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 전시관
선우현이 독특하게 생긴 동상 사진을 보며 예전 기억을 떠올렸다.
“옛날에는 탐사대 현장용 관측 모듈을 제사장이 주워가서 쓸 때도 있었지.”
- 가끔 관측용 조명이 켜지기도 하고, 만지다 보면 상태 표시 기능이 반짝거리기도 하니까요.
“오래돼서 고장 나면 보통은 부숴서 알맹이를 확인하거나 잘라서 나눠 갖던데, 이건 형태가 그대로네.”
- 제사장이나 족장, 아니면 부족국가의 왕이 그 모듈에 주술적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고 동상 내부에 넣었을 수 있습니다.
“이건 확인할 가치가 있겠다.”
- 강선정을 잘 꼬셔서 박재곤과 스래곤에 관한 정보도 얻어야 합니다.
선우현은 그 정보를 얻어볼까 하고 강선정을 옥상에 들였다. 그런데 이제 다른 이유도 생겼다.
선우현이 강선정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가 기대하는 눈으로 선우현의 말을 기다렸다.
선우현이 물었다.
“이거 비공식 작전이라고 했지요?”
그녀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네.”
“윗선의 허락도 못 받았고.”
“네.”
“이거 진행하다가 결과 나오기 전에 걸리면 큰일 나겠네요?”
강선정의 끄덕이던 고개가 움직임을 멈췄다.
“네? 그렇죠?”
“잘릴 수도 있고?”
강선정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그…렇죠?”
“업무 규칙에 얽매이지 않는 타입이지요?”
“네에….”
선우현이 조건을 걸었다.
“그럼 내가 이걸 도와주고 비밀도 지켜주면, 날 위해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일 하나 해줄 수 있습니까? 강선정 씨도 그 일에 관해서는 비밀을 지켜준다는 조건으로.”
강선정의 목소리가 도로 커졌다.
“그야 당연히….”
그녀가 말을 하다 말고 움찔하더니, 갑자기 두 팔을 교차시켜 가슴을 가렸다.
“어머. 설마 저를 원하시는 거예요?”
“확 쫓아내 버릴까?”
“농담이에요.”
“진담인 줄 알고 마음 상할 뻔했네.”
“농담…이라구요.”
선우현이 확인을 위해 물었다.
“일 하나씩 주고받는 조건, 받을 겁니까?”
“당연히 받아야죠.”
선우현이 그녀가 가져온 서류를 제대로 펼쳐놓고 물었다.
“그럼 이야기부터 들어봅시다. 이게 지금 무슨 상황입니까?”
강선정이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여기 있는 전시품들이 위험해요.”
“그러니까 어떻게요?”
“그건 저도 잘…. 문화재도 있으니까 도난 아닐까요? 아니면 살인사건? 방화?”
“모른다는 소리네. 그렇게만 말했으면 위에서 까이는 게 당연하지. 그런 사건이 걱정되면 경찰에 넘겨야지요.”
“경찰에도 넘겨봤죠.”
그녀가 억울함을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그런데 경찰에서는 딱히 의심할 점이 없다네요?”
“왜 의심했는지 설명했는데도 그럽니까?”
“그게요….”
선우현이 서류와 사진을 훑어보며 물었다.
“여긴 그 부분이 빠져 있는데, 의심한 이유가 뭡니까?”
“그게, 촉이 와서….”
선우현이 서류를 내려놓았다.
“뭐라고요?”
“촉….”
선우현이 강선정을 다시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가 당황해서 손을 흔들었다.
“아니, 이상하게 들리는 거 아는데요. 그래도 제 촉이 곧잘 맞거든요? 이번 일도 뭔가 수상하단 말이에요.”
선우현은 그래서 강선정을 본 게 아니다.
“지난번에 산업스파이 조직의 이동을 눈치채고 쫓아간 것도 혹시 촉이 온 겁니까?”
“네. 거기는 카테고리 C가 아니라, B나 A로 관리해야 한다는 촉이 왔거든요. 그래서 퇴근길에 종종 들러보곤 했어요.”
“카테고리 C는 의심만 조금 하는 수준인가?”
“앗! 그건 외부인에게 말하면 안 되는 건데….”
“그 전에 받은 징계도 혹시 촉 때문에 뭔가 저지른 겁니까? 촉이 빗나가서 징계를 먹은 거고요?”
“어머. 그걸 어떻게 아셨대요?”
“뻔하니까요.”
선우현이 강선정을 보며 작게 말했다.
“촉 관련 특수능력이라도 가지고 있나?”
- 설마요.
“최민정 씨를 봐. 불가능한 건 아니야.”
최종훈의 동생 최민정은 한 가지 꿈을 며칠이나 몇 주씩 반복해서 꾸는 증상을 어릴 때부터 겪었다. 최근에는 활력 토마토를 매일 먹어서 잠을 잘 잔다.
