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 분위기 변화
스래곤 주주총회는 금요일 오후 늦게 시작됐다. 그때는 이미 주식 시장이 닫힌 후였다.
주식 시장은 사흘 후인 월요일 아침 아홉 시가 되어야 다시 열린다.
기사를 보고 관심을 가졌지만 당장 주식을 사지는 못하는 사람들이 관련 정보를 검색했다.
주식 관련 인터넷 게시판에 스래곤 이야기가 여럿 올라왔다. 그중에는 정보를 분석해주는 사람도 있었다.
- 스래곤 주총에서 언급됐다는 소형 금속 부품 제조기술 말입니다. 그거 업계에서는 유명한 건데, 굉장히 혁신적인 기술입니다.
- 잘 나가나요?
- 이미 그 기술 라이센스를 받은 회사가 여럿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 국내 회사들이요?
- 외국 회사도 많습니다. 외국 회사에서 들어오는 로열티가 꽤 된다고 들었습니다.
- 그래도 국내 기술인 건 맞지요?
- 그건 맞습니다. JHC 테크에서 기술 라이센스를 공급하거든요.
다른 사람이 댓글로 질문했다.
- 이번에 나온 기술은 독일 교수가 연구했다던데요. 그러면 라이센스가 독일로 가는 거 아닙니까?
- 독일의 뮐러 교수가 연구한 건 소형 금속 부품 제조기술을 베이스로 추가 효과를 붙인 거죠. 게다가 그것도 원래 개발자와 공동으로 연구한 겁니다.
- 그러니까 원래 개발자가 계약 주도권을 가지고 있을 거란 말이지요?
- 제가 구체적인 상황까지는 모르지만, 아마 모든 결정권을 가지고 있을 겁니다.
스래곤 주식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 물었다.
- 그 개발자가 스래곤의 신임 사장이란 거잖아요. 그리고 그 기술로 회사를 살리겠다고 선언했고요.
- 그렇죠. 제가 볼 땐 스래곤은 쉽게 망하진 않을 것 같습니다. 충분히 승산이 있습니다.
- 주식 사야겠네요.
그 답변을 보고 안도하는 사람도 있었다.
- 스래곤 주식 안 팔길 정말 잘했다. 아. 살았다. 다른 데서 손실 본 거 여기서 회복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 과연 주가가 오를지, 오른다 해도 얼마나 오를지는 아무도 모르죠. 주식이라는 게, 호재가 나와도 떨어질 수 있는 거잖습니까?
- 스래곤은 지금 동전주 상태입니다. 설마 동전보다야 오르겠죠.
- 그건 그렇겠군요.
사람들은 신임 사장에 대해서도 검색해보았다.
그런데 선우현에 대해서는 공식적으로 알려진 게 없었다. 회사에서는 인물 정보를 아무것도 공개하지 않았다.
- 이 사람 정체를 모르겠습니다.
대신에 그날 사장 대신에 주주총회를 진행한 박서윤에 관한 글이 많이 올라왔다.
주주총회 기사 중에는 박서윤의 사진이 첨부된 것이 여럿 있었다. 기자가 여러 곳에서 온 덕분에 사진도 다양한 각도에서 찍혔다.
그 사진을 보고 질문이 올라왔다.
- 이분은 도대체 누구십니까? 진정 아름다우십니다.
- 저랑 사귀어 주세요.
- 그건 너무 가혹합니다.
- 영화배우가 주총을 진행한 건가요?
- 이분은 스래곤의 비서실장입니다. 오늘 주총을 진행했습니다. 유능한가 봅니다.
- 무슨 비서실장이 저렇게 젊어요?
- 사장도 젊겠죠.
박서윤의 사진이 뜨면서 그녀에 대한 정보가 좀 더 알려졌다.
- 저분은 길성 기업 최고의 미녀입니다. 길성 비서실에서 근무하는데, 길성 직원들 사이에서는 이미 유명한 분입니다.
- 그런데 왜 지금은 스래곤 비서실장이죠? 스카우트 된 건가?
