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 파이어 II
선우현이 계단 난간 위를 밟고 올라가 스케이트를 타듯이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러다 난간 중간에서 반대편으로 훌쩍 뛰어내려 다시 난간을 탔다.
시작한 곳은 2층이다. 지하까지는 두 층을 내려가야 한다. 그렇게 몇 번 난간을 미끄러지고 점프하자 순식간에 지하층에 도착했다.
뒤따라 뛰어온 강선정이 계단에 도착해 아래를 보았다. 선우현이 지하층에서 복도 쪽으로 사라지는 모습이 잠깐 보였다.
“빨라!”
그녀는 선우현이 2층에서 난간을 타고 미끄러져 내려가는 걸 보긴 했다. 그래서 그녀도 난간을 잡고 아래로 뛰려고 했다.
그러다 멈칫했다. 난간에서 떨어지면 죽을 것 같았다.
그녀는 계단을 열심히 뛰어서 내려갔다.
“너무 빠르다고!”
선우현이 지하층에서 복도로 들어갔다. 복도 중간에 불빛이 보였다.
“거기냐.”
그는 복도를 달렸다. 지하 철문에서 사람이 밖으로 나왔다. 얼굴에는 복면을 쓰고 있었다.
누군지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선우현이 점프했다.
밖에 나온 놈은 선우현 쪽으로 돌아섰다가 깜짝 놀랐다. 누군가 날아온다는 걸 인지한 순간, 선우현의 공중 발차기가 몸통에 꽂혔다. 대응할 틈도 없었다.
“케엑!”
적의 몸이 복도 끝을 향해 날아갔다가, 바닥에 철퍼덕 떨어졌다.
선우현이 그 자리에 착지하며 기계실 안쪽을 확인했다.
지하실로 내려온 놈은 둘이다. 다른 놈은 뒤따라 걸어 나오던 중이었다.
그놈은 먼저 기계실을 나가던 놈이 옆으로 날아가고, 그 자리에 선우현이 나타난 걸 보고 눈을 껌뻑였다.
“어?”
그러다 상황을 깨닫고 황급히 칼을 뽑았다. 접이식 칼인데 잭나이프치고는 조금 컸다. 그놈이 외쳤다.
“어디서 온 새끼야!”
“그건 네가 말해야지. 불은? 질렀냐?”
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놈이 칼을 앞으로 내밀며 급히 말했다.
“이 새끼. 당장 비켜!”
선우현이 칼을 쥔 손을 툭 쳤다. 칼이 공중에 떠올랐다.
“억?”
선우현이 적의 팔을 잡아 끌어당기며 손으로 목을 갈겼다.
“켁!”
맞은 놈이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공중에 떴던 칼이 아래로 떨어졌다. 선우현이 그 칼을 탁 잡았다. 그런 후에 칼날을 그놈의 목에 대며 물었다.
“어디서 불이 나게 했냐? 기계실이니까 기계일 텐데, 어느 장비야?”
“커컥.”
그놈은 목을 맞아 말을 할 수 없었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말하지 않으면 여기가 불탈 때 너도 죽는다. 너를 이 기계실에 묶어놓을 거니까. 연기를 마시다가 몇 분 안에 죽겠지.”
그놈이 다급히 여러 대의 장비 중 하나를 가리켰다.
“케켁.”
그 장비에서 진동하는 소리가 살짝 들렸다.
“저거 아니면 너 죽어.”
“켁.”
강선정도 기계실에 도착했다. 그녀가 얼른 외쳤다.
“저한테 맡겨요! 제가 원래 공대 여신….”
선우현이 방금 빼앗은 잭나이프를 던졌다.
칼이 무서운 속도로 날아가 그 장비와 연결된 굵은 전선을 끊고 벽까지 조금 파낸 후에 쇳소리와 함께 튕겨 나갔다.
잘려나간 전선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강선정은 당황했다.
“아니, 지금 뭘….”
“장비를 정지했습니다.”
“과학자시잖아요. 과학자가 그렇게 무식한 방법을….”
