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 날먹
선우현이 서울 삼성동에 있는 국제 전시장을 찾아갔다. 오늘 그곳에서 신기술 관련 세미나가 열린다.
김수선이 물었다.
- 선장님이 그런 세미나를 본다고 뭘 좀 아시는지?
“수선아. 나 지구연합에서 온 사람이다.”
- 지금 시대의 평범한 사람이 100년 전으로 돌아가면 과학 기술을 이해하기 쉬울까요?
“당연히 쉽겠지.”
- 그때쯤 발표된 상대성 이론을 듣는다면요?
“그건 선 넘었지. 그런데 설마 이런 세미나에서 그런 무거운 게 나오겠냐?”
- 그럼 가벼운 이야기를 왜 굳이 들으러 가신 겁니까?
“혹시 아냐? 탐사대 기술 현지화에 도움이 되는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을지.”
탐사대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김수선이 태도를 바꾸었다.
- 그게 목적이라고 말씀을 하시죠. 또 놀러 가시는 줄 알았습니다.
“최 사장님이 초대장을 줘서 가는 거긴 하지.”
선우현이 신기술 세미나 행사장에 들어갔다.
세미나는 이미 시작됐다. 외국 교수가 영어로 설명하고 있었다.
- 좀 늦으셨군요.
“괜찮아. 지금 들어보니까 이 강연은 늦어도 되는 거다. 기술 이론을 아주 본격적으로 설명하잖아.”
- 아는 이론입니까?
“아니. 들어도 하나도 모르겠다.”
- 선장님?
“어차피 모르는 거 좀 늦으면 어때.”
그 교수가 강연에 사용하는 언어는 영어다.
선우현은 지원위성에서 지상을 보며 다양한 시대의 언어를 익혔다. 그중에는 영어도 있다.
하지만 교수가 영어가 아니라 한국어로 설명했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전문용어에 전문수식까지 쏟아져 나오는데 저걸 내가 어떻게 알아.”
선우현이 지원위성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다. 그 긴 시간 동안 지상을 관측하고, 현지 협력자 주변에서 오가는 대화를 들으며 많은 걸 알게 됐다.
20세기부터는 TV와 라디오로도 정보를 얻었다. 그래서 현재 지상의 상식에 뒤처지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TV로는 최신 고급 이론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전문지식을 얻을 방법이 거의 없었다.
사용 가능한 휴대용 위성 통신기는 이미 예전에 모두 소모됐다. 통신기가 없으면 현지 협력자도 선정할 수 없다.
최종훈은 선우현이 지상에 직접 내려온 덕분에 현지 협력자로 선정할 수 있었다.
선우현은 그동안 이 지구의 최신 기술과 과학 이론을 책도 아니고 TV로만 접했다. 그래서 지금 교수가 설명하는 수식을 해석하고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최 사장님이 나를 멕인 것 같다.”
멕인 건 아니다.
최종훈은 선우현이 천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최신 이론이 나오는 이 세미나의 초대장을 보냈다. 그는 선우현이 이 세미나를 좋아할 줄 알았다.
교수의 강연이 끝났다.
선우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 더 있는 건 시간 낭비…. 음? 잠깐.”
스크린에 뜬 다음 발표 주제가 그의 관심을 끌었다.
“우리 탐사대 기술이 나온다는데?”
- 탐사대 현장 기술을 지상에서도 독자적으로 개발할 수는 있습니다. 이미 그런 게 여럿 있잖습니까?
“그게 아니야. 우리가 상용화한 소형 금속 부품 제작기술. 그걸 누가 분석해서 발표하겠다네?”
- JHC 테크에서요?
선우현은 JHC 테크를 통해 그 기술의 라이센스를 판다. 이미 여러 회사가 그 기술을 사서 부품 제작에 사용하고 있다.
선우현은 자리에 앉았다.
“독일 대학교수라는데…. 좀 들어보자.”
단상에 독일 교수 뮐러가 올라왔다.
뮐러 교수는 연구 결과를 영어로 발표했다. 그의 발표에도 수식이 많이 나왔다.
그런데 이건 선우현과 김수선이 이미 복원해 상용화한 기술이다. 수식을 다 이해하진 못해도 무슨 소리를 하는지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이야아. 그게 그래서 되는 거였구나.”