- 불가능한 건 아니겠군요.
선우현이 그녀가 가져온 사진을 쫙 펼쳤다.
“이 중에서 사진 하나만 골라봐요.”
강선정이 대놓고 동상 사진을 짚었다.
“이거요.”
그건 선우현과 김수선이 관측 모듈이 들어 있다고 의심하는 동상의 사진이었다.
“왜 이걸 고른 겁니까?”
“전시관에서 실제로 본 적이 있는데, 느낌이 묘했거든요.”
“특수능력이 약하게라도 있긴 있는 것 같은데….”
“그쵸? 촉 좋은 것도 능력은 능력이죠?”
“그렇기는 하죠.”
- 쓸모가 더 있겠는데요?
선우현이 제안했다.
“토마토 주스 한 잔 드릴까?”
“앗! 진짜요? 공무원은 그런 거 받으면 안 되는데….”
“이 옥상에서는 손님에게 주스 한 잔 줬다고 돈을 받지는 않습니다. 원래 공짜입니다.”
- 먹어서 없애면 아무도 모르죠.
강선정이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그럼 한 잔만….”
선우현이 화분에서 토마토를 따 믹서로 갈아 컵에 담아주었다. 강선정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그 모습을 구경했다.
그녀가 컵에 담긴 토마토 주스를 한 모금 마시더니 눈을 감았다.
“아. 이 맛이야. 몸이 상쾌해지는 이 기분. 어떤 과일을 먹어도 이런 맛이 안 나요.”
“그게 원래 먹자마자 효과가 나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저한테 맛을 잘 보는 특수능력도 있는 걸까요?”
- 제가 보기엔 그냥 맛있는 걸 좋아하는 겁니다.
선우현이 서류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거 도와줄 테니까, 무슨 일인지 자세히 설명해봐요.”
강선정이 선우현에게 설명했다.
“이 사진들은 전호 전시관에서 몰래 찍은 거예요. 전호 전시관은 원래는 전호 그룹에서 운영하던 곳이에요.”
“전호 그룹? 어디서 들어봤는데….”
- 최근에 북한산에서 구출한 여자가 전호 그룹에 다닌다고 했습니다.
“아. 전호 그룹.”
“네. 그런데 그 그룹은 자식 간에 내분이 일어나서 산산이 쪼개졌어요.”
“내분 원인은 뭡니까?”
“아마 경영권 싸움이겠죠.”
“그럼 전호 전시관은?”
“며느리가 받았어요. 원래 전시관 관장이었거든요.”
“며느리가 받았으면, 남편은?”
“죽었어요.”
“며느리에게 전시관은 넘겨준 이유는?”
강선정이 시선을 피했다.
“이게 공식 작전이 아니라 그것까지는 잘….”
“뭐지?”
“왜….”
“그룹이 산산이 쪼개질 정도로 자기들끼리 싸웠는데, 전시관은 며느리에게 넘겨준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상하긴 한데, 이유는 저도 잘….”
“경찰 쪽에서 받은 정보는 있습니까?”
“아니요.”
선우현이 한숨을 푹 쉬었다.
“이 작전이 승인이 안 날만 했네. 근거라고는 촉밖에 없으니까.”
- 하지만 그 촉을 무시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약한 수준의 특수능력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선우현이 물었다.
“그래서 의심하는 게 뭡니까? 이 전시관입니까? 아니면 전호 그룹입니까?”
“당연히 전시관이죠!”
강선정은 선우현이 관심을 계속 보이자 기운이 나서 설명했다.
“제가 얼마 전에 이 전시관에 방문했거든요? 요즘 이 전시관에서 영국에서 들여온 고대 예술품 전시회가 있어요. 저 그런 거에 관심 많아요.”
선우현이 사진을 보며 말했다.
“영국 고대 예술? 이건 그 지역 양식이 아닌데?”
“역시 유럽 고고학 전문가! 그리스 정부에서 협조를 요청할 정도라면서요?”
“그건 또 왜 알고 있을까?”
“그, 그냥 소문이 들렸어요!”
“시끄러우니까 이거나 계속 설명해요.”
“영국 양식이 아닌 이유는요. 당연히 옛날에 전 세계에서 긁어모은 것이기 때문이죠. 대영제국 시절에요.”
김수선이 말했다.
- 그래서 우리가 투하한 관측 모듈이 저기 있는 거군요.
선우현이 작게 말했다.
“아직 확실한 건 아니야. 동상 내부에 관측 모듈이 들어 있을 수도 있지만, 그냥 형태만 비슷하게 만들었을 수도 있어.”
- 어쨌든 누군가 실물을 봤으니까 만들었겠죠.
“그건 그렇지.”
강선정이 계속 설명했다.
“제가 그 전시관에 들어가서 각 지역 유물들을 보는데요. 뭔가 이상하다는 촉이 오는 거예요. 안 믿겠지만 저 이런 거 진짜 잘 맞거든요?”
