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 동상
뉴오션은 전국에 지점이 있는 대형 백화점 그룹이다. 뉴오션의 임원 회의실에서 보고받던 회장 곽태호가 화를 벌컥 냈다.
“겨우 본점 하나 있는 태양의 고객 그래프는 위로 치솟는데, 우리 그래프는 왜 그러지 못하냔 말이다!”
질책을 받는 이사들이 고개만 숙였다.
곽태호가 의자에서 일어나 그중 한 명을 가리켰다.
“박 이사! 말이 되냐고! 말을 해봐!”
“회장님. 태양은 그냥 일시적인 현상으로, 곧 원래대로 돌아갈….”
“일시적일지 아닐지 박 이사가 어떻게 알아! 전에도 일시적 현상이라더니 저게 뭐냔 말이다!”
“죄송합니다.”
“정 이사! 네가 말해봐. 내가 분명히 R 크림 3차 공급권은 우리가 따내라고 했는데, 왜 또 태양에서 파는 거지?”
“그게….”
“그것만 손에 넣었어도 저 그래프가 바뀌었단 말이다!”
정 이사가 조심스럽게 보고했다.
“태양에서 판매자와 연락할 수 있는 사람은 담당자 딱 한 명뿐입니다. 그래서 판매자의 정체를 알아낼 수가….”
“그럼 그 담당자를 매수해! 돈을 주든 스카웃을 제안하든 정보를 뽑아내라고!”
“그 담당자가, 사장의 손녀인 유소율 이사라서….”
“손녀?”
“예. 그래서 매수가 불가능합니다.”
곽태호가 씩씩대다가 숨을 크게 내쉬며 자리에 털썩 앉았다.
“젠장. 내 손자 손녀들은 사고나 안 치면 다행인데, 부럽다.”
“회장님. 어떻게 할까요? 결정을 내려주십시오.”
곽태호가 스크린을 보았다. 태양 백화점의 고객 그래프는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반면에 뉴오션의 그래프는 살짝 내려갔다.
한국에 대형 백화점이 뉴오션만 있는 건 아니다.
“태양이 다른 백화점 고객을 쓸어담고 있어. 우리가 태양처럼 하면 효과가 더 좋겠지? 당연하지. 우리가 태양보다 못한 게 뭐가 있다고.”
곽태호가 자리에서 다시 일어났다.
“활력 토마토의 주인과 R 크림의 주인. 무조건 찾아내. 태양을 통해서 알아낼 수 없으면 전국 방방곡곡을 다 뒤져서라도 아는 사람을 찾아내!”
***
4선 국회의원 박재곤이 통화를 마친 후에 물었다.
“R 크림이라는 게 있다며?”
비서가 대답했다.
“예. 저도 들어봤습니다.”
“그게 그렇게 좋아?”
“연예인들이 가장 가지고 싶어 하는 화장품이라고 합니다.”
“그래?”
“나이가 좀 있으면 효과가 더 좋은데, 중년 정도만 돼도 십 년은 젊어 보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박재곤이 실실 웃었다.
“그럼 그걸 여자한테 주면 좋아하겠는데?”
“물론입니다.”
“얼마야?”
“크림 한 통에 백만 원이라고 들었습니다.”
“가서 넉넉히 사와. 한 열 개.”
“알겠습니다.”
***
두 시간 후에 비서가 당황한 얼굴로 보고했다.
“저기, 의원님. R 크림 말입니다.”
박재곤이 다리를 탁자에 올려놓은 채로 말했다.
“가져왔어? 그럼 두 개는 쓸 곳이 있으니까 놔두고, 여덟 개는 여자 의원들에게 돌려. 아무나 주지 말고, 내가 이름 불러주는 의원들에게 보내.”
“그게…. R 크림을 못 구했습니다.”
박재곤이 다리를 내리며 인상을 썼다.
“뭐? 시킨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못 구해?”
“R 크림은 한정판이라 연예인들도 구하기 어렵답니다. VIP 고객 중 일부만 1인 1개 판매에, 나머지는 온라인 추첨으로 당첨자한테 판매해서….”
