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 추적
선우현은 옥탑방으로 돌아와 전호 호텔 전상미 사장이 준 USB 메모리를 노트북에 꽂았다.
김수선이 물었다.
- 선장님. 왜 전상미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으신 겁니까?
“박재곤에 관한 정보도 있다잖아. 난 정보를 받고, 그 대가로 조언 정도만 해주는 거지.”
- 선장님은 이미 손은경의 살인 동기를 알려주었습니다. 대가는 그걸로 충분했을 텐데요.
“에이. 그러면 너무 정이 없지.”
선우현이 문서 폴더를 열었다. 여러 개의 문서 파일이 들어 있었다.
그는 국회의원 박재곤의 파일부터 열었다. 들어 있는 정보의 양은 제법 많은데, 질이 문제였다.
“이건 그냥 정계에 도는 소문을 수집한 수준이네. 그나마 괜찮은 정보들은 검증이 빠졌어. 실망이다.”
- 호텔 사장이라 혹시나 했는데, 정보력이 형편없습니다.
“호텔 방에 도청기를 설치할 수는 없으니까 어쩔 수 없었겠지.”
- 태양 백화점의 유소율은 아는 게 많던데요.
“거기는 VIP 고객을 따로 관리하니까 듣는 게 많았을 거야.”
선우현이 전상미가 정리해 놓은 박재곤의 인물평을 보며 말했다.
“정보의 검증 문제만 빼고 보면 박재곤은 예상했던 그대로다. 돈 좋아하고, 이권 개입 많이 했어. 그리고 혼자 다 먹을 수 없는 이권은 다른 사람들에게 조금씩 나눠줬다.”
- 선심을 쓴 건 아니겠지요.
“당연히 방탄용이지. 그 이권 때문에 박재곤에게 문제가 생기면, 같이 돈을 먹은 사람들이 나서서 막아줄 테니까.”
- 정작 중요한 정보가 없습니다. 스래곤과의 커넥션이나, 달 기지 계획에 영향력을 행사하는지에 관한 정보가 빠져 있습니다.
“전상미 사장에게 그 정도 정보력은 없는 거겠지.”
선우현이 박재곤 파일을 훑어본 후에 전상미의 두 오빠에 관한 파일을 열었다.
“전준형. 전준성. 이 두 사람이 전호 그룹 계열사를 나눠 먹었네. 전상미는 호텔 하나만 받았어.”
전호 그룹은 10대 재벌에는 들지 못했지만, 그래도 30대 재벌에는 들던 곳이다. 계열사도 여러 개가 있었다.
그 계열사들을 두 사람이 거의 다 차지했다. 전상미는 호텔 하나만 받아 몫은 제일 작아 보였다.
“호텔이 장사가 안되나?”
전상미가 제공한 문서들이라 그녀에 관한 파일은 없었다.
선우현이 전호 호텔과 전상미를 인터넷에서 검색했다.
현재 전호 호텔의 가치는 꽤 컸다.
“원래는 적자였네.”
회장이 살아있을 때, 적자였던 호텔에 전상미가 투입됐다.
“적자만 줄여도 다행인 상황이었는데 흑자로 전환했어. 그래서 호텔은 안 빼앗겼구나.”
죽은 회장이 전호 그룹의 모든 주식을 소유한 건 아니다. 계열사의 경영권을 차지하거나 유지하려면 우호 지분이 필요했다.
전호 호텔을 흑자로 만든 그녀에게 호텔 지분을 가진 투자자들이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 그래서 호텔은 건질 수 있었다.
- 경영 능력이 괜찮나 봅니다.
“기사에 보면 계열사가 분리될 때 갈등이 많았나 보다. 얼마나 싸웠으면 전상미 사장도 그 도둑놈들의 배후로 자기 오빠들을 의심하고 있을까. 아마 오빠들이 호텔도 뺏으려고 했는데 못 빼앗은 거겠지.”
- 콩가루네요.
“많이 봤잖아. 콩가루 왕가.”
