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 바지 II
덕구파 천 실장은 당황했다.
“네가 뭐라고?”
“나는 바지 비서실장이야.”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박서윤이 설명했다.
“바지사장에게는 바지 비서실장을 붙여주면 충분하니까, 겨우 대리인 나를 그 자리에 쓴 거야.”
천 실장이 박서윤을 빤히 쳐다보았다.
‘거짓말 같지는 않은데….’
당연히 거짓말이다.
박서윤은 반 토막 난 비서실을 장악하고 업무를 효율적으로 처리했다. 그녀 덕분에 선우현은 출근하는 날이 적은데도 사장 일을 하는 데 딱히 어려움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박서윤은 회사 일이라곤 아무것도 모르는 바지 비서실장의 모습을 연기했다. 그 연기가 워낙 자연스러워서 천 실장도 진짜인지 아닌지 구분하지 못했다.
천 실장이 인상을 쓰며 남미연을 보았다.
“그럼 남미연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CF 출연 문제로 내가 접대하던 중이야. 바지 실장이 하는 일은 그런 것뿐이니까.”
남미연은 연기파 배우다. 게다가 그녀는 스래곤의 주식을 대량으로 보유한 주주라 회사 상황을 대충은 안다.
그녀는 박서윤의 바지 실장 연기를 보고 상황을 눈치챘다.
남미연이 아무것도 모르면서 슬퍼하는 사람을 연기했다.
“불쌍한 우리 흰둥이….”
박서윤의 연기가 진짜처럼 자연스러웠다면, 남미연의 연기에는 관객을 설득하는 힘이 있었다. 그녀는 슬픈 표정으로 대사 몇 마디만 했을 뿐인데 천 실장은 남미연을 의심하지 못했다.
천 실장이 이번에는 신나리를 보았다.
“너. 진짜 사장에 대해 뭔가 아는 게 있지?”
신나리가 눈이 동그래져서 대답했다.
“네? 저는 그냥 인턴 알바인데요?”
“인턴 알바가 왜 여기 있어?”
“홍보실 알바라서 잔심부름하려고 따라왔다가 잡혔는데요.”
신나리의 연기력은 형편없다.
그런데 그녀는 진짜로 아는 게 없었다. 잔심부름하려고 따라온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지금 그녀의 표정과 대답은 연기가 아니라 진짜다.
천 실장이 인상을 구겼다.
“젠장. 이것도 진짜 같은데….”
그가 잠시 생각하다 박서윤에게 요구했다.
“그러면 스래곤의 바지사장이라도 이리로 불러라. 그놈한테 진짜 전주가 누군지만 확인하고 보내줄 테니까. 날 믿고 여기로 오라고 해.”
박서윤은 그 요구가 반가웠다.
‘우현 씨를 불러달라고? 그러면 내일까지 기다릴 것도 없잖아. 우현 씨만 오면 이런 놈들은 다 때려잡을 테니까.’
그녀가 속마음을 감추고 일부러 당황한 모습을 연기했다.
“사장님을 갑자기 여기로 불러내라니…. 무슨 짓을 하려고….”
천 실장이 눈을 부라렸다.
“남 걱정할 때가 아닐 텐데? 다 죽고 싶어?”
“아, 알았어. 부를 테니까 총은 꺼내지 마.”
천 실장은 권총을 가지고 있다. 박서윤이 궁리했다.
‘이놈들에게 총이 있다는 걸 우현 씨가 눈치채게 해야 해. 그러면 충분히 대비할 수 있을 거야.’
천 실장이 부하에게 손짓했다. 부하가 대포폰을 가져왔다.
“아무리 바지 실장이라도 일단은 비서실장이니까 바지사장의 전화번호는 외우고 있겠지?”
“외우고 있어.”
그녀가 대포폰에 번호를 입력했다. 천 실장이 말했다.
“스피커폰으로 통화해라. 허튼소리 하면 저 알바는 죽는다.”
신나리는 화들짝 놀랐다.
“왜, 왜 난데요? 난 그냥 알바인데….”
“네가 그냥 알바라서 죽여도 수습하기 제일 편하니까.”
“억울해요. 약자부터 죽인다니요.”
덕구파 천 실장이 이죽거렸다.
“세상은 원래 약자부터 죽어. 항상 그래 왔어. 네가 사는 세상에서는 사람들이 아닌 척하는 것뿐이지.”
천 실장이 부하에게 손짓했다.
조직원이 박서윤의 옆에서 대포폰의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가 갔다. 잠시 후에 선우현이 전화를 받았다.
- 여보세요.
박서윤은 선우현이 뭔가 이야기하기 전에 얼른 말했다.
“사장님. 저 비서실장입니다. 지금 잠깐 뵐 수 있겠습니까?”
그녀의 말투는 상대를 어려워하고 예의를 철저히 지키는 사람의 느낌이었다.
그런데 두 사람은 평소에 그런 느낌으로 대화하지 않는다.
게다가 선우현은 그녀와 둘만 있을 때는 사장님이라고 부르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박서윤은 평소에 선우현과 통화할 때는 이름을 불렀다.
