔지를 만들었다.
가수 연습생들은 모두 스엔지에 들어왔다. 소속 가수 중 일부는 스엔지로 넘어오고 일부는 다른 기획사로 옮겼다.
JXK의 기존 직원 중에도 스엔지로 넘어온 사람이 꽤 있었다. JXK의 조직적인 비리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직원들이 많이 넘어왔다.
심지어 JXK가 망하고 건물이 경매에 나왔을 때, 그 건물을 인수한 것도 스엔지다.
경매에는 건물 내부 장비와 집기도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서 JXK에서 스엔지로 넘어온 직원들은 원래 일하던 책상에서 그대로 일하는 경우가 많았다.
“난 회사를 옮긴 게 맞나 싶을 때가 가끔 있다니까.”
“회사 분위기는 완전히 바뀌었잖아.”
“그건 그래. 지금이 훨씬 좋지.”
연습생들도 원래 쓰던 연습실을 사용했다. 녹음실 장비도 그대로였다.
건물도 그대로고 내부 인테리어나 장비도 그대로이지만, 달라진 것도 있었다.
연습생들이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으며 좋아했다.
“밥 진짜 맛있어.”
“난 하루 세끼 다 구내식당에서 먹어.”
“우리 너무 잘 먹는 거 아냐?”
“맛있잖아. 어쩔 수 없어.”
걱정하는 연습생도 있었다.
“언니들. 이렇게 밥이 잘 나오다가요. 식비가 너무 많이 들어서 회사가 또 망하면 어떻게 해요?”
“사장님이 돈 많대. 이 건물도 대출 없이 현금 일시불로 샀대. 그러니까 밥값 때문에 회사가 망할 리는 없어.”
“앗! 그럼 실컷 먹어야지.”
“우리 이러다 살찌겠다.”
“살은 데뷔 준비하면 힘들어서 빠질 거야.”
“데뷔요?”
“사장님이 예산을 시원하게 쏜 덕분에, 조만간 팀을 하나 만들어서 데뷔시킬 거라는 소문이 있더라.”
“많이 먹고 더 연습해야겠다.”
◈ ◈ ◈
망해버린 JXK의 사장 천호균이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그러니까 내 회사를 먹어치우고, 나를 이렇게 도망자로 만든 새끼가 스래곤 사장이라는 거요?”
사까이도 화를 냈다.
“내가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숨어서 지내는 게 다 스래곤 사장 새끼 때문이라고?”
사까이는 일본으로 갈 수 없다. 지명수배된 상태라서, 공항이나 항구를 이용해 출국을 시도하면 바로 체포된다.
사까이가 한국을 떠나려면 밀항을 하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사까이의 기반은 일본에 있다. 그는 한국의 밀항 루트에 대해서는 아는 게 별로 없었다.
천호균도 마찬가지다. 그는 청부업자는 여러 번 이용했는데, 그놈들이 모두 잡혀서 줄이 끊어졌다. 천호균도 갑자기 밀항 루트를 찾는 건 어려웠다.
그래서 사까이가 일본에 연락했다.
일본에는 그가 아는 조직이 있다. 그 조직을 통해 다시 한국의 밀항 조직에 선을 댔다.
사까이와 천호균은 그렇게 찾은 조직을 통해 일본으로 밀항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사람을 만났다.
덕구파 두목 곽덕구가 말했다.
“선우현. 나는 그놈의 정체를 최근에 겨우 알아냈다.”
곽덕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놈이 스래곤 사장이라는 걸 알았을 땐, 그놈의 수작질에 내 조직이 이미 무너진 후였다.”
천호균이 맞장구쳤다.
“그렇지. 그 사악한 새끼는 내 회사도 조금씩 무너뜨려서 결국 잡아먹었으니까. 돈 주고 산 것도 아니야. 그냥 잡아먹었어.”
JXK는 완전히 망했다. 지분은 모두 휴짓조각이 됐다.
회사를 팔아치운 게 아니라 망했기 때문에 천호균의 손에 떨어진 건 한 푼도 없었다. 건물 경매 대금은 채권자가 다 가져갔다.
JXK의 회사 지분은 천호균, 사까이의 아버지가 사장으로 있는 일본 회사, 그 외에 몇 명이 나눠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큰 손해를 보았다. 돈만 손해 본 게 아니라 그 몇 명은 횡령이나 폭행 등으로 경찰 조사까지 받고 있다.
천호균이 화를 냈다.
“그 새끼가 나를 완전히 끝장냈단 말이다!”
곽덕구의 눈이 칼날처럼 날카롭게 변했다.
“그러니까 복수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