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 투자금
남미연이 선우현을 찾아왔다.
선우현이 말했다.
“되게 당당한 표정이군요.”
“나 오늘은 좀 당당해도 돼요.”
“평소에도 당당하던데.”
“당연하죠. 나 남미연이잖아요.”
“지금 영화 촬영으로 바쁠 텐데 왜 여기까지 왔습니까?”
“내가 주연이라고 해서 나오는 설마 영화에 나만 나오겠어요? 촬영 없는 날이 자주 있어요. 그럴 때 스케줄을 소화하는 거죠.”
“이 옥상에 무슨 스케줄이 있다고?”
“흰둥이한테 있죠.”
남미연이 당당하게 말했다.
“우리 흰둥이한테 개 사료 회사에서 CF가 들어왔어요.”
“멍?”
남미연이 엠투의 목을 긁어주며 말했다.
“너도 좋지?”
“멍!”
선우현이 말했다.
“저건 먹는 건 다 좋단다.”
“우리 흰둥이 잘 먹이고 있는 것 맞아요? 왜 살이 빠진 것 같지?”
“엠투는 원래 살이 안 빠집니다.”
김수선이 말했다.
- 에너지나 부품 저장 상태나 자가 수리 상황에 따라 체중은 변할 수 있습니다.
“저장량이 많아지면 배가 나올 수는 있는데, 살이 빠지진 않잖아.”
선우현이 남미연에게 물었다.
“그 회사는 엠투의 CF를 왜 남미현 씨한테 연락했습니까?”
“그 회사는 선우현 씨 연락처를 모르니까요.”
“아. 그렇지.”
“뮤비를 보기는 했는데 누가 개 주인인지 몰라서 우리 소속사로 연락했어요.”
남미연은 그 뮤직비디오의 주연 배우다.
“내 소속사랑 전에 일한 적 있는 곳이에요. 그래서 내가 냉큼 만나보고 왔죠.”
그녀가 가방에서 문서를 꺼내며 말했다.
“일단 그쪽에서 제시한 조건은요.”
“거절합니다.”
“네? 아니, 왜요? 내가 대신 처리해서 그래요? 걱정하지 말아요. 사인이나 약속한 거 없어요. 난 흰둥이의 매니저 느낌으로 그쪽 조건만 받아온 거….”
“그게 아닙니다. 개 사료 CF는 안됩니다.”
남미연이 항의했다.
“아니, 이게 무슨 소리예요? 흰둥이가 CF 찍을 기회가 생기면 찍게 하겠다면서요!”
“엠투한테 먹방은 좀 그래서.”
엠투는 에너지원이나 자원을 입으로 먹어서 몸에 저장한다.
김수선이 말했다.
- 엠투가 먹는 모습은 사람이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자연스럽습니다. 오랜 지상 임무 수행으로 습성까지 개가 다 되기도 했고요.
“CF로 가까이서 찍는 건 이야기가 다르지. 먹는 모습을 확대해서 찍은 CF가 TV에 반복해서 나가면 말이야. 개 전문가가 뭔가 눈치챌 수도 있어.”
- 듣고 보니 그렇습니다. 자가 수리기능으로 모든 부품이 고쳐진 것도 아닙니다. 먹는 모습을 근접 촬영했는데 입안에서 스파크라도 튀면 큰일 납니다.
개의 입에서 스파크가 튀면 사람은 당연히 입안을 들여다보게 된다. 촬영용 장비의 부품을 먹은 줄 알고 동물병원에 데려가서 엑스레이라도 찍으면 일이 심각해진다.
선우현이 남미연에게 말했다.
“먹는 CF는 뺍시다. 엠투한테 먹방은 진짜 무리입니다.”
“우리 흰둥이가 얼마나 잘 먹는데!”
“촬영장에서 도대체 뭘 먹이는 겁니까?”
“개한테 좋은 거! 고기! 개가 좋아하는 거! 고구마!”
“엠투는 술을 더 좋아하는데.”
남미연은 화들짝 놀랐다.
“설마 여기서 술 먹여요?”
“어….”
“미쳤어요?”
엠투는 선우현이 술을 마실 때 곧잘 얻어먹었다. 캔맥주는 캔까지 씹어먹는다.
“농담입니다. 농담.”
어쨌든 엠투의 주인은 선우현이다. 개 사료 CF는 거절하기로 했다.
남미연이 씩씩댔다.
“두고 봐요. 우리 흰둥이가 진짜 멋지게 나오는 CF를 구해올 테니까.”
“먹는 것만 아니라면 언제든지 환영합니다.”
“나중에 딴소리만 해봐.”
***
남미연은 그날 밤에 정말로 엠투의 CF를 새로 구해왔다.
선우현은 살짝 당황했다.
“벌써?”
“나 한다면 하는 여자예요.”
“그런데 태양 백화점 광고네요?”
“맞아요. 내가 찾아가서 직접 땄어요. 이번엔 먹방 아니에요.”