그런데 박서윤은 방금 일부러 사장님이라고 불렀다.
‘사장님이라고 했으니까, 내가 혼자 있는 게 아니라는 건 눈치챘을 거야.’
선우현이 바로 대답했다.
- 좋죠. 지금 보죠.
“사장님. 제가 지금 밖에 있습니다. 여기까지 오셔야 하니까 시간이 조금 걸릴 겁니다.”
‘내가 지금 길성이나 스래곤에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면, 더 의심하겠지.’
여기까지는 쉽게 정보를 제공할 수 있었다.
‘이제 총을 가진 놈이 있다는 걸 알려야….’
선우현이 말했다.
- 괜찮습니다. 다 왔으니까.
박서윤은 당황했다.
“네?”
- 지금 이거 스피커폰이지요? 거기 듣고 있는 놈들. 문 열어라.
천 실장이 옆에서 듣다가 당황해서 물었다.
“너 도대체 뭐냐?”
- 네가 어제 청부업자를 나한테 보냈지?
“너 어디야!”
- 바로 앞이다. 문 안 열면 쳐들어간다.
천 실장이 뒤를 휙 돌아보았다. 문은 닫혀 있었다.
갑자기 문밖에서 부하가 물었다.
“누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천 실장이 화난 소리로 명령했다.
“문 열어봐. 활짝!”
창고 문이 열렸다. 선우현이 창고로 뚜벅뚜벅 걸어오고 있었다.
천 실장은 당황했다.
“이건 말이 안 돼. 여기를 어떻게 알고….”
선우현이 적당히 둘러댔다.
“어제 나를 습격한 청부업자를 도로 미행했지. 그놈이 누군가를 만나더라. 어제는 그놈이 여기 있다는 것만 확인하고, 오늘 진지한 대화라고 해볼까 하고 찾아왔다.”
선우현이 창고 안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런데 와우. 내가 아는 사람이 붙잡혀있네?”
천 실장이 부하를 휙 돌아보았다.
“너 이 새끼.”
“죄, 죄송합니다. 어제 미행당한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천 실장이 선우현에게 말했다.
“그런데 너 말이야. 경찰에 신고는 안 했나 보군.”
“신고했으면 나 혼자 왔을 리가 없잖아?”
“간이 큰 놈이야.”
선우현이 덕구파 조직원들을 보며 물었다.
“그런데 너희는 왜 꼴이 그 모양이냐? 팔이나 다리에 붕대를 감은 놈이 많네?”
“이건 그 개새끼 때문에…. 아니, 네가 신경 쓸 일 아니다. 너는 네 걱정이나 해라.”
선우현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지 뭐. 어쨌든 내가 목적일 테니까 저 사람들은 보내주지?”
“그럴 수야 있나. 진짜 사장을 만날 때까지는 곤란하지.”
“그래? 그럼 나도 안으로 들어가야겠다.”
천 실장은 선우현이 왜 이러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잠깐 머리를 굴려봐도 불리할 건 없었다.
“미친놈인가? 알아서 인질이 되겠다고? 뭐, 얼마든지. 야. 길 비켜드려라.”
선우현이 창고 안으로 걸어갔다. 그는 세 사람의 앞으로 가 그들의 상태를 확인했다.
“다친 사람은 없구나. 다행이다.”
신나리는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옥상 오빠도 잡힌 거예요?”
“아니. 구하러 왔어.”
“하지만 잡혔는데요?”
“잡힌 거 아니라고.”
옆에서 남미연이 울먹였다.
“흰둥이가 죽었어요.”
“안 죽었습니다.”
“총에 맞았어요.”
“빗맞았습니다.”
“진짜 맞았어요. 내가 봤어요.”
선우현이 물었다.
“엠투가 총에 맞을 때 피가 튀던가요?”
“네?”
“아니면 바닥에 흐르는 피를 봤습니까?”
“그게….”
“엠투는 털이 하얀색이니까, 총에 맞았으면 털이 새빨갛게 물들 텐데?”
남미연이 기억을 떠올려보았다. 빨간색을 본 기억은 없었다.
옆에서 박서윤이 작게 말했다.
“빨간색은 없었어요.”
선우현이 말했다.
“총알에 빗맞았거든요. 내가 확인했는데 피도 안 났습니다.”
남미연의 얼굴이 점점 밝아졌다.
“그럼 우리 흰둥이는….”
“안 죽었다니까요.”
그녀가 좋아서 소리를 질렀다.
“꺄악!”
천 실장은 창고 입구 쪽에서 계획과 달라진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지 고민하다가 그들을 돌아보았다.
“뭐야!”
남미연이 급히 말했다.
“아, 아니다! 바퀴벌레를 봤다!”
그녀가 이번에는 작은 소리로 물었다.
“선우현 씨. 우리 흰둥이 어디 있어요? 내가 동물병원에 데려갈 거야!”
“엠투는 전담 병원이 있습니다.”
“그럼 그 병원에 나도 같이 갈 거야!”
“거절합니다.”
“그럼 흰둥이라도 보여줘요. 잘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요.”
“충격을 좀 받은 상태라 쉬고 있습니다. 여기서 빠져나간 후에 보여주겠습니다.”
