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 멍배우
남미연이 여자 주인공을 맡은 영화의 촬영이 시작됐다. 첫 촬영장소는 전시관에 있는 카페였다.
그녀는 R 크림과 동안 메이크업, 그리고 적당한 의상을 이용해 샤방샤방한 28살 아가씨로 변신했다.
고 감독이 감탄했다.
“이야아. 역시 남미연 씨. 진짜 완벽합니다. 내가 생각한 이미지 딱 그대로입니다.”
“훗. 내가 원래 마음만 먹으면 이 정도는 해요.”
남미연은 완벽했다.
하지만 촬영팀은 그러지 못했다. 다들 첫 촬영 현장에서 생긴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느라 바빴다.
그런데 장비 문제는 그나마 나았다.
고 감독이 전화를 받다가 큰 소리로 화를 냈다.
“아무리 조연이라지만 이렇게 갑자기 빠지면 촬영은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말이 몇 마디 더 오가다가 고 감독이 다시 화를 냈다.
“됐습니다! 당신네 배우는 이제 안 쓸 겁니다!”
고 감독이 전화를 끊고 씩씩대다가 머리를 벅벅 긁으며 후회했다.
“그냥 대체할 배우를 받는다고 할 걸 그랬나?”
남미연이 다가왔다.
“뭐가 문제래요?”
“오늘 카페 직원으로 남미연 씨와 처음 만나야 하는 배우 말입니다.”
“걸그룹 아이돌이 나오기로 했죠.”
“그 아이돌이 마약 사건으로 구속됐답니다.”
“아니, 마약이나 하는 애를 도대체 왜 썼어요?”
“몰랐습니다. 그리고 그 조연 배역을 주면 청명 백화점에서 촬영할 수 있게 해준다고 큰소리를 치길래, 장소 섭외 좀 편하게 해볼까 해서 받았지요.”
고 감독이 머리를 다시 벅벅 긁었다.
“지금 당장 촬영 시작해야 하는데 배역이랑 이미지가 맞는 배우를 어디서 갑자기 구하지?”
남미연이 제안했다.
“그럼 우아름 어때요? 구하니 씨 뮤비를 나랑 같이 찍은 애인데.”
구하니가 부른 ‘하늘에 핀 꽃’은 음원 차트 1위를 찍었다. 고 감독도 그 뮤직비디오를 본 적이 있다.
“그 배우 연기는 좀 합니까?”
“그 나잇대 신인치고는 제법 해요. 사람 급하면 불러서 한번 테스트해 봐요.”
“남미연 씨가 추천할 정도면 연기 꽤 하겠네요. 계약 문제는요?”
“걔는 소속사가 없어요. 스케줄도 아마 없을 걸요?”
고 감독의 표정이 좀 펴졌다.
“시간이 없으니까 당장 오라고 해주시죠. 괜찮으면 바로 쓰게요.”
***
우아름은 당장 달려왔다. 고 감독은 현장 오디션을 간단히 본 후에 그녀에게 말했다.
“이 배역은 이제 우아름 씨 겁니다.”
“고맙습니다!”
“출연 비중은 낮지만 그래도 중요한 배역이니까 잘 부탁합니다.”
“제가 더 부탁드릴게요!”
“후우. 이제 문제는 다 해결….”
새로운 전화가 걸려왔다.
이 영화에는 여자 주인공이 데리고 다니는 개가 한 마리 나온다. 그런데 촬영을 위해 섭외한 개가 올 수가 없다는 연락이 왔다.
고 감독이 또 화를 냈다.
“그 개가 다른 영화 찍다가 다쳤으면 미리 말을 해주던가!”
고 감독은 전화를 끊고 나서 한숨을 푹푹 쉬었다.
“왜 촬영 시작부터 이렇게 일이 꼬이지? 아. 스트레스받아.”
남미연이 말했다.
“다른 개 섭외해요.”
“영화에 출연시킬 정도로 똑똑한 개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음…. 우리 흰둥이가 되게 똑똑한데.”
“네? 남미연 씨는 옛날부터 개는 안 키운다고 들었는데….”
