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 프리미어 X8
대성차 그룹 회장 양중근이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의 뒤를 그룹 임원들이 따라갔다.
연구소장이 따라가면서 말했다.
“회장님. 후보 차량을 이쪽에 모아놨습니다.”
대성차 연구소에는 다양한 차량을 테스트했다. 같은 차종을 몇 대씩 테스트로 굴린 경우도 많았다.
그중에 양산 후보에 오른 차가 한 대씩 연구소 실내 공간에 대기하고 있었다.
양중근 회장이 그 차들의 외관은 물론이고 실내까지 확인했다.
“내부는 그럴듯하게 만들었군. 저번보다 나아.”
“감사합니다.”
양중근이 준비된 차를 모두 확인한 후에 가운데에 있는 차를 가리켰다.
“X8은 어때?”
프리미어 X8은 대성차의 고급차 라인에서 제일 잘 팔리는 차다. X8은 휘발유와 전기차 버전이 있다.
연구팀장이 보고했다.
“프리미어 X8도 최소한의 개조로 안정적인 성능을 뽑아낼 수 있었습니다.”
“내부가 짬뽕 느낌이 나는데.”
디자인 담당 이사가 앞으로 나와 보고했다.
“프리미어 X8 테스트 카의 인테리어는 휘발유와 전기차 버전의 부품을 적극적으로 조합해 만들었습니다. 덕분에 기존 부품을 거의 수정 없이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는 소리군. 좋아. 김 전무. 라인은?”
자동차 생산 전문가인 김 전무가 대답했다.
“X8의 경우 공장의 다품종 라인에 세팅 중입니다.”
대성차에는 생산 차종을 수시로 바꿀 수 있는 가변형 라인이 여러 개 있다. 그 라인 중 하나에 M 연료전지차를 추가했다.
“스래곤 연구소와 협력해 시험 생산도 마쳤습니다.”
“차체 금형을 그대로 쓸 수 있으니까 여러모로 좋군. 역시 M 연료전지는 대단해. 이렇게 쉽게 기존 차량에 적용할 수 있다니 말이야.”
“현장에서도 높은 호환성에 감탄했습니다.”
양중근이 슬쩍 웃었다.
“그럼 X8의 연료전지 버전은 곧바로 생산할 수 있겠군.”
“행정 절차는 이미 정부에서 적극적으로 지원해주고 있습니다. 부품만 충분히 확보하면 조만간 생산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부품은 웃돈을 줘서라도 미리 만들어두라고 했는데, 어떻게 됐어?”
자재 담당 이사가 보고했다.
“다른 부품은 초기 생산에 필요한 양은 확보했습니다. 추가로 발주하면 앞으로의 생산에도 대응할 수 있습니다. 다만….”
“M 연료전지가 문제인가?”
“예. 아무래도 받을 수 있는 수량이….”
대성차는 스래곤에서 핵심 모듈을 받아 협력업체에서 M 연료전지를 생산한다. 그 협력업체는 양중근 회장의 측근이 경영한다. 회사 지분도 양중근 일가가 과반을 가지고 있다.
“연료전지는 최대한 생산해두라고 했잖아.”
“핵심 모듈을 받는 대로 생산했습니다만….”
“그 모듈은 우리가 제일 좋은 조건으로 받을 텐데, 그래도 부족하던가?”
대성차처럼 핵심 모듈만 받아 연료전지를 직접 생산하기로 한 회사는 더 있다. 모두 외국 회사다.
그렇지만 초기 물량은 대성차가 제일 많이 받기로 했다.
“우리 회사에 필요한 수량에 한참 모자랍니다. 게다가 생산된 연료전지 중 일부는 도로 스레곤에 넘겨야 합니다.”
“스래곤이 새로 짓는 공장들이 완성될 때까지는 물량 문제가 계속 생기겠군.”
“예. 설사 스래곤의 공장 증설이 완료된다 해도, 전 세계 자동차 회사에서 요구하는 물량을 다 공급하긴 어려울 겁니다.”