“그거야 일반인들 이야기고!”
박재곤이 화를 벌컥 냈다.
“나 박재곤이야! 국회의원이라고! 국민의 대표한테 안 판다는 게 말이 되나! 어느 회사가 민주주의를 무시하고 그따위로 나와!”
“그게…. 태양 백화점입니다.”
박재곤이 인상을 썼다.
“태양? 그 깐깐한 할망구가 하는 백화점?”
“예. 거기 사장은 의원님과는 가는 길이 다릅니다. 무리해서 화장품을 받아오면 어디 장부에 적어둘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나중에 귀찮은 일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젠장. 태양 그거 확 망하게 해버리면 좋겠다. 잠깐. 그 앞에 백화점 하나 더 있잖아. 청명.”
“예. 의원님께 후원금을 내는 바람직한 곳입니다.”
박재곤의 눈이 가늘어졌다.
“청명을 이용해서 태양을 괴롭혀볼까?”
비서가 머뭇거렸다.
“의원님. 요즘은 청명이 태양에 완전히 눌려버린 상태라 그럴 힘이 있을지….”
“뭐? 청명이 장사를 어떻게 했길래 그 꼴이 돼? 원래는 비슷했잖아?”
“손자가 뭔가 크게 말아먹었는데, 거기다 R 크림이 결정타를 때렸다고 들었습니다.”
박재곤이 짜증을 냈다.
“젠장. 요즘은 왜 되는 일이 없어? 에이 씨발. 그래도 어떻게든 R 크림을 구해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정보기관 내근직 요원 강선정이 선우현을 찾아왔다. 선우현이 옥상 문을 열었다.
강선정이 방긋 웃으며 물었다.
“시간 괜찮으세요?”
김수선이 말했다.
- 얽혀서 좋을 게 없는 여자입니다.
“쫓아버릴까?”
- 좋은 생각이십니다.
선우현이 옥상 문을 닫으려 했다.
강선정이 황급히 문을 두 손으로 잡았다.
“잠깐만요! 손님이 왔는데 차 한 잔은 줘야죠!”
“손님 아닌 것 같은데.”
“손님으로 쳐주면 안 될까요?”
선우현이 강선정을 가만히 보았다.
“음….”
최종훈의 비서 김찬혁이 박재곤과 스래곤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고는 있다.
그런데 김찬혁이 모으는 정보는 기업 사이에 돌아다니는 소문이나 자료 같은 것들이다.
김찬혁이 JHC 테크의 인적 자원을 동원하면 더 민감하고 깊은 수준의 정보도 얻을 수는 있다. 그런데 그러다 들키면 김찬혁이나 JHC 테크가 치러야 하는 대가가 너무 크다.
선우현이 작게 말했다.
“내근직이라도 정보기관 소속이니까, 그것도 산업스파이 부서에 있으니까 뭔가 아는 게 있을 수도 있겠다.”
- 다시 생각해 보니 차 한 잔은 줘도 되겠군요.
“문제는 그 정보를 어떻게 탈 안 나게 받아내느냐인데….”
- 간을 좀 보시죠.
선우현이 옥상 문을 열어주었다.
“들어와요.”
“휴우.”
강선정이 옥상에 들어왔다. 선우현이 물었다.
“활토 주스는 당연히 안 될 테고, 커피?”
그녀가 아쉬움에 입맛만 다시며 말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도 될까요? 얼음 팍팍 넣어서.”
“여긴 커피믹스밖에 없는데, 그런 게 마시고 싶으면 내 것까지 사 왔어야지.”
“앗! 지금 나갔다 올게요.”
“됐으니까 기다려요. 그래도 손님인데.”
선우현이 신나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너 집에 있냐?”
- 넹!
“심심하면 건물 앞 카페에서 커피 두 잔만 사와라. 아아에 얼음 팍팍 넣어서.”
- 어머. 옥상 오빠. 날 막 부려먹….
“배달비 만 원. 아아 두 잔 값까지 총 이만 원. 잔돈은 가져.”
- 지금 신발 신고 있어요.
