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 비공식
강선정은 정보기관 내근직 요원이다. 어젯밤 사건도, 지금 이 방문도 원래는 그녀의 임무가 아니다.
강선정이 커피를 한 모금 홀짝인 후에 상황을 설명했다.
“어젯밤에 시내 모처에서 총격 사건이 있었어요. 뉴스에는 나오지 않은 사건이죠.”
선우현이 어젯밤에 사채업자 사무실에서 그곳에 서 있던 놈들을 모조리 때려잡았다. 그때 총격전도 한바탕 했다.
“그런데요?”
“이건 비밀인데요.”
“그럼 안 궁금한데.”
“이거 말하면 또 징계받을지도 모르는데.”
“안 궁금하다니까?”
“그 사건은 외국 정보국에서 한국에 심어놓은 산업스파이 조직이 저지른 짓이에요.”
선우현이 손뼉을 쳤다.
“와우. 그러면 정부에서 그 나라에 공식 항의를 하겠군요.”
“그건 제가 알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비공식적으로라도 하겠지요. 아무것도 안 하면 호구 취급당할 테니까.”
“그런데 말이죠.”
그녀가 믹스 커피를 벌컥 마셨다.
“현장에서 잡힌 사채업자가 깨어나서 그러는데, 얼굴을 마스크로 가린 사람이 쳐들어왔다더라고요.”
“난입 뭐 그런 건가?”
강선정이 선우현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어제 저 보신 적 있으시죠?”
“뉘신지?”
“눈빛이 낯설지 않거든요?”
“그런 말 많이 듣습니다. 워낙 흔한 눈빛이라.”
“어제 그 사채업자 사무실에서 외국 정보국이 심어놓은 놈들과 사채업자들을 때려잡은 사람 말인데요. 딱 선생님 정도 체격이라던데요?”
“그러니까 그게 나다? 나 아닙니다.”
“세상에 혼자서 그렇게 싸울 수 있는 고수는 극히 드물어요.”
“있긴 있나 보네.”
“어제 여기가 습격당한 후에,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사건이 일어났잖아요.”
선우현이 피식 웃었다.
“여기 들어온 도둑놈들하고 그놈들이 한패라는 증거는 있고요?”
강선정이 즉시 대답했다.
“물론이죠. 저희는 그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다 파악하고 있었거든요. 어제 여기를 습격한 놈들은 다 그 위장회사 소속이에요.”
선우현은 멈칫했다.
“아. 이게 아닌가?”
김수선이 한마디 했다.
- 역시 어제 거기에 불을 질렀어야 했습니다.
강선정이 말했다.
“저는 책임을 물으러 온 거 아니에요. 그리고 간첩을 잡았으면 포상금이….”
“나일 수도 있겠네.”
- 선장님?
“농담입니다.”
“진담인 것 같은데요.”
선우현이 말했다.
“이야기를 정리해보죠. 그러니까 어제 이 건물이 습격당하자마자, 내가 여기 온 강도들의 패거리를 찾아내서 사채업자와 함께 쓸어버렸다? 지금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거지요?”
“네. 제가 분석하기로는….”
선우현이 물었다.
“그놈들이 어디 있는지 내가 어떻게 알고 쳐들어갑니까?”
김수선이 말했다.
- 제가 여기서 다 보고 있었죠.
강선정은 그 문제 때문에 밤새도록 고민하고 정보를 수집해 분석했다. 하지만 결론이 나지 않았다.
“그 부분이 설명이 안 되긴 하는데요.”
선우현이 활짝 웃었다.
“그러니까 나 아닙니다.”
강선정은 선우현처럼 잘 싸우는 사람이 극히 드물다는 건 안다.
그런데 선우현이 여기서 습격당하자마자 적의 본대를 치려면, 적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어야 한다.
그 부분을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강선정이 물었다.
“그러면 혹시, 그놈들이 왜 여기를 노렸는지는 아세요?”
선우현이 그 이유를 지금 당장은 숨길 수 있다.