양중근도 그렇게 생각했다.
“어디 자동차 회사만 그걸 사나? 다양한 분야에서 원하잖아. 내 듣기로, 국방부는 기존 잠수함의 동력을 M 연료전지로 교체하고 싶어 한다던데.”
“한 대의 출력으로는 어림도 없지만, 여러 대를 설치하면 가능하다고 들었습니다.”
“물량 부족 문제는 앞으로 더 심해지겠군.”
“스래곤도 공장을 더 짓겠지만, 한동안은 공급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겁니다.”
양중근이 선언했다.
“역시 우리가 세계최초로 M 연료전지차를 출시해야 해. 그러면 스래곤이 지금까지 만들어둔 연료전지 중에 자동차용은 우리가 다 먹을 명분이 생겨.”
“명분이 있다 해도 스래곤에서 동의를 해야….”
양중근이 손을 흔들었다.
“일단 저질러. 당장 연료전지차 출시를 발표하고, 새로운 X8을 만들어서 일단 내보내. 그래야 시장을 선점하고 그걸 우리가 먹을 수 있어.”
양중근이 입맛을 다셨다.
“어떻게든 우리가 먹어야 해.”
◈ ◈ ◈
양중근이 양수진을 불렀다.
“선우현 사장과는 잘 진행되고 있냐?”
“네? 진행이라니요?”
“데이트도 좀 하고 그러냔 말이다.”
양수진이 툴툴댔다.
“데이트는 뭐 혼자 하나요?”
“네가 먼저 만나자고 하던가.”
양수진이 눈을 가늘게 떴다.
“할아버지. 손녀를 막 팔아먹으려고 하시는 거 아니죠?”
“선우현 사장이 싫으냐?”
“아니, 싫다는 게 아니라요.”
“그럼 내가 밀어줄 때 얼른 붙잡아.”
“언제 밀어주셨는데요?”
양중근이 생색을 냈다.
“저번에 그 가수 관련 일로 경찰이 수사할 때, 내가 윗선에 전화 넣었다.”
“그건 약발이 이미 끝나지 않았을까요?”
“벌써 끝났나?”
“전화 한 통 해주고 언제까지 우려먹으시게요?”
“너는 누구 편이냐?”
“할아버지 편이죠. 전 그냥 합리적인 조언을 한 거예요.”
양중근의 이마에 주름이 깊어졌다.
“끄응. 선우현 사장은 아쉬운 게 없나? 있어야 하는데….”
“선우현 씨는 돈은 많은데 욕심이 없는 사람이라 딱히…. 아! 하나 있다.”
양수진이 손뼉을 치며 말했다.
“최근에 연예기획사를 하나 만들었대요. 구하니한테 가수 파트를 맡기고, 남미연이 배우 파트를 맡긴대요.”
“응? 선우현 사장이 연예계에 관심이 있나?”
“JXK라는 기획사가 거의 망하게 생겼잖아요. 그래서 거기 있던 사람들이 나와서 숨돌릴 곳을 만들었나 봐요.”
“무슨 말인지 알겠구나. 기업가가 사업을 냉정하게 해야지 그렇게 인정에 휘말려서야….”
“사람이 마음에 안 드시나 보다.”
“선우현 사장은 사람이 인간미가 있다는 말을 하려던 거다. 역시 차가운 놈보다는 그런 사람이 손녀사위로 제격이지.”
양수진이 손바닥으로 뺨을 눌렀다.
“어머. 할아버지. 부끄럽게 벌써 그런…. 우리 아직 그런 사이 아니에요.”
“관계가 진전될 기미는 보이고?”
“아뇨.”
“응?”
양수진이 한숨을 쉬었다.
“에휴. 아무래도 겉만 사람이고 알맹이는 돌부처 같아요.”
“그럼 그 기획사를 내가 좀 도와줘야겠구나. 광고모델 정도면 되려나?”
“선우현 씨가 돈이 얼마나 많은데, 모델료 조금 더해준다고….”
양중근이 피식 웃었다.
