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9. 팬 미팅
이튿날 선우현과 구하니가 팬 미팅 장소로 이동했다.
구하니가 차에서 말했다.
“강남대로 뒤쪽 골목으로 가면 언덕에 4층짜리 건물이 있어요. 거기 4층이 팬 미팅을 하기 괜찮아요.”
선우현이 밴을 운전하며 말했다.
“그런 장소를 섭외하는 건 매니저가 하는 일이라던데.”
구하니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에이. 괜찮아요. 전에도 행사로 이용한 곳이라서 제가 전화해야 간단히 처리돼요.”
“이벤트 회사도 하니 씨가 불렀던데요.”
“그 회사도 전부터 맡기던 곳이라서 제가 전화만 하면 다 알아서 해줘요.”
“나도 뭔가 도와주고 싶은데, 할 일이 없군요.”
“우현 씨는 스래곤 경영이랑 신기술 연구로 바쁘시잖아요.”
“어….”
김수선이 끼어들었다.
- 선장님. 거기서 그렇다고 말하면 양심 없는 겁니다.
선우현이 둘러댔다.
“그런 것보다 하니 씨 일이 더 중요하니까요.”
구하니의 눈이 초승달을 그렸다.
“어머. 고마워요.”
- 그렇다고 그런 식으로 말하길 바란 건 아니었는데요.
팬 미팅을 진행하기로 한 건물은 강남의 언덕 중간에 있었다.
차가 그곳에 도착했다. 그런데 건물 앞에 사람들이 서 있었다.
구하니가 그들을 알아보았다.
“이벤트 업체분들인데요? 왜 나와 계시지?”
두 사람이 차에서 내렸다.
구하니가 몇 번 일을 맡긴 적 있는 업체 팀장에게 물었다.
“무슨 일인데 그러세요? 팬 미팅 준비는요?”
팀장이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준비는 이미 다 끝내 놨습니다. 그런데…. 조금 전에 4층의 스프링클러가 터졌습니다.”
“네?”
“우리는 불을 쓰지 않았는데 그게 왜 터졌는지 모르겠습니다.”
“거기 상태가 어때요? 팬 미팅이 가능할까요?”
“천장에서 물이 쏟아져서 준비해놓은 게 다 젖었습니다.”
물바다에서 팬 미팅을 할 수는 없다.
“그럼 연락을 주셨어야죠.”
“방금 터져서요. 안 그래도 막 연락하려던 참입니다.”
선우현이 팀장에게 물었다.
“스프링클러는 4층만 터진 겁니까?”
“네. 이 건물은 소방장치가 층별로 따로 작동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니까 누가 노린 것처럼 4층만 터졌다는 거군요.”
“네?”
“라이터로 지진 거네.”
“아니, 누가 왜….”
선우현이 작게 말했다.
“수선아. 근처에 수상한 놈은?”
- 찾고 있습니다. 사람이 꽤 많습니다.
“여기가 대로변이 아닌 게 어디냐. 강남역 앞이었으면 찾아봤자 소용도 없었을 텐데.”
- 찾았습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곳 상황을 훔쳐보는 놈이 있습니다.
“수상해 보이냐?”
- 실실 웃고 있는데요?
“그놈 짓이 맞네.”
선우현이 씩 웃었다.
“하니 씨가 이렇게 활발히 활동하다 보면 걸려드는 놈이 있을 줄 알았다. 오늘 한 놈이 미끼를 물었어.”
- 선장님. 그놈이 이동하고 있습니다.
“추적해.”
- 지하철로 들어가면 추적이 어렵…. 버스 정류장 쪽으로 가는군요. 게다가 마을버스입니다.
“잘됐네. 놓칠 리는 없겠어.”
- 제가 저놈을 보는 동안은 선장님을 지원할 수 없습니다.
“여기는 내가 알아서 하면 돼.”
당황한 구하니가 이벤트 회사 팀장에게 물었다.
“그럼 오늘 팬 미팅은 어떻게 하죠?”
