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 날먹 II
선우현이 뮐러 교수에게 독일어로 말했다.
“그런데 그거 그렇게 하는 거 아닌데.”
“예?”
“다양한 실험을 하는 건 좋은데, 그렇게 맨땅에 헤딩하면 결과 나오기 전에 머리가 먼저 깨집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잘.”
지원위성의 자료에는 합금에 추가 효과를 주는 방법이 간단하게 설명되어 있다. 탐사대의 장비를 사용하면 그 정도만 알아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선우현은 개념만 간단히 설명하고 넘긴 후에 성공했을 때의 효과를 알려주었다.
“그렇게 하면 소형 금속 부품에 방사능 저항력이 조금 생깁니다.”
뮐러의 눈이 커졌다.
“방사능 저항력이요? 진짜입니까?”
“지금 설명한 건 1단계라 저항력은 약합니다만, 뮐러 박사님이라면 그 효과를 쉽게 측정할 수 있겠지요.”
“잠깐만요. 1단계라는 말씀은….”
“다음 단계는 추가 효과가 더 강해지는데, 그거야 1단계를 성공한 다음에나 고민할 문제죠. 거기까지도 못 갈 수도 있으니까.”
뮐러 교수는 당황했다.
“이미 그걸 연구하셨으면서 왜 발표를 안 하신 겁니까?”
“안 해봤으니까요. 그렇게 될 거라는 예상만 하고 있습니다.”
- 설명서에 개략적인 방법만 적혀 있으니까 더 알려주고 싶어도 알려줄 게 없습니다.
선우현이 제안했다.
“대략적인 방법은 구상했고 결과도 예측했습니다. 다만, 이론을 확실히 정립하거나 실험으로 확인한 건 아닙니다. 정말로 그렇게 될지는 직접 연구해서 확인해보시던가요.”
뮐러 교수가 눈을 반짝였다.
그는 선우현의 말을 그가 기존에 연구하던 것에 적용해 생각해 보았다. 생뚱맞은 이야기는 아니었다. 잘하면 선우현의 말처럼 될 것 같았다.
“그걸 제가 맡아도 되겠습니까?”
“공동 연구가 하고 싶다면서요.”
“고맙습니다!”
천호성은 옆에서 선우현과 뮐러 교수의 대화를 들었다.
그는 외국 진출을 대비해 영어를 따로 배웠다. 원어민처럼 잘하는 건 아니지만 간단한 인터뷰 정도는 가능했다.
그래서 선우현과 독일 교수가 영어로 이야기한 앞부분은 알아들었다.
“매니저라더니….”
구하니도 영어를 조금 한다. 게다가 그녀는 선우현이 활력 토마토의 주인이며 R 크림의 개발자라는 것도 안다.
그녀가 자랑했다.
“내 매니저는 과학자이기도 해.”
“독일 대학에서 공동 연구를 제안할 정도인 사람이 왜 네 매니저를 하는데?”
“그래서 전담이 아니라 일일 매니저만 하잖아.”
두 사람은 독일어 대화는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게 독일어라는 것만 알았다.
“네 매니저는 독일어는 또 왜 저렇게 잘하는데?”
“글로벌하지? 독일 행사에 같이 가면 통역을 쓸 필요가 없어.”
뒷말은 속으로 삼켰다.
‘데려갈 수만 있으면 말이지. 그런데 진짜 독일어도 잘하네.’
홍은성이 조금 떨어진 곳에서 말했다.
“와. 우리 형님. 싸움도 잘해. 곡도 잘 써. 거기다 외국어도 잘해. 만능이네. 만능.”
오민하는 입을 벌린 채 선우현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오민하?”
“나 우현 오빠한테 반해도 될까?”
“그러면 구하니 선배님한테 혼나지 않을까?”
“으응? 왜?”
“찬물도 위아래가 있고 줄을 설 때도 선착순이 국룰이잖아. 위아래나 선착순에서 네가 유리한 게 뭐가 있는데?”
“내가 더 젊은데? 그거면 된 거 아니야?”
“그런데도 미모에서 네가 밀린다. 게다가 구하니 선배님은 요즘 R 크림을 풍족하게 쓰셔서 그런지 너보다 젊어 보이셔.”
홍은성이 말하다 피식 웃었다.
