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 밥
덕구파 두목 곽덕구가 물었다.
“박재곤 의원이 그렇게 말했어? 스래곤의 새 사장이 모든 일을 꾸민 거라고?”
천 실장은 박재곤의 대포폰으로 전화를 걸었다가 그 이야기를 들었다.
“예. 회장님. 그렇게 말했습니다.”
“씨발. 이거 느낌이 쌔한데?”
“예?”
곽덕구는 의심이 많았다.
“박 의원이 우리를 이용해서 그놈을 치려는 거 같은데?”
덕구파가 멀쩡할 때는 박재곤이 뒤만 확실히 봐준다면 스래곤 사장을 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박재곤에게는 그런 대형 사건을 수습해줄 힘이 없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하면….”
덕구파가 계속 갈려 나가면 나중에는 곽덕구 혼자만 남는다. 그렇게 되기 전에 뭔가 방법을 찾아야 한다.
곽덕구가 욕을 했다.
“씨발. 이거 외통수구나. 박재곤이 원하는 대로 해줘도 우리가 산다는 보장은 없는데, 안 하면 확실히 죽어.”
곽덕구가 천 실장을 보며 물었다.
“통화 녹음은?”
“박 의원이 자기 이름은 절대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스래곤이나 회장님 이름도 직접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네가 말할 수도 있었잖아.”
“그러면 당장 전화를 끊을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그 능구렁이 같은 새끼. 대포폰인데도 조심하는 거 봐라.”
곽덕구가 꽤 오래 고민하다 결정을 내렸다.
“애들 모아. 이번 일은 천 실장이 책임지고 진행해.”
“하지만 회장님. 지금 우리 상황에서 스래곤 사장을 건드리면, 뒷감당이….”
“이대로 있으면 뭐 나아지는 게 있냐? 이렇게 있다가 말라죽고 싶어?”
“그건 아닙니다만….”
“우리는 이런 꼴로 숨어 있는데, 박재곤은 멀쩡히 돌아다니잖아. 우리는 실시간으로 갈려 나가는데 박재곤은 수사도 제대로 안 받아. 씨발. 우리만 엿 되고 있다고.”
곽덕구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야. 박재곤이 우리를 살려주지 못하면 같이 죽어야지.”
“그럼 스래곤의 새 사장을 제끼는 겁니까?”
곽덕구가 천 실장을 보며 인상을 썼다.
“그러면 너무 박재곤이 원하는 대로 하는 거잖아. 내가 박재곤 시다바리냐?”
“그러면….”
“스래곤 새 사장한테도 딜을 걸 게 있어야지.”
“돈을 주는 겁니까?”
“돈은 사장 새끼도 많을 테니까 안 통해. 우리는 우리가 잘하는 일을 해야지.”
천 실장도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
“역시 회장님이십니다.”
곽덕구가 명령했다.
“천 실장. 이 일은 네가 책임지고 진행해야겠다. 성공하면 우리는 산다. 조직 간판을 바꾸면 전보다 더 잘나갈 수 있어.”
“숨어 있는 애들을 모으겠습니다.”
“서두르지 마라. 배신자가 없는지 철저히 확인하면서 천천히 진행해. 경찰이 애들 사이에 빨대를 꽂아놨을지도 모르니까.”
“알겠습니다.”
◈ ◈ ◈
스래곤은 항공우주업계에서 활동하는 회사다. 국내만이 아니라 외국에도 관련 부품을 납품한다.
선우현이 회사에 출근했다.
“나 진짜 너무 자주 출근한다.”
김수선이 말했다.
- 선장님. 어제는 안 나오셨습니다만?
“이틀 만에 출근이잖아.”
- 그 전에는 주말이라 이틀을 노셨습니다만?
“주말은 원래 놀라고 있는 날이야.”
- 금요일도 노셨는데요? 목요일에 출근하고 화요일에 출근하시는데, 계산이 안 맞지 않습니까?