“빠져나갈 수 있어요?”
“물론이지요. 그러려고 들어왔으니까. 내가 시작하면 세 사람 다 창고 구석으로 뛰어요.”
“뭘 시작….”
천 실장이 결정을 내리고 선우현을 향해 손짓했다.
“어이. 거기. 바지사장. 이야기 좀 하지.”
박서윤이 작게 말했다.
“조심해요. 저놈은 총을 가지고 있어요.”
“압니다. 엠투가 맞은 거 봤으니까.”
“네? 조금 전에는 총에 안 맞았다고 했잖아요.”
“빗맞았단 말이었습니다.”
선우현이 천 실장 쪽으로 걸어갔다.
“나한테 궁금한 게 많나 봐? 일을 이렇게 크게 벌이는 거 보면.”
천 실장이 실실 웃으며 말했다.
“너는 진짜 전주가 누구인지부터 말해라. 내 모든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면, 너희 모두 살아서 여기를 나갈 수 있다.”
“그 말을 어떻게 믿냐. 남미연 씨는 너희가 납치하기엔 너무 거물이잖아.”
“우리가 마스크를 쓴 건 살려줄 생각이 있어서인데, 그래도 안 믿으면 다 죽는 거지.”
“뭐. 그건 그렇다 치고.”
이번에는 선우현이 물었다.
“그런데 어제 네 부하한테 내 이야기 못 들었냐? 청부업자들이 나한테 처맞고 도망쳤다는 이야기 말이야.”
천 실장이 오른손으로 권총을 뽑아 흔들었다.
“상관없다. 그놈들은 총이 없지만, 나는 있으니까.”
“‘나는’이라…. 총은 너만 있나 보다?”
“뭐?”
“좋은 정보 고맙다. 우리 숙녀분들을 위해서 그게 알고 싶었거든.”
선우현이 오른손을 슬쩍 흔들었다.
밖에서 주워온 조약돌이 옷소매 안에 끼워져 있다가 손바닥으로 흘러내렸다. 그는 그 조약돌을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오른손을 앞으로 휙 뻗었다. 동시에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면서 입으로 말했다.
“탕.”
탄력 있게 뻗는 팔에 강력한 손가락 튕김이 더해졌다.
조약돌이 마치 총알처럼 앞으로 날아갔다.
목표는 천 실장이 들고 있는 권총이었다.
조준은 정확했다. 이 거리에서는 빗나가지 않는다.
조약돌은 천 실장이 반응하기 전에 오른손을 때렸다. 조약돌에 담긴 힘은 마치 진짜 총알이라도 쏜 것처럼 강력했다.
손을 이루는 수십 개의 뼈 중에 가느다란 몇 개가 그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와드득 부러졌다. 천 실장이 비명을 질렀다.
“끄악!”
뼈가 부러지면서 신경도 충격을 받았다. 오른손이 말을 듣지 않았다. 손가락이 풀리면서 권총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천 실장은 기습을 당했다는 걸 깨달았다. 어떻게 당했는지 따져볼 시간은 없었다. 그는 재빨리 판단했다.
‘총으로 쏴야 해!’
그가 권총을 주우려고 재빨리 몸을 숙였다.
선우현이 앞으로 성큼 걸어갔다. 한 걸음의 보폭이 다른 사람 서너 걸음보다 넓었다.
단숨에 공간을 건너뛴 선우현이 천 실장을 걷어찼다.
천 실장이 반사적으로 두 팔을 교차해 그 발을 막았다.
반응은 빨랐지만, 오른손이 이미 부러진 게 문제였다. 막자마자 엄청난 고통이 밀려왔다.
“으아악!”
게다가 발차기를 완전히 막아내지도 못했다. 천 실장이 뒤로 날아가 창고 벽에 처박혔다.
선우현이 발을 내리면서 남은 놈들을 둘러보았다.
“이제 여섯 남았네?”
박서윤 일행을 납치할 때 움직인 조직원이 천 실장까지 여섯 명이다. 어제 청부업자를 고용했던 한 명은 이곳에 남아 있었다.
이제 천 실장이 당했으니 여섯이 남았다.
그중 넷은 즉시 무기를 뽑았다. 잭나이프를 뽑은 놈도 있고 회칼을 뽑은 놈도 있었다.
입구를 지키던 두 놈은 알루미늄 야구 배트를 하나씩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배트를 위로 들었다.
박서윤이 뒤에서 재빨리 말했다.
“우리는 구석으로 피해 주는 게 도와주는 거예요!”
남미연도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
“앗! 빨리 가자!”
박서윤이 얼 타고 있는 신나리의 팔을 잡고 구석으로 뛰었다. 그런 후에 말했다.
“한 놈쯤은 우현 씨 뒤로 샐 수 있어요. 이쪽으로 오는 놈은 우리가 잡아야 해요.”
남미연이 물었다.
“우, 우리가?”
“제가 좀 싸울 줄 알아요. 우리 셋이서 힘을 모으면 하나쯤은 상대할 수 있어요.”
“서윤 씨 무술이라도 배운 거야?”
“그냥 험하게 자랐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