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9. 맞불
대성차 홍보팀 과장 양수진이 손가락을 하나 세워 옆으로 흔들었다.
“할아버지는 대성차와 스래곤의 오너가 회담을 하자는 거잖아요. 그래서 어려운 거예요.”
“너는 다르다?”
“저는 회사와 상관없는 개인적인 만남이니까요. 선우현 씨와 만나도 회사 홍보 이야기는 한마디도 안 해요.”
회장 양중근이 은근히 기대하며 물었다.
“개인적인 만남이다? 그러면 요즘 말로 그, 썸….”
양수진이 얼른 말했다.
“아니요.”
양중근은 실망했다.
“그건 아니구나. 하긴. 너 혼자 힘으로는 무리지. 강력한 경쟁자들이 있는데.”
너무 대놓고 아니라고 하면 반발심이 생긴다.
“그래도 나중에는 혹시 모르잖아요? 친하게 지내다 보면 어떻게 될지 누가 알겠어요?”
양중근의 표정이 다시 밝아졌다.
“그렇지?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지?”
“일단 할아버지가 좀 도와주셔야 해요 홍보팀에서 해도 되는데, 할아버지가 하시면 무게가 다르잖아요.”
양중근이 팔을 걷었다.
“당연히 내가 도와야지. 전호 호텔 전상미 사장이나 태양 백화점 유소율 이사보다 더 화끈하게 밀어주마.”
“네?”
“그 이야기 아니냐?”
“아닌 건 아닌데, 지금 필요한 건 그게 아니라요.”
양수진이 경찰 수사가 방해받는 현재 상황을 짧게 요약해 설명했다. 그녀는 홍보팀 과장이라서 그런 요약을 잘했다.
양중근이 말했다.
“경찰 수사를 방해하는 곳이 가수 기획사라고?”
“네. JXK가 제일 의심스러워요. 거기서 빽을 쓰는 것 같아요. 선우현 씨는 맞불을 원해요.”
“알았다. 당장 내가 가진 모든 인맥을 동원해서….”
그녀가 얼른 손을 들었다.
“10%만 힘을 쓰시래요. 그러면 경찰이 알아서 수사할 수 있대요.”
“응? 굳이?”
“일을 너무 크게 키우면 불편한가 봐요. 선우현 씨는 사생활이 알려지는 거 싫어하잖아요.”
대성차 그룹 회장 양중근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선우현 사장은 신비주의를 추구하지. 그러면…. 딱 한 곳에만 전화할까?”
◈ ◈ ◈
안성준 형사가 항의했다.
“팀장님. 송정구 이사를 풀어줬단 말입니까?”
“그럼 어쩌냐? 압력이 자꾸 들어와서 다른 놈들은 잡아두더라도 송정구는 보내주는 수밖에 없었다. 그놈은 풀어준 상태로 조사해도 되잖아.”
“잡아두고 조사하는 거랑 같나요.”
광수대 팀장이 인상을 썼다.
“성준아. 그런데 말이야. 스래곤 사장이 힘써 주는 거 맞아?”
“네. 맞습니다. 아주 폭격을 하겠다던데요?”
“아직 폭격기가 이륙 안 했대? 아니면 대공포에 맞아서 다 추락했나? 왜 소식이 없냐?”
◈ ◈ ◈
청부업자 박석진과 조직원들은 경찰에 체포돼 조사받는 중이다. 매니저 주종환은 병원에서 수갑을 찬 채로 치료받았다.
그런데 송정구 이사는 일단 풀려났다.
선우현이 전호 그룹과 대성차 그룹에 연락하는 사이에 JXK가 인맥을 동원해 송정구만 빼냈다.
송정구가 사장실에서 머리를 숙였다.
“사장님. 빼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JXK 사장 천호균이 유리컵을 집어 던졌다.
“지금 감사라는 소리가 나오나!”