“저희가 준비한 이벤트 물품은 다 젖어서 쓸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4층은 지금 물바다라서….”
팀장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다른 장소를 구하셔야 합니다.”
“한 시간 뒤가 팬 미팅이에요. 이 근처에서 새 장소를 찾아야 하는데, 적당한 장소를 지금 당장 어떻게 구하겠어요?”
“그럼 연기하셔야….”
“이미 도착해서 어디 카페에 계신 분들도 있을 거예요. 다른 분들도 여기로 오고 계실 테고요.”
“아…. 큰일 났네요.”
구하니가 발을 동동 굴렀다.
“어떻게 하지?”
선우현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니 씨. 장소는 내가 구할 수 있습니다.”
“네? 진짜요?”
“그런데 이벤트 물품은 아무 가게에서나 사도 됩니까?”
팀장이 대답했다.
“파티 물품은 이 주변에서 사도 구색은 맞출 수 있습니다. 다만, 구하니 씨가 직접 준비하신 선물이 다 젖었습니다.”
“직접 준비한 선물이 없으면 상품으로 대체해야죠. 상품은 돈으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네? 아. 네. 그렇죠.”
선우현이 말했다.
“팀장님은 이벤트 물품으로 구할 수 있는 건 다 구해오시죠. 나는 장소를 섭외할 테니까.”
구하니가 옆에서 말했다.
“하지만 팬분들이 이미 이곳으로 오고 있는데요? 이제 한 시간 남았어요.”
“그러니까 여기서 가까운 장소를 한 시간 안에 구해야지요.”
“네?”
“아니다. 간단한 준비라도 하려면 지금부터 10분 안에 구해야겠네.”
“그게 가능해요?”
선우현이 앞쪽을 가리켰다.
“저기 전시장이 하나 있네요? 마당이 있는 집을 개조해서 전시용으로 쓰는 곳인가 봅니다.”
“하지만 저기는 이미 전시를 하는 중이잖아요. 우리한테 대관해줄 리가 없어요.”
“해줄 겁니다.”
선우현이 양수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대성차 회장 양중근의 손녀이고 대성차 홍보팀의 과장이다.
전화가 연결되자마자 양수진이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 어머! 선우현 씨. 안녕하세요.
“양 과장님. 저번에 나 제비 취급한 거 말입니다. 미안하다고 했지요?”
양수진의 목소리가 당장 다급하게 변했다.
- 죄, 죄송해요! 저번엔 제 사과가 부족했죠? 제가 당장 찾아뵙고….
“미안하면 그거 갚아요.”
- 네! 갚을게요! 말씀만 하세요!
“내가 지금 강남역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데.”
- 네! 제가 당장 갈게요!
“오실 필요는 없고, 여기 언덕 중간에 마당이 있는 이층집을 개조해 만든 전시관이 하나 있습니다. 그런데 전시 주관을 대성차에서 하네요?”
- 아! 그거요? 우리 회사에서 자동차와 인간을 테마로 한 체험 전시회를 하고 있어요. 차는 없지만 다양한 그림과 CG, 그리고 영상으로….
“저 전시장을 좀 빌렸으면 합니다. 될까요?”
- 당연하죠! 얼마나 오래 쓰실 건가요? 일주일 이상 쓰실 거면 아예 전시회 물품 다 철수시키고 새로 인테리어를….
“지금부터 몇 시간 정도.”
- 네?
“우리가 팬 미팅을 해야 해서.”
- 누구….
“당연히 구하니 씨지요. 내가 구하니 씨 매니저잖습니까?”
- 아. 그렇죠. 은밀한 취미생활 중이시죠.
양수진이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 혹시 그게 다예요?
“이벤트 진행은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까, 전시관만 좀 빌려주시죠.”
- 저기, 빚을 갚기엔 너무 작은 대가가 아닌가 싶어서요.
“그러니까 나를 계속 제비 취급 하고 싶다?”
- 아뇨! 거기 당장 비울게요!
