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 만사태평
현장은 안성준 형사 혼자서 해결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가 어쩔 수 없이 전화를 걸었다.
“팀장님.”
- 야. 나 퇴근했어. 사건이라는 말만 하지 마. 그냥 술이나 먹자고 해.
“여기 상황이 좀… 심각합니다.”
팀장의 목소리가 빨라졌다.
- 혹시 너 위험한 거냐?
“그건 아닙니다만.”
- 새끼가. 놀랄 뻔했네. 뭔데?
“사진 한 장 보내드리겠습니다.”
안성준이 사채업자 사무실의 사진을 스마트폰으로 찍었다. 복면을 쓴 놈들과 사채업자들이 여기저기 처박혀 있고, 바닥에는 소음기가 장착된 권총이 여러 개 굴러다녔다.
안성준 형사가 그 사진을 팀장에게 전송했다.
곧바로 팀장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 여기 어디야! 한국 맞아?
“예. 서울입니다.”
- 서울에서 권총이 막 굴러다니고 사람들이 처박혀 있고…. 환장하겠네.
“여기가 사채업자 사무실인데, 장부도 하나 있습니다. 아직 펼쳐보진 않았습니다만 뇌물 장부일 수 있습니다.”
- 거기다 뇌물 장부까지…. 그 장부에 적힌 이름이 누구냐에 따라 압력 오지게 들어올 수도 있겠다.
“이 사건은 우리 팀에서 맡아야 할 듯합니다.”
- 아무리 골치 아파 보여도 그 사건 정도면 못 먹어도 고 해야지. 당장 애들 소집해서 간다. 거기 관할에 지원도 요청해. 위험하면 넌 일단 거기서 나와.
“위험은….”
안성준이 내부를 다시 둘러보았다.
‘완전히 다 쓸어버렸네.’
서 있는 놈은 고사하고 눈을 뜨고 있는 놈조차 없었다.
“이제는 위험하진 않습니다. 현장을 확보하면서 기다리겠습니다.”
- 그러다 거기를 그 꼴로 만든 놈들이 다시 쳐들어오면…. 어? 누구 짓인지 아는 거냐?
“오시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안성준이 전화를 끊고 다시 한숨을 푹 쉬었다.
“뭐라고 설명하지? 정보원? 익명의 제보자?”
그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렇게 말한다고 누가 그냥 넘어가겠냐고.”
안성준이 119에도 전화를 걸었다. 다른 놈들은 몰라도 납치 폭행 피해자는 일단 병원에 보내야 했다.
***
선우현은 안성준에게 사채업자의 위치만 전달한 게 아니다. 첩보조직이 원래 쓰던 위장회사의 주소도 알려주었다.
“알아서 잘 처리하겠지.”
- 안성준이 잘 처리하지 못하면요?
“그러면 어쩔 수 없는 거고.”
- 역시 불을 질렀어야 했습니다.
“민간인이 잡혀 있었잖아.”
***
안성준이 소속된 광수대 형사팀이 사채업자의 사무실에 모였다.
안성준이 말했다.
“팀장님. 주소가 하나 더 있습니다만….”
“거긴 어떤 곳인데?”
“모르겠습니다.”
이미 현장에서 대량의 총기가 발견됐다. 다른 장소에 그냥 진입할 수는 없다.
“여긴 나한테 맡기고 가봐.”
***
안성준이 경찰특공대와 함께 위장회사가 있는 곳을 찾아갔다.
그런데 그들은 그 건물 바로 앞에서 다른 사람들과 마주쳤다.
정보기관의 현장 요원들은 부서진 차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던 강선정은 찾아내 구출했다. 하지만 외국 정보국 요원들이 어디로 갔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식별코드 C7로 지정된 외국 정보국 위장회사 건물로 찾아갔다.
그런데 그곳에 안성준과 경찰특공대가 들이닥쳤다.
정보기관 요원 강선정이 코가 빨개진 상태로 물었다.
