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 R 골드 II
전호 호텔 사장 전상미가 옥탑방 옥상에 올라왔다.
먼저 와 있던 유소율이 인사했다.
“어머. 전상미 사장님?”
“유소율 이사님이네요?”
선우현이 물었다.
“두 분이 서로 아시나?”
전상미가 대답했다.
“R 크림을 독점 판매하는 곳이 태양 백화점이잖아요. 태양의 R 크림 책임자인 유소율 이사님을 모를 리가 있나요.”
유소율도 설명했다.
“전호 호텔은 R 크림을 피부관리 패키지에 쓰는 곳이에요. 당연히 전 사장님이 누구신지 정도는 알아야죠.”
선우현이 물었다.
“그런데 상미 씨는 갑자기 무슨 일입니까? 경영권 싸움은 유리한 상태일 텐데?”
“오늘은 그것 때문이 아니라요.”
전상미가 눈을 반짝였다.
“R 골드 액세서리, 선우현 씨 작품이죠?”
“왜 그걸 다들 알지?”
“그야 채연서의 디자인, 남미연과 구하니….”
“왜 아는지는 알겠습니다. 유소율 씨도 똑같은 말을 했으니까.”
유소율이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
“잠깐만요. 설마 전호 호텔이 R 골드 액세서리를 소매판매하려는 건 아니죠?”
유소율이 긴장한 건 R 골드 하나 때문이 아니다.
‘R 액세서리를 호텔에서 판다면 R 크림도 팔 수 있잖아.’
태양 백화점은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는 중이다. 아직 국내 최대 백화점이 되지 못한 건 지점 없이 본점 하나만 운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본점의 매출이 국내 백화점 본점 중에서 1위를 찍었다.
그 성장의 바탕에는 태양 백화점에서만 판매하는 R 크림과, 가끔 이벤트로 판매하는 활력 토마토가 있었다.
‘R 크림을 전호 호텔에서도 팔면 우리 백화점이 지금 누리는 효과는 반감돼.’
전상미가 말했다.
“그런 건 아니고요.”
유소율이 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휴우. 아니구나. 선우현 씨를 믿고 있었…. 어? 그럼 여기는 왜….”
전상미가 선우현을 보며 말했다.
“나 R 골드로 만든 액세서리 하나만 주세요.”
“갑자기? 대놓고?”
“난 반지가 좋은데.”
“그거 이제부터 팔 거라서. 돈 내고 사요.”
유소율이 얼른 말했다.
“네. 우리 백화점에서 사요.”
선우현이 말했다.
“태양 백화점에 판매권을 준다는 말은 아직 안 했는데.”
“아, 안 주실 거예요?”
“스래곤을 인수할 때 도움 좀 받았으니까, 그럽시다. 태양 백화점에서 맡아서 팔아요.”
유소율이 두 팔을 선우현 쪽으로 뻗었다.
“고마워요!”
“고마우면 팔 내리고.”
전호 호텔 사장 전상미가 말했다.
“나도 그때 언론 움직여서 도움 많이 줬잖아요.”
“내가 도와준 게 더 많지 않나?”
“그럼 내 반지는요?”
“반지는 태양 백화점 가서 돈 내고 사라니까.”
◈ ◈ ◈
R 골드로 만든 목걸이와 귀걸이는 구하니와 남미연이 차고 다니면서 유명해졌다.
유명 연예인 마케팅은 액세서리가 평범하면 반짝 뜨고 사라지기 쉽다.
그런데 R 골드는 달랐다. 실물을 보면 일반적인 금목걸이보다 훨씬 더 아름다웠다.
게다가 두 사람의 목걸이와 귀걸이는 디자인만 다른 게 아니다. 모든 액세서리는 사용된 R 골드의 무늬가 조금씩 달랐다.
R 액세서리를 갖고 싶어 하는 사람이 점점 늘어났다. 그중에는 연예인들도 있었다. 하지만 구할 수가 없었다.
