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 바지
선우현이 명령했다.
“엠투. 넌 에너지를 아껴야 하니까 대기 모드로 전환해라. 에너지가 바닥나면 네 전자두뇌에 좋을 거 없다.”
엠투가 뒷좌석에 옆으로 눕혀진 상태로 짖었다.
“멍멍….”
“이게 내 말을 자꾸 씹네.”
- 엠투의 명령 수행 체계는 오랫동안 지상 생활을 하면서 약간의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그건 이미 알고 있었다. 남미연과 선우현이 같이 있을 때는, 정식으로 명령하지 않으면 남미연의 말을 더 잘 들을 때가 종종 있었다.
“총에 맞아서 그 오류 상태가 심해진 건 아니겠지?”
- 그건 아닐 겁니다. 머리에 총을 맞은 건 아니니까요.
선우현이 정식으로 명령하려다가 마음을 바꾸었다.
“엠투. 남미연 씨는 내가 구하러 가니까 넌 대기하라고. 너 지금부터 그러고 있으면 나중에 정작 필요할 때는 못 일어난다. 이게 더 전술적으로 효율적이다.”
“멍….”
엠투가 눈을 슬쩍 감으며 대기 모드에 진입했다.
대기 모드에서는 개의 심장박동을 흉내 내던 움직임도 멈추고 숨을 쉬는 동작도 하지 않았다. 일부러 개의 수준으로 높여놓은 체온도 천천히 낮아졌다.
선우현이 룸미러로 뒷좌석을 힐끗 보며 말했다.
“남미연 씨가 저 모습을 봤으면 엠투가 죽었다고 통곡이라도 하겠네.”
- 이미 울고 있습니다.
◈ ◈ ◈
남미연은 납치된 차에서 펑펑 울었다.
“흰둥이가 또 나를 구하다 죽었어!”
옆에서 신나리가 위로했다.
“언니. 흰둥이는 괜찮을 거예요.”
신나리는 평소에는 선우현처럼 엠투라고 부르지만 지금은 흰둥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그 정도 눈치는 있었다.
남미연이 울면서 말했다.
“옛날에도 나를 구하려다가 나 때문에 죽었어. 그런데 또…. 우리 흰둥이 맞아. 흰둥이 맞다고!”
◈ ◈ ◈
선우현이 갈림길 근처까지 달려갔다. 이제 어디로 갈지 결정해야 한다.
“상황 보고해.”
- 선장님. 문제가 생겼습니다.
선우현이 갈림길을 보며 말했다.
“두 길 중에 어느 쪽이 문제인데?”
- 제 쪽이 문제입니다.
선우현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 뭐라고?”
- 관측 카메라의 구동계가 고장 났습니다. 수리가 끝날 때까지 지상을 볼 수 없습니다.
“뭐? 왜?”
- 적의 차량이 두 대로 나뉘어 있어서 번갈아 살펴보다가 구동계에 무리가 갔나 봅니다.
“젠장. 하필 지금.”
탐사대 지원위성은 지구연합에서 건조된 후 5천 년이나 사용됐다.
이제 선체는 너무 낡아서 자주 금이 갔고, 모든 장비는 무리하면 언제든지 고장 날 수 있었다.
기존에는 많았던 관측 카메라도 거의 다 고장 나서 이제 한 대만 남았다. 그것조차도 예전에 이미 여러 번 고장 났던 것을 수리해서 쓰고 있다.
그 카메라로 두 대의 차량을 번갈아 확인하다가 구동장치가 고장 났다.
선우현이 갈림길 앞에서 차를 세웠다. 적이 어디로 갔는지 알아야 어느 길로 추적할지 결정할 수 있다. 적의 위치를 모르고 무작정 전진하면 오히려 거리가 더 멀어질 수도 있다.
“구동계 수리는?”
- 이미 수리하고 있습니다.
“자원을 아끼지 말고 서둘러.”
자원을 더 쓰면 수리 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
- 당연히 그러고 있습니다.
김수선이 관측 카메라의 구동계를 수리하는 데는 20분이 걸렸다. 평소보다 훨씬 빠른 속도였다.
- 선장님. 수리가 끝났습니다.
“그럼 그 새끼들을 찾아!”
하지만 미행을 할 때 20분은 너무 긴 시간이었다.
