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 연구소
최종훈이 선우현을 찾아가, R 크림 제조를 맡겼던 공장 침입 사건의 진행 상황을 설명했다.
“거기 사장님이 제 연락을 받고 경찰에 즉시 신고했습니다. 저도 인맥을 동원해 철저히 수사해달라고 했습니다.”
“문을 열어준 내부자가 있을 텐데요.”
“외부인과 공모한 직원이 있습니다. 평소와 달리 퇴근 시간 후에도 혼자 공장에 남아 있던 사람입니다. 처음에는 자기는 아니라고 부인했는데, 경찰이 추궁하니까 결국 자백했습니다.”
“왜 그랬답니까?”
“돈 때문이죠. 인터넷 도박으로 빚이 좀 있어서, 돈을 받기로 했다더군요.”
“공장에 침입한 놈들은요?”
“기계에 묻어 있던 R 크림 잔여물을 긁어갔습니다. 천으로 닦아서 가져가기까지 했다더군요. 그 직원에게는 선우현 씨가 첨가물로 뭘 넣는지도 잘 보라고 요구했답니다.”
“그놈들도 잡았습니까?”
최종훈이 혀를 찼다.
“그 직원도 누구인지는 모른답니다. 그쪽에서 먼저 찾아오길래 그냥 돈만 받기로 했다더군요. 경찰에서도 찾기 힘들 거라고 합니다. 당연히 화장품 회사 중 하나일 텐데….”
선우현이 물었다.
“엠쁘띠스킨이라는 회사가 있습니다. 아십니까?”
“어? 이름은 들어봤습니다. 큰 화장품 회사는 아닌데, R 크림을 연구하는 곳을 조사했을 때 명단에 이름이 있었습니다.”
“공장에 침투했던 놈들이 그 회사로 들어가더군요.”
김수선이 말했다.
- 제가 그놈들이 공장을 벗어났을 때부터 추적했습니다.
최종훈의 표정이 확 펴졌다.
“역시 선우현 씨군요. 그러면 혹시 공장에 침입하는 사진이….”
- 그래서 사진이 있을 리가 없죠.
지원위성에 있는 김수선과는 팔찌형 중계기와 귓속 통신기로 대화는 할 수 있다. 하지만 사진 같은 데이터는 전송할 수단이 없다.
“사진은 없는데, 어떤 길로 이동했는지는 알고 있습니다. 그 동선 곳곳에 CCTV가 있을 겁니다. 경찰이 그걸 확인하면 수사에 도움이 되겠지요.”
***
화장품 회사 엠쁘띠스킨에 형사가 찾아갔다.
사장은 형사의 말을 듣고 손을 내저었다.
“우리가 왜 남의 공장에 침입해서 그걸 훔칩니까? 이건 너무 모욕적이군요. 우리가 한 거 아닙니다.”
“이 회사 직원들이 그곳에서 여기까지 오는 동선을 다 파악하고 CCTV 영상도 다수 확보했습니다.”
“어…. 그래요?”
“직원들이 왜 하필 공장에 누군가 침입했을 때 그곳에 간 겁니까?”
“나는 모르는 일입니다.”
경찰은 현장 근처의 CCTV에서도 해당 차량을 확인했다. 그 차량을 렌트카 업체에서 빌린 엠쁘띠스킨 직원이 누구인지도 알아냈다.
그 직원은 경찰의 조사를 받다가 결국 자백했다.
“위에서 시켜서 안 할 수가 없었습니다. 싫다고 하면 회사에서 쫓겨날 분위기였습니다.”
직원이 자백했다는 보고를 받은 엠쁘티스킨 사장이 책상 위 물건을 손으로 쓸어버리며 화를 냈다.
“일을 왜 그따위로 처리하는 거야!”
이사가 긴장한 얼굴로 대답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성과를 내라고 하셔서….”
“들키지 않았어야지!”
“죄송합니다.”
“그래서 R 크림의 비밀은 알아냈어?”
“그 공장에서 가져온 걸 조사하긴 했는데, 성과는 없습니다.”
“그러면 괜히 경찰 수사만 받게 됐잖아!”
“사장님. 경찰에서 조사받으러 오라는데 어떻게….”
사장이 손짓했다.