“지금 문 닫아놨던데, 그냥 문만 열어주면 되겠네요.”
- 오늘이 휴관일이라 그래요! 당장 담당자한테 연락할게요! 아니다! 비밀번호 가르쳐드릴 테니까 그냥 열고 들어가세요! 그리고 제가 갈게요!
“오지 마라니까. 그리고 혹시 실수로 전시품을 망가뜨리면 나중에 나한테 청구해요.”
- 그냥 다 부수셔도 돼요! 다시 만들면 되죠!
선우현이 전화를 끊고 구하니에게 말했다.
“장소 섭외했습니다. 저 전시관으로.”
구하니가 감탄했다.
“와…. 그게 그냥 전화 한 통으로 되네요?”
“이제 이벤트 준비를 합시다. 세팅은 업체분들이 하실 테고, 우리는 선물이나 사러 갈까요?”
◈ ◈ ◈
배우 소병훈의 매니저 고성찬이 문자를 받고 피식 웃었다.
“팬 미팅 장소의 스프링클러를 터트렸다. 그럼 이제 구하니 팬 미팅은 거기서는 못 해.”
옆에서 기획사 JXK의 매니저 주종환이 물었다.
“프락치는?”
“그것도 이미 사람을 준비해 뒀다. 구하니가 개방된 곳에서 준비도 안 된 팬 미팅을 하면, 프락치가 팬인 척하고 쓱 끼어들어서 선동할 거야.”
“이게 무슨 팬 미팅이냐고, 매니저 자르라고 선동할 거지?”
“그러라며?”
“안 잊고 잘하고 있나 해서. 흐흐흐.”
고성찬이 실실 웃었다.
“이런 일의 전문가를 투입했으니까 기다려봐. 좋은 결과가 있을 거야. 흐흐흐.”
◈ ◈ ◈
구하니의 팬 미팅 참석을 위해 강남역으로 향하던 사람들에게 문자가 들어왔다. 팬 미팅 장소 변경 문자였다.
문자를 확인한 팬이 불평했다.
“아니, 팬 미팅까지 한 시간도 안 남았는데 지금 갑자기 변경하면….”
문자에는 약도도 들어 있었다.
“바로 그 근처네. 이러면 상관없지.”
팬 미팅에 같이 가는 친구가 문자를 읽으며 말했다.
“원래 팬 미팅 장소에서 수도가 터졌대. 그래서 급하게 옮긴 거래.”
“길거리에서만 안 하면 돼.”
사람들이 팬 미팅 장소에 하나둘 도착했다.
“와. 여기 좋다.”
“무슨 전시회를 하는 데를 그냥 빌렸나 봐.”
“갑자기 옮겼다더니 여기를 어떻게 구했지?”
“드디어 뽑은 매니저가 장소 섭외력이 짱인데?”
업체에서 이벤트를 위해 준비한 물품은 대부분 물에 젖어 쓸 수가 없다.
그런데 새로 빌린 곳은 대성차에서 돈을 들여 만든 전시장이다. 그 전시장은 내부 인테리어가 기존의 이벤트 룸보다 훨씬 더 고급스러웠다. 이벤트 업체에서는 장식이나 조금 세팅하면 될 정도로 환경이 좋았다.
전시관에 들어온 팬들이 웅성거렸다.
“여기 짱인데?”
“이제야 우리 하니 언니에게 어울리는 장소가 나왔네.”
“새 매니저 능력 있네.”
이벤트 자체는 평범하게 진행됐다.
지금 모인 팬들은 구하니의 목이 맛이 갔을 때도 그녀의 팬이던 사람들이다. 그녀의 목이 회복된 지금은 분위기가 예전 팬 미팅보다 훨씬 더 밝았다.
그러다 선물 증정 시간이 왔다.
이벤트 팀장이 사과했다.
“구하니 씨께서 미리 주신 선물은 다 젖어서….”
“괜찮아요. 매니저님이 새로 준비했어요.”
구하니가 마이크를 들고 말했다.