고 감독은 조감독이던 시절에 그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키우는 건 아닌데, 키우는 거랑 비슷한 강아지가 있어요. 아. 사진 보여줄게요.”
남미연이 엠투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사진이 많았다.
고 감독이 떨떠름해 했다.
“이 개는 생긴 게 너무 평범한데….”
“어머! 우리 흰둥이가 얼마나 특별하고 예쁜데!”
“아, 뭐. 그거야 넘어갈 수 있습니다. 이 개한테 연기를 시킬 수 있냐가 문제이죠.”
“우리 흰둥이가 내 말을 진짜 잘 알아들어요. 되게 똑똑하거든요.”
“그럼 일단 데려와 보시죠. 시험이라도 해보게.”
***
R 크림에 사용할 포장 패키지는 준비됐다. 로션 용기의 형태는 그대로 유지하고 인쇄되는 디자인만 약간의 변화를 주었다.
R 로션을 만들기로 한 날은 내일이다. 그날 공장에서 바로 용기에 담고 포장해 작업을 마칠 예정이다.
“그럼 오늘은 뭘 하고 노나.”
- 일하셔야죠.
전화가 걸려왔다. 발신자는 남미연이었다. 그녀가 본론부터 꺼냈다.
- 우리 흰둥이가 영화에 출연하게 됐어요.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신지?”
남미연이 방금 촬영장에서 고 감독과 나눈 이야기를 전했다.
김수선이 우려했다.
- 엠투를 영상으로 공개하는 건 조금 그렇지 않을까요?
“개 얼굴은 아무리 많이 알려져도 남들이 사람 얼굴처럼 구분하지는 못할 거야. 그리고 엠투는 되게 흔하게 생겼잖아.”
- 다시 생각해 보니 그렇긴 합니다. 위화감이 없게 하려고 지구연합에서 흔한 개의 모양을 선택했으니까요.
“그럼 괜찮겠네.”
선우현이 남미연에게 물었다.
“출연료는 줍니까?”
- 당연하죠! 영화에서 뜨면 나중에 CF도 찍을 수 있어요.
“지금 CF라고 했습니까? 영화 촬영장이 어디입니까? 당장 데려가겠습니다.”
***
영화 촬영은 서울에서 시작했다. 선우현이 엠투를 차에 싣고 그곳으로 이동했다.
그가 운전하며 지시했다.
“엠투. 거기서는 개처럼 굴어라.”
“끼잉?”
“그래. 그렇게. 열심히 해서 CF도 좀 찍고 돈 많이 벌어와.”
“멍!”
김수선이 말했다.
- 큰소리치는 건 선장님하고 비슷하네요.
“멍!”
- 인이어 무전기의 작은 목소리를 옆에서 듣는 거 보면, 엠투가 다른 건 다 고장 났어도 음파 감지장치는 멀쩡한가 봅니다.
“잠깐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야. 엠투. 방금 멍 그거 무슨 뜻이야?”
“끼잉?”
“이게 딴청 피우네.”
선우현이 운전하며 툴툴댔다.
“귀만 멀쩡한 게 아니야. 이 녀석 많이 먹는다. 식탐이 장난이 아니다.”
- 소형 에너지 전환장치의 기능이 너무 떨어져서, 활동에 필요한 에너지를 확보하려면 많이 먹어야 합니다.
“에너지만 전환하면 되지 왜 맛은 따지는데? 어젯밤에 내 치킨 노린 거 봤지?”
- 엠투가 지상 활동을 워낙 오래 해서 적응한 거겠지요.
“진짜 개가 다 됐다니까.”
차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선우현이 차에서 내렸다.
그런데 엠투는 조수석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선우현이 한마디 했다.
“너 지금 내가 문 열어주는 거 기다리는 거냐? 옥상이 아니라 건물 현관 앞 길가에서 비바람 맞아가며 경비견 하고 싶으면 계속 기다리던가.”
엠투는 그 말을 듣자마자 앞발로 손잡이를 당겨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오늘 촬영은 풍경이 좋은 대형 전시관을 통째로 빌려서 찍었다. 주 촬영장소는 전시관에 있는 예쁜 카페였다.
남미연이 손을 흔들었다.
“흰둥아!”