“왜 파는 곳이 없냐고. 외국에 알아봤는데 거기도 없대.”
“수제품이라잖아. 기존 브랜드에서 만드는 게 아니야.”
“그러면 다른 곳에서도 수제품으로 만들면 되잖아.”
“나도 좀 알아봤는데, R 골드를 구할 수가 없어서 못 만든다더라.”
“금이랑 다른 게 섞인 거라던데, 그럼 섞으면 되잖아.”
“그렇게 시도한 곳이 있는데, 두 개를 같이 보면 하나는 짝퉁 느낌이 확 난다던데?”
“톱배우 남미연하고 톱가수 구하니만 할 수 있는 건가?”
관련 정보가 조금 흘러나오긴 했다.
“채연서가 구하니의 목걸이랑 귀걸이 세트를 디자인했더라고.”
“어쩐지 명품 느낌이 난다 했어. 역시 채연서.”
“채연서도 한 세트 있다더라.”
“채연서까지? 그럼 물건이 더 있겠는데?”
◈ ◈ ◈
박서윤이 오늘은 스래곤에 출근했다.
비서실 남자 대리가 동료에게 말했다.
“실장님 목걸이랑 귀걸이 말이야. 그거지? 남미연과 구하니만 하고 있다던 그거.”
여자 대리가 물었다.
“남자가 그걸 어떻게 알았어? 연애하니?”
“내가 남미연과 구하니의 팬이거든. 그 목걸이를 비교한 글을 팬클럽 게시판에서 봤어.”
“하긴.”
“‘하긴’이라니? 그거 무슨 뜻이냐?”
여자 대리가 말을 돌렸다.
“R 액세서리는 파는 곳이 없다는데 실장님은 어디서 구하셨을까?”
◈ ◈ ◈
태양 백화점에서 액세서리 전문 매장을 하나 열었다. 직영 매장이었다.
새로 열린 매장에 젊은 커플이 들어왔다.
“어머. 예쁜 거 많다.”
“하나 골라봐.”
“사주는 거야?”
“당연하지.”
그런데 그 매장에 R 골드를 사용한 액세서리가 있었다.
여자가 액세서리를 구경하다가 깜짝 놀랐다.
“어머! 이거 그거 아냐? 남미연하고 구하니가 하는 그 목걸이.”
“어?”
“무늬가 살짝 다른데 그래도 그거로 만든 거네. R 골드. 대박! 이거 할까?”
남자의 얼굴이 허예졌다.
“선미야. 노, 농담이지?”
“당연히 농담이지. 이걸 우리가 어떻게 사. 가격이 엄청 비쌀 텐데.”
“휴우.”
“너무 대놓고 안심한다?”
“어…. 그런데 이건 왜 가격표가 없지?”
매장 직원이 설명했다.
“R 골드 액세서리는 극소량만 생산되는 한정판이라 주문 제작만 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건요?”
“전시용으로 딱 하나 가져다 놓은 겁니다.”
“비싸죠?”
“가격은 협의해서 결정됩니다만, R 골드가 워낙 희귀해서요.”
“많이 비싼가 보다.”
◈ ◈ ◈
가수 양미나는 구하니가 하고 다니는 목걸이와 귀걸이가 부러웠다. 그녀는 소문을 듣자마자 태양 백화점 액세서리매장을 찾아갔다.
“R 골드 액세서리 주문할게요. 목걸이, 반지, 귀걸이까지 풀세트로.”
“저기, 손님….”
“하니보다 많이 걸치고 가서 아주 그냥 기를 팍 죽여놔야지.”
“손님. 이 상품은 주문 제작이라….”
“주문하러 왔잖아요.”
“협의가 필요합니다.”
“협의하면 되겠네요. 얼마에요?”
“그런데 이미 주문이 끝나서….”
양미나는 당황했다.
“네? 뭐가 끝나요?”
“R 골드가 새로 확보되면 추가 제작을 할 예정입니다. 예상 제작 물량은 일주일에 한 세트 정도입니다. 그때 다시 협의하셔야 합니다.”