컵이 송정구를 스치고 지나가 벽에 충돌하며 박살 났다. 유리 파편이 바닥으로 튀었다.
“힉!”
천호균이 화를 냈다.
“송 이사! 도대체 일을 어떻게 했길래 경찰에 체포돼! 네가 경찰에 잡히면 나까지 곤란해지는 거 모르느냔 말이다!”
그래서 천호균은 송정구를 빼냈다.
매니저 주종환은 천호균이 뒤에 있다고 짐작은 했다. 그렇지만 직접 지시를 받은 건 아니다.
하지만 송정구는 다르다.
“알고 있습니다.”
천호균이 손가락을 넥타이에 걸어 반쯤 풀며 말했다.
“이제 어쩔 거야?”
“일본에 나가 있겠습니다. 여기 상황이 해결될 때까지 일본에서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당연히 열심히 일해야지. 이번 일을 덮으려면 돈이 얼마나 많이 깨질 텐데, 그거 도로 채워놔야지!”
송정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런데 사장님. 일본에 가려면 비행기를 타야 하는데, 혹시 저한테 출국금지가 걸려있으면….”
“기다려봐. 일단 걸려있는지부터 확인해야 하니까.”
천호균이 송정구를 빼낼 때 도와준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사람의 힘이면 출국금지 여부는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상대가 전화를 받자마자 천호진이 말했다.
“국장님. 천호진입니다.”
- 천 사장. 나도 전화하려고 했는데.
천호균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송정구가 빠져나왔으니까, 이제 대가를 받아먹겠다는 거네.’
“국장님. 시간이 되시면 저녁때 같이 식사나 하시죠. 저도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제가 애들 몇 명 데리고 나가겠….”
상대의 목소리가 싸늘했다.
- 천 사장. 나한테 엿 먹인 거지?
“예?”
- 나보고 도와달랄 때는 별일 아니라면서?
“국장님한테 그 정도는 쉬운 일….”
상대의 목소리가 커졌다.
- 도대체 얼마나 큰 건인데 전호 그룹에서 항의가 들어와!
“예?”
- 왜 경찰 수사를 방해하냐고 따지던데, 이거 어떻게 할 거야!
천호균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재빨리 머리를 굴려봤지만, 구하니와 전호 그룹의 관계는 짐작도 가지 않았다.
‘전호 그룹이 빽으로 있으면 구하니가 옛날에 그렇게 당할 리가 없는데?’
“전호 그룹에서 도대체 왜….”
-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천 사장이 알아야지! 앞으로 다시는 전화하지 마!
전화가 뚝 끊어졌다. 천호균은 당황했다.
“아니, 이게 무슨….”
송정구가 물었다.
“사장님. 왜 그러시는지….”
“기다려봐. 왜 이러는지 나도 확인 좀 해야겠다.”
천호균이 다시 전화를 걸었다.
“본부장님. 천호균입니다.”
이번에 통화하는 사람도 경찰 수사에 압력을 가해 송정구를 빼내는 데 도움을 주었다.
상대의 목소리가 차가웠다.
- 천 사장. 대성차 그룹하고 무슨 사이입니까?
“대성차요? 전호가 아니고요?”
- 전호는 무슨 소리인지 난 관심 없고, 대성차랑 무슨 사이냐니까요.
“우리 소속 가수가 대성차가 주최한 공연에 참여한 적이 있습니다만….”
- 공연하다가 대성차 양중근 회장님 멱살이라도 잡았습니까?
“예? 그게 무슨….”
상대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 도대체 무슨 짓을 했는데 양중근 회장님이 내 위에다 직접 항의하냐고!
“예?”
- 당신 도와주려다가 지금 나까지 찍혔어! 나한테 피해가 생기면 내가 당신 가만 안 놔둘 거야!
전화가 뚝 끊어졌다.
천호균은 당황했다.
“아니, 왜들….”
그는 왜 그가 연락한 사람들이 이렇게 나오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송 이사를 빼내 달라고 할 때만 해도 큰소리치던 사람들이 왜….’