- 놓쳤습니다. 탐색 범위가 너무 넓어 두 대의 차량 모두 찾을 수가 없습니다.
“젠장….”
- 제가 계속 찾아보겠습니다.
선우현은 이미 지도를 보고 적의 동선을 추측하던 중이다.
“엠투는 총에 맞았고, 내 주변 사람들이 납치됐어. 그 새끼들이 어디 갔을까?”
탐색 대상 지역을 좁히지 못하면 도주한 차량을 찾기 어려워진다. 만약 그 차량이 지하주차장에 들어갔다면 지원위성에서는 찾을 수 없다.
선우현이 스마트폰에 띄운 지도를 계속 보며 말했다.
“내가 생각해봤는데, 이 납치범 놈들이 예전처럼 길성 비서실 대리 박서윤을 노린 것일 수도 있지만.”
- 박서윤은 이미 비슷한 일을 여러 번 당했으니 이번에도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스래곤 비서실장 박서윤을 노렸을 거야. 내가 어제 습격당하고 오늘은 서윤 씨를 습격했잖아.”
선우현은 어제 나사 직원 조세핀과 같이 있을 때 습격당했다.
- 저도 스래곤 쪽이 더 유력해 보입니다.
“수선아. 어제 나를 습격한 청부업자가 도망치다가 만난 놈 말이야.”
청부업자의 차량 정보는 이미 안형준 형사에게 넘겼다. 김수선은 어제 청부업자와 접촉한 놈을 다시 추적했다.
“그놈 아지트가 여기서 차로 가면 얼마나 걸리지?”
- 현재 교통 상황에서는 15분쯤입니다.
“거기부터 확인해.”
잠시 후에 김수선이 살짝 흥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 확인했습니다. 놈들의 차량을 발견했습니다. 선장님은 천재이십니다! 역시 지구연합의 에이스 출신답습니다.
“놈들의 차가 두 대 다 거기에 있냐?”
세 사람을 납치한 차량은 두 대다.
- 한 대는 그곳에 있고, 다른 한 대는 근처에서 그곳으로 가고 있습니다.
“최단시간 코스!”
- 오른쪽 길로 가십시오! 그쪽이 더 빠릅니다!
선우현이 가속 페달을 깊게 밟았다. 시동은 끈 적이 없다. 차가 오른쪽 길로 튀어나갔다.
“이 새끼들! 다 뒈졌어!”
◈ ◈ ◈
남미연은 펑펑 울었다.
“흰둥이가 또 나를 지키려다가 죽었어! 우리 흰둥이가 또!”
신나리는 바로 옆에서 남미연이 펑펑 울고 있어서 무섭다는 티를 제대로 내지 못했다.
신나리는 원래 활발한 성격이다. 그녀는 남미연을 위로하면서 두려움을 조금이라도 떨치고 싶었다.
“저기, 언니.”
나이 차이가 스무 살이나 나기 때문에 원래는 남미연을 언니라고 부를 생각이 들지 않았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게라도 불러서 위로해주고 싶었다.
게다가 스무 살 많은 남미연이 신나리보다 더 예뻤다. R 크림을 매일 바른 덕분에 20대로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 일단 언니라고 불러보니 어색하지는 않았다.
“언니. 흰둥이는 좋은 곳에 갔을….”
남미연이 통곡했다.
“흰둥아아아! 내가 또 흰둥이를 죽인 거야.”
“언니가 어렸을 때 키운 흰둥이는 엠투…. 지금 흰둥이랑 닮은 다른 개잖아요.”
남미연이 고개를 휙 돌렸다.
“아니야! 같아! 같은 흰둥이야!”
“개는 수십 년이나 살지 못….”
“환생했겠지!”
“네?”
신나리가 눈을 깜빡이다가 물었다.
“아니, 왜 하필 개로 환생….”
“우리 흰둥이가 환생해서 나를 찾아온 거야!”
“옥상 오빠를 찾아간….”
“흰둥아아아!”
“언니 찾아간 거 맞아요. 환생한 것도 맞아요.”
남미연은 아직도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눈만 보였다. 그런데 그 눈은 눈물에 마스카라가 녹아 새카매진 상태였다.
“진짜?”
“네.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들이 갇혀 있는 창고의 문이 열리면서 박서윤이 들어왔다.
신나리가 외쳤다.