양미나가 선글라스를 벗었다.
“나 누군지 몰라요? 나 양미나에요.”
“압니다. 팬입니다.”
팬이라는 말에 양미나의 목소리가 조금 약해졌다.
“그, 그래요? 아니, 도대체 누가 나보다 먼저 샀는데요?”
“고객 정보는 비밀이라서요.”
“대기 명단에 이름 올려두는 건?”
“판매자의 뜻에 따라 예약은 불가능합니다.”
“아니, 그 판매자가 도대체 누군데! 왜 하니는 출시하기도 전에 주고 나는 돈 주고 산다는데도 안 되냐고!”
◈ ◈ ◈
덕구파 두목 곽덕구는 한적한 별장에 숨어 있었다. 별장 주변에 다른 건물은 없었다. 근처를 지나가는 길에도 CCTV가 없었다.
곽덕구가 별장에서 술을 마시며 화를 냈다.
“씨발. 왜 다 실패한 거야? 완벽한 계획이었는데.”
이 별장은 곽덕구의 소유가 아니다. 실소유주는 곽덕구이지만 별장 주인은 다른 이름으로 되어 있다.
그렇다고 계속 이곳에 있을 수는 없다. 조직원이 전멸하면 곽덕구의 미래도 없다.
“씨발. 이게 아닌데.”
덕구파는 얼마 전부터 일이 자꾸 꼬이고 실패가 늘어났다.
그러다 이 부장이 체포됐다.
곽덕구는 이 부장이 입을 열면 조직이 치명타를 입는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부하들을 보내 제거하려고 했다.
그런데 실패했다. 이 부장은 살아남아서 입을 열었다.
그는 아는 게 더 많은 정 부장이라도 제거하려고 했다. 그런데 정 부장은 선우현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정 부장은 체포되자마자 입을 열었다.
그 지경이 되자 믿을 건 주식 작전밖에 없었다.
“씨발. 그 작전만 성공하면 기사회생할 수 있었는데. 돈도 벌고, 박재곤의 빽도 확실히 쓰고.”
스래곤의 전임 사장 소성철과 4선 의원 박재곤은 덕구파를 주식 작전의 하수인으로 썼다.
두 사람의 목표 금액은 1조였다. 그들은 덕구파에게는 몇백억 원 정도 떼어줄 생각이었다.
곽덕구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더 많이 먹고 싶었다.
하지만 4선 의원 박재곤은 건드리기 부담스러웠다. 조직이 위기를 벗어나려면 박재곤의 영향력이 필요했다.
그는 그래서 박재곤이 아니라 소성철의 몫을 넉넉히 갈라먹을 생각이었다.
“소 사장한테서 이천억은 뜯어낼 수 있었어. 그 돈만 있었으면 애들도 더 모으고 여기저기 약도 많이 쳐서 조직을 살릴 수 있었는데. 아니 더 키울 수도 있었는데.”
망했다.
그 계획은 완벽하게 망했다.
이제 경찰은 덕구파를 갈아버릴 기세로 수사하고 있다. 그걸 막아줄 박재곤은 자기 자리를 보전하기도 버겁다.
곽덕구는 박재곤 외에도 줄을 대놓은 정치인이나 정부 고위직이 몇 명 더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박재곤만큼 강한 파워가 없었다. 그들의 힘만으로는 지금 사태에서 경찰의 수사를 막기 어려웠다.
게다가 그들도 다들 몸을 사리느라 바빴다.
그래서 덕구파 두목 곽덕구는 이 별장에 숨어든 후로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여기가 감옥이나 마찬가지였다.
곽덕구가 술잔을 던졌다. 유리잔이 벽을 때리며 박살 났다.
“씨발. 내가 이렇게 죽을 줄 알아? 나 곽덕구야!”
그는 술에 젖은 손으로 인터넷을 검색해 보았다. 박재곤 의원이 체포됐다는 기사는 없었다.
