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 여신
문체부의 김 국장과 그리스 대사, 그리고 통역사가 선우현을 만났다.
김수선은 이 장소에 나오지 않는다고 이미 말했다. 그런데도 김 국장은 미련이 남았다.
“김수선 씨를 뵙는 건 어렵겠습니까?”
“일단 제가 무슨 일인지 본 후에 필요하면 수선이에게 연락하겠습니다.”
“꼭 좀 부탁드립니다. 외교부에서도 협조를 요청한 일이기도 하고, 저도 김수선 씨의 노래를 무척 좋아해서요.”
선우현과 김 국장의 대화를 통역사가 그리스 대사에게 전했다.
대사가 그리스어로 불평했다.
“이건 일반인이 본다고 해서 알 수 있는 게 아닌데.”
선우현이 대사를 보며 말했다.
“못 믿겠으면 그냥 가던가요.”
대사가 인상을 쓰며 빠른 속도로 말을 쏟아냈다.
“내 대학 때 전공이 고고학입니다. 그리고 이건 그리스의 고대 문화에 정통한 학자와 과학자들도 100% 확신하지는 못하는 겁니다. 김수선 씨 정도는 되어야 의견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럴 가치가 있는지 먼저 확인해야겠습니다.”
“일반인은 봐도 모릅니다.”
“내가 못 알아보는 거면 그냥 가져가셔야지.”
“그리스의 대사인 내가 시간을 내서 찾아왔는데 그냥 가라니요?”
“난 뭐 시간이 남아돌아서 온 줄 압니까?”
김수선이 한마디 했다.
- 선장님은 시간이 남아도시는데요?
문체부 김 국장이 옆에서 통역사에게 물었다.
“저기, 지금 선우현 씨가 그리스어로 대화하는 겁니까?”
“네. 맞아요.”
“그리스어를 어느 정도로 하는 겁니까? 대화는 통하는 것 같은데….”
통역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발음이 너무 정확해서 그리스 사람이 말한다고 해도 믿을 정도예요.”
“예?”
그리스 대사도 뒤늦게 그걸 깨달았다.
“어? 그러고 보니 그리스어가 무척 자연스럽군요. 고향이 그리스입니까?”
“한국입니다.”
지금 아쉬운 건 그리스 대사다. 여기서 판이 깨져도 선우현은 아쉬울 게 하나도 없다.
게다가 선우현이 그리스어를 너무 잘했다.
그리스 대사가 잠시 망설이다가 가방을 열어 사진을 몇 장 꺼냈다.
“최근에 발견된 유물이 있습니다. 그리스 신화와 관계 있는 유물입니다.”
사진 속에는 돌로 만든 여신의 조각상이 보였다. 조각상이 밟고 있는 바닥에는 글자가 빽빽이 새겨져 있었다.
“이 유물이 진품이라면 당연히 사들여서 국보급으로 관리해야 하지만….”
“가짜인데 비싸게 사면 그리스 정부가 바보 취급을 당하겠군요.”
“예. 그래서 비공개로 전문가들의 조언을 얻는 중입니다.”
“결론은 안 났을 테고요.”
“그 시대에 이걸 직접 본 사람이나 사진이 남아 있을 리는 없잖습니까? 문서로 남아 있는 자료를 참고해 판단하는 중입니다.”
대사가 진지하게 말했다.
“김수선 씨는 그리스 고대 문화에 조예가 깊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김수선 씨의 의견을 듣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선우현은 그리스 대사가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뭘 가져왔든 그냥 돌려보낼까 하는 생각도 잠깐 했다.
그런데 사진을 본 후에 마음이 변했다.
선우현이 사진을 들고 일어나 창가로 갔다. 그는 창문을 열고 햇빛에 사진을 비추어보는 척하며 물었다.
“수선아. 보이냐?”
- 이제 여기서도 잘 보입니다.
“이거 그거지?”
- 그거네요. 그 시절에 찍어둔 영상 자료를 찾아보겠습니다.
선우현이 손짓했다.
“밝은 곳에서 보시죠.”
그리스 대사가 다가왔다. 선우현이 설명했다.