“앗! 언니! 구하러 온 거예요?”
“아니.”
“앗! 그럼 언니가 혹시 흑막의 보스….”
“같이 잡혔잖아. 나를 납치한 놈들이 지금 도착한 거야.”
뒤따라 들어온 조직원이 박서윤의 등을 밀었다.
“들어가서 옆에 앉아!”
박서윤이 신나리의 옆 바닥에 앉았다. 그녀의 두 손은 허리 뒤로 돌려져 케이블타이로 묶여 있었다. 그건 신나리나 남미연도 마찬가지였다.
조직원이 나가고 창고 문이 닫히자마자 박서윤이 창고 내부를 확인했다.
“넓은 창고. 출구는 하나. 내부에 이용할 물건은…. 다 치워놨네. 이놈들은 아마추어가 아니구나.”
창고는 완전히 텅 비어 있었다. 작은 창문은 너무 높은 곳에 달려 있었다.
그래도 남미연이나 박서윤은 날씬해서 그 창문으로 통과하는 게 불가능하진 않았다.
“두 사람이 밑에서 올려주면 한 명은 탈출할 수 있겠는데….”
신나리가 눈이 동그래져서 물었다.
“서윤 언니. 어떻게 그런 거 다 알아요? 혹시 언니의 진짜 정체는 기억을 잃은 첩보원이에요?”
“아니. 그냥, 납치를 좀 당해봤더니 경험이 생겼어.”
“네? 누가 언니를 왜 납치해요?”
“나도 그게 궁금해.”
“그런데도 괜찮은 건, 그때마다 풀려난 건가요?”
“아니. 구출됐어.”
신나리가 기대했다.
“그럼 이번에도….”
“예전 놈들은 아마추어 티가 좀 났었어. 그런데 이번 놈들은 프로 냄새가 나. 그때랑 다른 놈들이야.”
박서윤은 그걸 납치될 때부터 눈치챘다.
“예전 놈들은 길성 비서실 대리를 납치했는데, 이번에는 스래곤 비서실장을 납치했거든.”
신나리가 울상을 지었다.
“그럼 이번에는 우리 큰일 난 거예요.”
“아니. 난 믿어. 이번에도 선….”
갑자기 창고 문이 벌컥 열렸다.
덕구파 천 실장이 안으로 들어왔다. 다른 부하들도 우르르 따라왔다. 그중 한 명이 창고 가운데에 의자를 갖다놓았다.
천 실장이 그 의자에 앉으며 다리를 꼬았다.
“박서윤 비서실장. 만나서 반갑군.”
박서윤이 천 실장을 노려보며 물었다.
“우리를 왜 납치한 거야?”
“납치라니. 초대한 거지. 협조만 잘하면 나쁜 일은 없을 거야.”
박서윤이 궁리했다.
‘좋아. 대화를 통해 시간을 끌 수 있겠어. 어떻게든 내일까지만 버티면 선우현 씨가 눈치를….’
바로 옆에서 남미연이 소리를 질렀다.
“네가 우리 흰둥이를 죽였어!”
천 실장의 얼굴이 저절로 일그러졌다.
“아까 그 개새끼는 도대체 뭐야? 무슨 개가 총알을 피해? 그거 개 맞냐?”
“개 맞아! 환생해서 나를 찾아온 우리 흰둥이를 네가 다시 죽였다고!”
“뭐지? 정신이 나간 여자인가?”
부하가 옆에서 맞장구쳤다.
“그런가 봅니다. 환생이라니.”
천 실장이 남미연을 보며 말했다.
“그런데 저건 왜 아직도 마스크를 쓰고 있어? 저러니까 우리 쪽 같잖아. 야. 마스크 벗겨.”
조직원 하나가 얼른 앞으로 가서 남미연의 얼굴에서 마스크를 벗겼다.
“헉!”
“왜 그래?”
조직원이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실장님. 그게….”
“이 새끼가. 내가 누군지 말하지 말….”
천 실장의 눈에도 남미연의 얼굴이 보였다. 마스카라가 녹아 까맣던 눈만 볼 때는 몰랐는데, 마스크를 벗어 얼굴이 다 보이자마자 확실히 알아볼 수 있었다.
천 실장은 깜짝 놀라서 외쳤다.
“헉! 남미연? 남미연이 왜 여기 있어!”