“선우현 사장이 돈으로 잡을 수 있는 사람이면, 다른 회사들도 돈을 주고 잡으려고 했겠지.”
“선금 많이 넣잖아요.”
“그건 나중에 M 연료전지로 돌려받을 테니까 엄밀히 말하면 주는 게 아니다.”
“그럼 모델료는 왜 굳이….”
“얼마 안 되니까 부담이 없으면서, 효과는 기분이 좋을 정도가 나오지. 생색은 그렇게 내는 거란다.”
◈ ◈ ◈
양수진이 선우현을 만났다.
자동차 회사 사장들은 선우현을 따로 만나지 못한다. 선우현이 만나주지 않았다.
그런데 양수진은 양중근의 손녀지만 다른 일로 알게 된 사이다. 그래서 선우현을 만날 수 있었다.
그녀는 선우현을 만날 때는 회사 일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았다. 대신에 이번처럼 꼭 필요할 때는 말을 조금 꺼냈다.
“대성차에서 곧 세계최초로 M 연료전지차를 출시할 거예요.”
“알고 있습니다.”
“모델은 프리미어 X8로 선정됐어요. 대성차의 최고급 라인 중에서 세단형이죠. 프리미어 시리즈 중에서는 제일 잘 팔려요.”
“그것도 압니다.”
“할아버지가 그 차의 광고모델로 선우현 씨가 만든 기획사의 연예인을 쓰고 싶어 해요. 이것도 아셨어요?”
“그건 몰랐습니다만, 그런 일은 회사에 말해요. 기획사가 신생이긴 하지만 그래도 업무는 정상적으로 돌아가니까.”
“사장님이시잖아요.”
“내가 바지사장이라서.”
“바지 아닐 텐데.”
선우현이 물었다.
“그런데 대성차의 그 광고는 어디까지 하는 겁니까? TV 광고도 합니까?”
선우현이 관심을 보이자마자 양수진이 눈을 반짝이며 설명했다.
“당연하죠. 세계최초의 M 연료전지차인데요. 광고는 전 세계에 할 거예요.”
“그럼 기왕이면.”
“네!”
“출연료를 잘게 나눠서라도 한 방에 여러 명을 썼으면 좋겠는데.”
“네?”
“우리 기획사 소속 배우 다섯 명은 좀 알려진 사람들인데, 가수 라인은 연습생이나 아직 못 뜬 사람들이 꽤 많습니다. 그냥 소속 연예인부터 연습생까지 그 광고에 다 나오면 좋겠는데. 얼굴이라도 좀 알리게.”
광고모델에 누구를 출연시킬지는 이미 결정되어 있다.
“남미연 씨와 구하니 씨를 메인 모델로 섭외하려고 했어요. 거기에 보조 출연으로 절반씩 다른 사람들이 나오면 되겠네요.”
“그거 좋네요. 물론 그런다고 내가 M 연료전지 물량을….”
양수진이 왼손으로 입술을 가리고 오른손을 흔들며 웃었다.
“어머. 그냥 생색만 좀 내는 거예요. 물량을 바라고 한 거 아니에요.”
“그것 때문이 아니라 최초 출시를 하니까 물량을 더 할당하려고 했는데, 필요 없으면 뭐.”
“앗! 고맙습니다! 엄청 필요해요!”
◈ ◈ ◈
태양 백화점과 전호 호텔은 대성차의 자동차 프리미어 X8의 광고 촬영에 협조했다.
대성차에서는 M 연료전지차를 세계최초로 출시한다고 발표했다.
M 연료전지에 대한 건 이미 예전부터 기사가 많이 나왔다. 그 연료전지로 차를 개발하는 회사가 국내외에 많다는 것도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대성차가 갑자기 프리미어 X8의 연료전지 버전을 출시한다고 발표했다. 보통은 미리 떡밥이 깔리다가 출시되기 마련인데, 프리미어 X8은 갑자기 튀어나왔다.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판에 관련 글이 여럿 올라왔다.
- 차라는 게 이렇게 빨리 개발되는 거였나?