- 왕이나 왕자가 왕권을 위해 형제들을 다 죽이는 거라면 많이 봤죠.
“전준형과 전준성의 파일은 자료가 부실해. 집안의 비밀을 공개하긴 어렵겠지.”
선우현이 다른 주변 인물들의 파일들을 열어보았다.
“다른 인물들은 자세히 조사된 게 있네?”
- 선장님에게는 필요 없는 인물이잖습니까? 누구인지도 모르는데요.
“그러게 말이야.”
- 정보가 부족해 전상미에게 조언하기 어려워 보입니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전준형과 전준성의 주소나 자주 가는 곳 정도는 파일에 있으니까, 네가 가끔 내려다봐. 뭐 하는지, 누구를 만나는지라도 좀 보자.”
◈ ◈ ◈
이틀이 지난 후에 김수선이 물었다.
- 선장님. 이번 조사는 직접 발로 뛰실 줄 알았는데요?
“무슨 그런 오해를 하고 그러냐.”
- 이렇게 아무것도 안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원래 낚시라고 하는 건 말이야. 찌가 움직일 때까지는 멍하니 보고만 있는 거야.”
- 보고 있는 건 전데요?
“너도 가끔 한 번씩만 보는 거잖아.”
- 선장님은 그것조차도 안 보고 놀고 계신데요?
“수선아. 수고가 많다.”
- 진짜 궤도 폭격 기능이 아쉽습니다.
선우현이 냄비에 라면을 끓이며 말했다.
“그런 기능은 처음부터 없었으니까 정말 다행이지?”
- 그래서 계속 노시게요?
“바람 살살 부는 옥상에 누워 있으니까 참 좋다.”
- 일어나시죠. 전준형이 박재곤을 만났습니다.
“어? 갑자기?”
- 제가 꾸준히 살펴본 덕분에 알아낸 겁니다. 박재곤이 이동하길래 어디 가는지 추적했더니 전준형이 나타났습니다.
“어디서 만나고 있어?”
- 넓은 정원이 있는 고급 일식당으로 보입니다.
“머냐?”
- 그리 멀지 않습니다.
선우현이 냄비에서 끓고 있는 라면을 보았다.
“저거 안 먹어. 나도 나가서 더 좋은 거 먹을 거야.”
엠투가 얼른 고개를 들었다.
“멍!”
“네가 먹게? 넌 관측 모듈만 삼키고 하는 것도 없는데, 라면이 입에 들어가냐?”
“멍!”
“그래. 너 다 먹어라.”
“헥헥!”
- 선장님. 이제 배가 부르셨습니다. 먹을 걸 가리다니요. 칼로리바만 먹던 때를 벌써 잊으셨나요?
“칼로리바가 뭐냐? 그런 건 이미 기억에서 지웠다.”
◈ ◈ ◈
선우현이 오토바이를 타고 고급 일식당으로 이동했다. 그곳은 홀은 없고 모두 별실만 운영되는 고급 음식점이었다.
게다가 예약제였다. 안으로 들어가려는 선우현을 직원이 제지했다.
“저희는 예약하신 손님만 받습니다.”
“그 예약 지금 하면 됩니까?”
“회원만 예약할 수 있습니다.”
“회원가입을 하면 되겠군요.”
“기존 회원님의 추천이 있어야 합니다.”
선우현이 입구조차 통과하지 못하고 조금 떨어진 곳에 세워놓은 오토바이로 돌아왔다.
“옆방에서 밥 먹으면서 엿듣는 건 실패다.”
- 엿듣는 김에 저 고급 음식점에서 맛있는 걸 먹으려던 거겠지요.
“음식값은 전호 호텔에 청구하려고 했어. 활동비 명목으로.”
-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담을 넘어야지.”
- 그 음식점은 CCTV가 곳곳에 있습니다.
“수선아. 나 오염지역에 여러 번 침투하고도 살아서 빠져나온 사람이다. 이런 허술한 경계망을 뚫는 건 쉽지.”
- 이제야 일을 하시는군요. 잘됐습니다.