“과학적으로 가장 확실한 방법을 썼습니다. 전기가 끊기면 저런 장비는 멈춥니다.”
“아, 네….”
선우현이 붙잡은 놈에게 말했다.
“다른 장비는?”
그놈이 고개를 옆으로 살짝 흔들다가 목이 아파서 비명을 흘렸다.
“끄아아….”
강선정은 방금 선우현이 전선을 끊어버린 장비를 조사했다.
“이 장비 주변에 불에 잘 타는 걸 좀 갖다놨네요. 기름은 뿌리지 않았지만, 버리는 옷이나 스티로폼이 있어요.”
“공대 출신이면 해결됐는지부터 확인해요.”
그녀가 장비의 상태를 꼼꼼히 확인했다.
“네. 전기가 완전히 나갔어요. 다른 전력선도 연결된 건 없어요. 이건 이제 괜찮아요. 나중에 119에 연락해서 확인은 받아야겠지만요.”
선우현이 목을 맞은 놈을 가리켰다.
“그럼 저놈은 여기 묶어놓고 올라갑시다.”
“여기에요?”
“불이 나면 저놈부터 죽겠지.”
맞은 놈이 놀라서 눈을 껌뻑였다.
“커, 컥.”
“왜? 뭐가 더 있냐?”
그놈이 옆을 손으로 가리켰다. 장비가 아니라 페인트통이 있었다.
“아. 그 페인트가 기름 대신 타게 하려고 한 거냐?”
그놈이 얼른 고개를 끄덕이다가 목이 아파 비명을 다시 질렀다.
“끄으으….”
“새끼가 살고는 싶나 보네.”
선우현이 그놈의 턱을 때렸다. 맞은 놈의 턱이 돌아가면서 다친 목도 돌아갔다.
“켁!”
그놈은 짧은 비명만 남기고 기절했다.
강선정이 놀라서 물었다.
“죽인 거예요?”
“안 죽었습니다. 아니, 왜 다들 내가 막 죽이고 다닌다고 생각하지? 나 아무나 죽이진 않는데?”
“아무나는 아니면, 혹시 사람 가려서….”
“단군 이래로 아무도 안 죽였습니다.”
김수선이 말했다.
- 그럼요. 오천 년 동안은 여기 계셨으니까요. 단군 이후에는 지상에서 누굴 죽일 수는 없었죠.
“아. 농담하신 거구나. 휴우.”
두 사람은 지하 기계실에서 잡은 놈을 묶었다. 기계실에 케이블 타이가 많아서 묶는 건 쉬웠다.
강선정이 복도 한쪽에 쓰러진 놈도 묶으며 말했다.
“아니, 이놈은 왜 여기 자빠진 거지? 설마 문앞에서 여기까지 날려버린 건 아니죠?”
“안 죽었으면 됐습니다.”
두 사람은 그들을 묶어놓고 계단을 올라갔다.
강선정이 물었다.
“지하까지 엄청 빨리 내려가던데요. 난간을 계속 타신 거예요?”
“난간만 타면 안 되고 중간에 점프도 해야지요.”
“우와. 그거 저도 할 수 있어요?”
“그 운동신경으로 하면 죽을 텐데.”
“안 해야겠다.”
두 사람은 2층 전시실로 올라갔다. 관장 손은경은 아직도 빈 전시실에 갇혀 있다.
그런데 손은경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옷이 찢겨 있고 머리는 산발로 풀어져 있었다. 뺨도 한쪽이 부어 있었다.
그 옆에서 같이 갇혀 있던 여자가 씩씩댔다. 남자도 옆에서 화를 냈다.
선우현이 물었다.
“이 상황은 뭐지?”
여자가 당당하게 말했다.
“이게 다 이년 때문이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혼내주고 있었어요!”
“너희 마음대로?”
“네?”
선우현이 강화유리문을 열었다. 여자가 소리쳤다.
“너 이제 죽었어!”
“닥치고 뒤로 물러나.”
“네? 왜….”
선우현이 여자를 쳐다보았다.
“내가 너희들은 왜 믿어야 하냐?”
“그야 당연히….”
당연하다고 할만한 이유는 없었다.
