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 시험 생산
박길성은 젊었을 때 송덕선과 결혼했다가 수십 년 전에 이혼했다.
송덕선은 그 후에 사업가와 재혼했는데, 남편이 사망한 후에 그 회사를 계속 경영했다. 그 회사 규모는 길성의 계열사 하나와 비슷했다.
박길성은 송덕선과 이혼하기 전에 아들을 두 명 두었다.
박길성이 박현호와 박종호를 불러 선언했다.
“서윤이가 내 딸이다.”
둘째인 박종호가 눈이 동그래져서 물었다.
“네? 아버지 혹시 새장가라도 가셨어요? 지금 연세에?”
“이놈이. 새로 갔다는 게 아니라, 비서실 박서윤 대리 이야기다.
박종호가 웃었다.
“에이. 난 또 무슨.”
박길성의 눈이 조금 가늘어졌다.
“알고 있었냐?”
“에이. 박서윤 대리가 딸 같다고 농담하시는 거…. 어?”
둘째 박종호가 화들짝 놀랐다.
“지, 진짜예요?”
“진짜다.”
“아니, 왜 박서윤 대리를 갑자기 수양딸 삼으시려는 건데요?”
“친딸이다.”
“네?”
“내 친딸이라고.”
“어떻게요? 박 대리는 20대 중반인데…. 그때는 엄마도 없고….”
박길성이 설명했다.
“옛날에 내가 섬에 일주일쯤 갇혀 있을 때 기억하냐?”
“네. 알죠. 어? 그거 대충 25년쯤 전인데….”
“그때 얻었다.”
박종호가 당황한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아…. 지, 진짜구나.”
“너는 몰랐던 것 같은데.”
박길성이 첫째인 박현호에게 물었다.
“너는 왜 놀라지 않는 거냐?”
박현호의 표정은 심각했다.
“저번에 어머니한테서 그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번에도 괜한 의심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알고는 있었구나.”
“믿지 않았지만 그럴 수도 있다는 걸 알고는 있었습니다.”
“그러면 서윤이가 납치당한 사건에는 네가 손을 썼냐?”
박현호가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요. 그건 일이 터진 후에 알았습니다. 어머니가 박서윤 대리에게 경호원이 붙어 있다고, 아버지가 붙여줬을 거라고 하시더군요.”
박길성이 말했다.
“그 여자가 나한테 도움이 된 유일한 일이 그 사건이었다. 물론 그 여자가 의도한 건 아니지만.”
“네?”
“누가 왜 서윤이를 납치했는지 조사하다가, 서윤이가 내 딸이라는 걸 알게 됐으니까.”
박현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그동안은 박서윤 대리만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겁니까?”
“서윤이도 몰랐다. 며칠 전에 내가 말해주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몰랐어.”
박현호가 인상을 썼다.
“몰랐다는 말을 어떻게 믿겠습니까? 몰랐던 척하면서 아버지에게 접근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럼 나는 네가 몰랐다는 말을 왜 믿어야 하냐?”
“저는 아버지 아들입니다.”
“서윤이도 내 딸이다.”
“네? 그건….”
박길성의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서윤이는 몰랐던 척하면서 내 곁에 접근할 필요가 없었다. 내 딸이니까, 알았다면 처음부터, 아니면 입사 몇 달 후에라도 말했어야 했어. 2년이나 묵묵히 일할 필요가 없었단 말이다.”
“그렇지만….”
둘째 박종호가 당황한 얼굴로 끼어들었다.
“아버지랑 형이랑 진정들 하세요. 아버지. 일단 박서윤 대리가 아버지 딸인 건 확실해요?”
“이미 유전자 검사로 확인했다. 서윤이 모르게 검사했지.”
“와. 그럼 진짜인가 보다.”
둘째 박종호가 앞에 놓인 찬물을 벌컥 마셨다.
“어릴 때는 막내 여동생을 원했지만, 이런 식으로 다 큰 여동생이 나타나길 바란 건 아닌데….”
박현호가 물었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서윤이를 내 호적에 정식으로 올려야지.”
박현호가 반대했다.