- 너무 빨리 만드는 거 아닙니까?
- X8은 기존에 휘발유차였다가 전기차 버전이 나중에 나왔습니다. 그걸 다시 연료전지차로 개조한 거라더군요. 그래서 빨리 나올 수 있었다더군요.
- 그래도 너무 빠른데요. 다른 회사보다 먼저 출시하려고 대성차가 무리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 한국에서 나온 기술인데, 당연히 한국차에 먼저 적용되어야죠.
- 완성도가 걱정되니까 그러지요.
- 차가 나와 보면 알겠죠. 광고만 보면 잘 만들었나 본데.
다른 걸 궁금해하는 사람도 있었다.
- 그 광고에 나오는 배우들은 다 누구입니까?
- 설마 구하니와 남미연을 모르세요?
- 알죠. 아는 얼굴도 많은데, 처음 보는 사람이 많던데요.
- 구하니와 남미연이 최근에 기획사를 만들었습니다. 거기 소속된 연예인들이라더라고요.
- 제가 듣기로는 연습생을 포함해서 기획사 소속 연예인을 전부 다 출연시켰다던데요.
- 아하. 그게 광고 출연 조건이었나 보다.
◈ ◈ ◈
차량이 발표됐다고 바로 판매되는 건 아니다. 정식 판매까지는 시간이 조금 더 필요했다.
대성차는 정식 출시 전에 사전 제작된 차량을 자동차 전문 너튜버들에게 제공했다.
너튜버가 화면에서 웃으며 말했다.
“이 차는 이제 제 겁니다. 아. 농담이고요. 리뷰용으로 빌렸습니다. 하하하.”
“실내는 기존 X8의 전기차 버전과 휘발유차 버전이 섞여 있습니다. 이렇게 기존 부품을 그대로 쓴 덕분에 빨리 출시할 수 있었나 봅니다.”
“와, 이거. 차가 가볍습니다. 배터리가 없는 만큼 공간도 조금 넓어졌습니다. 배터리가 빠지면서 바닥이 낮아지니까 천장이 더 높아진 효과가 생겼죠.”
“잘나갑니다. 이게 배터리는 없는데 전기차용 모터를 쓰잖아요? 무거운 배터리를 휘발유로 대체한 덕분에 차의 중량이 가벼워졌고, 그만큼 잘나갑니다.”
“주행 품질은, 이게 호불호가 갈릴 수 있습니다. 좀 애매한 부분이 있어요. 그래도 뭐 이 정도면 저는 이 차를 살 겁니다. 전기차 느낌인데 충전 스트레스가 없으니까요.”
환경 관련 너튜버에게도 차가 제공됐다. 그 사람이 흥분한 얼굴로 말했다.
“여러분. 이 차는 말입니다. 매연이 안 나옵니다. 제가 측정기를 가지고 직접 확인했습니다. 그거 하나로도 휘발유차 사실 거면 이거 사셔야 해요. 아니, 전기차도 그냥 이걸 사세요.”
그가 바라는 건 차에 국한되지 않았다.
“그리고 가정용 보일러도 M 연료전지로 좀 만들어주세요. 아니, 그냥, 매연이 나오는 모든 장비는 다 이걸로 대체했으면 좋겠습니다.”
◈ ◈ ◈
사전 제작된 프리미어 X8이 태양 백화점에 전시됐다. 그런데 태양 백화점은 외부가 아니라 실내에 공간을 마련해 차를 전시했다.
백화점에 온 손님들이 자연스럽게 그 차를 구경했다.
“뭐야. 겉모습은 원래 X8과 똑같은데?”
“어머. 여기 안내판을 보니까 이 차는 지금 시동이 걸려있대.”
“진짜?”
실내에 배치한 M 연료전지차는 시동이 걸려있는 상태에서 가속페달만 밟을 수 없게 막아놨다.
“이 차 휘발유가 연료라며. 실내에서 시동을 걸어놓으면 매연 냄새는 어떻게 하려고?”
“아무 냄새도 안 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