“경찰이 여기는 무슨 일이죠?”
안성준이 물었다.
“그러는 당신들은 누구입니까?”
강선정이 정보기관 요원 신분증을 보여주었다.
“여기는 우리가 맡을 테니까 가셔도 돼요.”
“국내 사건은 경찰 담당입니다만?”
“이건 산업스파이 사건이라서 우리 사건 맞아요.”
“권총을 들고 사채업자를 습격한 놈이 여섯이나 됩니다. 우리 사건 맞습니다.”
강선정이 목소리를 조금 깔았다.
“여기는 우리가 오래전부터 주시하던 곳이에요.”
식별코드 중에서 카테고리 C는 의심만 하는 등급이라 요원을 상시 배치해 감시하지는 않는다. 보통은 가끔 체크하는 정도다.
안성준이 말했다.
“그럼 주시만 하지 말고 잡지 그랬습니까? 우리는 많이 잡아놨는데.”
“그래요? 잘됐네요. 우리한테 다 넘겨요.”
“거절합니다.”
두 기관의 관할 문제는 양쪽 기관 상부에서 전화가 오면서 정리됐다. 그 위장회사에는 수사기관과 정보기관이 같이 진입하기로 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 내부를 확인한 안성준이 푸념했다.
“괜히 싸웠네.”
위장회사 사무실은 텅텅 비어 있었다.
디지털 저장장치는 이미 모두 빼내서 남은 게 없었다. 종이로 된 문서는 얼마 남아있지도 않았는데 그나마도 모두 잘게 갈려 불에 탔다.
강선정도 말했다.
“괜히 싸웠어. 다 들고 튀었….”
강선정은 멈칫했다. 그녀는 여기서 빠져나간 차를 미행하다가 습격당했다.
‘빠져나간 차는 세 대. 날 공격한 차에는 아무것도 없었어. 그럼 여기서 파기하지 않고 가져간 기밀 자료는 다른 두 대에 있겠네?’
안성준도 상황을 눈치챘다. 그가 얼른 말했다.
“그럼 우리는 철수하겠습니다. 워낙 잔업이 많이 남아서.”
“가긴 어딜 간다는 거죠? 붙잡았다는 놈들 지금 어디 있어요?”
안성준이 같이 온 경찰특공대 요원들에게 말했다.
“철수하죠. 바로 갑시다. 저 사람들 떼어버리고!”
“안돼! 못 가! 우리도 데려가!”
잠시 후에 형사팀장이 안성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 야. 걔들하고 같이 움직여라. 위에서 그렇게 합의 봤단다.
“그러다 죽 쒀서 개 주는 거 아닙니까?”
강선정이 발끈했다.
“우리가 왜 개야! 이 죽 우리가 쑤고 있었다고! 막판에 날름 떠먹었으면 나눠 먹기라도 해야 할 거 아냐!”
***
두 기관의 요원들이 사채업자의 건물 쪽으로 이동했다. 미리 연락받은 형사들이 건물 주변 지역을 수색했다.
그들은 두 기관의 요원들이 도착하기 직전에 차 두 대를 발견했다.
강선정이 그 현장에 도착해서 물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죠?”
먼저 와 있던 형사가 대답했다.
“우리도 방금 찾았습니다. 운전석에 있는 놈은 처음부터 저 상태더군요.”
차 한 대의 운전석 유리가 깨져 있었다. 그곳에서 대기하던 놈은 이미 당했다.
“죽었나요?”
“기절했습니다. 구급차는 방금 불렀습니다.”
“누가 이렇게 한 건가요?”
“이 차에는 블랙박스가 없습니다. 주변에 CCTV도 없고요. 이제부터 알아봐야 하는데….”
“쉽진 않겠군요.”
안성준이 차의 문을 열었다. 안에는 상자가 여러 개 쌓여 있었다. 급히 담느라 뚜껑도 제대로 못 닫은 상자도 있었다.
