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 정 부장
선우현이 피자를 먹으며 인터넷을 검색했다. 그러느라 먹는 속도가 느려졌다.
전호 호텔 전상미 사장은 모든 역량을 동원해 기사를 내보냈다. 덕분에 기사가 쏟아져 나왔다.
전준형 부회장 쪽에서도 반박 기사가 나왔다.
하지만 그들은 전준형과 사설 용병팀이 긴급체포되는 바람에 상황 파악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반박 기사의 화력은 전호 호텔 쪽이 압도적으로 강했다.
“전상미 사장은 곧바로 전쟁 돌입이네. 그것도 전면전으로.”
- 추진력이 꽤 강하군요.
선우현이 손을 내밀었다.
“나리야? 스톱. 마지막 한 조각은 왜 손을 대니? 피자는 한 사람당 두 조각씩인데?”
“엠투는 한 사람이 아니잖아요.”
“멍!”
“엠투도 두 개 먹었어. 그거 내 거야. 내려놔.”
“쳇. 폰 보고 있을 때를 노렸는데.”
◈ ◈ ◈
덕구파 정 부장은 아직 저녁도 먹지 못했다.
그는 부하들이 전상미를 납치해 전준형 부회장에게 넘긴 일을 수습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전준형의 대포폰이 꺼져 있어서 연락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전준형의 개인 휴대폰에 전화할 수는 없다. 지금 시점에서 전화하면 일이 틀어졌을 때 유력한 증거를 경찰에 갖다 바치는 꼴이 된다.
“환장하겠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정 부장은 느긋하게 TV를 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아직도 전상미가 전준형에게 붙잡혀 있는 줄 알았다.
전준형과 정 부장의 커넥션을 일부나마 아는 부하가 말했다.
“그래도 전상미 사장은 자기 동생인데, 설마 죽이진 않을 겁니다.”
정 부장이 고개를 흔들었다.
“옛날 역사에는 말이야. 왕자가 권력을 위해 형제를 죽이는 일이 드물지 않았어. 재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떻게 알아?”
부하가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부장님. 그러면 혹시 이번 일이 잘못되면 저희한테도 피해가….”
정 부장이 얼굴을 구겼다.
“피해?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냐? 잘못하면 우린 다 죽어.”
“헉!”
TV 기자회견을 아직 보지 못한 정 부장이 구긴 얼굴을 조금 풀면서 말했다.
“그래도 전준형 부회장이 일을 그 지경으로 키우진 않겠지. 전상미 사장을 협박하던 뭘 하던, 이번 일이 커지지 않게 덮을 돈과 권력이 있잖아.”
“그건 그렇습니다.”
정 부장이 국회의원 박재곤을 떠올렸다. 그는 전준형이 박재곤과도 커넥션이 있다는 걸 안다.
‘박 의원은 이 부장 일에는 손을 쓰지 않으려고 했어. 그렇지만 전준형이 사고를 친 건 수습하려고 하겠지.’
정 부장이 머리를 굴렸다.
‘가만. 그러면 거기 이 부장을 끼워 넣으면?’
쉽지는 않지만, 계획대로만 되면 이 부장을 살릴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전상미 사장에게 문제가 생겼는데 이 부장까지 죽이면 일이 더 커져. 박 의원이 이 부장을 빼내지는 못해도, 처벌을 가볍게 해줄 수는 있겠는데?’
정 부장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러면 이 부장도 입을 열 리가 없잖아.’
그가 환한 얼굴로 말했다.
“차라리 잘 됐다!”
“예?”
“이번 일을 이용하면 이 부장을 살릴 수 있겠어.”
“어떻게….”
“전준형 부회장은 재벌이야. 지금은 그룹이 쪼개졌지만 그래도 힘이 상당히 남아 있어. 전상미 사장을 상대로 무슨 짓을 벌이든 수습은 하겠지. 거기에 이 부장을 끼워 넣어서 살린다.”
이 부장이 살아야 정 부장도 같은 일을 당했을 때 살 수 있다. 그래서 정 부장은 이 부장을 살리려고 노력했다.
부하의 표정도 밝아졌다.
“역시 부장님은 최고의 전략가이십니다.”
정 부장은 마음이 조금 놓였다. 배가 이제야 고파졌다.
“여기 먹을 거 좀 있냐?”
부하가 얼른 대답했다.
“당장 배달시키겠습니다.”
“일단 컵라면이라도 가져와. 배달도 시켜라. 중국요리로 쫙 깔아. 이제부터 이 부장도 살리고 우리도 사는 복잡한 기획을 해야 하니까 술은 빼고.”
“예!”
잠시 후에 뜨거운 물을 부은 컵라면 하나가 정 부장의 앞에 놓였다. 정 부장이 젓가락을 뜯으며 말했다.
“야. 너무 조용하니까 좀 그렇다. TV라도 켜라.”
“예!”
부하 하나가 얼른 리모컨으로 TV를 켰다.