“어…. 수선아. 레드 포션 작업은? 구하니 씨와 남미연 씨한테 돈을 좀 갚으려면 R 크림을 더 만들어야겠는데.”
- 레드 포션을 복원하려면 궤도를 날아다니는 우주 쓰레기를 추가로 잡아서 에너지와 자원을 확보해야 합니다.
“에너지가 또 여유가 없구나.”
- 여유는 항상 없었죠. 그런데 현재 위치가 우주왕복선에서 보이는 곳이라 움직임을 자제하는 중입니다.
“미국에서 보낸 거?”
- 네. 어제 발사해서 인공위성 궤도에 진입했습니다.
“우리 선체에는 카모플라쥬 시스템이 있잖아. 그럼 거기서 봐도 안 보일 텐데?”
- 그 시스템은 가끔 고장 날 때가 있습니다만? 우주왕복선의 정면에서 선체가 본모습을 드러내는 사태가 벌어지면, 감당이 되시는지?
“수선아. 왕복선에 가까지 가지 말고 살살 움직여. 레드 포션은 천천히 복원하면 되지.”
- 어차피 궤도의 고도 자체가 다릅니다. 저기까지 내려갔다 올라오면 에너지 손실이 너무 큽니다.
“맞아. 에너지는 아껴야지.”
- 그리고 출근이 너무 늦으십니다.
“내가 늦게 가야 서윤 씨가 자료 정리할 시간이 있지. 내가 일찍 가면 서윤 씨는 새벽부터 출근해서 일해야 한다?”
- 참 좋은 핑계를 찾으셨군요. 그런 쪽으로는 머리가 잘 돌아가십니다.
“내가 원래 머리를 안 써서 그렇지, 쓰면 잘 써.”
- 전문용어로 잔머리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 수선이가 착해졌어. 잔대가리라고 안 하다니.”
- 선장님이니까 참고 있습니다. 잘하면 여기로 로켓이라도 쏴줄 것 같아서요.
선우현이 사장실에 도착했다. 카페에서 산 커피 두 잔도 가져갔다.
박서윤이 보고를 위해 태블릿 PC를 들고 사장실로 따라갔다.
두 사람이 사라진 후에 비서실 남자 대리가 말했다.
“그런데 사장님은 커피를 꼭 두 잔씩만 사오시네.”
“실장님하고 드시려는 거지.”
“부럽다.”
“실장님이?”
“사장님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냐? 일이나 해.”
◈ ◈ ◈
박서윤이 회사 상황을 간단히 보고했다. 주로 정식 업무보고 전에 알아야 할 요약된 내용이지만, 비서실이 자체적으로 파악한 정보도 있었다.
선우현이 물었다.
“인공위성용 로켓 쪽을 알아봐 달라고 한 건?”
박서윤이 사장실 벽에 설치된 대형 모니터에 자료를 띄웠다.
“우리 회사에 그쪽 부품을 제작하는 부서가 있습니다. 그 부서에서 정리한 자료입니다.”
그녀가 화면을 넘기며 설명했다.
“보시다시피 로켓 하나를 혼자 사용하는 건 비용이 많이 듭니다. 그건 대형 인공위성을 발사할 때나 필요한 방식입니다. 소형 인공위성이라면, 하나의 로켓으로 여러 대를 궤도에 올릴 수 있습니다. 당연히 비용도 분담해서 부담합니다.”
“그러면 좀 저렴하긴 할 텐데, 위성의 궤도를 마음대로 정할 수는 없겠군요. 다른 위성들과 같이 궤도에 올려야 할 테니까.”
“그렇습니다.”
다른 문제도 있다.
소형 큐브 하나 정도의 물자를 지원위성으로 보내도 도움은 된다. 하지만 결정적인 도움까지는 아니다. 들어가는 돈과 감당해야 하는 리스크에 비해 얻는 게 너무 작다.
선우현이 작게 말했다.
“역시 우주왕복선이 필요한데….”
- 정확히 말하면 우주왕복선 회사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건 스래곤을 팔아도 안 될 겁니다.