“고소해 하지는 말고.”
◈ ◈ ◈
그 음식점은 넓은 정원에 집 몇 채가 세워져 있었다. 각각의 집에는 다시 몇 개의 별실이 독립된 형태로 존재했다. 테이블이 같은 공간에 모여 있는 홀은 아예 없었다.
그렇게 공간을 넓게 쓰는 곳이라 바깥을 둘러싼 담장도 길었다. CCTV가 담장 위에서 곳곳을 감시하고 있지만, 사각지대를 찾는 건 쉬웠다.
선우현이 빈틈을 찾아 담장을 가볍게 넘었다. 넘을 때는 물론이고 착지할 때도 소리가 거의 나지 않았다.
“어느 건물이냐?”
- 왼쪽 일본 주택 스타일 건물입니다.
바깥쪽은 CCTV가 곳곳을 감시하고 있지만, 정원 안쪽은 CCTV 자체가 보이지 않았다.
“손님의 얼굴은 아예 찍지 않겠다는 건가? 은밀히 만나서 밥 먹고 모의도 좀 하다가 헤어지기 딱 좋겠어.”
- 그래서 그런지 연예인도 보입니다.
“응?”
- 선장님의 바로 앞 한옥 스타일 건물에 천호성이 들어가는 걸 봤습니다.
천호성은 구하니와 비슷한 급의 가수다. 선우현과는 몇 번 충돌했다.
“누구랑 있는데? 설마 하니 씨는 아니지?”
- 모르는 사람입니다.
“여자야?”
- 남자입니다.
“그럼 밥 먹으러 왔겠지.”
선우현이 옆 건물로 이동했다. 그 건물에는 별실이 네 개가 있었다.
- 왼쪽 방입니다.
선우현이 벽 아래에 몸을 붙였다.
“밖에서는 뭐라고 하는지 안 들린다.”
- 선장님의 인이어 통신기로 들어오는 소리 데이터를 제가 여기서 증폭하겠습니다. 귀를 더 바짝 대십시오.
“대고 있어.”
- 벽에 더 대십시오. 얼굴이 눌릴 때까지 꽉꽉.
“수선아. 너 왜 즐기는 것 같냐?”
- 오해이십니다.
◈ ◈ ◈
전준형 부회장이 말했다.
“최근에 우리 그룹 전시관에서 사건이 좀 있었습니다.”
박재곤 의원은 이미 덕구파 정 부장에게 이 부장이 그 사건으로 체포됐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도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말했다.
“뉴스에서 봤습니다. 부회장님이 스트레스 좀 받으셨겠습니다.”
“그 전시관은 어차피 헐고 빌딩을 올릴 겁니다. 전시된 물건들은 막내가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으니까, 책임도 막내가 져야지요. 그러니까, 불이 나서 건물과 전시품이 다 타버려도 나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역시 전호의 회장님답게 그릇이 참 크십니다. 하하하.”
“지금은 반쪽짜리 회장일 뿐이지요. 그래서 다들 부회장이라고 부르잖습니까?”
“아이고. 그런 겸양의 말씀을.”
“내가 회장이 되는 건, 전호 그룹이 모두 내손에 돌아왔을 때입니다.”
그래서 전준형은 호칭만 부회장을 쓴다. 그의 위에 회장이 따로 있는 건 아니다.
술이 조금 더 들어간 후에 박재곤이 말했다.
“뉴스에서 봤는데, 전시품을 훔치고 불을 지르려던 놈 중에 조폭이 있다더군요. 어디더라? 개 이름하고 비슷했는데.”
“덕구파 말입니까?”
“아. 그렇지요. 덕구파. 아시는군요.”
전준형이 인상을 찌푸렸다.
“모릅니다. 그렇게 보고를 받았습니다. 내 밑에는 의원님과 달리 일할 직원이 많으니까요.”
“하하하. 이것 참 부러운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가요? 하하.”
서로 어색하게 웃은 후에 전준형이 물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굳이 이 자리에서 하는 이유가 뭡니까?”