“김 이사가 가서 잘 뭉개봐. 윗선에 줄 댈 수 있으면 돈 아끼지 말고 대. 법률 지원도 회사에서 확실히 해줄 테니까….”
“제가 아니라, 경찰에서 사장님을 지목해서요.”
“어? 나, 나를?”
다른 이사가 사장실로 서둘러 들어왔다.
“사장님. 문제가 생겼습니다.”
사장이 화를 냈다.
“그래서 지금 그 문제를 해결하고 있잖아! 경찰 조사를 어떻게 넘길지 논의 중이라고!”
“그게 아니라, 업계에 소문이….”
“소문? 무슨 소문?”
“우리가 R 크림의 비밀을 훔치려고 공장에 침입했다가 경찰 조사를 받고 있다는 소문이….”
“그, 그게 왜 소문이 나는데! 누가 낸 거야!”
“모르겠습니다. 지금 확인전화가 여기저기서 걸려오고 있습니다.”
***
최종훈이 씩 웃었다.
“엠쁘띠스킨 따위가 어디 감히 R 크림을 노려?”
비서 김찬혁이 물었다.
“사장님이 소문내신 겁니까?”
“난 아니야. 내가 소문내기도 전에 이미 아는 사람들이 여럿 있더라. R 크림에 관한 정보라면 뭐든지 수집하려는 회사가 여럿 있잖아. 그런 곳에서 그 공장이 털렸다는 걸 알고 무슨 일인지 알아봤겠지.”
“그래서 업계에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군요.”
“당연하지. 경쟁 화장품 회사가 그 기술을 훔쳐서 자기네 제품에만 적용하는 사태는 아무도 바라지 않을 테니까.”
“사장님은 정말 아무것도 안 하신 겁니까?”
“난 그 공장이 털렸다는 말밖에 안 했다.”
***
이번에 생산된 R 크림도 태양 백화점을 통해 팔렸다.
사전 예약을 한 사람은 단 한 명도 구매 취소를 하지 않았다. 자기가 쓰지 못할 상황이라면 다른 사람에게 넘길 목적으로라도 샀다.
일반 온라인 판매도 가능은 한데 조건이 있었다. 태양 백화점 회원카드가 있고 지난 3개월 안에 물건을 구매 이력만 있어야 추첨 신청을 할 수 있었다.
유소율 이사에게 담당 직원이 보고했다.
“회원카드를 만드는 손님이 상당히 많아졌습니다.”
“예상대로군요. 우리 고객이 계속 늘어나고 있어요. 그분들 모두 우리 백화점의 미래가 될 테니까 회원카드를 발급할 때 불편해하시지 않게 담당 직원을 더 배치해요.”
R 크림은 매장을 따로 만들지 않아 현장 판매는 하지 않았다. 사고 싶은 사람은 태양 백화점 홈페이지에서 신청해야만 했다.
본인이 R 크림을 쓰려고 구매 신청을 한 사람도 있지만, 주변에서 연락받고 대신 구매 신청을 한 사람도 꽤 있었다.
그래서 경쟁률이 올라갔다.
***
점심시간에 길성 본사의 구내식당에서 비서실의 여자 과장이 한숨을 푹 쉬었다.
“태양 백화점 R 크림 구매권 추첨 이벤트를 신청했는데 똑 떨어졌다.”
그녀가 같은 테이블에 앉아서 밥을 먹는 박서윤을 돌아보았다.
“박 대리. 나 떨어졌다니까?”
“네. 아쉽네요.”
“박 대리는 신청 안 했어?”
“저는 뭐….”
홍보팀 대리가 해맑은 표정으로 옆자리에 앉았다.
“와. 오늘 점심에 콩나물국 나왔어. 나 어제 술 마신 거 어떻게 알았지?”
“이 대리는 R 크림 신청 안 했어?”
“했죠.”
“혹시 당첨됐어?”
“아뇨. 똑 떨어졌죠.”
“그런데 왜 그렇게 표정이 밝아? R 크림을 빚을 내서라도 사겠다며.”
“그거야 박 대리 통해서 하나 샀…. 앗.”
홍보팀 대리가 입을 막았다. 하지만 비서실 과장은 이미 중요한 부분은 다 들었다.
“잠깐만. 어떻게 샀다고?”