“우주왕복선을 빌린다 해도 아무 궤도나 보내면 의심받기 딱 좋겠지. 거기다 왕복선 회사에서 화물이 뭔지 점검도 할 테고.”
- 우주에 위성 무기를 띄우지는 않는지 확인할 테니까요.
“대형 로켓도 마찬가지 상황이야. 역시 우주로 자재만 보내면 이상하겠어.”
- 그러니까 일을 더 많이 해서 자체 로켓을 쏠 수 있게 되시라고요. 물론 최선은 우주왕복선이고요.
선우현은 박서윤이 요약해준 정보를 듣고 나서 회의에 참석했다.
회의실에 각 분야의 담당 이사들이 들어와 정식으로 업무보고를 했다.
선우현이 손을 들어 화면을 멈추게 했다.
“이번에 미국에서 발사된 우주왕복선 화물에 우리 회사 부품이 들어가네요?”
“다른 회사가 우리 회사의 방사능 저항성 부품도 사용한 수리용 모듈을 NASA에 납품했습니다. 그게 이번에 올라갔다고 합니다. 홍보용 자료로 쓰려고 준비 중입니다.”
선우현이 작게 말했다.
“수선아. 탐사대 지원기술로 만든 부품이 네가 지금 보고 있는 우주왕복선에 실려서 거기로 올라갔다. 멋지지 않냐?”
- 우리 지원위성은 지구연합이 총력을 기울여 만든 최고의 우주선입니다. 지구 기술로 만든 인공위성을 수리하는 데 겨우 부품 몇 개 들어간 게 왜 멋질까요?
“신품이잖아. 지상에서 우리 기술로 만든 신품 부품이 위성 궤도로 올라갔다고.”
- 그건 부럽네요. 우리 선체는 오천 년이나 쓴 고물이라서 맨날 고장 나는데.
선우현이 물었다.
“NASA에 납품한다는 걸 홍보하면 매출에 도움이 됩니까?”
“홍보 문구 몇 개 추가하는 정도라 효과가 그리 크진 않을 겁니다. 우리 회사가 직접 납품하는 게 아니라, NASA에 들어가는 제품에 우리 부품이 조금 사용된 거니까요.”
“직접 납품하면 좋을 텐데, 우리 회사에는 뭐 없습니까?”
“적당한 제품은 있습니다. 아예 새로 발주를 받아도 되고요. 다만, 영업에서 NASA를 못 뚫었습니다.”
영업 담당 이사가 발끈했다.
“상대는 NASA입니다.”
“거기도 어차피 물건은 다 외부에서 사다 쓰잖습니까?”
“그곳을 뚫으려는 업체가 전 세계에 한두 곳인 줄 아십니까? 한국 업체가 미국 NASA를 뚫는 게 어디 쉬운 줄 아냔 말입니다. 기술력이 똑같아도 불리한데, 우린 기술력도 좀 밀렸잖습니까?”
연구소의 김정수 이사가 항의했다.
“불똥이 왜 우리한테 튑니까?”
“그럼 기술력을 더 높이던가!”
“요즘은 잘 만듭니다!”
선우현이 작게 말했다.
“NASA가 그렇게 어렵나? 옛날부터 보면 실력은 그냥 그렇던데.”
- 초기에는 참 답답했지요. 통신기가 남은 게 없어서 현지협력자를 섭외할 수도 없었고요.
“그때는 통신기를 보내 개입하는 건 좀 위험했지. 냉전 시대에 미국 애들이나 소련 애들이 눈 돌아가면 우리 선체를 노리고 무슨 짓을 할지 몰랐으니까. 냉전 시대 사람들은 맛이 살짝 가 있었잖아.”
- 그건 그렇습니다. 우리 선체는 가만 놔둬도 여기저기 금이 가서 때워야 하고 에너지도 부족한데,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으니까요.
“어차피 남아 있는 위성 통신기도 없었지만.”
- 그때는 있었어도 보내면 안 됐죠.
