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 멍배우 II
선우현이 말했다.
“나 그런 사람 아니라니까요.”
박서윤이 손뼉을 쳤다.
“아. 그렇죠. 악당이라도 반쯤은 살려두시죠.”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오해하겠네.”
김수선이 한마디 했다.
- 그러게 말입니다. 거기가 한국이라서 반쯤만 죽인 건데요.
“난 그냥 꺼지라면 꺼지는 사람입니다만?”
“그런 말을 들은 건 사실인가 보군요. 우리 회장님이 이 사실을 아시면 진노하시겠어요.”
고 감독은 이야기가 이상하게 흐른다는 걸 깨달았다.
“저기, 저 개 주인이 누군데 길성의 회장님이….”
박서윤이 대답했다.
“선우현 씨는 박길성 회장님의 특별 손님입니다. 비서실 소속인 제가 알았으니 이 상황을 보고드려야 하는데.”
그녀가 휴대폰을 꺼냈다.
“그러면 진노하실 테고, 전시관 대관은 취소되겠군요.”
고 감독이 당황한 얼굴로 항의했다.
“예? 아니, 갑자기 취소하는 게 어디 있습니까? 보다시피 촬영 준비 다 마쳤는데!”
박서윤이 전시관 직원에게 물었다.
“대관 조건에 제약이 있나요?”
그 직원은 본사 회장이 진노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바짝 긴장했다.
“아니요. 저희가 선의로 촬영에 협조해주는 것뿐입니다. 당장 쫓아내도 됩니다.”
“그럼 지금 보고를 드리겠….”
고 감독이 두 팔을 뻗으며 외쳤다.
“잠깐!”
“뭐죠?”
“그게…. 오해가 있었나 봅니다. 제가 오해를 다 풀겠습니다.”
“어떻게요?”
고 감독이 얼른 선우현에게 사과했다.
“미안합니다! 내가 그냥, 오늘 자꾸 여기저기서 사고가 터지는 바람에 짜증이 나서….”
그게 다가 아니었다.
“그리고 남미연 씨랑 기 싸움 좀 하느라 괜히….”
남미연이 끼어들었다.
“뭐야? 고 감독. 나한테 유감이 있어서 까칠하게 군 거야?”
“지금도 보세요. 기분 좋으면 존댓말 했다가, 기분 나쁘면 반말했다가. 그래도 내가 감독인데….”
남미연이 쏘아붙였다.
“고 감독이 10년 전에 조감독 할 때 사고 쳐서 다 재촬영하게 됐을 때, 괜찮다고 다시 찍자고 감독이랑 배우들 다독인 사람이 나야!”
그때 그 사고가 잘 수습되지 않았으면 고 감독은 다른 일을 알아봐야 했을 수도 있었다. 그런 일은 또 있었다.
“7년 전에도 내가 고 감독 쫓겨나는 거 막아줬는데, 이제 좀 떴다고 나한테 이렇게 나와? 나보다 더 뜬 것도 아니면서!”
“아뇨. 그게 아니라, 지금은 내가 감독이니까 촬영장에서만이라도 좀….”
“그래서 대접해줬잖아! 꼬박꼬박 존댓말도 써줬잖아!”
고 감독이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박서윤이 휴대폰을 든 채로 선우현에게 물었다.
“꺼지라는 말을 한 사람이 저 감독이었군요. 어떻게 하실 건가요?”
남미연이 선우현에게 말했다.
“난 흰둥이랑 영화 같이 찍고 싶어요. 그리고요.”
그녀가 선우현에게 다가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이번 영화 파토 나면 내가 스물여덟 청춘 로맨스를 언제 다시 찍을 수 있겠어요?”
선우현이 고 감독을 보았다. 상대가 선우현의 눈치를 보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선우현이 일하고 있는 영화 스태프들을 보았다. 오늘 촬영이 무산되면 영화 제작에 차질이 생기고 스태프들까지 곤란해진다.
선우현이 말했다.
“나한테 대놓고 욕을 한 건 아니니까, 이번엔 넘어갑시다.”
박서윤이 휴대폰을 내리며 말했다.