그 사이로 밀봉된 봉투와 노트북이 보였다.
강선정이 안성준의 옆에서 차량 내부를 보며 상황을 분석했다.
‘식별코드 C7. 외국의 산업스파이 위장회사일 가능성이 있던 곳. 그곳에 있던 기밀 자료구나. 운전석에 있던 놈은 이 자료를 파기할 틈도 없이 누군가에게 당했어.’
강선정은 SUV에 들이받혔을 때 그녀를 구해준 사람이 생각났다.
‘그 사람이야. 이 자료는 그 사람이 우리에게 넘겨준 거야.’
***
김수선이 물었다.
- 선장님. 그 차 운전석에 있던 놈은 왜 잡은 겁니까?
“그냥 같은 패거리니까 잡았는데?”
- 만사태평하셔서 좋겠습니다.
“집에 가서 라면이나 먹어야겠다.”
***
광수대 팀장이 안성준을 한쪽으로 데려가 조용히 물었다.
“그러니까 여기랑 거기의 위치를 익명의 제보자가 알려줬다?”
“안 믿으실 거죠?”
“이 사채업자 사무실에서 기절한 상태로 발견된 놈이 열한 명이다. 납치 피해자까지 더하면 열두 명. 넌 그런 곳에 혼자 찾아왔어. 너 같으면 익명의 제보라는 말을 그냥 믿겠냐?”
“그거야 그놈들끼리 싸우다가 서로 망한 거 아닐까요?”
“네가 없을 때 깨어난 놈이 털어놓았다. 복면 쓴 여섯 놈이 총을 가지고 습격했다더라. 그 여섯을 누군가 제압했다. 그거 누구냐?”
“그냥 정보원인데요.”
“나한테만 알려주면 안 되겠냐?”
안성준이 시선을 피했다.
“팀장님이 아시면 결국 다 알겠죠. 그러면 앞으로 정보는 못 받습니다.”
“젠장. 나도 위에다 할 말이 있어야지. 저 기관 애들도 지금 관심이 엄청 많아.”
“시간을 좀 주시죠. 제가 나중에 만나서 팀장님한테만 알려주는 건 어떠냐고 말해 보겠습니다.”
***
강선정은 과장에게 욕을 바가지로 먹었다.
“네가 현장 요원이야? 너 내근직이야!”
“압니다.”
“그리고 너 지금 징계 중이라고!”
“그것도 압니다.”
“알면서 왜 현장을 기웃거려!”
강선정은 당당했다.
“그래도 제가 그놈들의 단체 이동을 알아본 덕분에 일망타진할 수 있었습니다.”
“네가 잡았냐?”
“아니요.”
“그럼 우리가 잡았냐?”
“아니요.”
“그럼 너 없었어도 결과는 똑같았다는 소리잖아!”
강선정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그…렇죠?”
“꼴 보기 싫으니까 네 자리로 꺼져!”
***
강선정은 자리에 앉아서 경찰에 오늘 일어난 모든 강력사건 자료를 요청했다.
“그 회사 직원 중에 다섯 놈이 모자라.”
이제 식별부호 C7이 외국의 스파이 조직이라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스파이가 다섯 명이나 휴가를 갈 리가 없지. 그런데도 갔다면 휴가가 아니라 일을 하러 간 거겠지.”
그녀가 경찰에서 넘어오는 자료를 보며 각오를 다졌다.
“내가 우리나라에서 오늘 일어난 강력사건을 다 조사해서라도 단서를 찾아내고야 만다.”
자정이 지나 경찰서에서 처리된 사건 자료 하나가 새로 손에 들어왔다.
몇 시간 전에 서울에서 꽤 큰 사건이 터졌다.
“무장강도 다섯 놈이 건물에 침입했다가, 입주민한테 당했어?”
무기 정보도 확인했다.
“칼하고 창? 서울에서 창을 썼다고?”
그녀가 그 자료를 자세히 읽었다.
***
이튿날 오전에 선우현이 옥탑방 옥상에서 말했다.