“내가 살려면 박재곤밖에 없어.”
그가 부하를 불렀다.
“천 실장.”
“예. 회장님.”
천 실장은 이 부장이나 정 부장처럼 덕구파의 핵심 간부로 활동하는 조직원이다. 그는 곽덕구의 최측근이다.
“천 실장. 네가 박재곤을 만나야겠다.”
천 실장은 멈칫했다.
“하지만 회장님. 제가 박재곤을 만나면 경찰이 따라붙을 수 있습니다. 잘못하면 회장님께도 피해가 갑니다.”
“그럴 때 쓰라고 있는 게 대포폰이잖아!”
◈ ◈ ◈
박재곤은 요즘 매일 화가 났다.
“씨발. 곽덕구 그 새끼는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그는 대포폰을 몇 개 가지고 있다. 그중에는 덕구파가 준 대포폰도 있다.
덕구파의 대포폰은 원래 하나 더 있었다. 그런데 그건 정 부장이 잡혀가자마자 폐기했다.
그가 차에서 예비로 받은 대포폰을 켜보았다.
문자가 하나 들어와 있었다.
[연결하시면 고객님께 쿠폰이 쏟아집니다.]
“뭐 이런 스팸…. 음?”
이 대포폰에 들어온 문자는 이것 하나뿐이었다.
“하필 이 시기에?”
그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 문자가 온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그런 후에 말을 하지 않고 잠시 기다렸다.
상대편의 목소리가 들렸다.
- 박 선생님.
“누구냐?”
- 회장님이 보내셨습니다.
이 대포폰은 덕구파가 준 것이다. 게다가 상대는 박재곤의 성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무작위 스팸 전화라면 우연히 연결될 수는 있어도 성을 알 수는 없다.
“어? 혹시….”
- 예. 맞습니다.
“내가 다시 걸지.”
박재곤이 기사에게 말했다.
“내려.”
“예?”
“내가 운전할 테니까 내리라고.”
“알겠습니다.”
박재곤은 기사를 쫓아내고 승용차를 몰았다. 그러면서 전화를 다시 걸었다.
“이거 추적되는 거 아니지?”
- 물론입니다.
박재곤은 지금 차를 몰고 시내를 돌아다니는 중이다. 게다가 통화하는 휴대폰도 남의 명의로 된 대포폰이다. 이 대포폰으로 통화한 건 지금이 처음이다.
박재곤이 생각했다.
‘누군가 나를 노리고 이 대포폰을 지금 도청하는 건 불가능해. 그러면 말을 좀 구체적으로 해도 되겠는데?’
“회장이 보냈다고?”
- 예.
“젠장.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돼? 숨어만 있으면 장땡이야?”
- 그래서 선생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박재곤이 화를 벌컥 냈다.
“내 도움? 지금 내 발등에 불이 떨어졌어!”
- 상생을 위해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방법이 없겠습니까?
“방법?”
박재곤의 눈이 번뜩였다.
“사실 내가 방법은 찾는 중이야. 그런데 말이야. 복수하고 싶지 않아?”
- 예?
“우리 사업을 망치고 너희를 무너뜨린 놈, 제껴버리고 싶지 않냐고.”
- 아는 게 있으십니까?
◈ ◈ ◈
김수선이 보고했다.
- 선장님. 오늘은 선체에 고장 난 곳이 없어서 제가 시간이 남았습니다.
“그럼 TV 전파로 잡히는 영화나 드라마를 보고 있었겠네.”
- 당연하죠. 그러면서 박재곤이 뭘 하나 추적해봤는데요. 운전기사를 내리게 하고 혼자 차를 몰고 가더군요.
“그래? 어디 또 으쓱한 데 갔나?”
- 그러나 싶어서 계속 추적했는데, 차를 몰고 그냥 돌아다니다가 집으로 갔습니다.
“응? 왜?”
- 저야 모르죠.
“또 뭔가 꾸미고 있나 본데?”
-아마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