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 지원
국회의원 박재곤이 비서에게 물었다.
“기자회견 장소는?”
“말씀하신 호텔 리셉션장을 예약했습니다. 그날 기자들에게 좋은 음식을 제공하게 준비하겠습니다.”
“송 장관은?”
“그 문제를 보고드리려고 했습니다만, 송 장관 쪽에 확인하니 그날은 일정을 맞추기 어렵다고….”
박재곤이 인상을 썼다.
“그 친구가 냄새라도 맡았나? 왜 피하지?”
“그건 아닐 겁니다. 제가 알아봤는데, 정말로 긴급 일정이 잡혔다고 들었습니다.”
박재곤이 어깨를 으쓱했다.
“뭐, 어쩔 수 없지. 중요한 건 발표 내용이니까. 송 장관 대신에 실무자는 누구를 보낸다고 하나?”
“국장급으로 보내겠답니다.”
“그 정도면 됐어. 준비 잘해.”
“알겠습니다.”
비서가 나가려고 하는데 박재곤이 다시 불렀다.
“이번 일만 잘되면 너도 국회의원 배지 달 수 있다. 알지?”
비서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그런데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달랐다.
“보좌관도 있는데 제가 어떻게 먼저….”
박재곤은 일부러 보좌관을 이번 작업에서 배제했다. 보좌관은 나름 실력을 인정받은 사람이라 나중에 구청장이나 국회의원 공천을 받을 확률이 조금은 있었다.
반면에 비서는 보좌관보다 직급이 낮다. 공천은 고사하고 보좌관이 된다는 보장조차 없다.
그래서 박재곤은 보좌관이 아니라 젊은 비서를 이번 일에 끌어들였다.
“누가 너한테 한 방에 배지 달아준대? 앞으로 몇 년 동안 좋은 경력 팍팍 쌓아서 다다음 총선 정도에 달면 돼. 내가 밀어주면 다 돼.”
비서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저는 의원님만 믿고 가겠습니다.”
“당연하지. 며칠 안 남았으니까 실수 없이 잘해라.”
“철저하게 준비하겠습니다!”
◈ ◈ ◈
선우현이 가수 구하니를 만났다. 구하니의 얼굴이 환해졌다.
“어머. 선우현 씨가 이렇게 먼저 찾아주시는 경우는 잘 없는데.”
“용건이 있어서요.”
그녀의 올라갔던 어깨가 살짝 내려갔다.
“아. 용건이 있어야 만나러 오시는구나.”
“뭐, 요즘 좀 바쁘기도 했고.”
“아! 바빠서 못 만난 거네요!”
“뭐, 그렇죠.”
그녀가 신난 얼굴로 물었다.
“무슨 중요한 일인데요? 이번에도 나쁜 놈들을 무찌르는 건가요? 제가 도울 일이 있으면 말씀만….”
“돈 좀 있습니까?”
그녀가 손뼉을 쳤다.
“활동자금이 필요하시구나! 저 돈 많아요!”
“그럼 나한테 투자 좀 해요.”
구하니가 멈칫했다.
“네? 지금 뭐라고….”
“투자. 좋은 건수가 있으니까 팍팍 좀 투자해봐요. 이자는 많이 드릴게.”
“어머. 그런 말은 원래 연예인 중에 귀 얇은 사람을 노리는 사기꾼들이 쓰는 수법인데….”
그녀가 다시 방긋 웃었다.
“저야 뭐 귀가 안 얇으니까.”
“얇던데.”
“옛날에는 귀도 얇고 사람을 잘 믿어서 많이 당했는데요. 비싼 대가를 치르고 교훈을 얻었죠.”
“이번 투자는 진짜 좋은 겁니다.”
“네. 다들 그렇게 말해요. 시간이 얼마나 있어요?”
“며칠 내로?”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와. 갑자기 찾아와서 며칠 내로 투자하래.”
“나도 핵심 정보를 최근에 얻어서.”
“잠깐만요.”
그녀가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이것저것 띄워본 후에 화면을 보여주었다.
“여기 있는 돈 다 투자할게요.”
스마트폰 메모장에 몇 개 항목이 적혀 있었다. 거기 적힌 금액은 억대였다. 다 더하면 50억 원쯤 됐다.