엠투가 남미연에게 쪼르르 다가가 꼬리를 흔들었다.
선우현이 말했다.
“저놈 저거 내부 구동계 수리할 때 꼬리부터 고쳤을 거야. 꼬리 흔드는 속도 좀 봐라.”
남미연이 엠투를 꼭 껴안고 쓰다듬은 후에 선우현에게 다가왔다.
“흰둥이를 영화에 출연시켜줘서 고마워요. 옛날부터 강아지가 나오는 영화 찍을 때마다 흰둥이 생각이 많이 났어요. 우리 흰둥이가 더 잘할 수 있으니까요.”
“엠투가 연기를 잘하는 건 사실이긴 하지요.”
- 맞습니다. 진짜 개인 척하잖습니까?
고 감독이 다가왔다.
“이 개가 그 개입니까? 그럼 이분이 개 주인?”
남미연이 소개했다.
“선우현 씨예요.”
고 감독은 선우현한테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냥 고개만 까닥한 후에 엠투를 보며 말했다.
“개 이름이….”
“흰둥이요.”
“방금 엠투라고 들었….”
남미연이 정색했다.
“고 감독? 흰둥이라니까?”
“예? 어. 흰둥이로 하죠. 엠투가 별명인가 보네.”
고 감독이 대본을 펼쳤다.
“이 개가 남미연 씨를 따라다니면서 이런 연기를 해야 하는데, 잘할 수 있을까요?”
남미연이 말했다.
“내가 잘 설명해주면 되니까 고 감독은 걱정하지 말고 영화나 찍어요.”
“잘 안 되면 남미연 씨가 새로운 책임지는 겁니다?”
“흰둥아. 잘할 수 있지?”
“멍!”
“봐요. 잘하겠대요.”
남미연이 아예 대본을 펼쳐 엠투에게 보여주었다.
“여기 봐봐. 오늘은 나만 따라다니면 돼. 넌 카메라 위치 보고 동선만 조정하면 되겠다. 그치?”
“멍!”
고 감독이 고개를 옆으로 흔들었다.
“개한테 대본을 보여줘 봤자 무슨 소용이 있다고.”
김수선이 말했다.
- 엠투가 저 사람보다 알아듣는 언어가 많을 겁니다.
“옥상에서 테스트해봤더니 한글도 읽더라. 한국에 와서 배웠나 봐.”
고 감독이 선우현을 보며 물었다.
“저 개 사나운 거 아니겠지요? 사람을 물거나 그러진 않지요?”
“나쁜 놈은 뭅니다.”
“네?”
“보통 사람은 안 물고요.”
“무슨 소리인지….”
고 감독이 한마디 했다.
“어쨌든 저 개가 사고 치면 책임져야 합니다.”
“사람 불러놓고 사고 이야기부터 하시네?”
“내가 부른 거 아닙니다. 남미연 씨가 불렀습니다. 싫으면 그냥 가시던가.”
“그래야겠네.”
“뭐요? 나 뭐 이런.”
고 감독은 선우현이 낡은 국산 중고차를 타고 온 걸 봤다.
“딱 보니까 개 한 마리 가진 게 다면서 되게 뻣뻣하네. 필요 없으니까 내 현장에서 당장 꺼지쇼.”
갑자기 옆에서 사람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선우현이 옆을 보았다.
신인배우 우아름이 선우현을 보고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작곡가님!”
우아름은 구하니의 뮤직비디오에 남미연과 함게 출연했다. 그때는 우아름이 주연이었다.
그 뮤직비디오가 뜬 덕분에 그녀는 얼굴을 꽤 알렸다. 그래서 남미연이 우아름을 고 감독에게 소개했을 때, 고 감독은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뮤직비디오의 노래 ‘하늘에 핀 꽃’의 작곡가가 선우현이다.
“또 보네요. 반가워요.”
“앗! 혹시 우리 영화음악을 작곡가님이 맡으신 거예요?”
“그냥 개 데리고 구경 온 겁니다. 이제 갈 겁니다.”
고 감독이 옆에서 당황했다.
“어? 작곡가라니? 아름 씨. 그게 무슨 소리야?”