“삼천 년쯤 전에 이런 조각상이 만들어졌습니다.”
대사의 눈이 커졌다.
“일반인이 그걸 어떻게 알았습니까?”
“그 정도는 그리스에서도 알아냈나 보네요.”
“고대 문서에 이 조각상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쪽 전문가는 그 문서에서 말하는 조각상이 이것이라는 걸 알아내는 데만 며칠이 걸렸는데….”
선우현이 여신 조각상이 밟고 있는 바닥 부분을 가리켰다.
“여기 적혀 있는 이야기는 우리가 아는 그리스 신화의 고대 버전의 일부분입니다. 지금 신화와는 약간 차이가 있습니다.”
대사는 당황했다.
“잠깐만요.”
“왜요?”
“그 글씨를 보자마자 해석하신 겁니까?”
“뭐, 대충.”
대사의 말이 조금 공손해졌다.
“김수선 씨만 그리스 고대 문화에 조예가 깊은 게 아니군요.”
“저도 옛날 일이라면 좀 압니다.”
“그럼 이 조각상이 진품이라고 보시는 겁니까?”
“당연히 가짜입니다.”
“예?”
선우현이 사진 몇 장을 창틀에 주르륵 펼쳤다.
“원본과 모양이 조금 다릅니다.”
- 제가 당시 영상과 비교하고 있습니다. 옷에 장식이 조금 추가됐습니다.”
“그럴듯하게 보이려고 했는지, 옷에 필요 없는 장식이 좀 추가됐습니다.”
- 원본보다 몸매가 나쁩니다.
“체형도 약간 차이가 있습니다.”
선우현이 조각상의 얼굴 사진을 위로 들었다.
“결정적으로 얼굴 일부가 좀 다릅니다.”
- 원본은 더 예쁘죠.
대사가 급히 물었다.
“잠깐만요. 그러면 이건 누가 언제 만들었다는 겁니까?”
“당연히 위조범이 만들었겠죠. 그리스의 전문가들이 결론을 못 내릴 정도면 상당히 잘 만들었겠군요.”
“차이점이 있다고 하셨잖습니까? 우리가 모를 줄 알고 그 문서에서 말한 특징만 넣어서 위조품을 만들었다는 겁니까?”
“그건 또 아닙니다.”
“예?”
“몇 가지 다른 점도 있지만, 같은 부분도 많습니다. 특히 바닥의 판에 새겨진 글씨가 똑같습니다.”
선우현이 단언했다.
“이건 원본을 보고 만든 겁니다.”
왜 조각상에 다른 부분이 있는지는 짐작이 갔다.
“아마 원본이 좀 파손됐을 겁니다. 원본은 자기가 가지고, 위조품은 더 비싸게 팔려고 완전한 형태로 만든 겁니다.”
대사는 혼란에 빠졌다.
“어떻게 그런 걸 다 압니까? 이게 원본이 아닌 걸 사진만 보고 아는 것도 놀라운데,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아는 겁니까?”
“비밀입니다.”
“예?”
대사는 당황했다.
“그걸 설명을 안 해주면 믿을 수가….”
선우현이 사진을 돌려주었다.
“안 믿어도 괜찮습니다. 어차피 나랑 상관없는 일이니까요.”
그리스 대사는 갈등했다.
선우현은 이 조각상이 고대 문서에 언급된 삼천 년 전 그 조각상이라는 걸 사진을 보자마자 알아보았다.
이 일을 처음 맡은 전문가는 그걸 알아내는 데만 며칠이 걸렸다.
게다가 선우현은 거짓말을 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없다. 오히려 이 조각상이 진짜라고 밝혀진다면 그리스 정부의 항의를 받아야 한다.
고민하는 대사를 보고 선우현이 말했다.
“어쨌든, 진짜 보물은 이 위조 조각상이 아니라 그 파손된 원본입니다. 그리스 정부에 이걸 팔아먹으려던 사람을 족쳐보면 원본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을 겁니다.”
선우현이 종이를 한 장 가져와 볼펜으로 그림을 죽죽 그렸다. 김수선이 원본과의 차이점을 설명했다.