“남미연 씨가 저 감독을 오늘 또 살려준 거군요. 이제 팔다리가 무사할 테니까요.”
“나 그런 사람 아니라니까.”
남미연이 활짝 웃으며 두 팔을 뻗었다.
“흰둥아! 이리와.”
엠투가 얼른 남미연의 옆으로 갔다. 김수선이 말했다.
- 엠투가 좋다고 갑니다.
“지조 없는 놈 같으니라고.”
잠시 소란이 있었지만 상황은 수습했다.
엠투는 계속 출연하기로 결정됐다.
고 감독은 남들 눈치가 보여서 열심히 뛰어다니며 촬영을 준비했다.
박서윤이 선우현에게 말했다.
“영화 일도 하시는 줄은 몰랐어요.”
선우현이 앞을 가리켰다.
“내가 아니라 엠투가 할 겁니다.”
엠투는 박서윤이 사는 건물의 옥상에서 산다.
“엠투는 똑똑한 개니까 잘하겠네요.”
“박서윤 씨는?”
“회장님이 현장을 확인하고 오라고 하셔서요.”
“그걸 물어본 게 아닌데.”
“전 안 해요. 생각 없어요.”
첫 촬영장소는 전시관에 있는 카페다.
오늘은 카페도 쉬는 날이지만 촬영을 위해 가게를 개방했다.
홍보팀 직원이 그 카페에서 커피를 세 잔 받아왔다.
전시관 직원은 감독과 이야기하러 갔다. 고 감독을 보는 직원이 표정이 좋지는 않았다.
홍보팀 직원이 선우현의 앞에 커피를 내려놓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혹시….”
“왜 그러시는지?”
“회장님의 특별 손님이고 박 대리하고도 아는 사이시라면….”
특별 손님 중에는 홍보팀 직원이 만나고 싶은 사람이 한 명 있다.
“혹시 R 크림….”
“아시는구나.”
“어머! 진짜였어요? 세상에! 내가 눈치가 빠르긴 하지만 이번엔 찍었는데!”
“이제라도 아니라고 하면 안 믿겠지요?”
“모르는 척할게요. 그런데 그….”
“살 수 있냐고요?”
“한 개만 팔아주세요. 비싼 거니까 중요한 날에만 바르게요.”
박서윤이 옆에서 말했다.
“하지만 이미 품절이….”
“곧 2차 생산을 하니까, 서윤 씨 통해서 한 개 보내겠습니다.”
홍보팀 직원이 손뼉을 쳤다.
“꺄아! 고마워요!”
고 감독이 그쪽을 슬쩍 본 후에 말했다.
“잘나가는 사람이면 좋은 차를 타지, 왜 국산 중고차를 타고 와서 사람 헷갈리게….”
남미연이 말했다.
“고 감독. 7년 전에 사고 쳤을 때도 몸에 걸친 거로 사람 판단하다가 쫓겨날 뻔하더니, 아직도 그 버릇 못 버린 거야?”
“원래는 이 정도는 아닌데 오늘따라 이상하게 사고가 많아서 욱하다가 그만….”
고 감독이 불평했다.
“그리고 남미연 씨도 저 사람 편만 너무 드는 거 아닙니까? 내가 그래도 이 영화의 감독인데.”
“어머. 고 감독. 나 방금 고 감독 살려준 거야.”
“예?”
남미연은 선우현이 섬에서 촬영장을 습격한 마약조직원들을 혼자서 박살 낸 사람이라는 걸 안다.
“아까 팔다리가 무사할 거라는 이야기 그거 농담이 아니다?”
R 크림은 요즘 연예인들이 제일 가지고 싶어 하는 화장품이다. 남미연도 R 크림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그런데 선우현이 그 R 크림의 주인이라는 건 비밀이라 말해줄 수 없다.
“그리고 내가 안 막았으면 말이야. 다음 영화부터는 고 감독은 배우를 섭외할 수가 없어서 아무것도 못 찍는 사태가 왔을지도 몰라. 배우들이 고 감독을 보이콧 해서 말이야.”
남미연이 보기에는 불가능한 미래가 아니다.
