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 알바 II
성준호가 침을 꼴깍 삼켰다.
“저기, 나리야. 좀 전에 내가 이야기한 거는 농담이야. 농담. 알지?”
“어머. 그랬구나. 난 또 진담인 줄.”
“원래 회사에서는 빽 쓰고 그러면 안 돼. 하, 하하.”
“퍽이나.”
박서윤은 식당에 들어왔다가 신나리의 옆에 잠깐 앉아서 이야기하고 일어났다. 대화한 시간은 짧았다. 같이 밥을 먹은 것도 아니다.
그런데 회사의 젊은 남자들은 박서윤이 식당에 들어온 후에 곁눈질로 훔쳐보거나 슬쩍 돌아보기라도 했다. 그들이 그 모습을 목격했다.
“무슨 사이지?”
“혹시 학교 후배?”
“친구 동생일지도 모르지.”
신나리는 남들이 궁금해하는 줄도 모르고 밥을 신나게 먹었다.
“떡갈비 맛있다.”
성준호가 맞은편에서 창백한 얼굴로 먹고 있어서 더 맛있었다.
◈ ◈ ◈
오후에 업무를 할당하러 온 젊은 직원이 대놓고 물었다.
“신나리 씨. 박서윤 비서실장님과 아는 사이예요?”
신나리도 대놓고 대답했다.
“친해요.”
“아니, 그런데 왜 알바를….”
“1학년인 제가 정직원을 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아. 물론 저는 제힘으로 뽑혔어요. 서윤 언니 빽 아니에요.”
“그건 압니다. 여러분을 뽑을 때 비서실에서 아무 연락도 못 받았으니까. 저기, 그러면 혹시….”
“궁금한 게 있으신가 보다.”
직원이 조금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남자친구….”
“어머. 비서실장님의 개인 정보를 원하는 거예요?”
직원이 화들짝 놀라며 손을 흔들었다.
“아니요. 절대로 아닙니다. 신나리 씨 남자친구 이야기였, 아니, 그게 아니라 다들 그런 거 궁금해하지 말라고 하는 거….”
직원이 횡설수설하다가 정신을 차렸다. 그는 정색하고 말했다.
“오늘부터 여기 있는 다섯 명 중에 두 명은 사무실에서 일할 겁니다. 일단 신나리 씨는 홍보실.”
다른 알바생이 손을 들었다.
“잠깐만요. 혹시 나리는 비서실장님 빽으로 홍보실에 가는 건가요?”
직원이 손에 들고 있는 표를 반대 방향으로 돌려 보여주었다.
“홍보실에서 어제 열심히 일한 사람을 보내달라더군요. 신나리 씨는 지금 질문한 분과 비교하면 어제 두 배를 일했군요. 그래서 가는 겁니다.”
항의하려고 손을 들었던 알바생이 조용히 손을 내렸다.
“성준호 씨는 문서수발실.”
성준호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래. 나도 편하고 좋은 곳으로 가….’
“아니구나. 문서수발실의 창고.”
“네? 창고에서 무슨 일을….”
“우리 회사 전체에 들어오는 택배나 소포는 물량이 많아서 트럭으로 옵니다. 그걸 받아서 창고로 옮기고, 보낼 때는 다시 창고에서 가져오는 일을 하게 될 겁니다.”
신나리가 옆에서 말했다.
“어머. 힘들겠다.”
“이게 아닌데….”
◈ ◈ ◈
신나리가 홍보실로 가면서 싱글벙글 웃었다.
“나 이제 막 카메라로 사진도 찍고 CG로 편집하고 그러는 건가? 기자한테 막 전화 걸어서, 김 기자님. 기사 내려주세요. 그런 거 하고? 히히히.”
홍보실에서 만난 대리가 물었다.
“신나리 씨는, 선물 포장 좀 해봤어요?”
“네? 네. 잘생긴 오빠한테….”
“그럼 그 잘생긴 오빠한테 선물을 포장하는 마음으로.”