- 허리는 더 가늘게 하셔야죠. 얼굴도 더 예쁘게 하고요.
선우현이 그림을 다 그린 후에 말했다.
“원본 조각상은 이렇게 생겼으니까, 이걸 그 사람에게 들이밀면서 진실을 알고 있다고 해보시죠.”
대사가 그 그림을 보고 다급히 물었다.
“잠깐만요! 원본 조각상을 본 적이 있습니까?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모릅니다.”
“그럼 이건 어떻게….”
“그리스 전문가들도 고대 문서를 보고 이 조각상이 실존했다는 걸 알았다면서요. 저도 자료를 모아 분석하다 알게 됐습니다.”
- 선장님은 자료가 아니라 그냥 원본을 보신 거잖아요. 저도 지금 그 당시에 찍어둔 영상을 보면서 설명했고요.
대사가 혼란에 빠진 얼굴로 말했다.
“이 자료는 본국에 전달하겠습니다. 사실 여부 확인은 본국에서 할 겁니다.”
“그럼 이제 수선이는 안 찾으셔도 되겠지요?”
“물론입니다. 김수선 씨의 실력도 대단하다고 들었지만, 이게 사실이라면 선우현 씨가 부족할 것 같지는 않군요.”
- 아니, 잠깐만. 선장님보다 내가 아는 게 많은데! 훨씬 더 많은데!
“그럼 오늘 미팅은 여기까지. 가서 그것부터 처리하셔야겠네.”
그리스 대사가 인사하고 사진을 챙겨 그곳을 나갔다. 대사도 어서 본국에 연락해서 선우현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다.
김 국장이 선우현에게 다가왔다. 두 사람의 대화는 통역사가 김 국장에게 알려주었다.
“저기, 선우현 씨.”
“예.”
“그리스 고대 문화에 조예가 정말 깊으신가 봅니다.”
“그냥 취미로 조금 압니다.”
“취미…. 예. 그럼 혹시, 김수선 씨가 발표한 다섯 가지 민요도, 그러니까, 그 나라의 고고학도….”
“조금 압니다.”
“대단하십니다.”
“이번 일은 마침 제가 아는 것과 겹쳤던 것뿐입니다.”
“그렇게 겸손하게 말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나중에 그 나라들의 일로 부탁드릴 일이 있으면 연락드려도 될까요?”
“맨입으로는 좀 그런데요.”
문체부의 김 국장이 말했다.
“제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 주십시오. 합법적인 일이라면 힘을 다해 돕겠습니다.”
“제가 아는 일이라면 저도 돕겠습니다. 모르는 게 대부분이니까 기대는 하지 마시고요.”
세 사람은 인사를 하고 회의실을 나갔다.
회의실에 혼자 남은 선우현이 창가에 가서 하늘을 슬쩍 보며 말했다.
“수선아. 이거 어쩔 거냐?”
- 무슨 말씀이신지?
“네가 옛날에 친 사고가 지금까지 남아 있다.”
- 그건 사고가 아니라 단순한 장난이었습니다.
“현지 협력자한테 너의 모습을 말로 설명할 테니 여신상으로 만들라고 했잖아. 협력자가 너를 여신으로 착각하게 하려고 한 짓이잖아.”
- 장난이고 농담이었습니다.
“그 조각상은 너랑 닮지도 않았더라.”
김수선은 당당했다.
- 그래도 당시에는 다들 만족했습니다. 역시 여신의 아름다움이라는 칭송도 많았습니다.
“너랑 안 닮았다고.”
- 그게 뭐 중요하겠습니까? 저는 현지 협력자가 상상하는 모습을 현실에 만들 수 있게 조언해준 것뿐입니다.
“네가 그러는 바람에 고대 신화에 그 이야기가 섞여 들어갔잖아. 하늘을 나는 마차 이야기는 왜 해줬는데?”
- 제가 어디에 있는지 궁금해하는데, 지원위성이라고 말할 수는 없어서 힌트만 좀 줬습니다.
“너 그런 식으로 사고를 친 게 한두 번이 아니야.”