“하늘에 핀 꽃 작곡가님이시잖아요.”
“어?”
선우현이 엠투에게 손짓했다.
“야. 엠투. 가자. 영화 안 찍어도 된다.”
“끼잉?”
“우리 쫓겨났다고.”
엠투가 슬금슬금 다가왔다.
남미연도 걸어왔다.
“고 감독. 이게 무슨 소리야? 우리 흰둥이를 왜 쫓아내?”
“아니, 그게 아니라…. 아. 몰라. 다른 개 써요. 안 그래도 오늘 짜증 나는 일이 많은데 기분 나빠서 못 쓰겠으니까.”
“난 흰둥이가 필요해! 흰둥이랑 영화 찍는 게 이십 년 전부터 꿈이었다고!”
“아니, 저 개 나이가 몇인데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까?”
“그런 게 있어!”
조감독이 다가왔다.
“저기, 감독님. 드릴 말씀이….”
“야. 너 지금 분위기 안 보여? 나중에 이야기해!”
“그게, 손님이 찾아와서요.”
“어디서 온 손님인데?”
“이 전시관의 주인인 길성 기업에서….”
“아…. 오늘 그 회사에서 사람이 와서 어떤 영화인지 직접 참관하겠다고 했지.”
이 전시관은 영화 촬영에 꼭 필요한 장소다. 그래서 고 감독이 직접 길성을 찾아가 휴관일에 빌려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그 휴관일에 맞추기 위해 첫 촬영을 오늘 시작했다.
“그럼 일단 손님부터 만나러 가야겠….”
남미연이 말했다.
“고 감독. 우리 이야기 아직 안 끝났잖아.”
“일단 영화부터 찍어야 할 거 아닙니까? 여기를 빌리는 데 성공했으니까 영화 촬영을 오늘 시작할 수 있었지, 안 그랬으면 기간이랑 예산 다 빵꾸 납니다.”
조감독이 말했다.
“손님이 이미 오고 계신데요?”
“어? 그래.”
길성에서 나온 사람들이 먼저 다가왔다. 세 명이었다.
고 감독이 그쪽으로 걸어가며 웃었다.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가운데 있는 여자는 전시관 담당자라서 고 감독이 만난 적이 있다. 오늘 전시관 내부를 촬영하려면 그 직원이 문을 열어줘야 한다.
그 여자가 다른 두 사람을 소개했다.
“홍보실과 비서실에서 현장을 확인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도움 드릴 게 있을까 해서요.”
“예? 홍보실은 알겠는데 비서실이요?”
박서윤이 말했다.
“박길성 회장님께서 이번 영화에 관심이 있으셔서요.”
박길성은 영화에 관심이 있어서 박서윤을 보낸 게 아니다. 영화 촬영 현장이 어떤 곳인지 경험하게 하려고 일부러 보냈다.
박길성이 전시관을 빌려주라고 허락한 건, 박서윤을 오늘 이곳에 보내 경험을 쌓게 하려는 꿍꿍이가 있어서였다.
“그러시구나! 회장님께는 제가 인사라도 드려야 하는데요.”
“바쁘신 분이라서요.”
고 감독이 박서윤의 얼굴을 보며 물었다.
“혹시 영화 출연하실 생각이….”
“없습니다. 그런데….”
박서윤이 선우현을 보며 말했다.
“선우현 씨도 계실 줄은 몰랐어요. 혹시 이 영화 제작에 참여하세요?”
선우현이 손을 옆으로 흔들었다.
“아뇨. 구경 온 겁니다. 이제 갈 겁니다.”
남미연이 말했다.
“가긴 어딜 가요! 갈 때 가더라도 흰둥이는 놔두고 가요!”
박서윤이 엠투에게 손을 내밀었다.
“엠투 안녕? 그럼 너는 오늘 나랑 같이 있을래?”
선우현이 말했다.
“우리 쫓겨났다니까 그러시네.”
“쫓겨나다니요?”
“이 현장에서 꺼지라고 해서요.”
박서윤이 깜짝 놀란 얼굴로 진지하게 물었다.
“그 사람은 선우현 씨한테 그런 말을 하고도 아직 살아있나요?”