정 부장이 컵라면의 면을 젓가락으로 조금 풀어주었다. 그런 후에 한 젓가락을 집어서 들었다. 하얀 김이 올라왔다.
“그래. 살아있어야 이런 것도 먹는 거지.”
그가 면발에 입김을 후후 분 후에 면을 입에 넣었다.
TV에서 광고가 나왔다. 부하가 얼른 채널을 돌렸다.
그 채널에서는 전호 호텔 전상미 사장의 인터뷰가 나오고 있었다.
얼굴에 피멍이 든 전상미가 얼굴 전체에 심하게 멍이 든 남녀 비서와 함께 서 있었다.
전상미가 강한 눈빛으로 카메라를 보며 연설하듯 말했다.
“이 사건과 관련된 모든 범죄를 명명백백히 밝히고! 범죄자 전원이 합당한 처벌을 받을 때까지! 저와 전호 호텔, 전호 그룹의 모든 것을 걸고 싸우겠습니다!”
바로 밑에 자막이 떴다.
[전호 그룹 전준형 부회장 긴급체포]
정 부장의 입에서 라면 면발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손에 든 컵라면도 탁자 위에 툭 떨어졌다.
정 부장이 창백해진 얼굴로 말했다.
“우린 다 뒈졌다.”
◈ ◈ ◈
전호 호텔 전상미 사장이 공개한 증거 중에는 전준형 부회장이 그녀를 납치해 죽이려 했다는 걸 암시하는 장면이 있었다.
전준형이 금고 앞에서 소리 지른 건 초소형 녹음기로 목소리만 녹음됐다.
[아니야! 손가락은 정말로 자르라고 한 게 아니라고! 그냥 겁만 조금 준 거다!]
그 음성이 자막으로 떴다. 그러면서 복면을 쓴 놈이 이 비서의 손가락에 칼을 대는 영상이 모자이크되어 나왔다.
전상미는 세 사람 다 죽을 뻔했다고 주장했다. 그 장면을 본 시청자들은 전준형이 그 일을 지시했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방송에는 모자이크된 것이 공개됐지만, 경찰에는 선명한 영상이 그대로 제출됐다.
그 외에도 TV나 인터넷에 공개하거나 경찰에 제출한 증거가 많았다.
전준형은 전호 그룹의 계열사를 절반 가까이 지배하고 있는 부회장이다. 돈이 많고 권력과 가깝다.
그런데 이번에는 상대도 같은 전호 그룹 출신인 전상미 사장이다.
이번 사건에는 전준형의 인맥과 돈이 제대로 먹히지 않았다. 전준형 쪽에서는 평소처럼 덮으려고 했지만 덮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전준형의 인맥과 돈이 먹히는 곳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전준형이 긴급 체포된 상황에서 변호사를 따로 만났다. 그들의 대화를 듣는 사람은 없었다.
“박 변. 날 빨리 여기서 빼내. 이대로는 대응이 너무 늦어. 내가 나가서 처리해야겠어.”
“그게, 부회장님. 전상미 사장 측에서 TV 기자회견은 물론이고 각종 뉴스를 폭격하듯이 퍼붓고 있어서….”
“그걸 해결하라고 박 변한테 돈을 주는 거잖아! 돈이든 인맥이든 내가 상미보다 훨씬 더 많아!”
“하지만 여론이….”
“젠장. 그놈의 여론! 여론도 돈이 있으면 바꿀 수 있어! 장사 한두 번 해봤어? 나한테 유리한 뉴스를 뿌리고 댓글 대응팀도 투입하란 말이다!”
“시간이,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루 이틀만 여기 계시면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서….”
“그 사이에 상미가 무슨 짓을 얼마다 더 할지 알고!”
전준형이 화를 냈지만 그렇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다.
“준성이는? 상미의 공격에 어떻게 대응하고 있어?”
전준성은 전준형의 친동생이다. 전상미처럼 어머니가 다른 것도 아니다.
“그게…. 전준성 부회장님이 연락이 되지 않습니다.”
전준형은 살짝 긴장했다.
“뭐?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거야? 전상미가 기습했나?”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전준성 부회장 측 분위기는 차분합니다.”
“그럼….”
변호사가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연락을 피하는 게 아닐지….”
전준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준성이 이 새끼. 혹시 딴생각하는 거 아니야?”
◈ ◈ ◈
덕구파 정 부장이 탄식했다.
“이 부장 명줄이 더 줄어들겠구나.”
그런데 지금은 그걸 걱정할 때가 아니다. 정 부장이 목을 만졌다.
“이제 내 명줄도 간당간당해. 두목이 나를 제거해서 내 입을 막기 전에, 방법을 찾아야 해.”
정 부장이 심각하게 궁리했다.
“어떻게 해야 나 혼자라도 살 수 있지?”
◈ ◈ ◈
이튿날 선우현이 안성준 형사를 만났다. 안 형사가 물었다.
“이번 전호 그룹 사태 말입니다. 선우현 씨의 작품입니까?”