지원위성에는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휴대용 위성 통신기가 하나도 없었다. 선우현이 지상에 내려올 때도 가져오지 못했다.
그래서 그가 지상에 도착해서 제일 먼저 한 일은, 몇백 년 전에 현지협력자에게 보냈던 팔찌형 통신기를 찾는 것이었다.
이사들이 목소리를 키우며 서로 다른 부서 탓을 했다. 선우현이 마이크를 톡톡 두드렸다. 이사들이 조용해졌다.
선우현이 말했다.
“NASA도 알고 보면 그리 대단할 거 없습니다. 그러니까 방법을 찾아보시죠.”
“알겠습니다.”
◈ ◈ ◈
선우현이 점심을 먹으러 가면서 말했다.
“오늘도 나리가 회사에 알바 하러 왔으려나?”
박서윤이 옆에서 대답했다.
“나리는 학교 가는 날이에요.”
“구내식당에서 보이면 밥이라도 같이 먹으려고 했더니.”
“오늘은 구내식당인가요?”
“생각해보니까 내가 회사 밥을 한 번도 못 먹었더군요.”
두 사람은 구내식당에 자리를 잡았다. 직원들은 근처 테이블로 오는 사람조차 없었다.
꽤 떨어진 테이블에서 직원 두 명이 속삭이듯 말했다.
“저분이 사장님이셔. 얼굴 보는 건 처음이다.”
“사장님이 머리에 뿔이 난 건 아닌데? 능력만 보면 도깨비라고 해도 될 정도던데.”
“조심해. 이사진 절반을 단칼에 날린 분이야. 비서실장님을 훔쳐보다가 사장님한테 걸리면 네 책상이 엘리베이터 앞으로 이동할 수 있어.”
“나도 그 정도 눈치는 있어. 밥 먹자.”
“사장님이 오셨는데 구내식당에 특식 안 나오나?”
“갑자기 오셨잖아.”
선우현이 식사를 멈췄다.
“아니, 이건 아니지.”
박서윤이 물었다.
“왜 그러세요?”
“밥이 왜 맛이 없지? 요리의 달인으로서 이유를 알려줘 봐요.”
“제가 달인은 아니지만요.”
박서윤의 요리 실력은 상당하다. 요리를 배울 때는 학원에서 요식업계로 가야 한다는 제안을 받았었다.
“일단 구내식당 주방 직원이 부족해요. 전임 사장 때 많이 잘랐대요. 그 부족한 자리에 알바 직원을 자꾸 투입해서 전문성도 떨어져요.”
“나리가 하는 그 인턴 알바?”
“네. 주방일을 돌아가면서 맡기는데 나리도 전에 했어요.”
“와. 나리 실력으로 주방에 들어가니까 음식이 이 지경이 되는구나.”
“식재료도 단가가 낮아요. 전임 사장 때 회사 지원금을 다 삭감했거든요. 직원에게 음식값으로 받는 돈으로 운영하는데, 그 가격은 지원금이 있을 때의 기준이에요.”
“와. 먹는 데 쓰는 돈을 까다니. 그놈은 역시 인간성에 문제가 있네.”
“정확히 말하면, 서류상으로는 지원금이 나간 거로 처리하고 그걸 빼서 비자금으로 썼어요.”
“알뜰하게도 해먹었네. 그럼 지금은 식당 지원금이 어떻게 됩니까?”
“담당 임원들을 자르면서 지원금이 비자금으로 사라지는 건 막았어요. 그런데 식당은 원래 지원금 없이 운영했으니까, 지금도 예전 그대로 운영되고 있죠.”
“서윤 씨는 그럼 내가 늦게 출근하는 날은 점심으로 이걸 먹었어요?”
“네.”
선우현이 숟가락을 완전히 놓으며 말했다.
“내가 더 일찍 여기서 밥을 먹었어야 했네.밥이 얼마나 중요한데,이런 엠투도 안 먹을 걸 주나.이거 엎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