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 은밀한 취미생활
양수진은 계곡 깊은 곳에서 머리까지 물속에 완전히 잠겼을 때는 정말 죽는다고 생각했다.
그 깊은 물에서 선우현이 그녀를 끌어낼 때 귓가에 한 이야기나 거친 숨소리가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녀가 약간 달아오른 숨을 내뱉었다.
“하아.”
구하니가 물었다.
“우현 씨에 대해서는 왜 물어보세요?”
양수진이 대답했다.
“난 아까 선우현 씨 아니었으면 죽었을 거예요.”
운전석에 앉아 있던 구하니가 동그래진 눈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네? 그냥 물가에 빠지신 거 아니었어요?”
“아뇨. 계곡 가운데 아주 깊은 곳까지 끌려갔어요. 난 수영할 줄 아는데도 어떻게 할 수가 없었어요. 진짜 죽을 뻔했죠. 선우현 씨가 그 위험한 곳으로 들어와서 구해준 덕분에 살았어요.”
“아. 그러셨구나.”
양수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일단 살아나긴 했는데 아까 상황을 다시 떠올려보니 좀 이상했다.
“저 계곡은 되게 위험했는데, 선우현 씨는 어떻게 구조 장비 없이 들어와서 나까지 데리고 나온 걸까요?”
구하니는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선우현 씨니까 가능한 거예요. 원래 그런 분이거든요.”
양수진이 몸을 운전석 쪽으로 기울였다. 그녀는 선우현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다.
“자세히 이야기해줄 수 있어요? 원래 그렇다는 게 무슨 말이에요?”
구하니가 살짝 경계했다.
“아니에요. 그냥 해본 말이에요.”
“선우현 씨는 혹시 해양구조대 뭐 그런 거였어요? 자세히 말 좀….”
앞으로 몸을 기울인 그녀의 눈에 운전석 계기판이 보였다.
“어?”
그녀는 대성차 양중근 회장의 손녀다. 어릴 때부터 차의 내부 구조를 보면서 자랐고 그녀의 직장도 대성차 홍보팀이다.
그래서 그녀는 자동차에 대해서 잘 알았다. 특히 대성차에서 만든 차는 아주 잘 알았다.
양수진이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 차, 시동을 켠 상태였어요?”
“네?”
구하니는 실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양수진은 헤어드라이어를 쓸 때는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당연히 이 연예인용 밴에 캠핑용 고용량 배터리를 설치한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 차량의 계기판 상태는 시동이 걸렸을 때의 모습이었다.
양수진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차에서 엔진 소리가 안 나는데요? 진동도 전혀 없고요. 이 차는 디젤 특유의 소음과 진동이 없을 수가 없는데?”
“아니, 그게요.”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거 전기차인가? 아닌데? 우리 회사 차인데? 이 차는 전기차 모델도 없고 하이브리드 모델도 없는데?”
구하니가 선우현을 찾으려고 앞유리 바깥을 두리번거렸다.
‘우현 씨도 양 과장님이 차에 타는 걸 봤는데 왜 말리지 않으신 거지?’
양수진이 말했다.
“구하니 씨가 조금 전에 시동을 켜겠다고 하면서 운전석으로 갔잖아요. 그래서 전기가 다 들어오는 거잖아요.”
“아니에요. 아직 시동 안 켰어요.”
“나 대성차 회장님 손녀예요. 대성차에서 나온 모든 차의 계기판의 어떤 상태에서 어떻게 보이는지 잘 알아요.”
그녀가 손으로 계기판을 가리켰다.
“분명히 시동을 켰어요. RPM 게이지도 올라가 있잖아요. 그런데 왜 소음과 진동이 없….”
문득 그게 가능한 경우가 하나 생각났다.
최근에 대성차에서 테스트 중인 차량은 개조 편의성 때문에 RPM 게이지를 일부러 올려놓는 편법을 썼다는 말을 얼마 전에 들었다.
그런 편법을 써야 하는 개조 차량에 뭐가 들어가는지도 생각났다.
“스래곤의 M 연료전지?”
대성차에서는 스래곤의 M 연료전지를 장착한 차량을 테스트 중이다. 여러 대의 개조 차량이 지금도 대성차 자동차 연구소에서 테스트 중이다.
“M 연료전지가 지금 이 차에 사용됐다면….”
지금 이 차가 왜 이렇게 조용한지 설명할 수 있다.
양수진이 시원한 표정을 지었다.
“아. 그렇구나. 이거 우리 회사 테스트 차량이었….”
갑자기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입도 떡 벌어졌다.
“자, 잠깐만요. 하니 씨 매니저 이름이….”
양수진은 선우현의 명함을 받았을 때 스래곤 사장과 동명이인이라고 생각했다. 스래곤 사장이 연예인의 매니저를 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차에 M 연료전지가 적용됐다면, 선우현은 동명이인이 아닐 수 있다.
양수진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설마 선우현 씨가 그 선우현이에요?”
“그 선우현이요?”
“스래곤 사장 선우현!”
구하니가 한숨을 내쉬었다.
“에휴.”
“진짜냐고요!”