남미연도 소리를 질렀다.
“네가 납치했잖아!”
천 실장이 자신의 얼굴부터 확인했다. 커다란 마스크와 선글라스는 확실히 쓰고 있었다. 그가 부하들도 확인했다. 다들 마스크나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씨발. 놀랐네. 남미연은 계획에 없었는데….”
청부업자를 고용했던 측근 조직원이 옆에서 물었다.
“그럼 어떻게….”
“일이 복잡해져서 나도 생각 중이다.”
그들은 스래곤 비서실장 박서윤을 납치했다. 그것만 해도 후폭풍이 클 수 있다.
덕구파도 그건 알지만, 조직이 갈려 나가는 상황에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리스크를 각오하고 박서윤을 납치했다.
그런데 실수로 톱스타 남미연까지 납치했다.
“남미연은 후폭풍만 크고 우리 일에 도움은 하나도 안 되는데…. 씨발. 이걸 어쩌지?”
◈ ◈ ◈
선우현이 목적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도착했다. 그는 그곳에 차를 세워두고 세 사람이 갇힌 곳으로는 산을 통해 뛰어왔다.
“후우우. 후우.”
선우현이 고속으로 질주하느라 거칠어진 숨을 몰아쉬었다. 한적한 곳에 홀로 지어져 있는 낡은 주택이 보였다. 주택 옆에는 조립식 자재로 지은 커다란 창고가 있었다.
선우현이 숨을 고르며 물었다.
“수선아. 내부 상황은?”
- 창고 창문으로 세 사람을 계속 확인하는 중입니다. 손이 뒤로 묶인 채로 바닥에 앉아 있습니다. 조금 전과 같은 상태입니다.
“상태는?”
- 다치진 않은 것 같습니다.
“놈들은?”
- 창이 작아 창고 내부의 일부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추가로 도착한 차량에서 내부로 셋이 들어갔습니다. 대기하고 있던 놈 둘도 같이 들어갔습니다.
김수선이 이곳을 확인했을 때는 이미 차량 한 대가 이곳에 도착해 있던 상태였다. 그 전에 내부에 들어간 인원이 있다면 파악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밖을 지키는 놈이 둘이나 있는 걸 보면 내부에는 더 많기는 하겠지.”
- 어떻게 하실 겁니까? 쳐들어가실 겁니까?
“근처에 창고 내부를 확인할 수 있는 나무가 없어. 그렇다고 그냥 돌입하면 인질이 너무 많아서 위험해.”
- 엠투가 총에 맞았습니다. 총을 가진 놈이 있습니다.
“알아. 그래서 조심하는 거야. 총을 가진 놈이 많으면, 세 사람 중 누군가는 유탄에 맞을 수도 있잖아. 그건 절대로 안 되지.”
- 그럼 시간을 끄실 겁니까?
“아니.”
선우현이 입구를 지키고 있는 두 놈을 보며 말했다.
“그냥 걸어 들어갈까?”
- 예?
◈ ◈ ◈
덕구파 천 실장이 결정을 내렸다. 그가 부하들이 듣지 못하게 혼잣말을 했다.
“씨발. 이미 일은 저질렀어. 어차피 이번 일이 잘 풀리면 다 사는 거고, 안 풀리면 다 뒈지는 거야.”
천 실장이 손뼉을 짝 소리 나게 쳤다.
“질문을 시작하지.”
오늘 납치의 타깃은 남미연이 아니라 박서윤이다.
천 실장이 박서윤에게 물었다.
“스래곤의 진짜 사장은 누구지? 지금 있는 그 바지사장 말고.”
박서윤이 그 질문에서 쓸만한 정보를 찾아냈다.
‘이놈들은 우현 씨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구나. 그리고 스래곤의 내부 상황도 몰라. 누군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놈들이야.’
박서윤이 판단을 끝내고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진짜 사장이 누구인지는 나도 몰라. 나는 지금 사장님만 알아.”
“진짜 사장이 누구인지도 알려주지도 않고 너한테 비서실장을 시켰다? 그걸 믿으라고?”
“난 얼마 전까지 일개 대리였어. 그런 내가 어떻게 스래곤의 비서실장이 됐겠어?”
“그래. 어떻게….”
박서윤이 미리 생각해둔 대사를 읊었다.
“나도 바지실장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