선우현이 물었다.
“이 전시관에는 왜 들어왔지? 도둑놈이냐?”
“아, 아니에요. 우리는 그냥 하룻밤 추억을….”
“됐다. 그거야 형사들이 알아서 판단하겠지.”
남녀가 화들짝 놀랐다. 여자가 물었다.
“네? 우리를 경찰에 넘길 거예요?”
“어.”
“왜, 왜요?”
“왜 안 넘길 거라고 생각했냐?”
“그야…. 그쪽은 그놈들하고는 적이니까, 우리를 구출해주신 거잖아요.”
“적의 적이 꼭 아군은 아니야. 너희는 아직 검증이 안 됐으니까, 닥치고 구석에 가 있어.”
같이 있던 남자가 화를 냈다.
“이봐. 구해준 건 고마운데, 그렇게 말하면 기분이 나쁘지!”
선우현이 남자를 삐딱하게 쳐다보았다.
“이건 또 뭐지?”
선우현이 지하실에서 두 놈을 어떻게 때려잡았는지는 2층에서는 볼 수 없다.
남자가 붙잡힌 건 상대의 수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강선정은 여자다.
그는 선우현 한 명만 조심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존심을 세웠다.
“그리고 우리를 구해주러 여기 온 것도 아니잖아. 따지고 보면 그쪽도 여기 침입한 건데, 말을 그따위로 하면 내가 기분이…. 켁.”
선우현이 남자의 목을 잡고 위로 들어 올렸다.
“이걸 어떻게 할까? 놈들에게 당한 거로 처리할까?”
남자가 공중에서 버둥거렸다.
“사, 살….”
김수선이 말했다.
- 선장님. 목격자가 많습니다.
선우현이 남자를 툭 밀었다. 남자가 뒤로 나자빠졌다.
여자는 이미 겁먹은 얼굴로 벽에 찰싹 붙어 있었다. 그녀가 다급히 말했다.
“나, 난 아무 말도 안 했어요!”
“닥치고 처박혀 있어라.”
“네, 네!”
강선정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휴우.”
“뭡니까? 그 한숨은?”
“믿고 있었다고요.”
“뭘?”
“안 죽일걸?”
“아닌 것 같은데?”
손은경 관장이 일어났다. 그녀는 남자와 여자를 보며 말했다.
“꼴 좋다.”
선우현이 말했다.
“네 꼴이 더 좋은데?”
그녀가 눈꼬리를 내린 채로 말했다.
“내 팔자가 참 기구하네.”
선우현이 손은경을 데리고 그 전시실 밖으로 나갔다. 그런 후에 강화유리문을 닫아버렸다.
안에 갇혀 있던 여자가 화들짝 놀라서 외쳤다.
“우, 우리는요! 우리 아직 못 나갔어요!”
“네 남자친구한테 왜 거기서 못 나가게 됐는지 좀 물어봐라.”
“헤어질게요!”
“그건 맘대로 해. 경찰이 오면 문 열어달라고 해라.”
“아, 안돼!”
선우현은 손은경을 의자가 있는 곳으로 데려갔다.
“여기 앉아서 아는 거 다 말해.”
그녀가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난 사실 피해자….”
선우현이 말했다.
“이 전시관에 불을 지르려고 했잖아. 건물을 다 태워버리려고 스프링클러까지 꺼놨다며.”
거기까지는 손은경이 이미 자백했다.
“그런데 전시된 유물 중에 일부를 가짜로 교체했더라? 그러면 위조품도 불에 타겠지. 까맣게 타고 녹아서 흔적만 남은 위조품은 진품과 구분하기 어려울 테지.”
그런 방법으로 절도 사실을 숨기려 했다는 건 안다. 문제는 왜 그랬는지다.
“그런데 왜 흔적을 지워야 했던 거야? 여기는 당신 거라며.”
손은경의 눈빛이 조금 독해졌다. 그녀의 목소리도 커졌다.
“내 거? 내 거는 이 전시관 건물뿐이야!”
그녀가 화를 냈다.