구하니가 얼른 손가락으로 입술을 가렸다.
“쉿. 남들이 들어요.”
“마, 맞군요? 진짜 그 선우현이군요?”
“네. 맞아요. 비밀로 해주세요.”
양수진이 당황해서 물었다.
“아니, 스래곤 사장님이 왜 구하니 씨 매니저를 해요?”
몇 번이나 놓친 놈을 잡으려고 그런다고 말할 수는 없다. 구하니가 적당히 둘러댔다.
“선우연 씨와는 옛날부터 인연이 많았어요. 그래서 잠깐 도와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제 매니저는 임시로 하는 거죠.”
“도와주고 싶으면 사람 쓰면 되잖아요. 돈도 많은 분인데.”
구하니는 이럴 때 둘러댈 말을 하나 알고 있다.
“천재의 생각을 평범한 사람이 어떻게 다 알겠어요?”
“네?”
“선우현 씨는 천재잖아요. 그건 아시죠.”
“알죠.”
“그러니까 그냥 그런가 보다 하세요.”
“그, 그런가요?”
“네. 그래요.”
배우가 꿈이었던 양수진은 촬영 현장에서 배우와 밥차 밥을 먹으며 힐링을 한다. 그건 그녀의 취미생활이다.
양수진은 선우현도 그녀와 같은 이유로 매니저를 하나 싶었다.
“혹시 매니저 활동이 선우현 씨의 은밀한 취미생활….”
구하니가 얼른 맞장구쳤다.
“네! 맞아요. 취미생활. 딱 그거에요.”
양수진이 선우현의 정체를 깨닫고 놀란 가슴을 가라앉혔다. 그녀는 머리를 정성을 들여 마저 말리고 화장도 하려고 했다. 화장품은 구하니가 가진 것을 빌렸다.
그녀의 손이 멈칫했다. 구하니의 화장품케이스에 특별한 크림이 있었다.
“R 크림? 이게 왜 차에 있어요?”
“연예인이 많이 쓰잖아요. 그러니까 저도 쓰죠.”
“아니, 그래도 보통은 R 크림을 집에 두지 않아요? 내가 아는 연예인 중에는 아예 금고에 넣어둔다는 사람도 있던데.”
구하니는 선우현에게 R 크림을 종종 받는다. 그래서 집에도 두고 작업실에도 두고 차에도 두고 쓴다.
“아…. 그쵸. 보통은 그렇죠. 그런데 그건 모르시는구나.”
“네? 뭘요?”
대성차 그룹 회장 양중근은 선우현이 R 크림과 활토를 만들었다고 짐작하고 있다.
하지만 그 정보는 양수진에게까지 전해지진 않았다. 양중근이 기밀로 취급하는 정보여서다.
구하니가 말했다.
“아니에요. 필요하면 발라도 돼요.”
“이거 귀한 건데요?”
양수진도 집에 R 크림이 하나 있다. 그런데 R 크림은 돈이 많다고 해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양수진도 하나밖에 없어서 아껴가면서 바르고 있다.
구하니가 말했다.
“아끼지 말고 바르는 게 좋아요. 양 과장님 지금 얼굴이 물에 빠졌다가 나와서 그….”
“바를게요. 고마워요. R 크림을 써도 된다는데 안 바르면 바보죠.”
양수진이 R 크림을 바르고 화장을 했다. 그런 후에 두 사람이 구하니의 연예인용 밴 밖으로 나왔다.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특히 피디는 얼굴이 창백해진 상태였다.
피디가 급히 물었다.
“양 과장님. 몸은 어떻게, 괜찮으십니까?”
“네. 괜찮아요. 저 멀쩡해요.”
피디가 양수진의 얼굴을 보았다. 혈색이 괜찮았다. 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다행입니다.”
조연출이 옆에서 물었다.
“피디님. 촬영은 어떻게….”
“지금 촬영이 문제야? 당장 중단….”
양수진이 손을 흔들었다.
“아뇨! 저는 괜찮아요. 방해되는 건 원하지 않으니까 계속하셔도 돼요.”
“네? 그래도 물에 빠지셨는데….”
“이 방송이 나가야 우리 회사 PPL도 나가죠. 괜찮아요. 계속 일하세요. 저는 그냥…. 구경만 할게요.”
피디도 그러길 원한다. 오후 촬영을 통째로 날리면 수습하기가 쉽지 않다. 촬영 중단 이야기는 그냥 생색을 내본 것뿐이다.
피디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양 과장님. 이번엔 안전한 곳에서….”
“당연하죠.”
피디가 조연출에게 지시했다.
“편안한 의자 가져다 드려!”
“아뇨! 제가 알아서 구경할게요. 괜찮으니까 빨리 좀 촬영 시작하세요.”
“네? 아. 네.”
촬영이 다시 진행됐다.
그녀의 휴대폰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홍보팀 소속으로 그녀의 직속인 대리였다.
- 양 과장님. 회사로 언제 돌아오세요? 처리해주실 일이 있어서요.
양수진은 지금 회사 일이 문제가 아니다.
“그거 김 대리가 알아서 잘 진행해요.”
- 네?