- 겸직입니다. 길성 비서실에도 계속 근무하고 스래곤 비서실장도 한다더군요.
- 님이 그걸 어떻게 알아요?
- 제 친구가 길성에 다니거든요. 그 친구가 저 사진을 보고 화들짝 놀라면서 전화를 돌리더니, 겸직이라는 말을 듣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더군요.
- 그 친구분이 혹시 저분과 썸을….
- 아뇨. 말도 못 붙여봤답니다.
왜 박서윤이 굳이 두 회사에 동시에 근무하는지 추측하는 글도 올라왔다.
- 이번에 길성에서도 스래곤에 투자했습니다. 그래서 길성에서 인력을 지원하나 봅니다.
- 비서실장으로 보낼 만큼 능력이 뛰어난가?
- 일단 비서실에 근무하니까, 오너끼리 업무 협조하기는 좋겠죠.
박서윤의 실력이 아니라 외모나 다른 쪽에 관심을 가진 사람도 많았다.
- 저런 미녀께서 왜 회사에 다니시는 걸까요? 영화와 드라마로 가셔야지.
- 그러게 말입니다. 영화에서 보고 싶네요.
- 기획사! 일해라!
- 제가 기획사에 근무합니다. 저분의 존재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 그 기획사는 왜 저분을 안 뽑은 겁니까?
- 안 뽑기는요. 저분은 기획사들 사이에서 유명한 사람입니다. 여러 기획사에서 길거리 캐스팅을 시도했는데 모조리 실패했거든요.
- 네? 왜요?
- 연예계는 생각이 전혀 없다더군요.
- 연기가 안 되나?
- 아마 그렇겠죠.
◈ ◈ ◈
선우현은 정식으로 스래곤 사장이 되었다.
그는 첫날 이사들과 각 부서 부장급 직원들을 모아놓고 선언했다.
“난 매일 출근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직원들은 당황했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다른 일도 하는 게 많아서 바쁘거든요.”
- 네? 선장님이요? 바쁘다고요?
박 이사가 물었다.
“그러면 보고를 드릴 때는 비서실장에게….”
“박서윤 비서실장도 내가 나오는 날에만 출근할 겁니다.”
“예?”
“역시 바쁜 분이라.”
- 박서윤은 선장님과 달리 바쁜 게 사실이죠. 두 회사에서 일해야 하니까요. 물론 제가 더 바쁘지만.
선우현이 말했다.
“출근하지 않는다고 해서 눈 감고 있는 거 아닙니다. 지켜보고 있습니다.”
- 제가 위에서 지켜보는 거겠죠. 그래서 제가 제일 바쁩니다.
여기저기서 긴장으로 침 삼키는 소리가 났다.
선우현은 주주총회를 하기도 전에 쳐들어와서 사장과 이사 절반을 날렸다.
그런데 그렇게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 후에, 빈 이사 자리 중 두 개를 내부 승진으로 채웠다. 나머지 이사 자리는 박서윤이 임명된 비서실장을 제외하면 모두 내부 승진으로 채우겠다고 선언했다.
스래곤이 망할 것 같은 때조차도 이사로 승진하는 게 나쁘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제 회사가 살아날 조짐이 보였다.
이럴 때 이사가 된다면, 회사가 정상 궤도에 올랐을 때 꿀을 빨 수 있다.
그래서 부장급들은 긴장 속에서 눈빛을 빛냈다. 부장급의 수가 남은 이사 자리보다 훨씬 많기는 하지만, 그래도 승산이 제법 있었다.
선우현이 말했다.
“아. 그리고, 근무 복장은 자유화합시다. 나도 오늘은 양복을 입었는데, 내일부터는 입고 싶은 대로 입어요.”
이번에는 연구소 김정수 이사가 질문했다.
“복장은 어디까지 허용하실 건지요?”