- 그러게요. 금속 원자 사이의 관계가 그렇게 되는 거였군요.
“응용 분야도 있다는데?”
- 우리도 모르는 응용 분야를 찾아냈다고요?
“기회가 되면 JHC 테크와 공동 연구를 해서 완성하고 싶다잖아.”
- 성공하면 라이센스비가 추가로 들어오겠군요.
“좋네.”
- 저 교수가 선장님한테 그 이론의 디테일한 부분을 묻지 않는다면요.
“응?”
- JHC에서는 선장님이 그 기술을 개발했다고 알고 있으니까, 뮐러 교수가 묻고 싶은 게 있으면 선장님을 찾겠지요. 질문에 대답할 수 있으신지?
선우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서 빠져나가야겠다.”
어차피 오전 강연은 거의 끝났다. 다음 강연은 점심을 먹은 후에 다른 사람에 의해 진행할 예정이다.
“나가서 밥이나 먹고 집에 가야겠다.”
- 빠져나가겠다면서, 굳이 거기서 식사를 하시게요?
선우현이 초대장을 흔들었다.
“여기 뷔페 식사권이 포함되어 있으니까, 이건 먹어주고 가야지.”
- 선장님. 솔직히 말해 보시죠. 세미나가 목적입니까? 아니면 뷔페가 목적입니까?
“겸사겸사.”
- 무게추가 뷔페로 기울어지는 느낌입니다.
이 시설에는 행사장과 문화 공간, 그리고 식당들이 있다.
선우현이 세미나가 열리는 행사장을 나가 복도에서 밥 먹을 곳을 찾아보았다.
한쪽에 대형 포스터가 보였다.
“어? 오늘 여기서 하니 씨 행사가 있나 본데?”
- 공연인가요?
“그건 아니고, 문화 행사 초대손님 명단에 있어. 하니 씨는 공연 활동을 줄인 대신에 이런 행사에 잘 참석하나 보다.”
그 행사가 열리는 곳은 바로 옆에 있었다.
“하니 씨 만나서 같이 밥 먹으러 가자고 할까?”
- 행사 참석하러 온 사람한테요? 구하니가 설마 혼자 왔겠습니까?
“아. 그런가? 그럼 혼자 밥 먹으러 가야….”
“어머. 선우현 씨!”
선우현이 뒤로 돌아섰다. 구하니가 빠른 걸음으로 걸어왔다.
“여기는 어쩐 일이세요? 저 보러 오신 거예요?”
“아니요.”
“네. 아니시군요.”
이번에는 선우현이 물었다.
“일행은?”
“혼자 왔는데요.”
“음? 매니저는?”
“선우현 씨가 안 맡아줘서, 이런 행사는 그냥 혼자 와요. 가끔 필요할 땐 유정이가 도와주고요.”
“난 안 된다니까요.”
구하니가 손을 흔들었다.
“농담이에요.”
“무슨 농담을 그렇게 눈을 반짝이며 합니까? 아. 그렇지. 혼자 왔으면 점심은 어쩔 겁니까?”
“여기 뷔페로 가려고요. 행사를 주최한 협회가 참가자 식사제공을 여기 뷔페 이용권으로 대신했거든요.”
“나도 여기 뷔페 이용권이 있는데 잘됐네요. 같이 갑시다.”
구하니가 살짝 걱정했다.
“저랑 같이 가면 사진 찍힐 텐데 괜찮겠어요?”
“따로 먹으면 됩니다. 가는 동안은 매니저인 척하면 되고요.”
“그거 좋은 생각이네요. 가는 동안만 그러는 건 좀 아쉽지만요.”
두 사람은 뷔페식당으로 이동했다.
오늘 문화 행사에는 연예인이 여러 명 참석한다. 협회에서는 그들을 위해서 뷔페식당 안쪽에 독립된 공간을 따로 빌렸다.
“하니 씨는 그쪽으로 가요. 난 여기서 먹을 테니까.”
“같이 가셔도 되는데요. 계속 매니저라고 하면 되잖아요.”
“괜찮습니다.”
“쳇.”
뒤쪽에서 홍은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 형님!”
선우현이 뒤를 돌아보았다. 에이투원의 멤버 홍은성이 보였다.