“여러분을 위해 선물을 준비했어요. 추첨으로 뽑을 거예요.”
추첨은 번호가 적힌 종이를 상자에서 뽑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먼저 꽝을 뽑았다. 50명이 참석했는데 그중 30명이 꽝이었다.
꽝을 뽑은 팬들이 아쉬워했다.
“난 꽝이다.”
“꽝을 왜 따로 뽑은 거야? 아차상 같은 거라도 주려고 그러나?”
이벤트 회사 직원이 한쪽에 작은 상자를 쌓았다.
“아차상 주는 거 맞네.”
구하니가 말했다.
“아차상은 태블릿 PC!”
“꺄아!”
“12.9인치짜리 대화면!”
“꺄아악!”
아차상 상품이 30명에게 증정됐다.
구하니가 다시 번호를 뽑았다. 이번에는 16명이 뽑혔다.
사람들이 기대했다.
“꽝이 태블릿 PC면 우리는….”
구하니가 상품을 공개했다.
“최신 스마트폰! 당연히 최고 사양으로!”
“꺄아! 언니! 사랑해요!”
태블릿 PC와 스마트폰은 근처 매장에서 쓸어모았다.
그런데 상품을 받지 못한 사람이 아직도 네 명이 남아 있었다.
그 네 명은 무대 위로 올라갔다. 다들 눈을 반짝였다.
“우리는 뭐예요?”
“혹시 스마트폰보다 더 좋은 거예요?”
구하니가 대답했다.
“이번 상품은 가격이 스마트폰보다는 싸요. 백만 원짜리거든요.”
“앗! 괜찮아요!”
“갑자기 준비하셨는데요. 백만 원이면 엄청 좋잖아요.”
“근처 가게에 스마트폰이 남는 게 없었나 보다.”
구하니가 작은 상자 네 개를 가방에서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이거 태양 백화점에 가면 백만 원에 팔아요.”
구하니의 팬 미팅 참석자 중에는 여자가 많았다. 그리고 그들은 요즘 다른 연예인들이 받고 싶어 하는 선물 1위가 어떻게 생겼는지 안다.
“어? 저거?”
“설마 R 크림?”
“1등 상품이 R 크림이야?”
R 크림을 받게 된 팬이 두 팔을 번쩍 들었다.
“언니! 사랑해요!”
R 크림은 백만 원짜리지만, 돈이 있다고 해서 살 수 있는 게 아니다. 물량이 워낙 귀해서 연예인들도 쉽게 구하지 못한다.
R 크림을 선물 받은 연예인 중에는 SNS 동영상으로 팬에게 절을 한 사람도 있었다.
이곳에 모인 팬들은 당황했다.
“아니, R 크림이 팬 선물로 줄 수 있는 건가?”
“다른 건 돈을 주고 사면 되지만, R 크림은 돈이랑 상관없이 구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던데….”
“당연하지. 외국 연예인 중에 저거 구해보겠다고 국내에 들어왔다가 빈손으로 나간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더라.”
R 크림을 받은 사람이 상자를 머리 위로 들고 흔들었다.
“나 R 크림 받았다!”
그녀와 같이 온 친구가 무대 아래에서 딜을 걸었다.
“내가 받은 3등 선물 줄 테니까 1등 선물 반띵!”
“꺼지셈!”
◈ ◈ ◈
매니저 고성찬이 전화를 받았다. 룸살롱의 실소유주인 영업부장 박주열의 전화였다.
고성찬이 물었다.
“작업은 잘 되고 있지?”
- 그게 말이야. 4층은 스프링클러를 터트려서 망쳐놨는데….
“그건 아까 문자로 알려줬잖아. 그래서 구하니는 어떻게 하고 있어? 그 성격에 팬 미팅을 중단하진 않았을 텐데. 카페나 식당은 지금 그 인원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없을 테고, 길거리나 공원에서 하나?”
- 4층에 물난리 난 거 확인하더니, 그 근처 전시장을 바로 빌렸다더라.
“어?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