그런데 이미 외국 첩보조직이 이 건물에 단서가 있다는 걸 알고 침투를 시도했다.
그 사건을 조사하다 보면 한국의 수사기관이나 정보기관이 여기에 뭐가 있는지 알게 되는 건 시간문제다.
그는 그래서 강선정이 옥상으로 들어오는 걸 굳이 막지 않았다.
“그 이유가 궁금하시다?”
“짐작 가는 게 있으시군요?”
선우현이 옥상에 키우고 있는 토마토를 하나 따서 강선정의 앞에 내려놓았다.
그녀가 손을 내저었다.
“괜찮아요.”
“나랏일 하는 사람이라 힘들 텐데 맛이라도 봐요.”
“예. 그러면.”
강선정이 예의상 토마토를 들고 살짝 깨물었다.
“음?”
입안으로 톡 들어오는 과즙이 굉장히 맛있었다. 평범한 맛이 아니었다.
“어머? 이거 설마….”
그녀가 한 입 크게 깨물어 먹었다. 지금까지 먹어본 그 어떤 과일보다도 더 맛있었다.
다른 과일도 아니고 토마토가 이렇게 맛있기는 어렵다. 그런데 그녀는 그런 토마토를 안다.
“활력 토마토?”
“아시나 보네.”
“먹어본 적은 없지만, 이게 뭔지는 알아요.”
그녀는 활력 토마토를 문서로만 보았다.
“저희가 하는 일이 기술을 보고하고 산업스파이를 잡는 거라서, 이 놀라운 신품종에 대한 자료를 본 적이 있어요.”
강선정이 옥상의 화분을 보았다.
“그런데 이상하네요. 재배를 시도하는 곳은 많아도 열매까지 성공한 곳은 없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활토가 화분에….”
그녀의 표정이 굳었다. 재배가 가능한 사람은 딱 한 명뿐이다.
“설마 활력 토마토의 주인?”
“그렇죠.”
그녀가 벌떡 일어났다.
“이제 의문이 해결됐어요!”
그녀가 화분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놈들이 활력 토마토의 재배 비법을 노린 거예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요.”
“예?”
선우현이 옥탑방에 들어가 R 크림을 가져왔다.
“나랏일 하느라 많이 구르는 것 같은데, 그러다 피부 상할라. 크림도 하나 드릴 테니까 발라봐요.”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는 이런 디자인의 화장품 사진을 본 적이 있다.
“R 크림? 이게 왜 여기에….”
“자료를 봤다면서, 활력 토마토와 R 크림은 같은 곳에서 개발됐을 수 있다는 이야기는 못 들으셨나?”
들어봤다. R 크림은 그 기관의 여자 요원들도 갖고 싶어 하는 화장품이다. 다른 요원들과 이야기하다 그런 말을 들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럼 혹시 이곳이 R 크림과 관련된 곳….”
“뭐, 그렇죠. 같은 기술이 적용된 거니까요. 그거 가져요.”
강선정이 얼른 R 크림에 손을 뻗다가, 화들짝 놀라서 손을 흔들었다.
“이, 이건 받을 수 없어요. 공무원이 백만 원짜리를 받으면 부정청탁 및 금품수수 금지법에 걸려요.”
“아. 그렇겠네.”
“네. 그렇죠.”
“그런데 방금 드신 그 토마토도 백만 원짜리인데.”
“네? 아….”
“어디 보자. 한 입 크게 먹었으니까, 이십만 원쯤 드셨네?”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건 모르고 먹은 거라서….”
“농담입니다. 여기 오는 손님들은 보통은 주스로 만들어서 한 잔씩 마십니다. 그럴 때 쓰는 토마토는 파는 게 아닙니다.”
그녀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런가요?”
“그놈들의 목적이 뭔지 확실히 알려주려고 준 거기도 하고요.”
“아. 마음이 편해졌어요.”
그녀가 남은 활력 토마토를 들고 조금씩 베어먹었다.