“믿을게요.”
- 탐지 모듈을 인식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주술사의 후손인가?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머. 진짜 제 말을 믿으세요?”
“믿기는 하는데, 그런 촉 좋은 사람이 왜 내근직을 합니까?”
“현장 가고 싶죠. 근데 안 보내줘요.”
“안 보내주니까 현장에 쳐들어갔다가 일을 망쳐서 결국 징계도 받고?”
“저에 대해 너무 잘 아신다. 혹시 저 쫓아다녀요? 그럴 거면 그냥 당당하게 관심 있다고 해요.”
“이 자의식 과잉은 뭐지? 그 특수능력의 부작용인가?”
- 그럴 수도 있죠.
“네? 부작용이요?”
“혹시 평소에, 마음 가는 대로 지르면 다 잘 될 것 같다고 생각합니까?”
“실제로 잘될 때가 곧잘 있어요.”
“망하는 때도 많고, 사고 칠 때도 많겠네요.”
“그건 그래요. 참 신기하죠?”
“하나도 안 신기합니다. 진짜 촉이 왔을 때와 안 왔을 때를 구분하지 못하고 저지르는 거니까.”
- 능력이 너무 미약한 거지요. 특수능력이 진짜로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울 정도로 약하네요.
“진짜 촉이 온 건지 착각인지 구분을 못 하면, 중요한 순간에 일을 말아먹을 수 있습니다. 다만.”
선우현이 사진을 보며 말했다.
“가끔은 도움이 될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남들은 모르고 넘어가는 걸 알아챌 때도 있으니까요.”
- 탐지 모듈 형상의 동상에 반응한 걸 보면, 이번엔 진짜처럼 보입니다.
강선정의 표정이 다시 밝아졌다.
“저를 이렇게 믿어주는 분은 처음이에요. 우리 엄마 아빠도 이렇게는 안 믿어주시는데. 동생 놈은 저를 믿은 적이 없고요.”
“이번엔 믿을 만하니까.”
“나 막 반할 거 같아.”
“쫓아낼까?”
“아뇨. 농담이라니까요. 농담할 때마다 진담으로 그러시네.”
“그런 농담 자꾸 하면 진짜 쫓아낼 겁니다.”
강선정이 말을 돌렸다.
“이 전시관에서 뭔가 일이 일어날 거예요. 분명히 촉이 왔어요.”
“그러니까 그게 뭐냐고요.”
“그걸 선우현 씨가 알아낼 수 있도록 제가 열심히 도울게요.”
“양심 없네.”
***
전호 전시관의 관장 손은경이 말했다.
“경찰 쪽은 어때?”
전시관의 실무를 맡은 박 실장이 대답했다.
“형사들이 찾아와 둘러보긴 했습니다만, 본다고 뭐 알겠습니까? 그냥 돌아갔습니다.”
“그러면 영장이 없어도 전시관에 들여보낸 건 잘한 건가?”
“그럼요. 괜히 거절하면 더 의심할 테고, 그러다 수색영장이라도 받아오면 일이 심각해집니다. 적당히 상대해주고 보내야 의심을 안 합니다.”
“역시 그런 일은 박 실장이 잘한다니까.”
“관장님과 같은 배를 탔는데 열심히 해야죠. 흐흐흐.”
손은경이 인상을 살짝 썼다.
“그런데 경찰은 왜 온 거야? 뭔가 아는 사람이 신고한 거 아닐까?”
“그랬으면 그냥 둘러만 보고 갔겠습니까? 영장을 받아왔을 겁니다.”
손은경이 짜증을 냈다.
“그럼 왜 온 건데?”
“전호 쪽에서 괜히 툭툭 건드려본 거 아닐까요? 전시된 예술품을 관장님이 스트레스받는 방식으로 확인한 거겠죠.”
손은경이 주먹을 꽉 쥐었다.
“역시 그런 거지? 이거나 먹고 떨어지라고 던져준 것들이, 이제 이것조차 아까워졌어?”
“원래 있는 놈들이 더하다고 하잖습니까?”
손은경은 걱정도 했다.
“이번에 영국에서 빌려온 예술품들은?”
“당연히 잘 전시되어 있습니다. 형사들이 사진을 찍어 갔습니다만, 그런다고 뭐 알겠습니까?”
“하긴. 당연히 모르겠지. 전부 진품인데.”
“그렇죠.”
손은경이 눈을 반짝였다.
“그런데 박 실장. 형사들이 일단 왔다 갔으니까, 이제 아무도 안 오겠지?”
“당연하죠. 이미 확인을 했는데 왜 또 오겠습니까? 전호에서도 당분간은 건드리지 않을 겁니다.”
“여기에 이상이 없는 것도 형사들이 확인했잖아?”
“그렇죠.”
관장 손은경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럼 진행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