대리가 옆을 가리켰다.
“다 포장해요.”
한쪽에 메모지와 볼펜, 수정 테이프 등이 잔뜩 있었다. 메모지나 볼펜에는 회사 로고가 찍혀 있었다.
선물용 빈 박스도 접힌 상태로 산처럼 쌓여 있었다. 포장지와 테이프, 끈도 준비되어 있었다.
“저건 오빠한테 보낼 선물은 아닌 것 같….”
“백 개쯤 보내면 그중에 잘생긴 오빠가 있을지도 모르죠.”
신나리는 박스를 열심히 포장했다. 받는 사람이 정성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고 해서 공들여 포장지를 접었다.
“이러면 어제 밖에서 일하던 거랑 차이가 없잖아. 어제는 몸이 힘들었는데 오늘은 멘탈이 힘들다.”
그녀가 가방에서 텀블러를 꺼냈다. 선우현이 힘들 때 마시라고 넣어준 토마토 주스가 들어있었다.
신나리가 주스를 한 모금 마셨다. 옆을 지나가던 홍보실 대리가 냄새를 맡고 걸음을 멈추었다.
“잠깐. 그거 뭐예요? 향이 되게 상큼한데?”
“네? 아. 토마토 생과일주스요.”
“설마 그거…. 아니다. 말도 안 되지.”
“네? 그게 뭔데요?”
“아니에요. 맛있어 보이는 토마토 주스를 보니까 엉뚱한 생각이 들었던 것뿐이에요.”
대리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눈을 반짝거리며 신나리를 쳐다보았다.
신나리가 얼른 주스를 쭉 들이켰다.
“캬아. 역시 옥상 오빠의 토마토는 맛있다.”
“다 먹었네.”
“아는 오빠가 준 거라서 남기면 안 돼요.”
“아까 말한 잘생긴 오빠?”
“전혀 아닌데요?”
대리는 입맛만 다시고 걸어가며 말했다.
“나도 토마토 주스나 사 먹어야겠다. 대기업에서 나온 거 먹어야지.”
활토 주스를 먹고 나니 활력이 생겼다.
“얼른 끝내야지.”
그녀가 힘을 내서 작업했다. 포장 속도가 빨라졌다.
선물용 포장은 다시 택배용 박스에 담았다. 그리고 그 위에 미리 출력해둔 주소를 붙이는 작업까지 끝냈다.
그녀가 두 팔을 위로 번쩍 들었다.
“다 했다!”
“그럼 그거 문서수발실에 갖다 줘요.”
“네? 이걸 저 혼자 들고 가요?”
“들고 가는 건 아니고, 혼자 가는 건 맞아요. 저기 있는 화물용 카트를 써요.”
한쪽에 짐을 옮길 때 쓰는 녹색 손수레가 있었다. 평평한 바닥에 밀 수 있는 손잡이가 달린 카트였다.
“저런 게 있으면 할만하죠!”
신나리가 카트에 박스를 가득 쌓고 화물 엘리베이터로 이동했다. 여러 번 다니지 않으려고 쌓을 수 있는 최대 높이까지 박스를 쌓았다.
그렇게 했더니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끌고 가려고 하니 그것도 쉽지 않았다.
그녀가 화물용 카트를 밀면서 옆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렇게 일단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까지 이동했다.
그녀가 버튼을 누른 후에 다시 카트 뒤로 이동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상자에 가려져 엘리베이터 안쪽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고개를 옆으로 살짝 내밀었다. 엘리베이터에 사람의 다리가 슬쩍 보였다. 공간은 충분해 보였다.
“잠시만요! 들어갈게요!”
“응? 설마 나리냐?”
아는 목소리였다.
신나리가 고개를 옆으로 길게 뺐다. 선우현도 고개를 옆으로 빼고 있었다.
“잉? 옥상 오빠? 오빠가 왜 여기서 나와요?”
“나도 네가 왜 여기서 나오는지 궁금하다.”