“내가 고 감독의 미래도 살려준 거라니까?”
고 감독은 그녀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저 사람이 나중에 작곡가로 거물이 될 거라는 소리인가? 연예인한테 영향력을 끼칠 정도로?’
그는 그런 말을 믿지는 않았다.
‘나중에 저 사람이 거물이 될지 아닐지 벌써 어떻게 알아? 곡 하나 히트시키고 사라진 작곡가가 어디 한둘인가?’
그는 남미연이 선우현을 편드느라 그렇게 말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괜히 심통이 났다.
“촬영장에서는 나한테 존댓말 써준다면서요.”
“고 감독이 오늘 하는 거 보고 마음이 바뀌었어. 존댓말은 카메라 앞에서만 써줄게. 카메라 앞에서 나오면 국물도 없어.”
***
촬영이 시작됐다.
이 전시관이 등장하는 장면은 오늘 다 찍어야 한다.
시작은 전시관 야외 카페였다. 그곳에 조명이 설치되고 촬영이 진행됐다.
뮤직비디오를 찍을 때는 우아름이 주연이었고 남미연은 잠깐 출연하는 정도였다.
영화에서는 달랐다. 남미연은 원탑 여자 주인공을 맡았다. 남자 주인공도 있지만 남미연의 비중이 좀 더 컸다.
우아름은 비중이 낮은 조연으로 출연했다. 그것도 남미연의 추천 덕분에 땜빵으로 배역을 받았다.
남미연이 카페에서 대본을 보며 엠투에게 동선을 설명했다.
“내가 이렇게 카페를 가로질러 갈 거야. 그럼 너는 내 오른쪽에서 따라오다가 내가 의자에 앉으면 내 옆에 앉아. 내가 쓰다듬기 딱 좋은 위치로. 알았지?”
“멍!”
“고 감독님. 준비됐어요.”
고 감독이 말했다.
“아니, 남미연 씨. 개한테 그렇게 말로만 설명하면 개가 어떻게 알아듣습니까? 동선을 따라 움직이는 연습을 시켜야죠.”
“어머. 지금 우리 흰둥이를 무시하시나? 그냥 해봐요.”
“예. 예.”
고 감독은 남미연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 그렇지만 오늘은 지은 죄가 있어서 말싸움할 수가 없다.
‘첫 촬영은 메이킹 영상용으로나 쓰겠구나.’
촬영이 시작됐다.
남미연이 카페 문을 활짝 열었다. 엠투가 그녀의 옆에 서 있었다.
그녀는 남자가 앉아 있는 자리를 향해 또박또박 걸어갔다. 엠투는 그녀의 옆에서 호위하듯이 움직였다.
남미연이 남자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엠투는 그녀의 옆에 엉덩이를 바닥에 붙이고 앞발을 세운 채로 앉았다.
쓰다듬기 딱 좋은 위치였다.
남미연이 다리를 꼬고 앉아 엠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남자 주인공에게 말했다.
“너 바람피웠더라?”
“어? 그게 아니라….”
“증거 보여줘?”
고 감독은 촬영을 진행하며 당황했다.
‘저 개가, 진짜 남미연 씨가 시킨 대로 다 하네?’
카페 직원 우아름이 커피를 가지고 다가왔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이었다.
남미연이 갑자기 일어나 쟁반 위의 컵을 잡더니 상대 남자를 향해 확 뿌렸다. 진한 갈색 커피가 남자의 얼굴과 옷을 뒤덮었다.
“꺼져.”
“이게 무슨 짓이야!”
남자 배우가 벌떡 일어나 삿대질을 하며 소리를 질렀다.
“네가 내 여자친구도 아닌데, 왜 남의 일에 끼어들….”
문제가 생겼다. 신인 배우인 우아름의 동선이 남자 배우와 겹쳤다. 남자가 뻗던 팔이 우아름이 들고 있는 쟁반을 쳤다.
우아름이 쟁반을 놓치며 뒤로 넘어지려고 했다.
“꺄악!”