“돈 많네요?”
“제가 단기간에 동원할 수 있는 돈 전부예요. 부동산은 어차피 반쯤 은행 거라 대출받기도 어렵고, 된다 해도 대출이 며칠 내로 나오지는 않아요. 이건 예금이랑 주식이랑 기타 등등에, 전속계약을 담보로 주변에서 끌어올 수 있는 금액 전부예요.”
“전속계약?”
“저랑 계약하고 싶은 곳이 많아요. 그러니까 계약금과 이후 활동 수익을 담보로 걸고 돈을 빌릴 수 있어요.”
“아니, 그건 좀….”
“괜찮아요. 못 갚으면 그 회사에 들어가서 시키는 대로 행사도 뛰고 공연도 하고 방송출연도 해야 하지만, 갚으면 돼요.”
구하니는 예전에는 그렇게 살았다. 그런데 목이 회복된 후로는 활동을 줄이고 좀 더 자유로운 인생을 산다.
전속계약을 하면 다시 예전 생활로 돌아가야 한다.
“부담 팍팍 되네요.”
“그러니까 잘해요.”
“그런데 내 말만 듣고 그걸 다 투자한다? 귀가 안 얇다더니?”
구하니가 작게 웃었다.
그녀는 예전에 교통사고를 가장한 습격을 당했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 기절하면서 목을 다친 기억이 흐릿하게 있는데, 지금 목에는 흉터 하나 없다.
게다가 그날 이후로 그녀는 더 예전 사고의 후유증으로 잃어가던 목소리를 되찾았다. 그냥 되찾은 것도 아니고 스무 살 때의 목소리로 돌아갔다.
그날 차에서 기절한 구하니를 구해준 사람이 선우현이다.
‘그때 선우현 씨가 나한테 뭔가 했을 거야.’
처음에는 막연한 짐작이었다. 그런데 선우현은 나중에 활력 토마토도 생산하고 R 크림도 만들어냈다.
‘선우현 씨는 천재 과학자야.’
예전에 했던 짐작은 이제 확신으로 바뀌었다.
‘목을 다친 기억은 내 착각일 수 있어. 그런데 목소리가 돌아온 건 착각이 아니야. 선우현 씨가 그때 내 목을 치료해준 거야.’
그것만 해도 고마운데, 선우현은 그 후에도 그녀를 여러 번 구해주었다.
그런 선우현이 좋은 상품이 있다고 투자하라고 했다. 구하니가 말했다.
“저는요. 선우현 씨가 하는 일은 뭐가 됐든 다 믿어요. 그러니까 이자 많이 챙겨줘요.”
“이자에 더해서 활토와 R 크림을 충분히 챙겨주면 어때요?”
“어머! 좋죠!”
◈ ◈ ◈
선우현은 배우 남미연을 영화 촬영장에서 만났다.
촬영장 한쪽에 마련된 간이 테이블에 두 사람이 마주 앉았다. 오늘 영화 촬영에 참여하는 엠투는 남미연의 옆에 앉아서 그녀가 주는 간식을 먹고 있었다.
구하니가 정상급 가수라면 남미연은 정상급 배우다. 게다가 활동 기간은 남미연이 훨씬 더 길다.
선우현이 물었다.
“돈 좀 있습니까?”
그녀가 손가락 끝으로 입술을 가리며 말했다.
“어머. 나 남미연이에요. 나 돈 많아요. 진짜 많아요.”
“그럼 나한테 투자해요.”
“얼마나?”
“많이.”
남미연이 엠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흰둥이를 나한테 넘겨준다면 투자할 수도 있는데?”
“엠투는 거래 대상이 아닌데.”
“쳇. 씨도 안 먹히네.”
그녀가 툴툴대다가 물었다.
“언제까지 필요해요?”
“며칠 내로?”
“급하네요.”
“상황이 좀 급하게 돌아가서. 얼마까지 쓸 수 있습니까?”
남미연이 머릿속으로 간단히 재산 상황을 정리해보았다.
지금 선우현에게 필요한 건 그녀의 전 재산이 아니라 당장 끌어올 수 있는 자금이다.
“이것저것 다 끌어모으면 100억?”
“귀한 투자자님이시네!”