송정구는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채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사장님. 일이 잘 안 풀리는 겁니까?”
“송정구 이사.”
“예. 사장님.”
천호균이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너 도대체 누구를 건드린 거냐?”
◈ ◈ ◈
광수대 팀장이 실실 웃었다.
“흐흐흐. 나한테 송정구를 좀 풀어주라고 한 사람들이 도로 전화했다. 오해하지 말아달란다.”
안성준이 툴툴댔다.
“오해는 무슨. 이리저리 돌려 말하긴 했지만 결국 다 압력이었다면서요.”
“그 사람들도 윗선의 전화를 받고 나한테 그런 거라고 미안하단다.”
“JXK가 엄청 윗선을 움직였나 보네요.”
“그리고 선우현 사장은 더 위에다 손을 썼겠지.”
“그렇겠죠. 아주 폭격을 하겠다고 했으니까.”
팀장이 물었다.
“그 폭격기가 어디서 떴는지 아냐?”
“아뇨.”
“대성차 그룹이랑 전호 그룹. 사과한 사람들이 묻더라. 이번 사건이랑 재벌그룹이 무슨 관계냐고.”
“어…. 대성차는 알겠네요. 스래곤의 M 연료전지는 자동차에 들어가잖아요.”
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치. 나도 대성차는 이유가 짐작이 갔어.”
“설마 그대로 말해준 건 아니시죠?”
팀장이 손을 흔들었다.
“장난하냐? 선우현 사장은 신원조회에 락까지 걸려있는데 내가 그걸 왜 말해? 모른다고 했다.”
“역시 우리 팀장님은 낄낄빠빠를 잘하신다니까.”
“그런데 내가 이해가 안 가는 건 말이야.”
“네?”
팀장이 고개를 갸웃했다.
“대성차가 선우현 사장의 일에 나서는 건 이해가 가. M 연료전지가 있으니까. 그런데 전호 쪽에서는 왜 나선 거지? 너 혹시 모르냐?”
“저는 선우현 씨가 스래곤 사장이라는 것도 이번에 알았는데요?”
“넌 선우현 사장에 대해서 아는 게 뭐냐?”
“어…. 나 같은 벼룩의 간을 빼먹는 사람이라는 거? 내가 그동안 밥을 몇 번이나 샀는데요.”
“자랑이다.”
◈ ◈ ◈
송정구 이사가 다시 체포됐다.
주종환이나 박석진 패거리를 수사해 알아낸 정보에서 송정구의 이름이 자꾸 나왔다. 다시 체포할 명분은 그 정도면 충분했다.
안성준 형사가 취조실에서 송정구의 앞에 앉았다.
“밖에 잠깐 나갔을 때, 지금 어떤 상황인지는 파악하셨지요?”
송정구는 얼굴빛이 어두웠다.
“도대체 왜 대성차와 전호에서….”
“이제 JXK가 송정구 씨를 위해 빽을 써봤자 안 통하는 건 확실히 아시겠군요.”
송정구도 안다. 그가 기대하는 건 천호균 사장의 인맥과 영향력인데 이번에는 그게 통하지 않았다.
안성준이 말했다.
“송정구 씨가 다 뒤집어쓰고 들어가면, 혼자 엿 되는 겁니다. 교도소에 있는 동안 그 일을 시킨 사람은 밖에서 두 다리 쭉 뻗고 잘 살겠죠.”
“끄응.”
“그러니 다 털어놓으시죠. 누가 시켰습니까?”
안성준은 누가 시켰는지는 짐작하고 있다. 하지만 증거가 없었다. 자백이라도 필요했다.
송정구는 기가 죽었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자백할 생각은 없다.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다.
“난 모릅니다. 이거 다 오해입니다. 나는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었습니다.”
안성준이 취조실에서 나왔다.