선우현은 어젯밤에 치킨을 먹을 때 옥상에서 봤던 옷을 그대로 입고 출근했다.
“일단 이거 좀 잡아줘요.”
선우현이 카트 위에 쌓인 상자들을 잡고 엘리베이터에 타는 걸 도와주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마자 신나리가 물었다.
“옥상 오빠가 여기서 뭐 해요? 앗! 설마 서윤 언니한테 일자리 부탁하러 온 거예요?”
“설마 그랬겠냐?”
“하긴. 일하는 거 싫어하지.”
“너는 여기서 뭐 하는 거냐?”
“알바요.”
“스래곤에서?”
“왜, 왜요?”
선우현이 씩 웃었다.
“스래곤 주식은 안 사더니, 스래곤에서 주는 돈은 싫지 않았나 보다?”
“내가 이렇게 놀릴 거 같아서 말 안 한 거예요. 그러는 옥상 오빠는 여기서 뭐 해요?”
“나? 일하지.”
“뻥 치시네. 옥상 오빠가 일이라니.”
“그러게 말이야. 내가 일이라니.”
- 선장님. 일 좀 하시라고요.
엘리베이터가 3층에 도착했다.
“난 간다. 뺑이 쳐라.”
“이미 치고 있어요. 밤에 치킨?”
“오늘은 보족 세트.”
“아싸아. 이따 서윤 언니랑 갈게요.”
선우현이 카트를 빙글 돌려주었다. 신나리가 엘리베이터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래야 내릴 때 카트를 밀 수 있었다.
문이 열렸다. 선우현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신나리는 엘리베이터 안쪽, 상자가 쌓인 카트 뒤에 있어서 밖이 보이지 않았다.
엘리베이터에 세 사람이 탔다. 문이 닫힌 후에 그들이 말했다.
“갑자기 사장님을 볼 줄은 몰랐는데.”
“사장님이신 걸 어떻게 알았어?”
“전에 멀리서 본 적 있거든.”
“난 실제로 본 건 처음이다.”
“웃으면서 가시더라.”
“그냥 실실 웃으시던데?”
“천재의 웃음에는 뭔가 다른 의미가 있지 않을까?”
“예를 들면?”
“신기술이 떠오르셨나?”
“그럴듯한데? 또 뭔가 개발하실지도 모르지.”
그 옆에 있던 사람이 말했다.
“사장님 오시고 나서, 망할 줄 알았던 회사가 살아나고 있어. 천재 한 명이 우리 회사를 캐리하고 있다고. 진짜 대단하지 않냐?”
“쩔지.”
사람들은 1층에서 내렸다. 신나리의 목적지인 문서수발실은 지하 1층에 있었다.
그녀가 지하 1층에서 카트를 밀고 내린 후에 문서수발실로 가면서 말했다.
“이 회사 사장님은 엄청 대단한 사람인가 보다.”
문서수발실에서는 성준호가 일하고 있었다.
“어? 뭐야? 준호 선배는 창고에서 일하는 줄 알았는데?”
“창고에서 여기로 짐을 옮기고 가져가는 것도 내 일이다. 이러려고 실내로 온 게 아닌데.”
“선배네 삼촌이 안 챙겨주나?”
“위에서 알바에게 일 제대로 맡기는지 확인하겠다고 했대. 어? 잠깐. 설마 네가 나를….”
신나리가 두 팔을 X자로 교차했다.
“난 아님. 내가 빽 썼으면 지금 이렇게 나까지 박스를 옮기고 다닐 리가. 백 개나 포장하느라고 죽는 줄 알았는데.”
“아. 그렇겠네.”
신나리가 택배 박스가 실려 있는 카트를 한쪽으로 옮겼다. 여기에 일단 쌓아두면 성준호가 다시 옮겨야 한다.
택배 박스를 같이 내려놓으면서 신나리가 물었다.
“준호 선배. 여기 사장님이 회사를 살리고 있다던데, 진짜야?”