“백화점에서 개 광고를 찍는다고요? 도대체 거기 가서 무슨 협박을 한 겁니까?”
그녀가 두 손을 모아 손가락 끝을 입술에 살짝 대고 눈을 깜빡였다.
“어머. 협박이라니요? 나 그런 거 할 줄 몰라요.”
“귀여운 척하지 말고요.”
“쳇. 안 통하네.”
“무슨 협박을 했는지는 확인해보면 알겠지요.”
선우현이 유소율 이사에게 전화를 걸어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보았다.
유소율이 상황을 설명했다.
- TV 광고는 아니에요. 너튜브에 올리는 광고예요. 포스터는 제작할 거예요.
“백화점에서 개를 배우로 쓰는 이유는요?”
- 그야 선우현 씨 개니까….
“그런 이유라면 이 CF는 안 해도 됩니다.”
- 그리고 남미연 씨가 우리 너튜브 CF에 그 개랑 같이 출연해주겠다고 했어요. 평소라면 제안조차 할 수 없는 조건이거든요. 우리 백화점 너튜브 전용 CF에 톱스타 남미연이라니.
“뭐, 그렇다면야.”
선우현이 전화를 끊은 후에 남미연을 보았다.
남미연이 씩 웃으며 말했다.
“나랑 흰둥이의 시너지가 얼마나 좋은지 알았죠? 그러니까 흰둥이를 나한테 보내요. 잘해줄게요.”
“그렇게 자꾸 찔러봐도 씨도 안 먹힙니다.”
“칫.”
“영화 촬영하면서 CF를 또 찍을 시간은 있습니까?”
“스케줄은 만들면 돼요.”
“그럼 CF 감독은 이번에도 최 감독님?”
남미연이 다시 웃었다.
“최 감독이 마음에 들었나 보다.”
“뮤비 찍을 때 보니까 잘하더군요.”
“뮤비 때는 내가 부탁하니까 최 감독이 특별히 해준 거예요. 또 맡기는 건 어려워요. 내가 전화로 물어는 볼 텐데, 기대하지는 말아요.”
남미연이 최진욱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야. 시간 되면….”
- 살려….
전화가 끊어졌다.
남미연은 당황했다.
“뭐야? 최 감독? 최 감독!”
그녀가 다시 전화를 걸었다. 상대가 받지 않았다.
선우현이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남미연이 조금 창백해진 얼굴로 말했다.
“몰라요. ‘살려’라고 말하고 전화가 끊어졌어요.”
“위험한 일이다 싶으면 신고부터 해요.”
“맞다! 경찰에 신고, 신고해야 돼!”
남미연이 급히 112에 전화를 걸었다.
선우현이 작게 말했다.
“수선아. 최 감독 집 알지? 체크 좀 해봐.”
- 지금 하고 있습니다.
잠시 후에 김수선이 보고했다.
- 선장님. 최 감독이 집 근처에서 수상한 놈들에게 끌려가 차에 태워진 채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옆에서 남미연이 휴대폰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요! 그냥 ‘살려’ 딱 한 단어만 말하고 전화가 끊어졌다고요!”
- 상황을 좀 더 설명해주셔야….
“목소리가 진짜 다급했어요! 분명히 큰일 난 거예요! 그러니까 휴대폰 위치추적이라도 해서 찾아야 해요!”
선우현이 말했다.
“휴대폰 위치추적은 효과가 없을 겁니다.”
- 납치하는 놈들이 휴대폰을 처리했을 겁니다.
“그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잖아요!”
“그냥 순찰차를 집으로 보내달라고 해요.”
- 집 내부가 아니라 집 근처에서 납치됐습니다.
“운이 좋으면 근처에서 납치 흔적을 찾겠지.”
선우현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남미연이 얼른 물었다.
“어디 가게요?”
“알아볼 게 좀 있어서요.”
선우현이 옥탑방 건물 밖으로 나왔다.
“놈들이 최 감독을 납치해서 어디로 가는지 보고 있지?”
- 물론입니다.
그렇다고 그 차 번호를 지금 경찰에 알려줄 수는 없다. 어떻게 번호를 알아냈는지 설명할 방법이 없다.
남미연도 따라 나와서 물었다.
“어디 가는데요? 나도 같이 가요.”
“남미연 씨는 경찰을 만나서 상황을 설명해야죠.”
“아. 그렇죠.”
***
최지석 감독은 머리에 검은색 봉투가 씌워진 채로 납치됐다. 그는 달리는 차의 뒷좌석에 겁먹은 목소리로 물었다.
“누군데 이러세요? 사람 잘못 보신 것 같…. 컥!”
최지석을 후려친 남자가 말했다.
“시끄러우니까 닥치고 있어라.”
차는 한참을 달려 정지했다.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우르르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내려!”
최지석은 눈이 가려져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손을 더듬으며 승합차에서 내렸다. 사람들이 그를 끌고 갔다. 발에 나뭇가지나 풀이 밟혔다.