“뭐래. 아직 투자한다고 안 했어요. 어디에 쓰려고 그래요?”
“주식을 좀 사려고요.”
그녀가 손끝으로 입술을 가렸다.
“어머. 내가 힘들게 번 돈을 주식으로 다 날려 먹게요?”
“그런 거 아닙니다만?”
“뭐, 괜찮아요. 가져가요.”
“응? 이상할 정도로 쉽게 동의하는데? 날 그렇게 믿습니까?”
남미연이 씩 웃었다.
“어머어. 믿죠. 당연히 선우현 씨를 믿어요.”
“아닌 것 같은데?”
“활력 토마토와 R 크림을 더 믿지만요. 그 가치는 100억이 문제가 아니잖아요?”
“역시 남미연. 계산 확실하네요.”
“이 바닥에 오래 있으면서 험한 꼴을 하도 많이 봐서 그래요. 물론 조건이 있어요. 나한테도 100억은 굉장히 큰돈이니까요.”
“말해봐요.”
그녀가 검지를 하나 세워 선우현을 가리켰다.
“내 투자금 100억 날려 먹으면, 앞으로 평생 내가 먹을 활력 토마토와 바를 R 크림을 떨어지지 않게 선물해 줘요.”
“와우. 평생이라. 정말 긴 기간을 설정하네요.”
“뭐, 평생 걱정 없이 그 두 가지를 쓸 수 있으면 난 100억을 날려 먹어도 괜찮으니까. 돈이야 또 벌면 되는 거고, 이미 벌어놓은 것도 많아요.”
“안 날려 먹을 겁니다.”
“안 날려 먹어도 좀 챙겨줘요. 이자 대신 그 두 가지로 줘도 되고.”
“이자는 당연히 주고 추가로 활토와 R 크림을 좀 챙겨드리지.”
“거래 좀 할 줄 아시네! 내 100억은 이제 선우현 씨 거예요.”
“투자받는 거라니까요. 원금도 돌려줄 겁니다.”
남미연이 배시시 웃었다.
“난 그거 망해도 괜찮은데. 보상이 더 좋으니까.”
“어허.”
남미연이 물었다.
“그런데 진짜 궁금하네. 활토나 R 크림 중 하나만 대량생산하거나 기술을 공개해도 나한테 이런 제안을 할 필요 없잖아요. 돈 진짜 많이 벌 텐데, 왜 안 해요?”
그럴 수가 없다.
둘 다 레드 포션이 원료에 포함되어야 한다. 그러니 다른 회사에 기술을 팔 수도 없고 대량생산도 불가능하다.
“그거 만들려면 정성이 많이 들어가야 해서 대량생산은 못 합니다.”
김수선이 한마디 했다.
- 자원을 쥐어짜서 정성 대신 레드 포션을 집어넣는 건 접니다만?
선우현이 남미연에게 말했다.
“그 100억, 잘 불려줄 테니까 기대해요.”
“다 날려 먹고 평생 나한테 갚게 되라고 고사 지내야지.”
◈ ◈ ◈
선우현이 길성 기업의 회장 박길성도 만났다.
박길성에게는 돈을 직접 빌리려고 온 건 아니다. 대신에 다른 제안을 했다.
“좋은 투자처가 있습니다.”
박길성이 말했다.
“선우현 씨만큼 좋은 투자처는 없는데 말이지.”
“저한테 직접 해도 되는데, 그것보다는 백기사 좀 하시죠.”
“백기사라…. 그럼 대가는?”
“투자가 성공하면 길성 기업도 돈을 많이 벌 겁니다.”
박길성이 잠시 생각해 보았다.
‘어느 회사 경영권에 개입하려나 본데.’
그가 아는 선우현은 아직도 한계를 모를 정도로 놀라운 사람이다.
‘그러면 백기사 역할을 위해 끌어들인 지분은 서윤이에게 맡길까?’
그가 선우현을 보았다.
‘이 사람이 직접 추진하는 일이니까 이번에도 대성공하겠지. 그래. 지금부터 서윤이를 위해서 사전작업을 해둬야겠어.’
박길성이 마음의 결정을 내리고 조건을 슬쩍 추가했다.