“쟤도 오늘 행사에 옵니까?”
“에이투원에서는 은성이만요.”
“앗! 우현 오빠!”
“오민하도요?”
“네. 은하소녀에서는 민하만 왔어요.”
그녀의 눈이 조금 가늘어졌다.
“그런데 민하하고 오빠 동생 하는 사이에요?”
“아니요. 혼자 저렇게 부릅니다.”
가늘어졌던 눈이 도로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렇구나.”
오민하가 다가와 호들갑을 떨었다.
“어머. 오늘 행사에 우현 오빠도 참석하는 거예요?”
“아니.”
“네? 그럼 여기는 왜…. 혹시 하니 언니 도와주러….”
“그것도 아니고.”
홍은성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오늘도 악당들이 쳐들어왔나요?”
“넌 오버하지 마라.”
“넵!”
선우현이 손을 휘휘 저었다.
“다들 가서 밥 먹어요. 사람들이 시선이 나한테 모이기 전에.”
구하니가 말했다.
“시선이라면 이미 이쪽으로 모이고 있는데, 그냥 같이 가서 드시죠.”
“그래야 하나….”
연예인이 한 명 더 나타났다. 가수 천호성이었다.
“구하니. 연예인에 왜 사람들이 보는 곳에서 떠들고 있냐? 격 떨어지게.”
구하니가 인상을 살짝 썼다.
“말조심해라.”
“사실이잖아.”
“너만 그렇게 생각해.”
“그런 사람 많다. 쟤들도 그렇게 생각할걸?”
구하니와 천호성은 인기 가수다.
무명만 겨우 면한 홍은성과 오민하가 둘 사이에 튀는 불꽃을 감지하고 슬그머니 뒤로 빠졌다.
“좀 빠져 있자. 유탄만 맞아도 우리는 즉사야.”
“스쳐도 죽지.”
“형님도 빠지셔야 하지 않나?”
“오빠도 빠지셔야지.”
천호성은 선우현의 얼굴을 이제야 보았다. 그의 눈이 커졌다.
“어? 너 그때 복도에서 그….”
“또 보네?”
천호성은 그때 선우현에게 시비를 걸었다가 기세에 눌려 겁먹고 자리를 피했었다.
그는 그날이 일이 생각났다. 다시 생각하니 자존심이 상했다.
게다가 지금 이곳에는 사람이 많았다.
‘여기서 설마 내 멱살을 잡으면서 문제를 일으키지는 못하겠지.’
천호성이 판단을 끝내자마자 삐딱하게 서서 턱으로 선우현을 슬쩍 가리키며 구하니에게 물었다.
“누구냐?”
구하니는 선우현을 소개할 말이 여럿 떠올랐다.
‘호성이가 그렇게 먹고 싶어 하던 활력 토마토의 주인. 그렇게 갖고 싶어 하던 R 크림의 개발자. 그리고 꼭 곡을 받고 싶다고 하던 하늘에 핀 꽃의 작곡가.’
어느 정보도 주기 싫었다.
‘분명히 선우현 씨한테 질척댈 거야.’
일부러 다른 대답을 내놓았다.
“오늘은 내 매니저.”
“너 아직도 알바 매니저 쓰냐? 정식 매니저 구하라니까?”
“내 마음이니까 신경 꺼라.”
“내 마음은 신경을 쓰고 싶은데?”
천호성이 선우현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봐. 매니저. 우리끼리 이야기하게 좀 비켜주지?”
“하니 씨가 원하지 않는데 내가 왜?”
“뭐? 당신 내가 누군지 몰라?”
“누구더라?”
“나를 모를 리가 없잖아!”
천호성이 목소리를 키웠다가 얼른 주변을 보았다. 이런 곳에서 큰소리로 시비가 붙으면 좋을 게 없다.
천호성이 작은 소리로 으르렁댔다.
“당신 이 바닥에서 일하기 싫어?”
“하기 싫은 거 어떻게 알았지?”
“뭐?”
구하니의 목소리가 싸늘해졌다.
“천호성. 너 가.”
“야. 내가 이런 무시를 당할 사람이 아닌 거 너도 알….”
옆에서 갑자기 영어가 들렸다.