“여, 여긴 어디….”
사람들이 최지석을 무릎 꿇렸다.
“벗겨.”
머리에 씌운 검은색 봉투가 사라졌다.
최지석이 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곳은 산속이었다. 한밤중인 데다가 숲이 울창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를 납치한 사람들은 얼굴에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최지석이 다급히 말했다.
“사람을 착각하신 것 같습니다. 저는 사채도 안 썼고, 어딘가의 조직원도 아닙니다. 이런 자리에 끌려올 이유가 없….”
최지석의 앞쪽에 서 있는 양복 입은 남자가 말했다.
“어이. 최지석이.”
“예? 예?”
“영화 다시 한다며?”
최지석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영화 하지… 말까요?”
“이 새끼가 지금 장난하나. 누가 그거 막으려고 너 데려온 줄 알아?”
“죄송합니다! 저기…. 그럼 왜….”
남자가 담배를 입에 물었다. 옆에 있던 부하가 불을 붙여주었다.
“예전에 투자금 받았던 건 다 돌려주면서 영화 접는다고 했다며? 그런데 다시 투자금을 모으러 다니네?”
“예? 아, 그건….”
“영화를 다시 할 거면 말이야. 지난번 투자금은 왜 돌려준 거야?”
“그건…. 아! 이자 안 쳐줘서 이러시는 거라면, 제가 이번 영화만 성공하면 꼭 갚겠습니다!”
“이 새끼가 장난하나.”
“예?”
“이미 다 받아놓은 투자금을 돌려주고 새로 돈을 모으러 다닌 이유가 있겠지.”
최지석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냥 그때는 영화가 안 풀릴 줄 알고 포기하려다가, 다시 생각해 보니 할 만한 것 같아서….”
“너 내가 바보로 보이냐? 그런 거면 원래 투자자에게 먼저 연락했겠지.”
남자가 담배 연기를 뿜었다.
“말이 되는 건 하나뿐이야. 너는 그 돈을 쓰기 싫었던 거야. 왜 쓰기 싫었을까?”
그가 최지석의 정면으로 걸어가며 물었다.
“그 돈이 누구 돈인지, 무슨 돈인지 알아낸 거겠지. 대답해라. 어떻게 알았지?”
“예? 몰랐….”
남자가 최지석을 향해 발을 내질렀다.
“케엑!”
최지석이 뒤로 밀려나 쓰러졌다. 옆에 있던 놈들이 최지석을 도로 일으켜 무릎 꿇렸다.
“우리가 장난하려고 널 데려온 것 같아? 제대로 대답 안 하면 오늘 밤에 네 손으로 판 구덩이에 묻히게 될 거다.”
최지석은 망설였다. 입을 다물고 있으면 정말 죽을 것 같았다.
“그때 그 돈은… 아는 사람이 충고했습니다. 출처가 수상하니까 돌려주라고….”
“출처가 어디라고 했는데?”
“범죄와 관계된 돈 같다고….”
“그럴 줄 알았다. 너한테 그 말을 해준 놈은 누구야?”
“예? 그건 말씀드릴 수가 없….”
남자의 목소리가 싸늘해졌다.
“죽고 싶어?”
최지석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는 여기서 이름을 말하면 그 사람도 위험해진다는 걸 깨달았다.
“잘 모르겠….”
“구덩이 파.”
“헉!”
부하가 전화를 받은 후에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형님. 저놈 집에 경찰이 왔답니다.”
그들은 최지석을 납치한 후에 상황을 보기 위해 한 명을 그 장소에 남겨두었다. 그런데 그 장소는 최지석의 집 근처였다.
남자가 인상을 썼다.
“어떻게 알고?”
“저희가 저놈을 잡을 때 어디서 전화가 걸려왔었는데, 1초 정도 짧게 말하는 걸 빼앗아 끊었습니다.”
남자가 부하를 걷어찼다.
“이 새끼가! 일 똑바로 안 해? 휴대폰부터 빼앗았어야지!”
“죄송합니다! 워낙 갑자기 일어난 일이라….”
“젠장.”
“어떻게 할까요?”
남자가 주변을 보았다.
“장소를 옮긴다. 혹시 이 근처까지 찾아오더라도,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게 해야 해. 그래야 손을 써서 허위 신고나 착각으로 만들기 편하니까. 흔적 지우고, 차 번호판도 바꿔.”
“예.”
***
선우현은 숲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이놈들 뭐지? 투자자인가?”
- 수상한 투자자입니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원래는 바로 쳐들어가서 구할 생각이었는데.”
최지석이 어디로 납치되는지는 김수선이 추적했다. 선우현은 오토바이를 타고 쫓아와 조금 전에 이 산에 도착했다.
“당장 어떻게 될 것 같지는 않으니까, 따라가서 저러는 이유를 좀 알아보자.”
- 최 감독은 몇 대 더 맞을 수도 있겠군요.
“괜찮아. 그 정도로는 안 죽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