“가수로서의 능력은 뭐 비교하는 게 죄송한 일이지.”
“너 누구 편이니?”
“설마 네 편이겠냐?”
뮐러 교수는 흥분해서 말을 쏟아냈다. 그가 연구한 것에 선우현이 말한 걸 더해 전문용어가 잔뜩 섞인 이야기를 했다.
선우현은 적당히 듣는 척만 했다.
김수선이 말했다.
- 뮐러에게 공동 연구로 위장한 독박 연구를 맡기려면, 선장님이 바보라는 걸 들키지 않아야 합니다.
“일단 시간을 벌어놓고 궁리해 보자. 그리고 나 바보 아니다.”
선우현이 손을 들었다.
“뮐러 교수님. 지금 여기는 식당입니다. 보는 사람이 많습니다.”
“아. 그렇군요. 그러면 장소를 옮길까요?”
선우현이 가수들을 슬쩍 가리키며 말했다.
“제가 일행들이 있어서요.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시죠.”
“그럼 오후에….”
“오늘은 일행들과 일정이 계속 있습니다.”
뮐러는 당황했다.
“저는 저녁 비행기로 출국해야 합니다.”
“그래요?”
- 잘됐군요. 시간을 많이 벌 수 있겠습니다.
선우현이 얼른 제안했다.
“그러면 이메일을 보내시죠. 아니면 전화로 이야기하거나 화상통화를 하시죠.”
“물론 그래도 되지만 직접 보면서 토론하면 더 좋을 텐데….”
“나중에 독일에 갈 수도 있으니까요.”
그 말이 뮐러에게 먹혔다. 어차피 이런 연구는 하루 이틀 만에 결과를 내야 하는 게 아니다.
뮐러가 아쉬움을 가득 남기며 자리를 비켜주었다.
“휴우. 겨우 보냈네.”
- 그런데 식사는 어디서 하시게요?
홀에서 식사하면 뮐러가 다시 붙어서 질문할 게 뻔하다.
선우현이 구하니에게 말했다.
“이 뷔페식당에 오늘 행사 참석자용 공간을 따로 빌렸다면서요. 오늘은 내가 하니 씨 매니저니까 같이 가도 됩니까?”
구하니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물론이죠!”
홍은성도 얼른 말했다.
“형님. 제가 가방을 들어드리…. 빈손이시구나.”
선우현은 뮐러 교수를 피해 구하니와 함께 뷔페식당의 별도 공간으로 들어갔다.
그 공간은 주말에는 돌잔치 같은 행사를 치르기도 하고, 평소에는 이렇게 따로 모임을 위해 제공되기도 한다. 그래서 연예계 관계자들만 모여서 식사하기 좋았다.
대신에 음식은 사람이 홀에 가서 가져와야 한다.
인기 연예인이 홀을 돌아다니며 음식을 담으면 사람들의 관심이 몰린다.
그래서 매니저가 같이 온 경우는 그 사람이 연예인의 음식을 대신 가져다주었다. 선우현이 진짜 구하니의 매니저라면 그녀의 음식은 그가 가져와야 한다.
그런데 그러면 홀에서 뮐러 교수와 다시 마주친다.
“밥 가지러 가면 그 아저씨가 또 귀찮게 할 텐데.”
홍은성이 얼른 말했다.
“형님 건 제가 가져오겠습니다.”
오민하가 그 말을 듣고 벌떡 일어났다.
“아니야. 제가 가져올게요! 선배님 것도요!”
선우현이 물었다.
“안 불편하겠어?”
두 사람이 대답했다.
“저희는 인기가 없어서 괜찮아요.”
“아무도 안 다가와요.”
두 사람이 경쟁하듯이 홀로 나갔다.
옆 테이블에 앉은 천호성이 선우현이 들으라는 듯이 말했다.
“쟤들은 왜 저래? 연예인이 남의 매니저 밥이나 타다 주고 말이야.”
구하니가 천호성을 째려보았다.
“그만 좀 하지?”
“내가 뭘? 당연한 걸 말했을 뿐인데.”
선우현이 구하니에게 말했다.
“밴댕이라는 물고기가 있습니다.”
구하니가 천호성을 보며 말했다.