“내가 없으면 회사 망하는 상황만 아니면 그냥 알아서 하거나 아니면 미뤄둬요.”
- 아…. 네. 미뤄둘게요.
그녀가 전화를 끊고 나서 촬영장을 보았다.
오후 촬영은 걸그룹 피치걸스도 없고 배우 소병훈도 없다. 피치걸스는 오전에 떠났고 소병훈도 밥만 먹고 떠났다.
오후 촬영의 게스트는 구하니 한 명뿐이다. 그래서 촬영이 구하니에게 집중됐다.
선우현은 구하니의 매니저로 이곳에 와 있다. 그는 촬영 현장을 구경하고 있었다.
양수진이 선우현을 가만히 보았다. 선우현이 뒤를 돌아보았다.
“어머. 내 시선을 눈치챘나 봐.”
그녀가 손을 살짝 흔들었다. 선우현이 다시 촬영장을 보았다.
“아. 맞다.”
그녀는 방금 전화한 김 대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천호성 쪽으로 보낸 커피차. 도착했어?”
- 아니요. 아직 가고 있을 거예요.
가수 천호성은 다른 방송국의 예능 프로그램에 게스트로 참여해 촬영하는 중이다. 오늘 홍보팀에서 이곳에는 밥차를 보내고 천호성 쪽으로는 커피차를 보냈다.
“그 촬영 장소도 이쪽 어딘가이지?”
- 네. 근처는 아니지만 방향이 같아요.
“그럼 그 커피차 여기로 돌려.”
- 네? 하지만 그러면 천호성은….
“지금 천호성이 중요한 게 아니야. 빨리 보내.”
김 대리는 이유가 궁금했지만 캐묻지는 않았다.
- 알겠습니다. 그러면 커피차에 붙어 있는 플래카드는 어떻게 할까요? 지금은 천호성을 응원하는 플래카드가 붙어 있는데….
“새로 만들 시간 없어. 그거 떼고 그냥 종이에 써서 붙이라고 해.”
- 누구를 응원한다고 할까요?
그녀가 선우현을 보았다.
“그야 당연히 선…. 아니, 잠깐.”
그녀가 궁리했다.
‘스래곤 사장이 정체를 숨기고 매니저를 하고 있는데 내가 이름을 대놓고 깐다고? 취미생활을 박살 내는 짓인데 미쳤어? 안돼.’
그녀가 말했다.
“구하니를 응원한다고 적당히 써서 보내.”
- 알겠습니다.
◈ ◈ ◈
잠깐 쉬는 시간에 구하니가 선우현에게 말했다.
“양수진 과장님이 우리 차에 M 연료전지가 있다는 걸 눈치챘어요. 선우현 씨가 스래곤 사장님인 것도 알게 됐고요.”
“그럴 확률은 반반이라고 봤는데.”
“네? 눈치챌 줄 알면서 우리 차에 타는 걸 말리지 않으신 거예요?”
“죽다 살아난 사람을 진정시킬 편안한 곳이 필요했으니까요. 그리고.”
선우현이 양수진을 슬쩍 보았다. 양수진은 눈이 마주치자마자 방긋 웃었다.
“어차피 용의자가 아니니까 괜찮습니다. 대성차 회장의 손녀니까 나에 대해 떠들고 다니면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알 테고요.”
“아. 다 생각이 있으셨구나.”
◈ ◈ ◈
20분 뒤에 커피차가 촬영 현장에 도착했다. 다른 촬영장으로 가던 차의 방향을 튼 것뿐이라 오는 건 금방이었다.
커피차가 왔다고 진행 중인 촬영을 멈출 수는 없었다. 그래서 당장은 커피 손님도 없었다.
구경꾼인 양수진이 커피차에 가서 얼른 말했다.
“아메리카노랑 라떼, 따뜻한 거 차가운 거 각각 두 잔씩. 빨리요.”
그녀가 커피 네 잔을 받아서 선우현에게 다가갔다.
“선우현 씨. 커피 좋아해요?”
“좋아합니다.”
그녀가 커피 트레이를 들었다. 네 잔이 꽂혀 있었다.
“뭘 좋아하시는지 몰라서 골고루 뽑아왔어요.”
선우현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골랐다.
“난 이거.”
“어머. 나랑 커피 취향이 비슷하시다. 난 찬물에 빠졌다가 나왔으니까 따뜻한 거 마셔야지.”
그녀가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꺼냈다. 남은 두 잔의 커피는 근처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선우현이 커피를 마시며 말했다.
“구해준 값은 이 커피로 퉁 치면 되겠군요.”
“어머어. 그럴 수는 없죠. 제가 제대로 대접할게요. 호호호.”
“이것도 괜찮습니다.”
“여기서 가까운 곳에 진짜 맛있는 집 알아요. 촬영 끝나면 같이 가요.”
선우현은 맛있는 걸 좋아한다.
“하니 씨는 연예인이라 별실이나 칸막이가 있으면 좋은데.”
양수진은 선우현만 데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가 먼저 이렇게 말하는데 둘이서만 가자고 할 수는 없다.
“세 명 앉기 딱 좋은 자리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