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5. 양수진 II
대성차는 이 예능 방송 프로그램의 중요 협찬사다. 방송국의 다른 프로그램에도 대성차의 광고가 많이 붙는다.
양수진은 그런 대성차 회장의 손녀다. 게다가 협찬이나 광고를 담당하는 홍보팀의 과장이다.
그래서 촬영장의 피디는 물론이고 스태프들도 양수진을 공주처럼 대했다.
배우 소병훈의 매니저 고성찬은 할 수만 있다면 양탄자라도 깔아줄 기세였다.
“이쪽 자리가 피디님 자리보다 더 상석입니다. 여기서 보시면 촬영을 제일 가까이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어머. 저 촬영 방해하러 온 거 아니에요. 저는 바깥쪽에서 볼게요.”
JXK의 걸그룹도 양수진을 찾아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피치소녀입니다!”
“어머. 반가워요. 복사골 출신인가?”
“네?”
“앗. 아니구나.”
배우 소병훈이 양수진의 주변에서 어슬렁거렸다. 그녀가 슬쩍 제안했다.
“이따가 같이 밥이라도 할래요?”
소병훈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제가 좋은 곳으로 예약하겠습니다.”
소병훈이 손짓했다. 매니저 고성찬이 즉시 휴대폰을 꺼냈다.
양수진이 얼른 손을 흔들었다.
“아뇨. 아뇨. 밥차요. 나 촬영장 밥차에서 밥 먹는 거 좋아해요.”
“네?”
“진짜예요.”
“소탈하십니다. 하하하.”
그녀가 밥차 밥을 먹는 걸 좋아하는 건 사실이다. 그런데 그 밥의 맛이 좋아서 먹는 건 아니다.
그녀가 좋아하는 건 배우와 같이 촬영 현장에서 밥차 밥을 먹는 것이다. 그러면 그녀도 배우가 된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아졌다. 그게 그녀의 힐링 방식이다.
소병훈의 촬영은 오전에 집중되어 있다. 그래서 그는 더 어슬렁거리지 못하고 카메라 앞으로 이동했다.
이 예능 방송의 고정 출연진들도 양수진을 찾아와 인사를 하고 갔다
그런데 구하니만 반응이 없었다. 아까 간단한 인사를 나누긴 했지만, 소병훈처럼 따로 인사하러 오지는 않았다.
양수진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흥. 톱스타라 그건가? 앞으로 우리 회사에서 구하니 CF는 찍지 말라고 할까 보다.”
어차피 그녀 쪽에서 구하니에게 먼저 말을 걸어볼 생각은 없었다. 그녀는 잘생긴 남자 연예인을 좋아하지 여자 가수는 관심 대상이 아니다.
소병훈과 피치소녀의 촬영은 오전에 집중되어 있었다. 소병훈은 오전 내내 촬영한 후에 양수진을 찾아왔다.
“제 오늘 촬영이 드디어 끝났습니다. 저 이제 시간 많습니다. 하하하.”
“그럼 밥 먹으러 가요. 마침 밥차 시간이네요.”
“네? 진짜로 밥차….”
“네. 진짜로.”
밥차에서 점심을 먹으며 양수진이 생색을 냈다.
“오늘 점심은 신경 좀 써달라고 말했어요.”
오늘 밥차는 제작진이 아니라 양수진의 밑에 있는 대성차 홍보팀 대리가 섭외해 보냈다. 밥차의 명분은 PPL 촬영 현장 지원이었다.
밥값도 넉넉하게 책정했다. 그래서 오늘 밥차에는 좋은 식재료가 많이 들어갔다.
소병훈이 말했다.
“어쩐지 맛있습니다. 하하하.”
“이런 밥차 다른 데서는 못 봤을 걸요? 최고로 보내달라고 했으니까요.”
소병훈이 씩 웃었다. 말할 거리가 하나 생겼다.
“아…. 예전에 제가 진짜 맛있는 밥차 밥을 먹은 적이 있습니다. 그거 드셔 보면 진짜 반하실 겁니다.”