1년 선배라고 말끝에 ‘요’를 붙여주던 건 아까 식당에서 끝났다.
“그거 진짜야. 삼촌한테 들었는데, 여기 사장님은 지금 스래곤을 살리고 있는 신기술을 다 개발한 천재래.”
“와…. 어디 외국에서 평생 연구하다 오신 건가?”
“그건 아닐걸? 되게 젊다더라. 물론 우리보다는 나이가 많지만.”
“토마토나 키우면서 놀고먹는 옥상 오빠는 진짜 반성해야겠다.”
“또 그 옥상 오빠 이야기야? 도대체 무슨 관계야?”
“사람은 착한데 맨날 노는 아는 오빠 있어. 좀 전에 엘리베이터에서 봤거든.”
“아. 그 사람도 스래곤에 다녀?”
“아니. 맨날 논다니까? 심부름 왔나 봐.”
◈ ◈ ◈
박재곤 의원은 그 난리가 났는데도 아직 국회의원직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새도 떨어뜨릴 것 같던 그의 권력은 이제 예전 같지 않았다.
예전에는 4선 의원 박재곤이 필요한 일을 슬쩍 말하면 다들 알아서 움직였다. 심지어 중간 절차를 다 건너뛰고 바로 처리될 때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가 대놓고 말을 해도 잘 먹히지 않았다.
게다가 언론 쪽은 박재곤의 전화를 슬슬 피했다.
박재곤은 아직 국회의원 자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경찰에 체포되지도 않았다.
그건 평소에 다른 사람들과 부지런히 돈을 나눠 먹은 덕분이다.
박재곤이 자폭하면 같이 망하는 정치인이나 정부기관 고위 간부가 여럿 있었다. 그들은 박재곤이 구속되거나 의원직이 날아가는 것만은 막아주었다.
그런데 그것도 박재곤에게 국회의원 배지가 있을 때의 이야기였다.
“제기랄. 이러다 다음 선거에서 떨어지기라도 하면….”
상황은 지금보다 훨씬 더 암울해진다. 최악의 경우에는 꼬리 자르기를 당할 수도 있었다.
“이게 다 스래곤을 집어삼킨 그 새끼 때문이야!”
그가 권력을 쥐고 있을 때는 정치권과 수사기관을 움직여 스래곤을 괴롭힐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 그 힘이 빠졌다.
게다가 스래곤 전임 사장과의 연루설이 파다한 상황에서 무리해서 건드렸다가 잘못되면 뒷감당이 더 어려워진다.
하지만 이대로 넘어가고 싶지 않았다.
“나만 엿을 먹었나? 덕구파도 제대로 엿 먹었잖아.”
덕구파는 스래곤 사건으로 치명타를 입었다. 체포된 이 부장을 제거하려다 실패하면서 이 부장이 입을 열었다.
덕구파는 이 부장보다 아는 게 더 많은 정 부장이라도 제거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것도 선우현이 개입하는 바람에 실패했다.
정 부장은 이 부장보다 더 많은 것을 자백했다.
스래곤 주가조작 현장에서 덕구파 조 과장과 조직원들이 체포됐다. 그곳에는 언론사 기자가 납치되어 있었다.
요즘 수사기관은 작정하고 덕구파를 갈아버리고 있었다. 기자들도 성과가 날 때마다 기사를 크게 써서 힘을 실어주었다.
덕구파는 지금 실시간으로 갈려 나가는 중이다.
두목은 물론이고 간부와 핵심 조직원들도 도망쳐서 숨어 있었다. 그러다 하나씩 체포되곤 했다.
박재곤이 중얼거렸다.
“덕구파 두목을 만나서 스래곤을 집어삼킨 새끼에게 복수하라고 부추겨야겠는데….”
두목은 경찰이 찾는 중이다. 그런데 두목이 너무 완벽하게 숨어서 찾을 수가 없었다.
박재곤도 덕구파 두목과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젠장.일단 찾아야 복수를 시킬 텐데,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