엠투가 재빨리 우아름의 뒤로 점프해 그녀의 등을 툭 밀었다. 우아름은 엠투가 등을 밀어준 덕분에 겨우 중심을 잡았다.
쟁반과 컵이 공중으로 솟아올랐다가 회전하며 바닥에 떨어졌다.
촬영팀은 돌발상황을 보고 깜짝 놀랐다. 남자 배우와 우아름도 몸이 굳었다.
남미연은 놀라는 모습을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엠투를 쓱 본 후에 남자에게 말했다.
“너 이제 사람 치겠다?”
“아니, 이건 실수로….”
사고나 대사 모두 대본에는 없었다. 하지만 감독이 중지시키지 않아 촬영은 그대로 진행됐다.
“똑바로 살라는 건 너한테 무리한 요구겠네. 다시 세희 앞에 나타나지 마라.”
남미연이 카페 밖으로 걸어갔다. 엠투가 남자 배우를 향해 가볍게 짖었다.
“멍!”
엠투는 우아름을 돌아본 후에 남미연을 따라 카페를 나갔다.
원래 대본에는 남미연이 커피를 뿌리고 몇 마디 대사를 주고받은 후에 카페를 나가는 것만 적혀 있었다.
감독이 말했다.
“컷.”
스태프들이 달려갔다. 남자 스태프들은 우아름이 괜찮은지 확인했고 여자 스태프들은 남자 배우에게 수건을 가져다주었다.
남미연이 도도한 표정으로 고 감독에게 걸어와 물었다.
“어때?”
고 감독이 엄지를 세웠다.
“애드립이 기가 막혔습니다. 역시 연기는 남미연 씨가 최고입니다.”
“우리 흰둥이는?”
고 감독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렇게 연기를 자연스럽게 하는 개는 처음 봤습니다. 거기다 우아름 씨가 위험해졌을 때 멋지게 도와준 것까지…. 이 개 정체가 뭡니까?”
“흰둥이는 지구에서 제일 똑똑한 개야.”
커피가 엎질러진 현장이 정리된 후에 신인 배우 우아름이 달려와 두 팔을 뻗었다.
“엠투!”
“흰둥이야.”
“흰둥아!”
우아름이 엠투를 두 팔로 껴안고 얼굴을 비볐다.
“고마워! 너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 네가 나를 구해준 거 맞지?”
“멍!”
남미연이 자랑했다.
“우리 흰둥이가 옛날부터 사람이 위험해지는 걸 못 보는 착한 개였거든.”
“선배님 강아지예요?”
“으응? 어. 내거나 다름없어.”
남미연이 선우현을 향해 또박또박 걸어왔다.
“선우현 씨. 역시 안 되겠어요.”
“뭐가요?”
“흰둥이 나한테 넘겨요.”
“안 팝니다.”
“나 남미연이에요.”
“압니다.”
“으…. 얼마에요? 얼마면 돼요? 나 돈 많아요.”
“나도 돈이라면 좀 있는데.”
남미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활력 토마토의 주인에 R 크림 개발자.’
소형 금속 부품 제작 기술까지는 남미연이 알 수 없지만 그래도 계산은 간단히 나왔다. 활력 토마토나 R 크림 모두 한 개에 백만 원짜리인데 없어서 못 판다.
“우이씨. 돈 많이 벌겠네.”
남미연이 툴툴대며 말했다.
“방금 봤잖아요. 아름이가 위험해지니까 흰둥이가 뛰어들어서 지켜준 거. 우리 흰둥이가 원래 저런단 말이에요. 쟤는 아무리 봐도 내가 어릴 때 키운 흰둥이의 환생이에요.”
김수선이 말했다.
- 엠투는 독립형 장거리 정찰이 주 임무이지만, 평소에는 탐사대원을 지키고 주변을 경계하는 일도 합니다.
“방금 구해준 우아름 씨는 탐사대원은커녕 현지 협력자조차 아니잖아.”
- 그러게 말입니다.
“엠투는 진짜 개같이 변했네.”
선우현이 남미연에게 선언했다.
“어쨌든 엠투는 절대로 안 팝니다.”
- 맞습니다. 동료를 팔 수는 없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