- 어차피 다 지난 일입니다.
“역시 김수선. 항상 당당해.
- 선장님께 배웠습니다.
***
며칠이 지난 후에 선우현의 옥탑방으로 초청장이 하나 배달됐다.
“이게 뭐야?”
봉투를 뜯어보았다.
“초청장이네? 무슨 고대 학술 연구 세미나인가 본데?”
- 그걸 왜 선장님께 보냈을까요?
“문체부 국장이 소문냈나 보다. 아. 그 아저씨 입 싸네.”
- 참석하시겠습니까?
“내가 왜 가겠냐? 그런 곳에 갔다가 괜히 밑천 털릴 일 있어?”
- 그러게 그리스 대사는 왜 만나셔서.
“문체부의 부탁이라길래 네 신곡 발표할 때 도움이 될까 했지.”
- 청탁할 일은 딱히 없을 텐데요?
“보험 삼아 했다고.”
- 그럼 그리스 대사를 만났을 때는 그 사진이 뭔지 모르는 척하시지.
“그러려고 했지. 그런데 네가 옛날에 친 사고가 아직도 남아 있으니까 관심이 가잖아.”
선우현이 초대장을 던져버렸다.
“내가 세미나에 안 보이면 나에 관한 관심은 금방 식겠지.”
선우현이 노트북에 영상 회의 프로그램을 실행했다.
“지금은 탐사대 기술 복원 외주 준 거나 신경 쓰자.”
- 맞습니다. 연구는 뮐러를 시키고 돈은 나눠야죠.
“뮐러 교수는 우리가 이것저것 알려준 덕분에 연구가 빠르게 진행되는 거야. 그 연구에는 우리도 지분이 있다고.”
독일 교수 뮐러는 탐사대의 소형 금속 부품 제작기술을 분석했다. 그리고 그걸 기반으로 방사능 저항 효과를 추가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중이다.
그 연구의 끝에 뭐가 있는지, 단계별 진행은 어떤 방향으로 해야 하는지 알려준 사람이 선우현이다.
탐사대 지원용 기술의 참고 자료에 그런 정보가 남아 있었다. 그걸 알려주면 나머지는 뮐러가 알아서 했다.
그런데 선우현은 연구를 전문으로 하는 과학자가 아니다. 중간 과정 몇 개도 알고 결과도 알지만, 과정을 모른다.
영상이 연결됐다. 독일 교수 뮐러와 JHC 테크 사장 최종훈의 모습이 화면에 나왔다.
인사말이 오간 후에 뮐러가 먼저 연구 진행 상황을 설명했다. 선우현은 대충 알아듣는 척했다.
뮐러가 설명을 마친 후에 말했다.
“다음 단계로 진행하려면 수백 번의 실험을 해서 답을 찾아야 할 듯합니다. 운이 나쁘면 수천 번을 해도 정답을 못 찾겠죠.”
선우현은 기술 자료에 적혀 있던 소재를 알려주었다.
“망간을 추가해 보시죠. 많이는 말고 조금만.”
뮐러가 영상 속에서 선우현을 빤히 쳐다보았다.
“왜 그렇게 봅니까?”
“저번에는 그렇게 가볍게 제안한 게 결국 문제의 해답이었습니다. 이번에도 그러시는군요.”
“아직 결과가 나온 게 아니잖습니까?”
“이번에도 망간으로 문제가 해결된다면, 선우현 씨는 이미 연구를 끝낸 거라고 봐도 되겠습니까?”
선우현이 어깨를 으쓱했다.
“난 그냥 진행되는 걸 보면서 아이디어를 제안하고, 결과가 어떻게 될지 예상하는 것뿐입니다. 직접 만들어본 적은 없습니다.”
거짓말은 아니다. 결과는 아는데 원리는 모른다.
그래서 선우현은 뮐러가 필요하고 뮐러도 선우현이 필요했다.
그런데 뮐러는 그 상황을 조금 다르게 받아들였다.
“역시 이론적인 부분은 정리를 마쳤군요.”
“그냥 직관으로 아는 겁니다.”
“허…. 그게 더 대단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