“어머. 그래요? 그 밥차 연락처 줘 봐요. 다음에는 그 밥차 불러야겠다.”
소병훈은 당황했다.
“어…. 그게요. 촬영 현장에서 어쩌다 한 번씩만 하는 밥차라서, 예약이 안 됩니다. 일종의 이벤트 밥차 같은 거죠. 하, 하하.”
“뭐예요? 그런 걸 뭐하러 말했어요?”
“죄송합니다.”
점심을 먹고 나서 양수진은 밥차 앞을 떠났다. 배우와 밥을 먹었으니 그녀가 여기 온 제일 중요한 목적은 달성했다.
뒤에 남은 소병훈이 아쉬움에 입맛만 다셨다.
오후에 다시 촬영이 시작됐다.
배우 소병훈과 JXK의 걸그룹 피치소녀는 스케줄 때문에 오전 촬영만 진행했다. 피치소녀는 이미 오전에 떠났고 소병훈도 양수진과 점심을 먹고 나서 다음 스케줄을 하러 갔다.
매니저 고성찬도 선우현을 째려본 후에 그곳을 떠났다.
구하니는 평소에 스케줄을 거의 안 잡기 때문에 오후에도 시간이 많았다. 그래서 구하니의 촬영분은 오후에 몰려 있었다.
대성차 홍보팀 과장 양수진은 오전에는 현장에 PPL이 제대로 들어갔는지 체크했다. 점심때는 배우와 밥차 밥도 먹었다.
“슬슬 돌아가야 하나.”
이제 회사로 돌아가서 일해야 하는데, 촬영 현장을 떠나기가 아쉬웠다. 그녀가 현장을 보며 생각했다.
“나도 배우 하고 싶다.”
양수진의 어릴 때 꿈은 배우였다. 그녀는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배우가 좋았다.
하지만 집안에서는 그녀의 꿈을 좋게 보지는 않았다. 연기 연습을 조금씩 하는 정도는 놔뒀지만 밀어주지는 않았다.
그녀의 배경을 노리고 접근하는 연예계 관계자가 없던 건 아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녀의 집안에서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걸 알자마자 후환이 두려워서 손을 떼고 물러났다.
결국 그녀가 배우가 되고 싶으면 모든 걸 직접 해내야 했다.
그런데 그녀는 얼굴 천재도 아니고 연기 천재도 아니다. 집안의 도움 없이 그녀의 외모와 연기력으로 배우가 되려면 밑바닥부터 시작해야 했다.
그녀는 밑바닥에서 고생하면서 한 단계씩 올라가 배우로 성공할 자신은 없었다. 자신에게 그 정도 재능은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녀는 할아버지가 회장으로 있는 대성차에 들어가서 일했다.
대신에 연예계와 자주 접촉할 수 있는 홍보 부서에서 경력을 쌓았다.
양수진은 이렇게 촬영 현장을 찾아와 구경하다 보면 예전 선택이 아쉬웠다.
“할아버지가 조금만 도와줬으면 나도 잘할 수 있었는데.”
그녀가 툴툴대면서 촬영장 주변을 걸었다. 촬영이 한창 진행 중이라 스태프들은 그녀에게 신경 쓰지 못했다.
그녀가 촬영 현장 옆 계곡 근처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촬영 현장을 스마트폰의 동영상 기능으로 찍으며 말했다.
“독립영화라도 만들어보고 싶다. 주연 감독 다 내가 하는 거로. 그 정도는 내 돈으로 할 수 있는데.”
전부터 그 생각은 했지만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결과물이 처참하게 나오면 꿈을 완전히 잃고 좌절하게 될까 봐 시작하지 못했다.
그녀가 방금 촬영한 영상을 확인했다. 구도가 조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걸 구분하는 걸 보면, 나한테도 재능이 있는 거 같은데….”
그녀가 더 좋은 구도를 잡기 위해 조금 뒤로 물러났다.
“카메라를 가져올 걸 그랬….”
뒤로 걷는 발에 닿는 게 없었다.
“어머?”
그녀의 몸이 뒤로 휙 미끄러졌다.
