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3. 앞잡이
선우현은 구하니의 매니저 자리에서 잘리면 밥줄이 끊기는 것처럼 말했다.
매니저 고성찬이 다급히 변명했다.
“다 주종환이 시켜서 한 거야! 나는 진짜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고!”
“무슨 생각? 드라마 배역을 팔아서 나를 치라고 청부할 생각?”
“그, 그건 주종환이 시킨 일을 하려다 보니까 어쩔 수 없이…. 그리고 치는 게 아니라, 매니저 자리에서 잘릴 정도만….”
배우 소병훈이 옆에서 화를 벌컥 냈다.
“그걸 변명이라고 하냐!”
“내가 다 설명할게. 이건 다 너를 위해서….”
“꺼져! 이 새끼야! 다시 내 앞에 나타나면 넌 내 손으로 처넣을 거야!”
고성찬이 선우현의 초소형 녹음기를 힐끗 보았다. 거기에 증거가 들어 있었다.
선우현이 물었다.
“이게 탐나냐?”
“얼마면….”
“1분 준다. 그 후에도 네가 내 눈에 보이면 이 파일은 형사 손에 넘어갈 거다.”
선우현의 눈빛은 차가웠다. 고성찬은 협상은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다.
선우현이 말했다.
“이제 30초 남았네.”
- 선장님? 10초 지났는데요?
고성찬 그 말을 듣고 화들짝 놀라 도망쳤다. 눈앞에서 사라지려면 시간이 부족했다.
소병훈이 그 모습을 노려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젠장.”
그가 선우현을 돌아보며 사과했다.
“미안하다. 난 정말 몰랐다.”
“말을 까네?”
“아니, 말은 너도 까고 있는데….”
“아. 그렇지.”
소병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녹음파일 말인데. 나한테 줄 수 있을까?”
“어디 쓰려고?”
“내 매니저가 저지른 짓이 알려지면 나도 좋을 게 없어. 그건 폐기해야 해. 돈은 충분히 낼 테니까….”
“내가 매니저이긴 한데, 돈이 좀 있어.”
“어?”
“그리고 이 파일의 복사본이 있다는 생각은 못 하냐?”
“아…. 그렇겠네. 그거 녹음파일이지.”
선우현이 초소형 녹음기를 주머니에 넣었다.
“괜한 욕심 부리지 말고 너희 회사는 저놈 처리나 제대로 해라.”
소병훈이 장담했다.
“오늘 일은 소속사 사장님에게 직접 이야기하겠다. 고성찬을 왜 잘라야 하는지도 말하겠다. 안 자르면 내가 가만히 안 있어!”
“그리고 미안하다는 사과는 하니 씨한테 해. 네 매니저가 하니 씨 팬 미팅을 망칠 뻔했잖아.”
“당연하지. 내가 꼭 사과하겠다.”
선우현이 소병훈의 차를 보았다. 소병훈도 연예인용 밴을 사용했다. 그 차는 회사 소유였다.
“매니저 새로 뽑아야겠네.”
소병훈이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은 새 매니저라 해도 믿어도 되나 모르겠다. 당분간은 나 혼자 다녀야겠어.”
“할 줄은 알고?”
“나도 배우로 뜨기 전에는 온갖 알바를 하면서 살았다. 저 차 운전은 당연하고, 내 앞가림 정도는 할 수 있어.”
◈ ◈ ◈
선우현이 그곳을 떠났다.
소병훈은 한숨을 푹푹 쉬었다.
“젠장.”
그는 집으로 들어갔다. 마음에 여유가 없어서 씻는 것보다 술 생각이 먼저 났다.
그는 냉장고에서 맥주를 몇 캔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런 후에 노트북으로 구하니의 팬 미팅 소식부터 검색했다.
“고성찬 그 새끼가 얼마나 망쳐놨는지 알아야 무슨 말로 사과해야 할지 알…. 어?”
팬 미팅 후기를 찾는 건 쉬웠다.
“대성공? 망했다며?”
그가 글을 좀 더 읽었다.
“아. 장소가 변경됐구나. 처음에는 그 새끼가 망쳐놓았는데, 마침 휴관인 기업체의 전시관을 빌려서…. 어?”
팬들이 상품으로 뭘 받았는지도 나왔다. 태블릿 PC나 최신 스마트폰은 납득이 갔다.
“갑자기 터진 사고를 돈을 발라서 수습한 건 이해가 가는데….”
대박상이 문제였다. 그 상품을 믿을 수가 없었다.
“R 크림을 네 개나 뿌렸다고? 이거 구라 아냐?”
R 크림은 소병훈도 지금 하나밖에 없다. 그나마도 반쯤 썼다. 그걸 다 쓰기 전에 새로 구해야 하는데 쉽지 않았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이건 누가 뻥 친 거겠지.”
소병훈이 다른 후기를 찾아봤다.
대박상으로 R 크림을 주었다는 후기가 또 있었다. 그 후기에는 구하니가 사인한 R 크림 케이스의 사진도 올라왔다.