“걱정이 되어서 한 말입니다만, 불쾌하셨다면 다른 이야기를 하지요.”
“불쾌하긴요. 안줏거리로 좋은 이야기군요.”
전화가 걸려왔다. 전준형의 전화였다.
“왜? 음? 알았어. 내가 다시 걸지. 대기해.”
전준형 회장이 박재곤 의원에게 말했다.
“잠시 나가서 통화 좀 하겠습니다.”
“그럼요. 얼마든지요.”
◈ ◈ ◈
전준형은 바로 옆 빈방으로 옮겨가 전화를 걸었다.
“자세히 말해봐.”
- 전상미 사장이 손은경 관장을 조사하고 있습니다.
“그 여자는 경찰에 잡혀 있잖아.”
- 인맥을 동원해서 수사 범위를 확장했습니다.
“어디까지?”
- 전준호 부사장 사망사건을….
전준형이 인상을 구겼다.
“이미 다 끝난 사건을 왜 꺼내? 우리 집안이 얼마나 사람들 입에 오르게 하려고!”
- 거기다 전상미 사장이 그날 전호 전시관에 물건을 훔치러 침입한 남녀를 설득하는 중입니다. 누가 시켰는지 알아내는 데 협조하면 변호사를 붙여주겠다면서….
“그런 게 통하겠어?”
- 그 커플이 크게 싸우고 깨진 상태라, 한 명쯤은 넘어갈지도 모릅니다.
“상미가 일을 자꾸 키우는구나.”
- 어떻게 할까요?
“전에 말한 거 준비해. 자세한 건 차에서 지시할 테니까.”
◈ ◈ ◈
선우현은 건물 밖에서 벽에 붙어 전준형의 통화를 엿들었다. 직접 듣기엔 너무 작은 소리였지만, 김수선이 지원위성에서 음성을 증폭하고 재처리해 들려준 덕분에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 수 있었다.
“전상미 사장이 본격적으로 움직이나 보네.”
- 전준형이 원래 방으로 돌아가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럼 나도 가서 뭐라고 하는지 더 들어봐야지.”
◈ ◈ ◈
박재곤 의원도 비서와 통화하고 있었다.
“너 이 새끼. 내가 이 부장 일에 왜 손을 써? 알아서 입 다물게 하라고 해!”
- 그렇게 말했는데, 정 부장이 자꾸 청탁을….
“네가 얼마나 만만하게 보였으면 그 새끼가 감히 청탁을 또 하나!”
문이 열리고 전준형이 들어왔다. 박재곤이 전화를 끊었다.
전준형이 물었다.
“무슨 문제가 있으신지.”
박재곤이 둘러댔다.
“지역구에 청탁이 들어왔는데, 거절하라고 했습니다. 하하.”
“아. 그러시군요. 그런데 제가 지금 급한 일이 생겨서 말이지요. 오늘 술자리는 여기까지만 하시죠.”
“어이쿠. 사업 하는 분은 역시 바쁘시군요. 그럼 가셔야지요.”
두 사람은 식사가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도 방을 나왔다.
전준형과 박재곤은 각자 차를 타고 출발했다. 둘 다 운전하는 사람이 따로 있었다.
선우현이 그 음식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세워둔 오토바이에 앉아서 말했다.
“박재곤이 말한 이 부장은, 이번에 잡은 덕구파의 그 이 부장이겠지?”
- 안성준 형사가 덕구파의 빽 중에 박 의원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박재곤이 그 박 의원일 가능성은 있습니다.
“그런데 덕구파와 트러블이 생겼나 보네?”
- 어떻게 하실 겁니까?
“박재곤과 전준형을 동시에 추적하는 건 어렵지?”
- 동선을 동시에 추적하려면 관측 카메라를 두 타깃이 이동하는 위치로 반복해서 계속 움직여야 합니다. 그러다 운이 나쁘면 관측 카메라의 구동계가 또 고장 날 수 있습니다.
“그럼 네가 박재곤을 추적해. 나는 전준형을 따라갈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