“아버지. 그러면 상황이 복잡해집니다. 그냥 편히 살 수 있을 정도로 챙겨주시죠.”
박서윤이 호적에 올라가면 나중에 회사 지분을 물려받을 수 있다.
박현호는 지분을 나누고 싶지 않았다. 박현호의 어머니도 그런 일은 막으라고 말했다.
박길성이 말했다.
“서윤이는 어머니를 어려서 잃고 정말 어렵게 살았다. 그런데도 잘 성장하고 학교를 졸업해 우리 회사 비서실에 들어왔지.”
박길성의 눈썹이 비틀어졌다.
“그런데 너는 내 아들이라는 이유로, 지금까지 받았던 건 물론이고, 앞으로 받을 것도 주고 싶지 않다는 거구나.”
“그야….”
“내 재산을 어떻게 쓸지는 내 마음이다.”
박현호가 침을 꼴깍 삼키며 물었다.
“그럼 설마 회사 지분을….”
“물론이다. 나중에 너희가 당연히 받을 거라고 생각한 모든 것은, 앞으로는 둘이 아니라 셋이 나눠야지.”
이런 말을 박길성이 은퇴를 준비할 때 했다면 반발이 거셀 게 뻔했다.
그런데 지금은 박길성이 다시 회사를 장악했다. 반발해봤자 눌러버릴 힘이 있다.
그런데도 박현호는 반발했다.
“일개 대리한테 회사를 맡긴다는 말입니까? 그건 안됩니다!”
박길성이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내가 회사를 뒤집어엎어서 이사들을 다시 줄 세운 게 정답이었구나.”
“아버지!”
박길성이 호통을 쳤다.
“현호야! 너는 지금 네 자리에 네 능력만으로 올라간 게 아니다! 내 아들이니까 그 자리에 올라갔단 말이다!”
박현호도 그건 안다.
그는 신입 사원일 때부터 회사 내에서 발언권이 강했다. 그가 프로젝트를 제안하면 어떤 것이든 쉽게 통과됐다.
그러다 실패해도 징계를 별로 받지 않았다.
반면에 프로젝트가 성공하면 혜택은 톡톡히 받았다.
그는 그렇게 고속승진을 해서 이사가 됐다.
“하지만 저는 이 자리에 올라와서, 이 자리를 감당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박서윤은 겨우 대리입니다!”
“스래곤에서는 비서실장이다. 거기서는 이사급이지.”
박현호가 멈칫했다.
“예? 그건….”
박서윤은 길성 비서실 대리와 스래곤 비서실장을 겸직하고 있다.
“스래곤에서 일을 아주 잘한다고 업계에 소문이 자자하더구나. 서윤이가 스래곤 경영진에서 핵심적인 위치에 있다지.”
박현호의 얼굴이 벌게졌다.
“아버지가 그 자리에 꽂아주신 거잖습니까?”
“내가? 어떻게?”
“스래곤 지분이 있으시니까요.”
“그건 이미 반쯤은 도로 팔았다.”
“네?”
그 지분은 선우현이 도로 사들였다.
“처음부터 그러려고 했다. 그 과정에서 꽤 많이 남겼어. 투자금보다 더 많이 벌었지.”
박현호가 포기하지 않고 따졌다. 여기서 그냥 받아들이기엔 걸린 게 너무 컸다.
“아버지가 꽂아주신 게 아니면 박서윤이 어떻게 갑자기 비서실장이 됩니까?”
“능력이 있으니까.”
“능력이 있다는 걸 스래곤에서 어떻게 안단 말입니까?”
“예전에 서윤이를 납치하려던 사건. 그 여자는 그때 서윤이를 구해준 사람이 내 경호원일 거라고 했지? 아니다.”
“지금 그게 뭐가 중요합니까?”
“중요하지. 그때 서윤이를 구해준 사람이 바로 스래곤 사장이니까.”
박현호는 깜짝 놀랐다.
“네?”
“스래곤 사장은 서윤이와 아는 사이다. 그래서 서윤이의 능력이 얼마나 뛰어난지를 나보다 먼저 알아보고 스카우트했다.”