“어머. 알아요. 뱃속이 좁은 물고기죠? 그래서 밴댕이 소갈딱지란 말이 생겼다면서요?”
“그 말에는 다른 유래도 있습니다. 밴댕이는 조금만 열 받아도 자기 성질을 못 이기고 죽어버립니다.”
구하니가 갑자기 선우현의 팔을 잡았다.
“쟤 죽이면 안 돼요. 말을 싸가지없게 해서 그렇지 나쁜 놈은 아니에요.”
“왜 그런 오해를 합니까? 내가 막 죽이고 다니는 사람도 아닌데.”
천호성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지만 죽인다는 부분은 손톱만큼도 믿지 않았다. 밴댕이라고 놀린다고만 생각하고 발끈했다.
“뭐야? 지금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야?”
“어머. 들렸어? 그럼 안 들릴 정도로 떨어져 앉아.”
천호성은 물러나지 않았다.
지금 이 공간에는 일반인이 없다. 업계 관계자만 있어서 홀에 있을 때보다 큰소리를 내도 수습할 수 있다.
천호성이 선우현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과학자가 하니의 매니저는 왜 하는 거지?”
“부탁받았으니까.”
구하니가 맞장구를 쳤다.
“맞아. 내가 부탁했어.”
“하니 너 정신 차려. 과학자가 왜 네 매니저를 해? 저 인간 분명히 다른 목적이 있다.”
“무슨 목적?”
“뒷돈 받고 접근한 스파이?”
“그런 거 아니야.”
“그게 아니면 너를 꼬시려는 거겠지.”
구하니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쯤이야 뭐.”
“뭐?”
“다른 일에 비하면 딱히 위험한 것도 아니란 뜻이야. 습격도 당해봤는데 그쯤이야 뭐.”
천호성은 당황했다.
“어? 습격이라니?”
구하니는 예전에 도로에서 공격당했던 일을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때 선우현이 그녀를 구해주었다.
그때 그녀를 일 년이나 괴롭히던 사고 후유증이 완치됐다. 목소리도 최고의 상태로 돌아왔다.
‘내가 잠깐 기절한 사이에 선우현 씨가 뭔가 한 것 같은데.’
그때는 그냥 그렇게 짐작만 했다. 말이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확신을 가진 건 아니었다.
그런데 이제는 선우현이 활력 토마토나 R 크림을 만든 사람이라는 걸 안다. 그때 한 짐작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뭘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지만, 남에게 알려서는 안 되는 일이겠지. 그건 기적 같은 거니까.’
그래서 그 사건은 경찰에 신고한 것 외에는 공식적으로 알리지 않았다.
그녀가 천호성에게 말했다.
“그런 게 있어. 그리고 넌 좀 꺼져줄래?”
천호성은 자존심이 세다. 옆 테이블에서 계속 버텨보려고 했는데 구박을 몇 번이나 받으면서 그러긴 어려웠다.
“내가 가는 건 우리 매니저가 도착해서 가는 거야. 네가 가라고 해서 가는 거 아니다.”
“알았으니까 가라고.”
천호성은 선우현을 째려본 후에 다른 자리로 이동했다.
홍은성과 오민하가 눈치를 보다가 천호성이 사라진 후에 자리에 앉았다. 두 사람은 접시 네 개를 가져왔다.
“형님. 제가 맛있는 것만 골라 왔습니다.”
“제 접시가 더 맛있어요.”
네 사람은 식사를 시작했다. 선우현이 말했다.
“저게 가고 나니까 조용해서 좋네.”
식사 도중에 음원 이야기가 나왔다.
오민하가 말했다.
“외삼촌이, 그러니까 우리 사장님이 그러시는데요. 김수선 씨의 고대 민요 시리즈는 발매 준비가 다 됐대요.”
“바로 진행하면 되겠네. 목소리 녹음 원본은 구하니 씨한테 받아.”
“네? 구하니 선배님이 왜….”
구하니가 말했다.
“너튜브에 올린 건 내 작업실에서 녹음했으니까. 보이스 파일은 내가 가진 게 원본이야.”
“어머. 그러니까 우현 오빠랑 선배님이 같이 작업을….”
구하니가 코를 살짝 들며 말했다.
“우리가 그 정도 사이는 되니까.”