강선정이 옥상에서 경치를 감상하며 물었다.
“독일의 뮐러 교수와 새로운 기술을 공동으로 연구하고 있다면서요?”
“정보기관에서 그런 것도 압니까?”
“산업스파이 색출이나 국가 핵심 기술 보호가 우리 부서의 일이라서요. 어쩌다 소문이 들렸어요.”
“일부러 알아본 느낌인데?”
강선정이 잡아뗐다.
“어머. 아니에요. 저 바쁜 사람이에요.”
“그 연구는 기존에 개발한 소형 금속 부품 제조 기술에 다른 효과를 조금 추가하려는 겁니다.”
“연구가 놀라운 속도로 진전되고 있다던데요.”
“일 잘하네요. 그런 것도 조사하고.”
“지금까지 나온 성과만으로도 독일 쪽에서 놀라워하거든요. 그래서 소문이 들렸죠.”
강선정이 선우현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런데 그 연구의 최종 목표가 뭔지는 독일에도 알려지지 않았나 봐요.”
“아직은 될지 안 될지 모르는 거니까, 뮐러 교수님도 말을 아끼는 겁니다.”
- 제대로만 하면 탐사대 지원기술 중 하나를 현지화할 수 있습니다. 뮐러 교수의 실력이 모자라면 실패하겠지만요.
강선정이 물었다.
“어떤 기술인가요?”
“있습니다. 좋은 거.”
- 그 기술의 라이센스를 팔아서 우주왕복선의 랜딩 기어 값은 벌어야 할 텐데요.
선우현이 물었다.
“그거 물어보려고 온 겁니까? 그런 건 그냥 전화로 해도 되는데.”
“아니요. 그건 그냥 생각나서 물어본 거예요.”
“독일에 도는 소문까지 수집해서 왔으면서 그냥 생각나기는.”
“일은 일이니까요.”
“그럼 오늘은 일이 아닌 거로 찾아왔나?”
그녀가 시선을 화분 쪽으로 돌렸다.
“웅…. 어머. 활토가 진짜 맛있게 익었다.”
“공무원이니까 안 줄 겁니다.”
“쳇. 전에는 공짜 주스니까 줘도 된다더니.”
잠시 후에 신나리가 커피 캐리어를 들고 옥상에 올라왔다.
“옥상 오빠. 이런 심부름은 자주 좀 시켜요. 물론 배달비 추가된 유상으로.”
“손님이 빈손으로 와서 너 시킨 거야. 옜다. 이만 원.”
선우현이 스마트폰의 톡 어플로 돈을 이체했다.
“히히. 땡큐.”
“그런데 커피가 왜 네 잔이냐?”
신나리는 캐리어에서 커피를 두 잔만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캐리어에는 아직 두 잔이 남아 있었다.
“저랑 서윤 언니도 마셔야죠. 그런 의미에서 우리 커피값으로 만 원 더 보내줘요.”
“주겠냐?”
“안 주는구나. 그럼 두 분 좋은 시간 보내고 있다고 서윤 언니한테 다 일러야지.”
“내가 호랑이 새끼를 키우고 있었어.”
선우현이 톡으로 만 원을 더 보냈다.
신나리가 알림 메시지를 확인한 후에 활짝 웃으며 물었다.
“그런데 저분은 누구세요?”
“빨리도 묻는다. 일 관계로 회의하러 찾아온 분이야.”
“에이. 백수가 일하는 척은. 그것도 토요일에.”
“내가 너보단 많이 일하니까 가라.”
“넹!”
신나리가 내려가고 나서 강선정이 물었다.
“저 아가씨는 누구죠? 가까워 보이는데요.”
“이 건물 관리 알바를 하는 대학생인데, 친화력이 워낙 좋습니다. 활력도 넘치고.”
- 활력 토마토를 먹어도 효과가 없을 정도로 평소에 활력이 넘치죠.
“그렇구나.”
그녀가 커피를 조금 마시다가 본론을 꺼냈다.
“도와주세요.”
“거절합니다.”
“무슨 일인지 들어나 보고 결정해주세요.”