“그럼….”
박길성이 경고했다.
“서윤이의 배경에는 나는 물론이고 스래곤 사장도 있다는 말이다. 현호야. 섣불리 서윤이를 공격하지 마라. 네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적을 만들게 될 테니까.”
스래곤은 요즘 잘나간다. 기존의 기술들도 대단하지만, 새로 발표한 연료전지 기술이 초대박을 쳤다.
박길성이 말했다.
“스래곤 사장이 이미 개발한 기술들만 해도 엄청나지만, 발표하지 않고 아는 사람들만 아는 대단한 기술들도 있다. 그런데 그게 전부일까? 다음에는 어떤 대단한 것을 개발할지 상상이나 되냐?”
박서윤이 박길성의 딸이긴 하지만 박현호와 박종호도 아들이다. 박길성이 아들들을 위해 충고했다.
“너희들이 스래곤 사장과 적이 되면 길성은 미래가 없다.”
박현호는 말문이 막혔다.
그는 박길성이 말한 ‘공식적으로 발표하지는 않은’ 기술이 뭔지 깨달았다.
‘활토와 R 크림. JHC 테크와 아버지만 특별대우를 받는 그 두 명품. 박서윤이 담당자.’
그리고 그 두 회사는 선우현이 스래곤을 인수할 때 백기사로 참전했다.
‘활토와 R 크림도 스래곤 사장이 만들었구나.’
말을 못하는 박현호에게 박길성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현호야. 그 여자…. 네 어머니에게도 전해라. 그 회사가 파산해서 길바닥에 나앉고 싶으면 서윤이에게 수작을 또 부려보라고. 길성과 스래곤을 동시에 상대할 자신이 있으면 덤비라고 해라.”
◈ ◈ ◈
토요일 점심때 박서윤이 옥탑방 옥상에서 활력 토마토를 넉넉히 써서 요리를 만들었다.
선우현과 신나리는 옆에서 심부름이나 보조를 하며 군침을 삼켰다.
신나리가 말했다.
“서윤 언니가 바빠서 요리를 자주 못 해주는 게 너무 아쉽다.”
선우현이 한마디 했다.
“네가 만들어줄 생각을 해라.”
“반사. 옥상 오빠는 왜 못 만드는데요?”
“알잖아. 내가 하면 같은 재료를 써도 서윤 씨가 했을 때랑 맛이 달라.”
“나도 그래서 언니한테 맡겨요.”
“그런데….”
선우현이 옆을 보았다.
“우리는 심부름이라도 하는데 남미연 씨는 놀러 왔나?”
남미연은 옥상 의자에 앉아서 엠투와 놀고 있었다.
“어머어. 나 남미연이에요. 톱스타 남미연.”
“톱스타는 손이 없나? 시끄러우니까 얻어먹고 싶으면 일을 해요.”
남미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쳇. 서윤 씨. 난 뭐 하면 돼?”
“앉아있는 게 도와주는 거예요.”
남미연이 도로 앉았다.
“그치?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선우현이 말했다.
“그거 칭찬이 아닐 텐데?”
“내가 도와준다고 하면 다들 나한테 그렇게 말하던데?”
“다들 칭찬한 게 아닐 텐데?”
네 사람의 요리 실력은 차이가 너무 많이 났다. 박서윤은 베테랑 요리사 수준의 실력자인데, 다른 세 명은 라면이나 끓일 줄 알았다.
그래서 요리는 박서윤이 맡았다.
토마토를 주로 사용하는 유럽식 요리가 식탁에 차려졌다.
남미연이 요리의 맛을 보고 감탄했다.
“서윤 씨는 요리를 정말 동서양을 넘나들면서 잘한다. 거기다 스래곤 비서실장에, 연기까지. 못하는 게 뭐야?”
“연기는 아니에요. 할 줄 몰라요.”
“저번에 그놈들하고 싸울 때 보니까 엄청 잘하던데. 나 진짜 칼잡이가 칼 들고 겨누는 줄 알았잖아.”
“톱스타 배우님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실력이죠.”
남미연이 씩 웃었다.