“이 땅도, 여기 전시된 작품들도 다 전호 그룹 거야! 나는 전시관 건물만 받았어!”
“전호 그룹은 쪼개졌는데?”
“회장이 죽으니까 자식놈들이 경영권을 차지하려고 싸워서 계열사들이 쪼개졌지. 그런데 여기라고 놔뒀겠어? 이거 다 그놈들 거야! 자기들끼리 서로 견제하느라 나한테 잠깐 맡겨둔 거라고!”
“전시관 건물은 줬다며.”
“이 전시관은!”
그녀의 어깨가 갑자기 축 처졌다.
“전호 그룹 놈들이 이 땅에 빌딩을 지으면 없어져. 그냥 그때까지만 나한테 맡겨둔 거야. 전시관 건물을 헐어버리면 나한테 남는 건 아무것도 없어.”
“전호 그룹에서 독하게 하긴 했네. 그래서 너는 보물들을 훔치고 여기는 불을 지르려 한 거군.”
“나도 내 몫은 챙겨야지.”
“사람도 죽이고.”
손은경은 화들짝 놀랐다.
“무, 무슨 소리야!”
“불을 지를 때 빈 전시실에 갇혀 있는 두 명도 죽이려고 했잖아. 목격자니까.”
“아니야. 그건….”
“그 두 사람을 말로 속여서 더 자연스럽게 타죽게 하려고 했나? 그러다 너까지 함정에 빠졌겠지.”
그녀의 눈빛이 독해졌다.
“박 실장! 그 새끼가 나를 배신했어!”
“박 실장이 누구야?”
“이 전시관 실장이야! 그놈이 제안했어! 여기가 없어지면 자기도 갈 곳이 없어지니까, 그 전에 우리 몫을 챙기자고 했어!”
“공범이네.”
“그놈이 주범이야!”
“이런 경우는 둘 다 주범이지. 그럼 훔쳐간 보물들을 어디에 넘길지는 박 실장이 알겠네?”
김수선이 말했다.
- 관측 모듈이 들어 있는 동상도 박 실장에게 있을 겁니다.
손은경이 얼른 말했다.
“맞아! 박 실장이 물건을 사줄 사람들을 구했어. 물건 받아갈 사람들도 데려왔다고. 지하 기계실로 간 놈들도 박 실장이 데려온 사람들이야! 이건 다 박 실장이 주도했다고!”
“실장이 어떻게 혼자 다 하겠어? 관장이 한통속이니까 가능했지. 변명은 잘 들었다.”
“변명이 아니라….”
“외국에서 유물을 대여로 들여온 것도, 이렇게 빼돌려서 팔아먹으려고 일부러 그런 거잖아. 뒷감당은 보험사가 할 테니까. 전호 그룹은 그렇다 치고, 보험사는 왜 당해야 하는데? 괜히 다른 사람들 보험료만 오르겠네.”
“그거야….”
“유물을 빌려준 곳에서도 담당자들한테 칼바람이 불 테고.”
“그건….”
선우현은 낮에 봤던 책 이야기도 꺼냈다.
“야한 이야기가 추가된 춘향전. 그건 우리 문화재일 텐데, 그것도 팔아먹었으면 문화재 유출까지 한 거네?”
이 전시관에는 한국의 문화재도 여럿 있다.
“문화재 유출도 전호 그룹 엿 먹으라고 하는 짓이냐? 다 챙기지 못한 문화재를 불태워버리면 그건 누구 손해냐? 보험을 들어놨으면 전호 그룹 사람들은 손해는 좀 봐도 감당할 수 있을걸? 오히려 현금화했다고 좋아하려나?”
“그게….”
“보험사에서 받은 돈을 불타버린 전시관을 철거하고 빌딩 올리는 데 보태면 오히려 좋네? 도대체 네 계획의 어디가 복수야?”
손은경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선우현이 말했다.
“넌 그냥 돈을 챙기려고 유물들을 빼돌리고 건물에 불을 지르려던 거야.”
손은경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어쩔 수 없었어! 그럼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
“뭘 어떻게 해? 불도 지르고 사람도 죽이려고 했는데 감옥에 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