소병훈은 당황했다.
“진짜였어? 이 귀한 걸 네 개나…. 어디서 구한 거지? 인맥이 장난 아니구나.”
소병훈은 하나 구하기도 힘든 R 크림을 구하니는 팬에게 뿌릴 수 있다는 게 너무 부러웠다. 그리고 안타까웠다.
“내가 요즘 구하니를 촬영 현장에서 가끔 마주치니까, 나도 부탁하면 하나쯤 살 수 있었을 텐데….”
매니저가 한 짓 때문에 R 크림을 구해달라고 부탁할 염치가 없다. 저절로 욕이 나왔다.
“고성찬 개새끼.”
◈ ◈ ◈
주종환은 기획사 JXK의 매니저다. 지금은 걸그룹 피치소녀와 다른 연예인을 맡고 있다.
선우현이 인터넷으로 피치소녀의 행사 일정을 검색했다.
“얘들은 지금 충남 바닷가에 있는데.”
김수선이 보고했다.
- 검색하신 장소에서 피치소녀는 찾았습니다만, 주종환은 보이지 않습니다.
“매니저는 있어?”
- 있기는 한데 다른 사람입니다.
“음…. 일단 하니 씨를 만나야겠네.”
◈ ◈ ◈
구하니는 한밤중에 선우현의 전화를 받았다. 그녀의 표정이 밝아졌다.
“오늘 팬 미팅 이야기가 더 하고 싶으신가 보다.”
그녀가 전화를 공손히 받았다.
“여보세요.”
- 지금 집 앞이니까 잠깐 보시죠.
“네?”
- 의논할 게 있어서.
구하니가 거울을 보았다. 이미 화장은 다 지웠다.
“시, 시간이 필요해요! 한 시간!”
“잠깐이면 됩니다. 범인을 찾으려면 정보가 더 필요해서요.”
“아…. 범인 이야기를 하려고 오셨구나.”
구하니는 화장하느라 시간을 소모할 때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집 앞 카페에서 봐요. 늦게까지 하는 데 있어요.”
◈ ◈ ◈
구하니는 얼굴을 칭칭 싸매고 나갔다. 모자도 쓰고 목 스카프에 마스크, 선글라스까지 썼다.
그녀가 물었다.
“무슨 일로….”
“일단 오늘 스프링클러 터진 거. 소병훈의 매니저 고성찬이 룸살롱 양아치들을 시켜서 저지른 짓입니다.”
구하니는 당황했다.
“네? 소병훈 씨가 저한테 왜….”
“나쁜 사이는 아닌가 보죠?”
“잘 모르니까 좋고 나쁘고가 없죠. 마주치면 인사나 하는 정도인데요.”
“소병훈은 자기는 몰랐다고 합니다. 매니저 고성찬의 짓인 건 확인했습니다.”
“매니저는 저랑 더 인연이 없는데….”
“나하고 있습니다.”
그녀가 얼마 전의 일을 떠올렸다.
“저번에 대기실에서 말싸움을 좀 하신 거요?”
“그게 기분 나쁘다고 나를 노렸습니다. 내가 하니 씨의 매니저 자리에서 잘리게 하는 게 목적이었죠.”
“스래곤 사장님을 매니저에서 자른다고 무슨 타격이 있다고요?”
“그놈은 내가 누구인지 모르니까.”
“아. 그렇죠.”
구하니가 걱정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요? 그놈들이 또 뭔가 꾸미는 건가요?”
“룸살롱 놈들이나 고성찬은 해결했으니까 이제 얼씬도 안 할 겁니다.”
“네?”
“뭐 크게 한 건 아니고요.”
“아! 납치범 놈들 잡을 때처럼 갈아버리셨구나.”
“이놈들은 누굴 납치한 건 아니라서 이번에는 사지는 멀쩡하게 놔뒀습니다.”
김수선이 끼어들었다.
- 대신에 사무실에 불을 지르셨죠.
“사무실에 소화기 있는 거 보고 지른 거야. 소화기로 잘 껐더라고.”
선우현이 설명했다.
“고성찬은 다시는 안 나타날 겁니다. 그놈이 하니 씨 앞에 나타나면 내가 증거를 공개하고 그놈을 감방에 보낼 테니까요.”
구하니가 손뼉을 쳤다.
“그러면 다 해결된 건가요? 아니, 잠깐만요.”
그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날 대기실에서 말싸움 조금 했다고 이렇게까지 하나요? 그놈 혹시 사이코패스인가요?”
“일을 너무 크게 벌이긴 했지요. 혼자서라면 안 그랬을 텐데, 부추긴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
“JXK 매니저 주종환.”
구하니가 바로 납득했다.
“아!”
선우현이 말했다.
“이번에는 소병훈이나 고성찬에 관해 물었을 때와는 반응이 다르군요.”
“저번에 지하주차장에서 보셨다시피 사이가 나쁘니까요.”