“어머어. 우리 서윤 씨가 벌써 나랑 연기력 비교를 하네? 하긴. 그 정도 연기력이면 내 무릎 정도는 올라온 거 같더라. 신인은 보통 내 발바닥 정도인데 말이야.”
선우현이 말했다.
“거 기왕 쓰는 김에 허벅지 정도 쓰지 말이야.”
“어머나. 야해라.”
“아니, 어디가!”
남미연이 식사를 하면서 말했다.
“서윤 씨 먹는 거 보면 내가 옛날에 알던 언니 생각이 자꾸 난다. 진짜 그 언니처럼 잘 먹는데도 몸매가 좋아. 아주 좋아. 그 언니도 그랬거든.”
박서윤이 물었다.
“그분 이야기 더 이야기해주세요. 궁금해요.”
“그럴까? 내가 아역일 때 처음 만난 언니였는데 말이야. 그러니까 꼬맹이 아역 말고 여학생 역할로 영화에 출연했을 때였는데….”
◈ ◈ ◈
새로운 연료전지는 전 세계 여러 회사에서 원했다.
그 연료전지의 핵심 부품은 지금은 스래곤에서만 생산했다.
스래곤은 그 핵심 부품에 나머지 부분을 조립한 연료전지를 여러 회사에 테스트용으로 공급했다.
그런데 스래곤 자체 공장에서 모든 것을 다 만드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다. 지금은 테스트 단계라 하려면 할 수 있는데, 나중에는 그럴 수가 없다.
그래서 스래곤에서는 핵심 부품만 직접 만들었다. 나머지 부품이나 조립 작업은 다른 회사에 외주를 주었다.
신개념 연료전지인 M 전지는 구조가 복잡하지 않았다. 제작 방법만 제대로 알려주면 나머지 부분을 만들어 조립할 수 있는 업체는 국내에 많았다.
선우현이 출근해 임원 회의를 주관했다.
이사가 보고했다.
“M 전지 부품을 만들고 조립하는 협력업체들은 기존에 자동차 엔진의 부품을 만들던 회사들입니다. 경험이 많은 곳들이라 생산에는 문제가 없을 겁니다.”
선우현이 물었다.
“그 정도면 공급은 충분합니까?”
“지금은 국내외 회사들이 M 전지를 테스트하는 단계니까 필요한 물량은 충분히 공급하고 있습니다. 협력업체 세 곳의 공장도 생산량을 늘릴 예정입니다. 다만….”
“나중이 문제군요.”
“그 세 회사가 공장을 최대로 돌린다 해도, 자동차 회사들이 본격적으로 차량을 생산하면 필요한 물량을 못 맞출 겁니다.”
“새로 알아본다는 협력업체는 어떻게 됐습니까?”
“그곳은 품질관리 조건을 충족하지 못해, 그 조건부터 먼저 채우라고 했습니다. 다른 협력업체를 더 알아보는 중입니다.”
영업 담당 이사가 말했다.
“사장님. 대성차에서 물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제안을 해왔습니다.”
“어떤 겁니까?”
“우리 회사에서 만든 핵심 모듈만 받아서 자기네가 M 전지를 직접 생산하는 방식을 제안했습니다.”
대성차 그룹은 국내 최대 규모의 자동차 회사다. 세계 자동차 업계 순위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간다.
“대성차에서 직접 생산한답니까?”
“아닙니다. 기존에 엔진을 납품하던 협력업체에 맡겨서 생산하겠다고 합니다.”
“그 협력업체가 우리 물량도 처리해줄 수 있으면 좋겠군요.”
“그러면 그 협력업체는 좋아하겠지만, 대성차에서 좋아할지….”
“싫으면 말라고 하면 되지요.”
“그 협력업체에 말입니까?”
“아니요. 대성차 말입니다. 우리 M 전지를 쓰기 싫으면 말라고 하세요. 달라는 곳은 많으니까.”
당황한 이사가 급히 말했다.
“제가 대성차와 잘 이야기하겠습니다.아직 차가 출시된 건 아니니까 협의할 시간은 충분히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