바로 뒤는 급경사가 있었다. 그 경사면 아래에는 계곡물이 흘렀다.
그녀가 주르륵 미끄러져 계곡물에 풍덩 빠졌다. 물에 빠지자마자 당황하고 놀라서 비명을 지르려고 했다.
“사…. 꾸륵.”
소리를 제대로 지르기도 전에 입으로 물이 밀려 들어왔다. 물 때문에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녀가 빠진 자리는 물살이 제법 강했다. 그녀의 몸이 순식간에 계곡의 가운데 쪽으로 끌려갔다.
“누가 구…. 켁켁.”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촬영장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촬영 현장을 보고 있던 게 생각났다. 그녀는 그들의 뒤쪽에 있었다.
‘내가 물에 빠졌다는 걸 아무도 몰라?’
무서웠다. 이러다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리를 지르려고 할 때마다 입에 물이 밀려들었다. 물을 자꾸 먹다가 기도 쪽으로도 물이 조금 들어갔다.
기침이 나왔다. 물에 빠진 상태인데 기침까지 나오니 하늘이 다 노래졌다. 숨이 막히고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녀가 더 버티지 못하고 깊은 계곡물 속으로 꼬르륵 가라앉았다.
‘나 이렇게 죽나 보다.’
갑자기 뭔가가 그녀의 몸을 위로 확 끌어당겼다. 그녀의 머리가 물 위로 솟아올랐다.
곧바로 막혀 있던 기침이 터졌다.
“켁! 켁! 콜록!”
김수선은 촬영 현장을 지원위성의 관측 카메라로 보다가 양수진이 물에 빠진 걸 알았다. 곧바로 그 사실을 선우현에게 전달했다.
선우현이 즉시 달려와 계곡에 뛰어들었다. 그는 깊은 곳으로 가라앉는 그녀를 붙잡았다.
선우현은 지금 그녀를 앞쪽에서 오른팔로 껴안고 있었다. 물에 빠진 사람은 뒤에서 잡는 게 정석이지만 흐르는 계곡물 때문에 그럴 틈이 없었다.
양수진은 본능적으로 두 팔을 움직여 뭐든 잡고 위로 올라가려고 했다. 보통은 그러면 둘 다 위험해질 수 있다.
하지만 선우현의 힘은 양수진보다 압도적으로 강했다. 설사 그녀가 발악한다 해도 버틸 수 있다.
두 사람이 떠내려가는 방향 위쪽에 굵은 나뭇가지 하나가 보였다.
선우현이 오른팔로 그녀의 몸을 단단히 껴안고 왼손을 위로 쭉 뻗어 나뭇가지를 붙잡았다.
굵은 나뭇가지가 활처럼 휘었지만 부러지지는 않았다. 두 사람도 더는 떠내려가지 않았다.
양수진이 기침을 하며 힘겹게 말했다.
“살려주세요. 콜록.”
선우현이 그녀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
“이제 괜찮아요. 내가 잡았어요.”
그 목소리 덕분에 양수진이 정신을 차렸다.
그녀가 앞을 보았다.
선우현의 얼굴이 보였다. 왼팔로 나뭇가지를 붙잡고 있는 모습도 보였다.
방금 그녀가 그에게 했던 행동도 생각났다. 그녀는 구해주러 온 선우현을 누르고 위로 올라가 숨을 쉬려고만 했다.
“미, 미안해요.”
“두 팔로 내 목을 잡아요. 일단 물가로 나가야 하니까.”
“이, 이렇게요?”
“더 꽉. 물살에 다시 흘러가지 않게.”
양수진이 선우현의 목을 꼭 껴안았다.
선우현이 그녀의 몸을 잡고 있던 팔을 놓았다. 그런 후에 두 손으로 나뭇가지를 잡고 물가로 조금씩 이동했다.
거센 물살 속에서 두 사람의 몸무게를 버티며 물가로 이동하다 보니 자연히 숨이 거칠어졌다.
양수진의 귓가에 선우현의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그 숨소리가 든든하게 느껴졌다.
선우현이 말했다.
“이제 일어설 수 있을 겁니다.”