“Mr. Sun?”
선우현이 옆을 보았다.
조금 전에 세미나에서 소형 금속 부품 제작기술의 원리를 설명한 독일 교수 뮐러가 다가왔다.
선우현이 그 옆을 보았다. JHC 테크 연구소 팀장이 보였다. 연구소에서 기술 테스트를 할 때 같이 움직여서 통성명 정도는 한 사이다.
“안 팀장님. 이게 무슨 상황입니까?”
“밥 먹으러 오다가 마침 보이시길래, 그 기술을 개발하신 분이라고 말했더니 뮐러 교수님이 갑자기 물어볼 게 있다고….”
독일 교수는 한국어를 모른다. 그가 영어로 말했다.
“우리 대학과 공동 연구를 요청합니다.”
“거절합니다.”
“왜…. 거절 이유를 말해 주십시오.”
선우현은 지원위성에서 지상을 보면서 다양한 시대의 언어를 익혔다. 특히 영어는 TV가 개발된 후에 할리우드 영화를 보면서 발음을 교정했다.
선우현이 정확한 영어 발음으로 말했다.
“연구소에서 엉덩이를 붙이고 연구하는 건 나랑 안 맞아서요.”
“연구는 원래 그렇게 하는 거잖습니까?”
“내가 해야 할 일이 좀 많아서.”
- 일 안 하시는데요?
선우현이 작게 말했다.
“연구소에 매일 출퇴근하는데 시간을 다 쓰면 우주왕복선은 언제 사냐?”
- 그건 그렇습니다. 단칼에 거절하십시오.
독일 교수는 마음이 급했다. 그의 입에서 독일어가 튀어나왔다.
“그럼 그 기술에 관해 물어볼 게 있습니다.”
선우현이 아는 언어 중에는 독일어도 있다. 독일어도 TV와 라디오 전파를 수신할 수 있게 된 후에는 억양을 현대에 맞게 교정했다.
교수는 연구 과정에서 생긴 의문을 질문했다. 합금이 특정 조건에서 보이는 특이 반응에 관한 것이었다.
김수선이 말했다.
- 선장님. 그건 탐사대 지원기술 자료의 응용 기술 부분에 언급돼 있습니다.
선우현이 손으로 입을 살짝 가리고 작게 물었다.
“그래? 어떤 건데?”
- 우리 소형 금속 부품 제작기술에 사용되는 합금에 방사능 저항력을 약간 추가할 수 있습니다.
“그걸로 만든 장비는 방사능 지역에서 고장이 덜 난다는 거네?”
- 낮은 등급의 기술이라 대단한 저항력은 아니지만, 그래도 지금보다 몇 배 더 오래 버티긴 할 겁니다.
“우리는 왜 그걸 만들 생각을 안 했지?”
- 저항력이 추가된 합금을 만들려면 탐사대에 지급되는 장비를 써야 하니까요. 지상에서 양산할 수 없는 기술은 팔 수가 없으니까 제 선에서 커트했습니다.
“지금 뮐러 교수가 그 장비 없이 방사능 저항성 합금을 만드는 방법을 연구하겠다는 거잖아.”
- 그러네요? 듣고 보니 대단한데요?
“우리한테 자료가 얼마나 있지?”
- 개념과 기본 원리, 장비를 사용했을 때의 단계별 결과 정도가 있습니다.
“그러면 뮐러 교수에게 요령을 좀 알려주면서 살살 꼬드겨서 연구하게 해야겠는데?”
- 우리도 이해를 못 하는데 요령을 어떻게 알려주시게요?
“우리가 원리는 모르지만,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는 알잖아. 개념, 원리, 단계별 예상 상황과 방향을 필요할 때마다 알려줄 수 있지.
- 뮐러 교수의 연구에 길잡이 정도는 할 수 있겠군요!
“그렇지. 그러다 연구에 성공하면 공동 연구자로 등록하고 지분을 나누는 거지. 성공하면 여기서 나오는 돈으로 우주왕복선의 랜딩 기어 정도는 살 수 있겠다.”
- 그거 정말 좋은 생각이십니다!
선우현이 손을 내리고 밝은 표정을 지으며 독일어로 말했다.
“이야아! 그 현상을 알아보셨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