“맛있다.”
선우현이 설명했다.
“그놈들이 여기 침입한 이유는, 활력 토마토나 R 크림의 기술을 노린 거겠죠. 여기가 연구소라고 생각하고 온 건 아닐 수 있어도, 여기에 단서 정도는 있다고 봤을 겁니다.”
“이제야 확실히 납득이 가요.”
“소형 금속 부품 제작기술을 노린 건 아닐 테니까요. 그거야 특허를 내서 어떤 기술인지 다 공개했으니까.”
활토를 순식간에 다 먹고 손가락을 빨던 강선정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활토는 JHC 테크의 최종훈 사장이 공급한다. 그런데 JHC 테크에서는 얼마 전부터 금속 가공에 관한 신기술의 라이센스를 판다.
“예? 혹시 JHC 테크에서 공급하는 그 기술 말인가요?”
“그거죠.”
“그 기술을 왜….”
“몰랐습니까? 그것도 내가 특허 낸 건데.”
“네?”
“뭐지? 정보기관에서 왜 아무것도 모르지?”
“저는 선생님의 사생활을 추적하고 찾아온 건 아니라서….”
“경찰 기록에 있는 것만 보고 오셨구나.”
“그렇죠.”
선우현이 툴툴댔다.
“괜히 다 말했네. 아무것도 모른다고 할걸.”
“그놈들을 조사하면 다 나올 거였어요. 잘 말씀하신 거예요.”
“어쨌든 질문에 대한 대답은 됐지요?”
강선정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예. 확실히 이해했습니다. 그건 됐는데, 그러면 어젯밤에 사채업자 사무실에서 그놈들을 습격해서 전멸시킨 사람은….”
선우현이 잡아뗐다.
“나는 모릅니다.”
강선정이 옥상에 있는 활토 화분을 다시 보았다. 바로 앞에 놓여 있는 R 크림도 확인했다.
‘활토와 R 크림을 개발한 사람. 어제 사건도 우리 일에 도움을 준 사람.’
그녀가 어제 적의 매복에 당했을 때, 누군가 마스크를 쓰고 나타나 그녀를 구해주었다.
‘나를 구해준 사람.’
그녀가 선우현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어제는 어두워서 자세한 건 볼 수 없었지만, 체격 정도는 알아볼 수 있었다.
‘남자 몸매가 비슷해. 그리고 그런 실력자는 극히 드물어.’
“아무리 봐도 어제….”
“나는 여기 쭉 있었습니다만?”
그녀가 선우현을 계속 쳐다보다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말했다.
“예. 공식적으로는 모르시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비공식적으로는?”
“저도 보고는 해야 해서요.”
선우현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거야 뭐, 어쩔 수 없죠.”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R 크림도 챙겼다.
“이건 보고를 위해서….”
“선물로 준 거니까 가져요.”
그녀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어제 구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난 어제 여기 있었다니까 그러시네.”
“예. 공식적으로는 그렇죠.”
***
강선정이 정보기관으로 돌아가 과장에게 보고했다.
과장이 처음 몇 마디만 듣고 화를 냈다.
“야. 너는 진짜. 현장 기웃거리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하냐? 아예 정직당하고 싶어?”
“놈들이 어제 그렇게 다급히 움직인 이유를 알아냈습니다.”
“내가 그걸 굳이 너한테…. 음. 그걸 아는 사람이 너밖에 없네. 말해봐. 들어는 보자.”
강선정이 오늘 선우현과 만나 알아온 이야기를 설명했다.
과장의 표정이 굳었다.
“그러니까 그 건물이 활력 토마토와 R 크림 기술과 관계된 곳이라고?”
“예. 놈들이 그래서 그곳을 노렸던 게 확실합니다.”
“근거는?”
“활력 토마토는 제가 먹어봤습니다.”
“어? 먹어?”
“확인시켜준다고 먹으라고 해서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먹은 겁니다.”
“그래서… 자료에 적힌 것처럼 맛있냐?”