양수진이 발을 살살 움직여보았다. 신발에 바닥이 닿았다.
“살았다.”
“살았다니까요.”
그녀는 아직도 무서웠다. 여전히 발이 물속에 있어서 선우현의 목을 껴안은 팔을 놓고 싶지 않았다.
선우현이 양수진을 데리고 물 밖으로 완전히 벗어났다.
“이제 손 놔요.”
“그, 그래도 돼요?”
“보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녀가 옆을 보았다. 스태프들이 뒤늦게 다가오는 게 보였다.
“아!”
스태프 중에 양수진이 계곡물에 빠지는 걸 본 사람은 없다. 하지만 선우현이 갑자기 계곡 쪽으로 뛰어간 걸 본 사람은 많았다.
촬영이 중단되고 사람들이 선우현이 간 곳으로 따라왔다.
그들이 도착했을 때는 선우현이 양수진을 물가로 데리고 나온 후였다. 그들은 그녀가 계곡물 깊은 곳에 가라앉던 모습이나, 선우현이 거기서 그녀를 구해서 빠져나오는 모습은 보지 못했다.
그들이 봤을 때는 현재 상황이 딱히 위험하지는 않아 보였다.
스태프 중 한 명이 말했다.
“아. 양 과장님이 물가에서 넘어진 걸 구하니 씨 매니저가 도와줬나 보다.”
피디가 얼른 지시했다.
“가서 수건 가져와! 양수진 과장님이 젖으셨잖아!”
다들 그녀가 물에 젖은 게 제일 큰 문제인 줄 알았다.
여성 스태프들이 수건을 몇 장 가져와 양수진을 닦아주려고 했다.
그녀가 얼른 말했다.
“내가 할게요. 내가.”
그녀가 수건으로 얼굴과 옷을 닦으려 했다. 손이 떨렸다.
게다가 물에 깊게 빠졌다가 건져진 상태라 수건 몇 장만으로는 답이 나오지 않았다.
지금 촬영하는 장소에는 그녀가 들어가 쉴만한 건물이 없었다. 대신에 촬영팀이나 출연진이 가져온 차는 여러 대 있었다.
구하니가 제안했다.
“우리 차로 가요.”
구하니의 차는 연예인용 밴으로 개조되어 있다. 그래서 내부가 넓고 커튼으로 창문을 완전히 가릴 수도 있다.
지금 이곳에 여자 연예인이 타고 온 연예인용 밴은 그 차 한 대뿐이다.
“네. 네. 고마워요.”
양수진이 수건을 몇 장 더 받아서 구하니의 차에 들어갔다. 구하니가 같이 차에 들어가서 창문에 커튼을 쳤다.
“저는 앞에 가서 시동을 걸게요. 뒤에 드라이기도 있고 갈아입을 옷도 있어요.”
두 사람은 체형이 달라서 지금 양수진이 갈아입을 수 있는 옷은 하나뿐이다.
구하니가 말했다.
“예쁜 옷은 아니고 추리닝이긴 한데….”
“고마워요.”
구하니가 아예 운전석 사이의 커튼도 쳐주었다. 실내등이 켜져 있어서 뒷좌석은 충분히 밝았다.
양수진이 젖은 옷을 벗고 수건으로 몸을 닦았다. 속옷을 갈아입지 않아도 상태가 훨씬 나아졌다.
그녀는 구하니의 추리닝을 찾아 입었다. 그 추리닝은 잘 늘어나는 재질이라 체형이 달라도 입을 수 있었다.
양수진이 헤어드라이어도 차량 내부의 콘센트에 연결해 머리를 말렸다. 드라이기에서 나오는 따뜻한 바람을 맞으니 떨리던 몸이 진정됐다.
그녀가 머리를 적당히 말린 후에 운전석 사이의 커튼을 젖히며 말했다.
“정말 고마워요.”
“뭘요. 이 정도는 당연히 도와야죠.”
“그런데요.”
양수진이 살짝 망설이다 질문했다.
“구하니 씨의 매니저분요.이름이 선우현 씨였죠?어떤 분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