연구소는 원래 복장이 자유로운 편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사장이 바뀌고 경영진이 날아간 상태라 연구원들도 복장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하와이안 셔츠를 입고 오든 뭘 입고 오든 맘대로 하시죠. 수영복만 빼고. 회사에서 수영복은 선 넘었지요.”
“그, 그 정도로 자유롭게요?”
“난 다음에 추리닝 입고 올 겁니다.”
“완전히 자유롭게 입으라고 하겠습니다.”
김수선이 물었다.
- 굳이 복장 자유화를 지금 말씀하시는 이유가?
“여기 올 때마다 옷 차려입기 귀찮아.”
- 아, 예. 그러시겠죠.
◈ ◈ ◈
박서윤은 선우현이 나오는 날만 스래곤에 출근하기로 했다.
박서윤이 비서실 직원들에게 말했다.
“비서실의 기존 업무는 인원이 충원될 때까지 여러분이 다 처리해야 합니다. 그게 문제가 될까요?”
다른 부서는 직원들은 아무도 잘리지 않고 원래 자리에 그대로 남았다.
오직 비서실만 절반이 다른 부서로 이동 배치됐다. 그들은 전임 사장의 측근이라 정보 유출 위험이 있어 비서실에 둘 수가 없었다.
전임 사장의 최측근으로 주가조작 작전에 직접 개입한 곽 비서는 아예 경찰에 넘겼다.
그 칼바람에서 살아남은 과장이 대표로 대답했다.
“공식적인 비서실 업무만 한다면 지금 인원으로도 처리할 수 있습니다.”
“공식적인?”
“전에는 전임 사장님의 개인적인 지시가 많았습니다. 그걸 안 해도 되면….”
스래곤 비서실장 박서윤이 지시했다.
“알겠어요. 사장님이 안 계실 때도 예전처럼 업무를 진행하세요. 제가 없을 때 급한 보고가 있으면 화상회의로 연락하시고요.”
“알겠습니다!”
◈ ◈ ◈
박서윤은 이튿날은 길성 비서실에 출근했다.
박길성 회장은 박서윤이 길성에서 계속 근무하기를 원했다. 박서윤도 길성을 그만둘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녀의 자리로 비서실 여자 과장이 쓱 다가왔다.
“박 대리. 기사 봤어. 사진 많이 찍혔던데?”
“아. 그거요.”
“처음에는 회사 옮긴 줄 알고 깜짝 놀랐어.”
“저는 여기 계속 다닐 거예요.”
“스래곤 비서실장님이 길성에서는 대리? 이게 맞나 싶은데?”
“놀리지 마세요. 임시로 맡은 거예요.”
“회장님이 스래곤에 투자했다며? 그래서 박 대리가 파견 나간 거야?”
“네. 그래서 그런 거예요.”
길성 비서실장이 지나가다가 박서윤을 보고 말을 걸었다.
“이게 누구신가. 박서윤 비서실장님 아니신가?”
박서윤이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실장님.”
“이제 그냥 김 실장이라고 불러. 같은 비서실장이잖아.”
“그건 그냥 임시로….”
비서실장이 웃었다.
“농담이야, 농담. 스래곤에 쳐들어갔을 때 나도 거기서 회장님을 수행해서 무슨 상황인지 알아.”
그날 박서윤은 그녀가 스래곤의 신임 비서실장이라는 말을 갑자기 듣고 깜짝 놀랐다. 하지만 곧바로 차분한 표정을 연기했다.
스래곤의 이사들은 그 연기를 구분하지 못했다.
하지만 평소에 박서윤을 근처에서 지켜본 길성 비서실장은 그 모습이 연기라는 걸 눈치챘다.
비서실장이 웃으며 자기 자리로 갔다.
박서윤이 다시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이제 일하죠.”
과장도 웃었다.
“네. 박서윤 비서실장님.”
“과장님. 자꾸 그러시면, 부끄러워요.”
여자 과장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와…. 나 박 대리가 이렇게 부끄러워하는 거 처음 보는 거 같아.”