“내가 그놈을 만나야겠는데, 그놈은 지금 피치소녀 옆에 없습니다.”
“피치소녀가 지역 행사에 갔나 보죠?”
“맞습니다. 지금 충남 바닷가에 있습니다.”
“그럼 당연히 안 따라갔을 거예요. 주종환은 인맥 관리에 도움이 되는 곳만 직접 가요. 지역 행사는 로드 매니저를 보내죠.”
“그럼 지금 어디 있을까요?”
“음…. 다른 연예인을 데리고 방송국에 가지 않았을까요? 아. 제가 지금 찾아볼게요.”
그녀가 잠깐 검색하더니 말했다.
“주종환이 관리하는 가수가 KMTV 방송국에 오늘 출연해요. 거기 갔을 거예요.”
“역시 하니 씨한테 물어보는 게 답이었군요.”
“악연이니까 저도 좀 알아요.”
“어떤 악연인가요?”
“JXK는 저와의 계약을 끝낸 후에 직원들을 동원해 제 활동을 방해했어요. 주종환이 JXK의 앞잡이 짓을 많이 했죠.”
“그 전부터?”
“아뇨. 주종환은 제 계약이 남아 있을 때는 예의 바른 척했어요. 그러다 재계약을 안 하니까 돌변하더라고요.”
선우현이 결론을 내렸다.
“자기한테 이익이 되는 방송국만 가고 행사는 남에게 맡기는 주종환이, 생기는 것도 없는데 혼자 날뛸 리는 없지요. 뒤에 누가 있군요.”
“아마도요.”
“누구인지 압니까?”
“몰라요. 본부장이나 이사, 아니면 사장이겠죠.”
“확인해야겠네요.”
“어떻게….”
“만나서 직접.”
선우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구하니가 물었다.
“지금 가시게요?”
“이렇게 늦은 시간에는 목격자가 없어서 좋습니다.”
“네?”
“내가 지상의 법을 안 지킬 때가 있어서.”
“혹시 다크 나이트세요?”
김수선이 끼어들었다.
- 구하니가 헛소리하는 걸 보니 빨리 들여보내서 재워야겠습니다.
선우현이 말했다.
“들어가서 쉬어요.”
“제가 같이 갈까요?”
“하니 씨는 아무것도 몰라야 합니다. 지금 이 대화도 들은 적이 없어요. 당연히 같이 가면 안 됩니다.”
“하지만….”
“이건 매니저가 처리할 테니까 기다려요. 나중에 말해줄 테니까.”
◈ ◈ ◈
JXK 주종환은 방송국 일정을 마치고 회사로 돌아갔다가 술집으로 갔다.
그가 고성찬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받지 않았다.
“이 새끼가 왜 갑자기 전화를 안 받아? 만나서 다음 계획을 의논해야 하는데 왜 이래?”
그는 고성찬을 이 술집으로 불러내려고 했다. 그런데 연락이 되지 않았다.
“혹시 겁먹었나. 벌써 손을 떼려고 그러는 거야? 하. 이 쫄보 새끼.”
주종환이 술을 한 잔 더 마시고 술집을 나왔다.
그는 이곳에 차를 몰고 왔다.
“몇 잔 안 마셨으니 괜찮겠지.”
음주운전은 보통 습관적으로 한다. 예전에 음주운전을 했는데 괜찮았으면 다음에도 괜찮을 줄 알고 또 한다.
주종환도 그런 스타일이다. 그는 오늘처럼 짜증이 난 상태로 술을 마시면 운전대를 직접 잡곤 한다.
주종환이 운전석으로 가서 손잡이에 손을 댔다. 스마트키를 감지한 차량이 잠금을 해제했다.
주종환이 앞문을 열고 운전석에 앉았다. 그런 후에 문을 닫았다.
문을 닫을 때 느낌이 평소와 조금 달랐다. 그가 룸미러를 보았다. 이상한 점은 보이지 않았다.
“창문이 살짝 열렸나?”
그는 술을 마신 상태라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창문을 올리는 스위치를 손가락으로 당겨본 후에 시동을 걸었다.
주종환이 차를 몰고 집으로 향했다.
“그 쫄보 새끼를 어떻게 꼬드겨서 그 매니저 새끼를 쳐내지? 쫄보 새끼가 그래도 사람 부리는 건 잘했는데.”
그래서 고성찬이 없으면 아쉬웠다.
“일이 잘못되면 꼬리 자르기도 좋고.”
그는 여차하면 고성찬에게 뒤집어씌울 생각이었다.
“이번에 스프링클러를 터트린 것 같은 일을 다시 하다가 현장 담당이 걸리면, 고성찬이 알아서 꼬리를 잘라야지. 고성찬까지 걸리면 내가 고성찬을 자르고.”
갑자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네가 걸리면 누가 너를 자르지?”
주종환은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이 차에는 그 혼자 타고 있는 줄 알았다. 손이 미끄러지면서 차가 비틀거렸다.
“누,누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