“팀장님. 입을 안 여는데요? 천호균이 시켰다는 거 다 아는데 말이죠.”
“지금 자백하면 징역을 피할 수 없으니까, 천호균이 방법을 찾을 때까지 시간을 끌려는 거겠지.”
“그럼 JXK가 쫄딱 망하면 털어놓을까요?”
“대형 기획사인데 설마 망하겠어? 소속 연예인이 한둘이 아니잖아.”
“젠장. 수사 방해만 없으면 해결될 줄 알았는데, 돈 많은 놈이 뒤에 있으니 어렵네요.”
팀장이 말했다.
“JXK나 잘 털어봐. 영장 나왔다.”
◈ ◈ ◈
선우현이 그날 오후에 구하니를 만났다.
“오늘 오전에 경찰이 JXK를 압수 수색했다는 뉴스 봤습니까?”
“네. 당연하죠. 이번 사건 관련 기사를 열심히 찾아보거든요.”
옆에서 예능 작가 안유정이 말했다.
“저도 틈만 나면 보고 있어요. 나쁜 놈들. 이 기회에 그 회사 확 망해버렸으면 좋겠다.”
구하니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천호균은 잡혀야 하지만 회사는 망하면 안 돼.”
“이 언니가 착해빠져서는. 거기 천호균 앞잡이가 한둘이야? 그 사람들을 다 용서하겠다는 거야?”
“그게 아니야. 회사가 망하면 거기 연습생 애들은 길거리에 나앉잖아.”
안유정이 잠시 생각해보았다.
“웅…. 회사가 저 꼴이 되면 새로 데뷔하는 건 어렵지 않나? 이미 데뷔한 가수들도 어중간한 사람들은 방송 스케줄 잡기가 쉽지 않을걸?”
구하니가 물었다.
“왜? 너 방송국에서 뭐 들은 게 있어?”
안유정은 조연출 출신인 박성훈 PD와 함께 예능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있다. 음악방송 쪽도 같은 예능국이라 무슨 소문이 퍼지는지 들을 수 있었다.
“이미 JXK가 수사받는다는 소문이 쫙 돌았거든. 이런 때에 괜히 얽히기 싫어하는 사람 많아. 같은 조건이면 JXK 소속은 좀 피하는 분위기야.”
“받아먹은 게 있어서 찔리는 사람들도 거리를 두겠네.”
“거기다가 이건 소문인데.”
안유정이 목소리를 낮췄다.
“대성차 그룹하고 전호 그룹에서 JXK를 싫어한다는 말이 있어.”
“그, 그래?”
“전호 그룹이야 계열사별로 쪼개진 곳이니까 덜하지만, 대성차 그룹은 사이즈가 다르잖아. 소문이 사실이라면 방송국은 더 거리를 두고 싶겠지. 광고비가 얼마인데.”
구하니가 한숨을 내쉬었다.
“다들 어려워지겠다.”
“그걸 왜 언니가 걱정하냐고. 착해빠져서는.”
안유정이 선우현을 돌아보았다.
“우현 오빠. 이 언니가 이래요.”
선우현이 물었다.
“유정아. 그런데 넌 왜 여기 있을까? 난 하니 씨만 보는 줄 알았는데?”
그녀는 당당했다.
“하니 언니의 선배 매니저로서 새 매니저를 만나는 건데요?”
“난 그놈들을 잡으려고 임시로 매니저를 한 거야.”
“우현 오빠. 놀면 뭐해요? 이 기회에 아주 그냥 하니 언니 전담 매니저로 눌러앉아요.”
안유정은 선우현이 스래곤 사장이라는 건 모른다. 말해준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나 바쁘다.”
“직업이 백수 닐리리 맘보 아녔어요?”
“요즘은 아니야.”
“설마 회사 다녀요?”
“설마가 무슨 뜻이냐?”
“회사원이 이 시간에 밖에 있어요?외근 나왔다가 땡땡이치는구나?그러다 들키면 잘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