◈ ◈ ◈
스래곤은 이제 소형 금속 부품 제조기술과 그 파생형인 방사능 저항성이 추가된 부품 제조기술을 쓸 수 있다.
회사 내에서 그 두 기술을 스래곤의 어떤 제품에 쓸 수 있는지 검토했다. 필요한 자료는 JHC 테크와 뮐러 교수가 보내주었다.
그 기술 검토를 맡은 사람 중 한 명인 연구소 최 팀장이 김정수 이사를 찾아갔다.
“이사님. 이거 장난 아닌데요?”
이번에 이사로 승진한 사람은 두 명이다. 김정수는 연구소 팀장에서 이사로 갑자기 승진했다.
김정수 이사가 물었다.
“우리 제품에 적용할 수 있겠어?”
“폭넓게 적용할 수 있겠는데요?”
“그 정도야?”
“소형 금속 부품 제조기술이 좋다는 거야 알고 있었는데….”
“방사능 저항성은?”
“뮐러 교수에게 자료를 받아 확인했습니다. 좋던데요. 거기에 기존 차폐막을 덮어씌우면 당연히 저항력을 더 높일 수도 있고요. 그러면 단가는 올라가겠지만요.”
“고객의 요구에 따라 비용은 들어도 저항성을 더 높여줄 수도 있다는 거네.”
“그렇죠. 방사능 오염 지역에 들어갈 장비라면 이 기술이 적용된 제품이 필요할 겁니다.”
“좋구나.”
최 팀장이 물었다.
“그런데 이 기술, 혹시 우리 회사 독점인가요?”
“그건 아니야.”
“좋다 말았네요.”
김정수 이사가 손가락을 두 개 세워 흔들었다.
“하지만 로열티 비율을 다르게 한다더라. 당연히 우리 회사가 혜택을 받는 쪽으로. 그러면 단가가 낮아지고, 그만큼 경쟁력이 생기겠지.”
“당연하죠!”
“그리고 추가 연구 프로젝트를 우리한테 주겠다던데? 거기서 나온 기술은 우리만 쓸 수도 있겠지.”
“그건 누가 주는데요?”
김정수 이사가 위를 가리켰다.
“사장님이 좋은 기술을 구상한 게 있는데, 원리를 대충 알려줄 테니까 잘 만들어보라고 하시더라. 아직은 이론만 있대.”
탐사대 지원기술 중에 뭘 맡겨야 할지는 선우현과 김수선이 찾는 중이다.
아무거나 대충 주면 안 된다. 현재 기술로 구현할 수 있어야 한다. 게다가 선우현이 개발팀에 어느 정도는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탐사대 지원기술 중에 그런 것을 찾으려면 시간이 조금 걸렸다.
최 팀장이 활짝 웃었다.
“사장님이 개발자니까 좋네요.”
“연구소 분위기는 어때?”
최 팀장이 주변을 슬쩍 본 후에 말했다.
“사기가 오르고 있죠. 개발자 사정은 개발자인 사장님이 잘 아실 거라면서 다들 기대가 많습니다.”
“이직을 생각하던 친구들은?”
“계속 근무하기로 했습니다.”
최 팀장이 그 이유를 설명했다.
“사장님이 신임 비서실장님 말고는 전부 내부 승진이라고 하셨잖습니까?”
“나도 그렇게 승진했잖아.”
김정수 이사는 갑자기 승진했다.
최 팀장은 그 자리를 물려받아 팀장이 됐다. 최 팀장의 승진은 선우현이 정식 사장이 된 후에 이루어졌다.
“팀장님이 이사님이 되시면서 저부터 제 아래로 줄줄이 승진했습니다. 빈 이사 자리가 아직 여럿 남았으니까, 앞으로도 승진 기회는 많겠죠.”
최 팀장이 씩 웃었다.
“회사가 망할 거 같으면 승진이 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만.”
“이제는 승진이 의미가 크지?”
“당연하죠. 회사가 살아나게 생겼는데. 잘하면 잘나갈 수도 있는데. 그래서 사람들 의욕이 장난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