“아니, 그게 아니라요.”
“다 들었으니까 소문내기 전에 빨리 말하지?”
홍보팀 대리가 박서윤을 본 후에 어색하게 설명했다.
“저번에 영화 촬영장에 갔다가, R 크림 개발하신 분을 봤는데요. 그분하고 박 대리가 아는 사이라고 해서 하나 따로 사기로 했….”
과장이 눈을 반짝였다.
“박 대리가 개발자와 아는 사이인 건 알고 있었어. 회장님 드시는 활력 토마토 담당자가 박 대리잖아. 전에 샘플 로션도 만들어서 나눠줬었고.”
“뭐야. 다 아시네요. 괜히 말실수했는지 알고 걱정했….”
“박 대리한테 대신 사줄 수 있는지 떠보는 중이었는데, 가능하단 소리네? 박 대리! 나도!”
박 대리가 한숨을 가볍게 쉬었다.
“그분께 그런 부탁드리면 곤란해 하실지도 몰라요.”
“그냥 물어만 봐줘! 내가 애랑 남편 키우느라 자꾸 늙는다니까?”
“돈은 정가 그대로 내야 하는데, 백만 원이나 쓰셔도 돼요?”
“남편이 이번에 말도 없이 그래픽카드 샀어. 나도 R 크림 살 거야.”
***
그날 밤에 박서윤이 옥상에 올라왔다.
그녀는 엠투에게 강아지용 육포를 조금 먹이면서 오늘 낮에 구내식당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선우현이 옥탑방에 들어가 세 개를 가져왔다.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죄송해서 그러죠. 그런데 두 개면 되는데 왜 세 개나….”
“서윤 씨도 써야죠.”
“저는 많이 남았어요.”
“서윤 씨 건 선물입니다. 매일 바르면 효과가 더 좋으니까 아낌없이 발라요.”
김수선이 한마디 했다.
- 선물을 주는 이유는 역시 예뻐서지요?
엠투는 선우현의 인이어 통신기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엠투가 작게 짖었다.
“멍.”
- 너까지 그렇다고 하지 마!
***
R 크림 2차 판매는 태양 백화점 매출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회의실에서 담당자가 보고했다.
“우리 백화점의 VIP 조건을 충족한 고객이 많이 늘었습니다. 이유는 다음번 R 크림 판매 때 우대권을 손에 넣기 위해서라고 판단됩니다.”
유소율의 할머니인 백화점 사장이 물었다.
“신규 고객은?”
직원이 그래프를 보여주었다.
“이번 R 크림 판매 행사 기간에 회원카드를 만든 손님이 많았습니다.”
“이번에 만든 카드는 구매권 신청 자격이 없으니까, 다음번 행사를 기대하고 만든 거겠군.”
“예. 지금도 회원카드 발급량이 행사 이전보다 많습니다.”
사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R 크림은 확실한 킬러 상품이야. 그 상품 하나가 우리 백화점의 미래를 긍정적으로 바꿔주고 있으니까.”
담당자가 대형 화면에 고객 수와 매출 그래프를 띄웠다.
“맞습니다. 조금씩 감소 중이던 고객 수와 전체 매출이 R 크림 1차 행사 이후에 보합으로 바뀌더니, 2차 행사 이후에는 증가세로 돌아섰습니다.”
사장이 유소율에게 질문했다.
“R 크림 3차 판매도 우리가 할 수 있지?”
“당연하죠. 제가 개발자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거든요.”
“그거 유 이사 혼자만의 생각은 아니지?”
유소율이 큰소리쳤다.
“저랑 개발자랑 엄청 친해요. 이번에 활력 토마토 50개로 신규 이벤트도 할 예정인데, 활토로 이벤트를 하는 백화점은 우리밖에 없어요.”
***
태양 백화점의 매출이 늘어난 만큼 다른 백화점은 실적이 줄어들었다.
직접적인 타격은 맞은편에 있는 청명 백화점이 입었다.
그런데 청명만 문제가 생긴 건 아니다.
전국에 지점이 있는 대형 백화점 뉴오션은 VIP 고객 매출이 조금 감소했다.
회장 곽태호가 회의실에서 물었다.
“VIP 고객들이 왜 우리 백화점에서는 R 크림을 안 파는지 항의한다고?”