“살면서 먹어본 과일 중에 제일 맛있었습니다.”
“자료처럼 힘도 나고?”
“힘이 더 세진 건 아닌데요.”
강선정은 어젯밤을 꼬박 새웠다. 그 시간을 놀면서 보낸 것도 아니다.
어젯밤에 적을 미행하다 매복에 당하고, 다시 적의 근거지로 쳐들어가고, 경찰들과 기 싸움도 했다.
기관에 돌아와서는 밤새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했다.
그렇게 움직였으면 지금쯤은 파김치가 되어야 한다.
“한숨도 안 잤고 일했는데도 전혀 피곤하지 않습니다. 기운이 넘칩니다.”
“활토에 각성 성분은 전혀 없다던데 진짜 신기하네. 몸에 그렇게 좋은 거면 나도 좀 먹고 싶다.”
“과장님 월급으로는 무리죠.”
“내 월급으로 안 되는 건 아닌데, 애들 키워야지. 학원비가 어휴…. 내가 지금 너랑 무슨 이야기 하는 거냐.”
과장이 다시 물었다.
“그럼 R 크림은?”
강선정이 R 크림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하나 받아왔습니다.”
“이거 진품이겠지?”
“활력 토마토가 진짜인데 이것만 짝퉁일 리는 없죠.”
과장이 턱을 긁었다.
“음…. 선우현에 대한 자료, 다 긁어와서 분석하고 정식으로 보고해.”
이미 어젯밤에 수집한 자료가 많았다. 추가 자료만 확보해 정리하는 건 오래 걸리지 않았다.
두 시간 후에 회의실에서 강선정이 브리핑했다.
“활력 토마토와 R 크림은 원래 정보가 별로 없습니다. 다만 선우현이 관계자라는 건 확실합니다.”
“다른 특이 사항은?”
“대단한 무술 고수입니다. 이미 여러 건의 사건에 휘말렸는데, 그때마다 혼자서 적을 전멸시켰습니다.”
“무기는 뭘 썼는데?”
“맨손으로요.”
스크린에 경찰에 있는 전투 기록들이 떴다.
과장이 기록을 보며 감탄했다.
“와…. 대단하네. 우리 격투기 교관으로 초빙하고 싶을 정도다.”
“우리 교관 월급으로는 어려울 겁니다. 선우현은 건물주입니다.”
“사는 곳은?”
“현재는 본인이 소유한 건물의 옥탑방에 산다고 합니다.”
“옥탑방? 세상에. 있는 사람이 더하다더니….”
“구하니의 신곡, 하늘에 핀 꽃의 작곡가입니다.”
“그 노래 좋지. 그런데 갑자기 일하는 방향이 너무 바뀌는데?”
“JHC 테크에서 라이센스를 공급하는 소형 금속 제작기술의 개발자입니다.”
“어? 그거 업계에서 주목하는 신개념 기술이잖아.”
“예. 그런데 그 기술은 특허를 내면서 제작 방법을 공개했습니다. 그것 자체는 비밀이 아니라 놈들의 목적은 아니었을 겁니다.”
“음….”
강선정이 말했다.
“어제 매복에 당한 저를 구해준 사람도 선우현이라고 짐작하고 있습니다.”
과장이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우리가 이 정보를 경찰 쪽에 공유할 필요는 없겠지?”
“예. 공식적으로는 어제 사채업자 사무실에 나타난 사람도, 저를 구해준 사람도 아니니까요.”
“경찰 쪽에서도 이미 누군지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눈치야. 우리도 신세 진 게 있으니까, 일단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기만 해.”
“공식적으로 그러면 문제가….”
“비공식적으로 네가 전담해.”
“앗! 그럼 저도 이제 현장을 뛰는 건가요?”
“당연히 아니지. 그냥 사적으로 연락이라도 하면서 지내라고. 소통 창구 정도만 열어놔. 싫으면 말고.”
“꼭 사적으로 알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