“들어볼 것도 없네. 정보기관에서 도와달라는 거 보니까 위험한 일일 텐데.”
“경찰 자료에서 그동안 하신 일을 봤어요. 위험을 즐기는 분 아니셨어요?”
“위험해지는 게 싫어서, 위험한 짓을 하려는 놈들을 미리 제거한 겁니다만?”
“네? 그게 말이 돼요?”
“됩니다. 난 평화를 매우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녀가 커피를 벌컥 들이켰다.
“이번 일은 하나도 안 위험해요.”
“그러면 정보기관에서 직접 알아서 하면 되겠네.”
“그게….”
그녀가 눈치를 살살 보며 말했다.
“공식 작전이 아니라서….”
“비공식 작전이다? 그러면 비공식 허가는 받은 겁니까?”
“아니요.”
- 선장님. 잘됐습니다. 이걸 이용해서 정보를 빼내십시오.
선우현이 강선정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가 그 눈빛을 피하다가 입을 열었다.
“분명히 수상한 정황은 있는데요. 저만 그렇게 판단하고 위에서는 아니라고 보거든요. 저는 내근직이라서 단독 작전도 할 수 없고….”
“커피 괜히 사줬네. 그냥 쫓아낼걸.”
선우현이 일어났다.
“나가요. 멀리 안 나갑니다. 아니다. 난 옥상에서 아예 안 나가겠구나.”
강선정이 서류를 가방에서 꺼내 내밀며 울상을 지었다.
“아무리 싫어도 이렇게 막 쫓아내는 건…. 너무해요!”
“잘못되면 나한테 독박을 쓰라고 하는 사람이 할 말은 아닌데. 그리고 우는 시늉 해도 안 통합니다. 연기력이 별로네.”
강선정이 언제 울상을 지었냐는 듯이 얼굴을 펴며 반박했다.
“독박이 아니라 쌍박이거든요? 이번 일이 망하면 저도 같이 망하는 거라서요.”
“도박판에 낀 사람만 박을 쓰면 되지 왜 나까지 끼워 넣습니까?”
그녀가 서류를 가방에 도로 집어넣으며 시무룩하게 말했다.
“안 되면 할 수 없죠. 시간 빼앗아서 미안해요.”
- 선장님? 너무 튕기셨는데요? 그냥 갈 눈치인데요? 이걸 이용해서 정보를 캐내셔야죠.
선우현이 말했다.
“그래도 손님인데 읽어보지도 않고 보내는 건 그렇겠네요. 커피 마저 마셔요. 그동안 그 서류가 뭔지나 좀 보게.”
강선정이 얼른 서류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표정도 대놓고 밝아졌다.
“네. 그냥 참고라도 해주세요.”
김수선이 말했다.
- 강선정은 앞으로도 내근직만 해야겠습니다. 현장 요원을 하기엔 얼굴에 감정이 너무 잘 드러납니다.
선우현이 서류를 대충 펼쳤다.
“별것 없겠지.”
김수선의 생각은 달랐다.
- 선장님. 잠시만요.
“왜?”
- 반쯤 가려진 사진이 이상합니다.
사진 하나가 다른 서류와 겹쳐져 일부만 보였다.
“어? 이거….”
선우현이 서류 사이에 끼워져 있는 사진들을 뽑아서, 하늘에서 볼 수 있게 서류 위에 펼쳐놓았다.
김수선이 말했다.
- 오른쪽 위 사진에 익숙한 게 보입니다.
선우현이 그 사진을 자세히 보았다. 작은 동상의 사진이었다.
그런데 그 동상의 일부분이 익숙한 모습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이거 옛날에 지상에 보낸 소형 관측 모듈과 겉모습이 비슷한데?”
- 네. 옛날에 가끔 투하한 탐사대 현장용 관측 모듈과 형태가 매우 유사합니다.
“그런데 이건 동상이잖아. 누군가 관측 모듈을 보고 유사한 형태로 만들었나?”
- 아니면 내부에 그 모듈을 넣고 겉을 금속으로 덮어씌웠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