“선우현 씨가 우리 박서윤 대리한테 신경 좀 써주면 좋겠는데. 같은 건물에 산다면서.”
“항상 신경 쓰고 있습니다.”
박길성이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요? 그럼 어떤 투자처인지 이야기를 좀 들어볼까?”
“당연히 비밀로 하셔야 합니다만.”
박길성이 소리 내어 웃었다.
“두말하면 잔소리지요. 내 입으로 소문냈다가 들키면 활토를 다시는 못 먹게 될 테고, 그러면 나만 망하는 건데.”
◈ ◈ ◈
선우현은 전호 호텔 사장 전상미도 만났다.
전상미가 반가워했다.
“앗! 선우현 씨. 도와주러 오신 거예요? 드디어 내 브레인이 되시나요?”
“뇌는 상미 씨 뇌를 쓰셔야지.”
“내 뇌는 전쟁을 치르느라 너무 써서 이제 다 타버렸어요. 도와줘요.”
“경영권 싸움이라면 전준형 정도는 이길 수 있을 텐데?”
전상미가 씩 웃었다.
“전준형은 이제 내 상대가 아니에요. 이 사태를 해결할 명분은 나한테 있고, 전호 호텔의 놀라운 실적 상승은 강력한 무기가 됐죠. 고마워요.”
“그러면 전준성이 문제겠네요.”
“맞아요. 전준성까지 상대하는 건 쉽지는 않아요. 질 것 같지는 않지만, 방심할 수 없는 상대죠. 그래서 힘들어요.”
선우현이 물었다.
“그러면, R 크림이 좀 있으면 싸움이 편해지려나?”
전상미가 손을 흔들며 피식 웃었다.
“에이. R 크림을 어떻게 손에 넣어요. 그건 태양 백화점에서 독점 판매하는 거잖아요. 태양이 백화점 업계의 태풍이 된 게 활토와 R 크림 덕분인데, 그 좋은 걸 우리한테 넘겨줄 리가 없…. 어?”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잠깐만요.”
활력 토마토를 구하는 경로는 두 개다. 하나는 JHC 테크 최종훈 사장을 통해 인맥으로 구하는 것이다.
인맥과 상관없이 돈을 주고 사는 경로는 하나뿐이다. 태양 백화점에서 가끔 이벤트로 판다.
그런데 그 활력 토마토를 선우현이 전호 호텔에 공급하고 있다. 수량은 VIP 스위트룸 고객에게만 팔 수 있을 만큼으로 제한됐지만, 그것만으로도 강력한 무기가 됐다.
태양 백화점을 업계의 태풍으로 만들어준 독점 상품은 하나가 더 있다. R 크림이다.
여자들에게는 활력 토마토보다 R 크림이 가지는 영향력이 훨씬 더 크다.
그런데 활력 토마토를 만든 사람이 선우현이다.
전상미가 침을 꼴깍 삼키며 물었다.
“혹시 R 크림도 선우현 씨와 무슨 관계가….”
“그것도 내가 만든 거라서.”
전상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대박! 혼자서 활토에 R 크림까지 개발했어! 정체가 천재세요?”
선우현이 제안했다.
“R 크림을 좀 공급할 테니까, 전호 호텔에서 고객 피부관리용으로 쓰는 건 어때요?”
“VIP 스위트룸….”
“일반 객실까지 확장해서.”
“지, 진짜요?”
활력 토마토는 한 사람이 하나를 먹어야 제 효과를 본다. 현재 전호 호텔이 받는 물량으로는 VIP 스위트룸 고객에게만 제공할 수 있었다.
그런데 R 크림은 다르다. 크림은 한 통으로 여러 번 바를 수 있다. 수량만 충분하다면 일반 객실 고객도 피부관리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
전상미가 선우현을 향해 두 팔을 내밀었다.
“선우현 씨. 나 진짜 반해도 돼요?”
“안됩니다.”
“왜요!”
“그냥 갈까 보다.”
“아니에요! 안 그럴게요!”
“볼 때마다 그러던데.”
“볼 때마다 놀라게 하니까 그러죠.”
선우현이 물었다.
“그 정도면 전준형이나 전준성과의 경영권 싸움에서 유리해지겠습니까?”
“유리? 아니요. 아무도 날 막을 수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