“예. 그렇습니다.”
“태양에서는 파는데?”
“태양에서도 이벤트 형식으로만 팔고 있습니다.”
“어쨌든 판다는 거잖아. 태양은 본점 하나만 있는 곳인데, 전국에 지점이 있는 우리가 상품에서 밀린다는 게 말이 돼?”
“회장님. 이번 일은 R 크림으로 인해 일어난 일시적인 현상일 겁니다.”
“그 행사를 한 번 하고 끝났으면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런데 이번에 2차 판매까지 했잖아. 3차, 4차, 나중에 10차 이상 가면 그래도 무시할 수 있어?”
“그건….”
곽태호가 지시했다.
“R 크림 3차는 우리가 따. 그러면 모든 문제가 해결돼. 태양은 원래대로 점점 말라갈 테고 우리는….”
회장이 손가락을 톡톡 두드렸다.
“R 크림을 이용해서 외국 손님들을 유치해야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무조건 성공해.”
***
태양 백화점에서 활력 토마토 판매 행사를 새로 준비했다. 이번에는 활토 50개와 R 크림 50개를 내놓았다.
지난번에는 행사 초대장을 받고도 오지 않은 손님이 꽤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태양 백화점의 활토 행사 초대장을 받으려고 연줄을 동원하는 사람까지 생겼다.
유소율이 직원에게 물었다.
“초대장 청탁이 많이 들어온다고요?”
“네. 관계 부서의 직원들은 물론이고 다른 부서 직원들도 연락을 받았다고 합니다.”
유소율이 방긋 웃었다.
“초대장을 원하면 VVIP가 되라고 하세요.”
“네? 아. 네.”
***
경쟁 백화점만 활토와 R 크림에 주목한 게 아니다.
종자 회사나 화장품 회사들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중에는 이익을 위해서라면 불법적인 방법이라도 쓰는 회사도 있었다. 엠쁘띠스킨도 그런 회사였다.
그런데 공장에서 기술을 훔치려던 엠쁘띠스킨이 헛물만 켰고 오히려 경찰 조사를 받았다는 게 알려졌다.
“그런 식의 도둑질은 위험해. 걸리면 엠쁘띠스킨처럼 회사도 타격을 받고 경영진까지 조사받을 수 있어.”
대부분은 합법적인 수단으로 기술을 얻으려고 했다. 그런데 성과가 없었다.
“JHC 테크 쪽에서 협업을 왜 안 받아주지?”
“거기는 원래 기술을 파는 회사잖아. 왜 이건 라이센스를 안 팔고 비밀로 하는데?”
“개발자가 도대체 누구야?”
기술 협력을 통해 뭔가 얻으려는 회사만 있는 게 아니다. 샘플을 분석해 비밀을 알아내려는 시도도 계속됐다.
엠쁘띠스킨이 이미 실패했는데도 기술을 직접 훔치려는 곳은 또 있었다.
***
비밀 회의실에서 팀장이 모니터에 옥탑방 건물의 사진을 띄워놓고 팀원들에게 임무를 설명했다.
“공장에 침입해봤자 R 크림의 비밀을 알 수는 없다. 비밀 첨가물을 개발한 연구소에 침입해야 진짜 기술을 손에 넣을 수 있다.”
그러려면 연구소가 어디 있는지 알아야 한다.
“본국에 있는 분석팀이 그동안 다양한 경로를 통해 수집한 정보를 분석했다.”
그들은 한국인이 아니다. 한국에서 활동 중인 외국인이다.
“분석팀은 활력 토마토와 R 크림을 같은 곳에서 개발됐다고 판단했다.”
팀원이 옥탑방 건물 사진을 보며 물었다.
“그게 저 건물입니까? 그 대단한 제품들을 개발한 연구소이라고 보기엔 건물이 좀….”
“당연히 저기가 그 연구소는 아니지.”
팀장이 계속 설명했다.
“JHC 테크 사장의 동선과 R 크림 디자이너의 동선을 교차 체크했더니 저 건물이 나왔다. 본국에서는 저 건물에 R 크림 관계자가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팀장이 옥탑방 건물 사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번 미션은, 저곳에 침투해서 R 크림을 개발한 연구소의 위치를 알아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