“그, 그럼 김수선 씨의 신곡은요?”
“고대 민요는 당연히 내 작업실에서 계속….”
“가요라던데요?”
“잠깐만!”
구하니가 선우현에게 물었다.
“신곡 썼어요?”
“쓰는 중입니다.”
- 제가 복원하는 중이죠.
“김수선 씨가 부를 건가요?”
“그렇죠?”
“나는요?”
- 이 노래는 제 거입니다.
“음…. 다음에?”
“그 다음이라는 게, 날짜 확정해줄 수 있는 다음이에요?”
“아니요.”
“쳇. 역시 그렇구나.”
오민하가 얼른 말했다.
“오빠. 우리도 곡 하나만 주세요.”
“형님! 우리도 곡 하나만!”
“시끄러.”
***
구하니의 고대 민요 시리즈 다섯 곡은 1절이 한국어로 녹음되어 있다. 대신에 2절은 그 곡이 유행했던 시대의 해당 지역 언어로 녹음됐다.
그러다 보니 2절에 사용된 언어는 현대와는 차이가 있었다. 그건 현재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도 알아듣기 어려웠다.
김수선은 그 다섯 곡의 1절을 그동안 그 다섯 나라의 현대 언어로 번역해 조금씩 녹음했다.
팔찌형 통신기의 음성 기능은 재사용 대기시간이 있어서 자주 쓸 수 없다. 그래도 기회가 생길 때마다 녹음한 덕분에 드디어 다섯 곡의 현대어 1절 녹음이 끝났다.
선우현이 기획사 사장 박대석을 만났다. 박대석이 활짝 웃었다.
“김수선 씨의 고대 민요 다섯 곡이, 현지 현대 언어로도 녹음됐다는 겁니까?”
“두 가지 버전이 있는 거죠. 1절이 한국어인 것 하나, 해당 국가 현대 언어인 것 하나.”
“그럼 모두 열 곡이군요. 이러면 정규 음반으로 내도 되겠습니다.”
정규 음반으로 만든다고 해서 기획사가 손해 보는 건 없다. 어차피 제작 비용은 선우현이 낸다.
대신에 음원 수익 비율은 선우현 쪽이 훨씬 높다.
음성 파일은 구하니의 작업실에서 녹음한 것을 그대로 사용했다.
그건 다시 녹음할 여유가 없다. 외부 시설에서 녹음 방식을 보여줄 수도 없다.
구하니는 팔찌형 통신기를 사용해 녹음해도 따지지 않는다. 하지만 다른 녹음실에서 그렇게 하면 의심하는 사람이 나올 수밖에 없다.
대신에 악기 연주 부분은 모두 새로 녹음하기로 했다. 그건 딱히 숨길 필요가 없다.
박대석이 말했다.
“세션은 실력 있는 사람들로 섭외하겠습니다.”
너튜브에 올린 노래는 악기를 직접 연주한 게 아니다. 비슷한 악기의 합성음을 사용했다.
이번에는 진짜 악기를 사람이 직접 연주해 녹음하기로 했다.
김수선이 말했다.
- 선장님이 연주할 생각은 마시죠.
“나도 그 시대의 악기를 연주할 수 있을걸?”
- 연주해본 적 없으시잖아요.
지원위성의 부족한 자원을 악기 만드는 데 쓸 수는 없었다. 그래서 연주하는 방법만 알았다.
“실제로 하면 잘할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 그냥 전문 연주자에게 맡기시죠.
“수선아. 전문 연주자를 쓰면 돈이 들잖아. 나는 공짜로 할 수 있어.”
- 제가 여기서 허리띠를 졸라매고 레드 포션을 하나 더 복원하면 되겠습니까?
“최고의 연주자로 섭외할게. 필요하면 그 나라 전통악기 연주자를 데려와서라도 해야지.”
- 그 당시 악기와 현대에 복원한 전통악기에 차이점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내가 그 시대 악기와 똑같은 걸 새로 만들어서라도 제대로 녹음할 테니까, 넌 포션만 만들어놔.”
- 새 레드 포션이 없으면요?
“그러면 네 정규 음반에는 너튜브에 쓴 기계 합성음을 그냥 대충 쓰겠지?”
- 포션 작업에 쓸 에너지부터 모아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