“아니, 안 형사님은 왜 그런 일만 있으면 날 의심합니까?”
“누군가 혼자서 맨손으로 무기를 든 다섯 명을 순식간에 제압했다고 들었으니까요. 그래서 선우현 씨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니시라면, 제가 실례를 했나 보군요.”
“물론 내가 한 거 맞긴 합니다.”
“네? 아, 네. 그럴 줄 알았습니다.”
“아는 사람이 칼 맞게 생겼는데 구경만 할 수는 없으니까.”
안성준이 물었다.
“전호 그룹 내부에서 전면전이 벌어졌는데, 거기 개입한 건 아니고요?”
“아니, 사람을 어떻게 보고.”
“하하. 그건 농담입니….”
“우리 집 개가 전호 호텔 CF를 찍었습니다.”
“네?”
“아직 출연료가 입금도 안 됐는데 그냥 놔두면 CF 찍은 호텔이 망하게 생겼더군요. 그래서 전상미 사장한테 그냥 전준형 부회장이 무슨 짓을 했는지 정도만 가르쳐줬습니다. 전면전은 전상미 사장이 하는 겁니다.”
“아…. 결국 다 개입하셨네요. 전상미 사장은 그 현장에서 증거도 다 확보했던데, 그럼 그것도….”
“아니라니까요. 나 그런 사람 아닙니다.”
“아, 예. 공식적으로는 아닌 거로 하겠습니다.”
안성준이 삼겹살을 뒤집으며 말했다.
“저번에 선우현 씨가 잡은 덕구파 이 부장 말입니다.”
“그 일도 나부터 의심하고 말이야.”
“그건 선우현 씨가 한 거라면서요.”
“의심 잘했다고요.”
안성준이 조금 굳어진 얼굴로 말했다.
“덕구파 이 부장이 오늘 살해당할 뻔했습니다.”
“음? 그놈은 지금 경찰 손에 있을 텐데요?”
“그때 선우현 씨한테 하도 맞아서 구치소 의무실에서 치료받는 거로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병원 통원 치료를 한 번씩 하는데, 오늘이 그날이었습니다.”
“이 부장이 외부로 나와 경계가 약해질 때를 노렸네. 그런데 살인이 아니라 자살로 위장해야 했을 텐데요?”
“병실에서 뛰어내린 거로 처리하려고 했더군요.”
“상황이 불리해지니까 전준형이나 덕구파에서 서둘러 자살로 처리하려다가 실패했군요. 그러게 사람을 처리하려면 준비를 철저히 하고 했어야지.”
“예?”
“아니, 범죄자들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그렇다는 겁니다. 수사는 원래 범죄자들의 생각을 알아야 하는 거 아닙니까? 드라마에서 보면 그러던데.”
“아, 예. 그런 방법도 있죠.”
“어쨌든 이 부장 자살 조작 건은 내가 개입한 거 아닙니다.”
“하하. 당연하지요.”
“그런데 그러면, 이제 이 부장이 입을 열 수도 있겠군요.”
안성준 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 담당 사건은 아니라 직접 만나본 건 아니지만, 아마 배신감을 엄청나게 느꼈을 겁니다. 그러니까 조금만 달래면 입을 열 겁니다.”
“그럼 덕구파는 마음이 더 급해져서 다른 리스크라도 줄이려고 하겠군요.”
“다른 리스크라니요?”
선우현은 정 부장이 한강 근처에서 휴대폰에 대고 질렀던 소리를 떠올렸다.
[전 회장이 어디로 데려갔어?]
[그걸 알아야지 왜 몰라! 야 이 새끼들아! 그러다 나랑 너희들까지 다 뒈져!]
“덕구파에 정 부장이라고 압니까?”
“알지요. 덕구파에서 머리 쓰는 일을 많이 맡는 놈입니다.”
“그럼 정 부장은 아는 것도 많겠군요.”
“그렇겠지요?”
“덕구파가 전호 그룹의 일에 깊게 개입했으니까, 상황에 따라서는 두목도 감옥에 갈 수 있을 겁니다.”
“맞습니다. 그게 수사팀의 목표입니다.”
“예를 들면, 정 부장이 이번 일로 체포되면 두목까지 위험해진다면 말입니다. 두목은 그 리스크를 줄이고 싶겠지요. 이미 이 부장에게 한 것처럼.”
“어? 설마…. 덕구파 두목이 정 부장까지….”
“고기 남았는데 아깝네.”
선우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시다.”
“어디로….”
“정 부장 잡으러요.”
“하지만 정 부장은 대포폰을 씁니다. 어디 있는지 어떻게 알고 잡으러 갑니까?”
“짐작 가는 데가 있습니다.”
김수선이 지원위성에서 말했다.
- 선장님. 짐작이 아닌데요?
“수선아. 네가 위에서 다 내려다보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잖아. 그놈 지금 어디 있냐?”
- 정 부장은 사무실에서 주택으로 이동했습니다. 안전가옥으로 판단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