“편안하구나.”
- 원래 놀면 편합니다.
“어젯밤에는 일했잖아.”
- 남들은 전날 일했어도 이튿날 또 일합니다. 그래야 일용할 양식이 생기거든요.
“양식 이야기가 나오니까 돈가스가 땡기네. 점심 먹으러 가야겠다.”
선우현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모르는 번호라서 받지 않았다.
잠시 후에 문자가 들어왔다. 어제 이 건물에 침입한 놈들에 관해 이야기할 게 있어서 방문하고 싶다는 문자였다.
“누군데 여기 온다는 거야?”
김수선이 말했다.
- 지상에 승용차가 한 대 서 있습니다. 유리에 아주 진한 색으로 틴팅을 한 차입니다.
“양카인가?”
- 요란한 사제 부품이나 스티커는 보이지 않습니다.
“왜 미리 말 안 했어?”
- 몰랐습니다. 선장님이 계신 쪽을 안 보고 있었으니까요.
옥상 문밖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선우현 씨. 계세요?”
선우현이 문을 열었다. 양복을 입은 여자가 서 있었다.
선우현은 그녀를 어젯밤에 보았다. 그가 작게 말했다.
“수선아. 어제 차로 그놈들을 미행하다가 매복에 당한 사람이다.”
- 어젯밤 그 여자가 현장에서 안성준과 말싸움을 하는 모습을 봤습니다. 권총을 소지한 동료도 있었습니다. 그 여자도 경찰이거나 다른 수사기관, 아니면 정보기관 소속일 겁니다.
선우현이 강선정을 보며 말했다.
“방문하고 싶다고 하자마자 벨을 누르시네? 이럴 거면 문자는 왜 보낸 겁니까?”
강선정이 밤을 꼬박 새워서 퀭한 눈으로 대답했다.
“미안해요. 서두르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경찰?”
강선정이 신분증을 보여주었다. 정보기관 요원 신분증이 아니라 외부 활동에 사용하는 공무원증이었다.
“그냥 공무원이에요.”
“그래 보입니다. 일단 들어오시죠.”
선우현이 강선정을 옥상으로 들이며 작게 말했다.
“수선아. 이 아가씨가 돌아갈 때 어디로 가는지 추적해라.”
- 당연히 그래야죠.
선우현이 옥상에 있는 의자를 권했다. 강선정이 자리에 앉았다.
선우현이 물었다.
“커피? 아니면 토마토 주스도 있습니다만.”
강선정은 밤을 꼬박 새워서 피곤했다.
“커피 부탁드려요.”
선우현이 머그컵에 믹스 커피를 타며 말했다.
“주스를 거절하는 걸 보면, 활토에 대해 알고 온 건 아닌가 본데?”
- 공짜로 먹을 기회를 거절할 리가 없죠.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돌아갈 때 추적은 하겠습니다.
선우현이 머그잔을 주면서 물었다.
“어제 그놈들 때문에 오셨다고요?”
“예. 어제 무장강도 다섯 놈이 이 건물에 침입했잖아요? 그 사건을 조사하고 있어요. 혹시 왜 침입했는지 짐작 가는 게 있으세요?”
선우현이 어깨를 으쓱했다.
“도둑질하러 왔겠죠.”
“그놈들을 직접 때려잡으셨다고요?”
“운이 좋았습니다.”
강선정은 경찰 자료를 많이 찾아보고 왔다.
“선생님께서는 이전에도 범죄자들을 여러 번 잡으셨던데요.”
“취조하러 온 거면 영장이라도 가져오는 성의를 보이던가. 빈손은 좀 아니지 않나?”
“이건 취조가 아니라….”
“맞다. 경찰이 아니니까 취조는 아니겠구나. 어디서 오셨나? 정보기관에서 나오셨나?”
강선정의 표정이 굳었다.
“그렇게 생각하신 이유는요?”
“경찰은 아니라니까 그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